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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에스라 3장 강해 대성통곡하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사람들.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2-11-26 00:00:00
조회수 : 4,137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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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3장 강해 대성통곡하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사람들.

에스라 31-에스라 313

요절 에스라 3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초막절을 지키고자 모인 사람들)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습니다. 그들은 일곱째 달에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7월은 유대력의 디스리 월을 말합니다. 태양력 달력으로는 9월 혹은 10월에 해당됩니다. 7월은 분명히 귀환한 그 해의 칠월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까닭은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23:41)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모인지라는 모이다 혹은 모으다의 수동형으로서, 특별한 일에의 참여를 위하여 한마음이 되어 모여드는 행위를 말합니다.(9:4 20:11 대하 30:13). 일제히는 문자적으로 한 사람처럼 모였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들)

 

2절을 보십시오.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났습니다. 대제사장 예수아를 말합니다(2:2). 요사닥은 여호와께서는 공의로우시다의 의미입니다. 그는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바벨론에 끌려갔던 제사장이었습니다(대상 6:14,15). 그 형제 제사장들을 예수아의 친형제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모든 제사장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후예들이었다는 점에서 형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의 법적인 아비이며, 실제 아비는 브나야였습니다. 그 형제들은 제사장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의 평민들 등으로 이해됩니다. 에스라는 성전 재건에 범국민적인 참여가 있었음을 본 문맥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이라는 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고 있으며(왕상 18:36) 또한 그들 상호간에 단절될 수 없는 유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특히 여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하신 보호와 인도를 부각시켜 줍니다.

은 정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제단이었을 것입니다(20:25 8:31).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를 단 위에서 드리고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선지자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삼상 2:27 대상 23:14).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모세의 율법이 신적인 기원을 갖는 것임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희생 제사 의식과 관련된 율법 규정, 특히 제사드리는 절차 및 방법에 관한 조항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한 것입니다.(1:3-13).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를 드리기 위하여로 번역하면 보다 자연스럽습니다. 성전 건축도 결국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한 목적 때문에 필요하였습니다. 이 희생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갱신하며(9:38),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중보적 요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소실 당한 채 뿔뿔이 흩어졌던 포로 기간 동안에도 하나님의 율법을 잊지 않고 나름대로 희생 제사를 드렸으리라 추측됩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제단을 만듦으로써 더욱 신선하고 의미 깊은 헌신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을 지킨 사람들)

 

3-4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무리가 그 지역에 사는 모든 나라 사람을 두려워할지라도 그 제단을 그 위에 세웠습니다. ‘오히려 비록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려워하였지만으로 번역해야 본 문맥의 흐름과 잘 조화됩니다(NIV). 열국 백성은 문자적으로 그 땅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 당시 팔레스틴 땅과 그 주변 지역에 살던 여러 민족들을 말합니다. 그들 중 대표적인 민족은 사마리아인들이었을 것입니다(4:2). 두려워하여는 급속히 엄습하여 공포 속으로 빠져들어갈 때 사용되는 단어와 ~안에서 혹은 ~의로 번역될 수 있는 전치사가 합쳐진 말입니다(15:12 15:16 2:9 20:25).

단을 세운 그 터는 원래 솔로몬 성전의 제단이 세워져 있던 곳입니다(2:68).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팔레스틴에 귀환한 직후부터 제단 쌓기를 시작하여 칠월이 되어서야 그 작업을 마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1).

제단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기록된 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본문의 번제는 매일 드려져야 하는 상번제를 말합니다.(29:38, 39 28:3, 4). 초막절은 유월절, 칠칠절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3대 절기로서 율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23:14-16 34:22 16:13-17).

특히 이 초막절은 장막절 혹은 수장절이라고도 불리우며, 땅에서 산출되는 모든 곡식, , 기름을 거둬들일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이 절기는 유대력으로 디스리월, 7(보통 달력으로는 10) 15일에 시작하여(29:12) 8일 동안 지켜졌습니다. 첫날과 마지막 날에는 성회가 있었습니다. 이 절기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수송아지, 수양 등을 제물로 바쳤으나, 곡식은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가축만을 제물로 삼으신 까닭은, 가나안 족속의 추수제와 초막절을 엄격히 구별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절기가 지켜지는 8일 동안 날마다 동일한 수효의 제물이 드려진 것이 아닙니다. 수송아지의 경우, 첫날에는 13마리가 둘째날에는 12마리가 바쳐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절기 동안 바쳐져야 했던 가축의 수는 모두 215 마리였습니다(29:13-38).

출바벨론해서 초막절을 지킨 것은 초막절을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짓기 전에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성전을 통하여 출애굽을 이루신 하나님을 예배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번제와 예물을 드린 사람들)

 

5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후는 귀환 후 최초로 지켜진 초막절 절기가 끝난 다음을 말합니다. 평상시에도 아침 저녁 하루 두 차례씩 상번제를 드렸습니다(29:42 28:3-6).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 절기를 계기로 모든 희생 제사를 정상화 시켰습니다. 초하루는 월삭 현상이 일어나는 매월의 첫날에 베풀어지는 종교적 축제를 말합니다(10:10 28:11-15 삼상 20:5 10:33 1:13).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도 지켰습니다.

여호와의...절기의 번제는 무교절(23:5-8), 맥추절(23:15-21), 나팔절(23:23-25), 초막절(4절 레 23:33-36), 속죄일(23:27-32)등에 드려져야 할 번제를 말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적 측면을 강조하는 칭호입니다.

저자는 여호와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이 절기가 지켜진 것이 언약적 차원에서 였음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절기를 지키는 것이 언약 백성들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의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23) 본서 저자의 이러한 의도는 분명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렸습니다.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은 특정한 절기와 상관없이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22:18,21 대하 35:8). 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에게 순종의 번제를 드려야합니다.

 

(성전 건축 준비)

 

6,7절을 보십시오.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생 제사를 회복한 것이 초막절 절기 때부터는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초막절은 칠 월 보름부터 시작됐다는 점에서, 적어도 약 보름간은 상번제가 제단에서 드려졌음을 뜻합니다.

매년 칠월 열흘에 드려졌던 속죄일은 안 지켜졌습니다(1623:26-32 29:7-11). 속죄일이 지켜지지 않은 것은 백성들의 신앙적 열심의 부족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성전이 아직 재건되지 못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사죄를 위해서 지성소로 들어가야 하는 독특한 의식이 뒤따르는 속죄일 행사가 지켜지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놓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저자는, 성전 재건이 착수되는 현장으로 이 글의 무대를 옮기려 시도합니다. 그들은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서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석수와 목수는 필경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선발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석수는 돌을 뜨는 사람(왕상 5:15). 혹은 벌목하는 사람(대하 2:18)을 뜻하며 목수는 철공(44:12), 목공(44:13), 벽돌공(왕하 12:12), 장색(40:19)등을 두루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계획했던 상황과 유사합니다. 농토가 없음으로 해서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돈과 두로(12:20)에 먹을 것을 주는 대신 성전 건축에 필요했던 건축 재료들을 수입해 왔을 것입니다(왕상 5:8-11 대하 2:10-15).

시돈과 두로는 가나안 족속으로서 B.C. 9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각기 독립된 도시 국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에 의해 B.C. 9세기에 정복된 후에는 거의 계속적으로 강대국들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 무역이 매우 발달했던 나라들로서, 솔로몬 왕 시절만 해도 엄청난 국부를 자랑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기에는 그들도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시돈은 오늘날의 베이루트 남방 약 48Km지점에 위치해 있고 두로는 시돈 남쪽 40Km 지점에 있습니다. 그들은 바사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습니다. 고레스의 조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재건하는 것을 도우라는 명령 조항이, 구체적으로 두로와 시돈 사람을 겨냥하여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조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에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과 남아있는 백성들은 그들을 도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1:3, 4). 오늘날 건축을 하기 위해서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듯이 그 당시에도 성전 건축과 갈은 큰 공사를 위해서는 바사 정부의 허가가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이 허가 속에는 많은 양의 건축 자재를 조달하는 사업까지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백향목은 굳건히 뿌리 박힌 강한 나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최고 36m까지 자라며, 나무의 둘레도 최고 12m까지 된다고 합니다. 또한 이 나무는 크기(2:9) 뿐만 아니라 모양과 향기에 있어서도 특출합니다. 이 나무가 건축 재료로 적당한 까닭은, 나무 자체에서 풍기는 향기가 좋다는 점 외에도 옹이가 없으며 아울러 내구력도 뛰어나다는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바논은 팔레스틴의 북서쪽에 위치한 험준한 레바논 산맥을 말합니다. 이 산맥은 폭이 약 1.6Km 이내인 해안 평야에 의해서 지중해 해안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욥바는 아름답다는 의미를 갖는 항구 도시(1:3)로서 높이가 해발 약 43m인 바위로 이루어진 갑()이 바다로 돌출해 있는 등의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는 서북 쪽으로 약 56Km 떨어져 있습니다. 수운은 백향목 뗏목으로 엮어서 해안을 따라 옮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운송 방식은 최초의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에 의해서도 이용되었습니다(왕상 5:9).

 

(성전 건축의 감독자)

 

8,9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이에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지 두 달 째였습니다.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포로 귀환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서의 저자가 이 같은 방식으로 포로 귀환 사건을 묘사한 것은, 포로 귀환의 주목적이 성건 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년 이 월은 바벨론에서 귀환한 그 해의 이듬해 즉 B.C. 536년의 둘째 달인 시브월로서, 솔로몬도 이 때에 성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왕상 6:1).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재건의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한 지 육개월이 지나서야, 그 작업에 착수한 셈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굳이 이 시기를 택하여 성건 재건 작업에 착수한 까닭은, 일반 달력으로 4, 5 월인 이때는 건조기가 시작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과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사로 잡혔던 자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성전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세 이상의 레위 사람을 세워서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원래 레위인이 성전 봉사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25세 이상이 되어야 했습니다(8:24). 그러나 후대에 들어와서는 레위인의 인구가 감소함으로 하한 연령이 20세로 낮춰졌습니다(대상 23:24, 27 대하 31:17).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여기의 예수아는 대제사장 예수아가 아닌 호다위야 자손(2:40)의 한 대표인 레위인 예수아를 말합니다. 갓미엘도 역시 레위인으로서 호다위야 자손의 또 다른 대표였습니다(2:40). 유다 자손은 예수아와 갓미엘과 그 아들들과 동격으로 봐야하기 때문에 호다위야 자손으로 고쳐져야 함이 당연합니다.

헤나닷 자손들은 2장의 레위인 족보에 나타나지 않습니다(2:40). 이들이 성전 재건 작업의 감독자가 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이들도 레위 사람의 일파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형제 레위 사람들은 아삽 자손등을 말합니다(2:41, 42).

일제히 일어나다는 말은 히브리 원문에는 없으나 건축 감독자들의 적극적 자세를 강조하기 위해 첨가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 공장에서 공장은 일 혹은 역사(役事), 사업 등을 의미합니다(35:24 왕상 9:23 대상 23:4). 따라서 하나님의 전 공장은 성전 재건을 위한 공사(工事)를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 일꾼을 감독하였습니다. 감독하는 말은 원래 인도하다, 보살피다 등의 의미로서(대상 15:21 23:4 대하 34:13), 일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돕는 자, 혹은 조정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는 레위인들이 일반 백성들이나 고용된 일꾼들에 대해서 강압적 및 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줍니다.

 

(성전 건축의 기초를 놓다)

 

10,11절을 보십시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었습니다. 건축자는 7절에 언급되고 있는 목수 중의 일부였음이 분명합니다. 지대를 놓는 것은 원래 한 더미로 쌓다 혹은 위치를 정하다(104:8)의 의미이지만, 본절과 같은 문맥에서는 기초 공사를 하다의 뜻으로 쓰여집니다(대하 31:7 38:4 24:2 54:11).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옷이 입혀진 제사장들입니다. 예복을 입고 라는 동사는 원래 옷을 입다라는 의미지만 항상 제사장의 예복과 관련되어 사용된다는 점에서, 본절의 예복을 입고 는 어느 정도 적절한 번역입니다(6:10 16:4).

나팔을 들고는- 뒤에 나오는 여호와를 찬송하되에 걸립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는 데 나팔을 사용했습니다. 이 나팔은 산산히 부수다의 의미를 갖는 금속제 관악기였습니다. 따라서 이는 수양의 뿔로 만들어진 나팔(19:3)이나 야생 염소의 뿔로 된 나팔(대상 15:28 대하 15:14 5:8)과는 전혀 달랐으며 제사장들에 의해서 의식용으로 사용됐다는 점에서 다른 것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섰습니다. 제금은 본 단어의 쌍수형을 통해서 엿볼 수 있듯이, 두 개의 금속 원반으로 한 조가 되는 타악기였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심벌즈같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서는 단순한 의미의 기립 행위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특별한 의식의 집행을 위하여 임명되고 그래서 정 위치한 것까지를 말합니다(11:24 27:22 대하 8:14 11:1519:5 20:21).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고 찬양으로 화답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다윗이라는 인물의 특출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식적 명칭입니다. 물론 사울이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에 선택된 최초의 왕이라는 점에서 (삼상 13:14 13:22)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큰 비중을 갖는 인물이었습니다.

다윗의 규례대로는 2절의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에 상응하는 문구입니다. 모세는 성전예배의 기초적 혹은 핵심적 요소인 희생 제사 제도를 확립한 반면(2), 다윗은 부가적 혹은 보완적 요소인 음악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규례대로는 음악사용에 관한 다윗의 명령을 가리킴이 분명합니다(대상 15:16-24).

여호와를 찬송하되에서- 찬송하되는 구약 성경에서 송축하다(대상 16:36), 찬양하다(대상 25:3 113:1 146:1), 칭찬하다(12:15 삼하 14:25)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바로 이 단어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인 할렐루야가 파생되었습니다(113:9 115:18 116:19 135:21). 그들은 여호와께 감사하여 말하였습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 가운데 영원하시도다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감사하였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그들이 찬송하면서 그리고 감사하면서 노래했다는 의미입니다. 한 무리는 하나님을 찬송했고 또 한 무리는 감사했다는 점에서 우리말 번역처럼 화답, 즉 서로 주고 받는 식의 찬송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찬송과 감사는 거의 동의적입니다. ‘주는 지선하다에서 주()는 말할 나위없이 여호와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히브리 본문에 주란 말은 없습니다. 다만 그분은으로 번역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뿐입니다. 한편, 지선하시므로는 문자적으로 진실로 선하시므로의 뜻입니다.

그 인자하심이...영원하시도다 에서 인자는 계약적 관계로 인하여 베풀어지는 불변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여 백성들의 엄청난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치 않으시고 길이 참으심을 뜻합니다(3:22, 23). 하나님의 인자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로서의 유대 민족을 가리킵니다(1:3). 큰 소리로 함성을 지르는 것이나 노래하는 것은 승리의 상황에서 이루어졌습니다(삼상 4:5). 하나님의 성전이 다시 재건되어 하나님께 대한 희생제사가 완전히 회복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마귀 세력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이자 언약 백성의 승리였습니다.

성전 건축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한 세계만민의 구원역사를 신실하게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통곡과 기쁨)

 

12,13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지금 짓는 성전이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의 느부사라단에 의해서 파괴된 것(왕하 25:13 대하 36:19)B.C. 586 년이었습니다. 따라서 지대가 눠여진 그 해(B.C. 536)로부터 50년 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귀환자들중에 연로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을 본 경험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스룹바벨 성전의 기초는 거기에 사용된 재료의 질이나(왕상 5:17 7:10, 11) 그 규모에 있어서 솔로몬 성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보잘것 없었던 것 같습니다(2:3). 뿐만 아니라 그 공사를 담당했던 석공의 기술 수준에 있어서도 현저한 차이가 있었습니다(왕상 5:6).

대성통곡은 문자적인 의미가 큰 소리로 울면서라는 점에서, 개역 성경의 번역은 꽤 적절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노인들이 대성 통곡을 한 까닭은 (1) 성전의 규모가 과거의 솔로몬 성전에 비해 보잘것 없으리 만큼 작았으며, (2) 범죄로 인하여 이방 민족에게 철저히 멸망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에 의해서 그들의 땅에 포로로 끌려 갔었던 슬픈 과거가 생각났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은 솔로몬 성전을 못봤던 대부분의 백성들을 뜻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슬픈 역사에 대해서 체험적이지 못했으며, 2 성전의 규모가 작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낙천적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르니는 소리치다의 의미로서, 일이 잘 진행됨을 인하여 기쁨 중에 함성을 지르는 행동을 가리킵니다(6:5 삼상 4:5 대하 13:15 95:1). 여러 사람들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질렀습니다.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렸습니다.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본절은 노인들의 통곡하는 소리와 기뻐 외치는 소리가 함께 어울려져서 큰 소음으로 변했음을 말해줍니다. 노인들의 숫자는 분명히 작았을 것이 틀림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슬픔에 겨운 탄식 소리가 기뻐 외치는 소리보다 훨씬 컸던 때문이었습니다. 개역 성경 본문에 따라 이해하면 이 문구는 마치 이 다음의 문구에 언급된 내용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본절에서 두 번째로 나오는 백성은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사람인 양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나 본 문구는 오히려 본절의 끝부분으로 옮겨지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백성들의 탄식과 기쁨의 함성이 섞여져서 멀리까지 들릴 만큼 그 소리가 매우 컸음을 시사하는 데에 본절의 주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다는 말에서 백성은 본절의 초두에 나오는 백성과 동일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회중들을 가리킵니다. 탄식 소리와 기쁨의 함성 소리가 혼합된 나머지,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조차도 어떤 것이 탄식 소리이며, 또 어떤 것이 기쁨의 함성인지를 분별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통곡하고 기뻐하는 그 배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영광과 같지 못함을 슬퍼하고 다시 성전을 건축할 수 있음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퍼도 기뻐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잃은 것으로 슬퍼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된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면에서는 초라하지만 새 일을 하셨습니다. 자발적인 감동의 역사를 이루셨고, 말씀 중심의 역사를 이루셨고 모든 우상을 제거하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전을 지으면서 기뻐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새 역사를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에스라 3장 강해 대성통곡하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사람들.

에스라 31-에스라 313

요절 에스라 3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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