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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에스더 9장. 강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 부림절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4-11-29 00:00:00
조회수 : 4,220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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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9장 강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 부림절

에스더 91-에스더 932

요절 에스더 922.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심판의 반전이 일어난 날)

 

“1. 아달월 곧 열두째 달 십삼일은 왕의 어명을 시행하게 된 날이라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에

 

열두째 달인 아달월 십삼일이 왔습니다. 이 날은 하만이 내린 조서에 따르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기로 결정된 날이었습니다.(3:13), 모르드개가 내린 조서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학살하려고 하는 대적들에게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결정된 날이었습니다(8:11, 12). 따라서 이날에는 유대인들과 그 대적들간의 살상 행위가 필연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달월은 바벨론식의 달() 이름으로서 종교력으로는 제12, 민간력으로는 제6, 그리고 태양력으로는 2-3월에 해당되는 때입니다. 드디어 왕이 내린 명령과 조서대로 시행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의 왕의 어명은 하만의 것은 아니고 오직 모르드개에 의해 작성된 것만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어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왕의 칙령. 법령등을 의미하는데 본 구절에서는 이 용어가 단수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만에 의해 반포된 조서는 페르시아의 관례상 어쩔 수 없이 취소되지 못했을 뿐(8:8), 왕이 그 조서의 효력을 제거하기 위한 조서 모르드개에 의해서 반포케 했다는 점에서 실제적으로 사장(死藏)된 것이나 진배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자들은 하만이 내린 조서를 근거로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행위를 감행할 것이 뻔했습니다.

이 날은, 본래 유다 사람의 원수들이 유다 사람을 없애려고 한 날입니다. 하만과 그 추종자들이 왕을 유혹하여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날입니다.(3:7) 물론 음모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사람의 숫자는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 음모가 조서로 구체화되어(3:13, 14) 반포됐을 때, 하만의 뜻을 좇아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하는 데 참여할 뜻을 가졌던 자들은 심히 많았음이 분명합니다. 대적들이 유대인을 제거하고자 한 것은은 통치하다 혹은 지배하다, 권력을 갖다, 군림하다란 뜻을 갖는 동사의 부정사형으로서, 유대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만큼 해롭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8:93:276:8). 그래서 혹자는 이를 움켜서 쥔다 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을 제거하려고 한 그 날이 오히려 유다 사람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없애는 날로 바뀌었습니다. 모르드개에 의해 반포된 조서에 따라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학살하려는 자들을 오히려 죽일 수 있게 된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미워하는 자는 혐오감을 갖다 혹은 악의를 품다. 증오하다등의 뜻을 갖는 동사의 분사로 이와같은 감정적인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도리어는 변하다 혹은 뒤집다, 전복하다, 반대로 돌다등의 뜻이 있는 동사의 수동형 부정사로서 상황이 반전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반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불신자들에 의해서 핍박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순교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법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는 그 날에는 반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법에 지배를 받아 사단의 법을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여주실 것입니다. 그날에는 우리 믿는 자들을 왕으로 높여주시고 핍박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유대인을 해치는 자를 복수함)

 

“2. 유다인들이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 각 읍에 모여 자기들을 해하고자 한 자를 죽이려 하니 모든 민족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능히 막을 자가 없고 3. 각 지방 모든 지방관과 대신들과 총독들과 왕의 사무를 보는 자들이 모르드개를 두려워하므로 다 유다인을 도우니

 

아하수에로 왕이 다스리는 모든 지방의 각 성읍에 사는 유다 사람들은, 성읍별로 모였습니다. 유다인들의 이 같은 행동은 왕의 조서 첫조항에 함께 모이라는 것에 따른 것이었습니다(8:11). 당시 제국내의 유대인들 전체가 한 곳에 모두 모인 것은 결코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역 성경의 각 도, 각 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 본 구절에서 복수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 백성들이 살던 모든 도시에 유대인들이 모였었음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해치려고 하는 자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유대인을 해하고자 하는 자는 문자적으로 자신들의 멸망을 추구하는 자의 뜻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그들을 죽이려하니는 손을 뻗다는 뜻으로 유대인이 대적자를 죽이는 모습을 묘사한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로 된 어구는 본서의 2:21에서는 모살하려로, 3:6에서는 멸하고자로 각각 번역되어 그 의미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결코 선제 공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사신들에게 공격을 해오는 자들만을 자신들의 대적으로 보고 그들만을 죽였던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유대인을 막을 자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두려움이 그 모든 백성들 위에 떨어졌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든 민족들에게 임한 이 두려움도 8:17에 본토인이 유대인을 두려워하는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려는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각 지방의 대신들과 제후들과 총독들과 왕의 행정관리들은, 모르드개가 무서워서도 유다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대세의 흐름에 편승하는 데 민감한 관리들이 유대인들 편에 서기로 재빨리 결정했습니다. 원래 그들은 하만의 조서에 따라서, 유대인들을 죽이려는 자들을 돕는 입장에 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만의 조서가 취소되지 않은 채, 모르드개에 의해 조서가 내려졌기 때문에 그들은 온전한 중립적 입장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8:9). 그러나 그들은 절대적 권력을 장악한 신층 세력인 모르드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유대인들을 지지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관원은 왕의 신하를 가리키는 광의(廣義)의 단어입니다(3:12). 이는 1:3에서는 방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왕의 사무를 보는 자들은 3:9의 왕의 일을 맡은 자와 동일합니다. 이들은 다 유대인을 도왔습니다. 여기서 도우니는 올리다 혹은 세우다 일으키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의 분사로서, 유대인을 지속적으로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관리들이 노골적으로 유대인들을 돕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지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관리들이 노골적으로 유대인들을 돕는다면 왕의 첫 번째 조명(3:12 - 14)를 범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존귀하게 된 모르드개)

 

“4. 모르드개가 왕궁에서 존귀하여 점점 창대하매 이 사람 모르드개의 명성이 각 지방에 퍼지더라

 

당시 모르드개는, 왕궁에서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의 세력은 날로 더하여 갔으며, 그의 명성은 전국 방방곡곡에 퍼졌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안 나타나 있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가 본절 초두에 놓여 모르드개가 권세가 있어서 관리들이 도왔음을 말해줍니다. 모르드개의 지위와 명예 그리고 권세가 아울러 높아졌습니다.(8:2, 15 10:3). 모르드개가 창대하매는 앞의 존귀하여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대적을 진멸한 유대인)

 

“5. 유다인이 칼로 그 모든 대적들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행하고 6. 유다인이 또 도성 수산에서 오백 명을 죽이고 진멸하고7. 또 바산다다와 달본과 아스바다와 8. 보라다와 아달리야와 아리다다와 9. 바마스다와 아리새와 아리대와 왜사다 10. 곧 함므다다의 손자요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원수를 다 칼로 쳐 죽여 없앴습니다. 유대인들이 이같이 할 수 있었던 데는 관리들이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던 것(3)이 큰 힘이 됐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8:11-13에 언급된 조서의 내용과 같이 대적들을 진멸했을 것입니다. 대적은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감을 무력을 통해 나타내려고 했던 자들입니다(8:11).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본절 앞의 문구 그 모든 대적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됩니다.

본서의 저자는 이 같은 동의적(同意的) 대구법의 표현 방식을 빌어서 유대인들의 대적들에 대한 진멸 행위가 완벽하게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도성 수산에서만도 그런 자들을 오백 명이나 처형하였습니다.

6절에서부터는 5절에 언급된 유대인들의 진멸행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본 한글 개역성경은 5절을 유대인들의 진멸 행위의 전체적 개요로 보지 않고 하나의 구체적 모습으로 봅니다. 그래서 본절을 번역하면서 원문에도 없는 또라는 단어를 삽입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 문구의 도성 수산은, 수산시()의 서쪽 언덕 위에 인공적으로 만들어긴 요새 지역으로서 왕궁 이외의 다른 거주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곳은 인구가 조밀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도성 수산과 수산은 다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도성 수산에서 오백 명을 죽이면서 하만의 열 아들도 함께 죽였는데(7-10), 그 아들들의 시체가 수산에서 달렸다는 언급(14)을 볼 때, 저자는 도성 수산은 수산과 별 구별없이 사용한 듯합니다. 죽이고는 8:11에서 도륙하고로 번역된 단어입니다(3:13 주석 참조). 멸하고는 8:11에서 진멸하고로 번역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유대인들에 의해 도성 수산에서 살해된 하만의 열 아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바산다다 는 기도로 인해 주어진의 뜻입니다. 달본은 거만한, 오만한이란 뜻입니다. 아스바다는 말을 선물로 받은의 뜻입니다. 보라다는 많은 병거를 가진이란 의미입니다. 아달리야는 용감한의 뜻을 갖습니다. 아리다다는 관대한입니다. 바마스다는 가장 위대한입니다. 아리새는 정복하기의 뜻입니다. 아리대는 주기(to give)를 뜻합니다. 왜사다는 바람처럼 강한이란 의미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이렇게 한꺼번에 계속적으로 나열되어서 언급된 것은 그들이 모두 한 순간에 죽은 것을 나타내려는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사실 왕의 조서에 따른다면, 유대인들은 대적의 생명과 재산을 아울러 빼앗을 수도 있었습니다(8:11).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이같이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음으로써, 대적들에 대한 자신들의 공격 행위가 결코 더러운 이익을 탐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확연히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대적들에 대한 자신들의 행위가 대적들을 멸하는 그 자체에만 의의가 있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만의 아들들의 재산은, 주인을 잃은 재산 일체는 왕에게 귀속됐던 고대법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아하수에로 왕의 것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약500년 전에 사울이 아말렉을 물리치고 난후 탐심에 빠져 전리품을 취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사건(삼상 15:17-23)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복수할 시간을 하루 더 줌)

 

“11. 그 날에 도성 수산에서 도륙한 자의 수효를 왕께 아뢰니 12.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이르되 유다인이 도성 수산에서 이미 오백 명을 죽이고 멸하고 또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니 왕의 다른 지방에서는 어떠하였겠느냐 이제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또한 시행하겠노라 하니13. 에스더가 이르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면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이 내일도 오늘 조서대로 행하게 하시고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게 하소서 하니14. 왕이 그대로 행하기를 허락하고 조서를 수산에 내리니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가 매달리니라

 

도성 수산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그 날로 왕에게 보고되었습니다. 국가의 중요한 일은 항상 실록(6:1)에 기록되어야 했으므로 유대인들에 의해 살해된 자의 숫자가 왕께 보고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왕은 그러한 관례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신의 조서가 어떻게 실행되었는지 그 결과 보고를 받을 필요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왕이 에스더 왕후에게 말하였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도성 수산에서만도 그들의 원수를 오백 명이나 죽였고, 하만의 열 아들도 다 죽였소.” 에스더는 모르드개 혹은 그밖의 소식통에 의해서 1213일에 몇 명의 대적들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살해 됐는지를 보고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왕은, 에스더가 모르는 것으로 간주한 채 자신이 부하들로부터 보고 받은 바를 에스더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이같이 함으로써 자신의 에스더에 대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표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왕은 그러니 나머지 다른 지방에서야 오죽하였겠소?”라고 합니다. 수산에서 죽은 수효를 생각해 볼 때 전국적으로는 엄청난 숫자의 대적들이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사실(16)을 암시하기 위한 감탄문입니다.

이제 당신의 남은 소청이 무엇이오? 내가 그대로 들어주리다. 당신의 요구가 또 무엇이오?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하여 주겠소. 왕은 유대인에 의해서 살해된 대적의 숫자와 함께, 그 대적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세가 대단하였다는 보고도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태의 추이를 익히 알고 있었던 아하수에로 왕은 나머지 대적들을 소탕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서 다시 이같이 에스더에게 소청의 유무를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왕은 에스더와 유대인들에 대해 은총을 허락하고 또 은혜를 내릴 것을 요청케 한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의 결과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난폭할 뿐만 아니라 즉흥적이고 허영심이 많은 군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수에로가 본절에서 처럼 반응한 것은 그의 성격과 마음을 여호와께서 움직이셨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대답하였습니다. 임금님께서만 좋으시다면, 수산에 있는 유다 사람들이 내일도 오늘처럼 이 조서대로 시행하도록 하여 달라고 합니다. 하만의 조서(3:12, 14)나 모르드개의 조서는(8:11, 12) 모두 하루 동안만 유효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적대적 공격을 해왔던 모든 대적들을 그 하루 동안에 모두 진멸키는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남은 대적들이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유대인들에게 큰 해를 입힐 것이 뻔하였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그러한 것을 미리 예견하며 대적들의 완전한 진멸을 위해 왕에게 다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는 절대명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 자신의 개인적 원한을 갚으려는 의도에서 그러한 요청을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하만의 열 아들의 주검은 장대에 매달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대적들을 죽일 수는 있었지만, 그 시체를 훼손시키는 등의 일은 멋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 같은 권한이 부여되었다고 하더라도, 1213일 하루만에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어달 시간적 여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이처럼 그 다음 날인 1214일에 그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어달 수 있게끔 아하수에로 왕에게 간청을 한 것입니다.

에스더는 이처럼 하만의 아들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어 닮으로써 유대인의 대적 아각 자손(3:1)인 하만 일가가 완전히 진멸됐다는 사실을 가시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그밖의 대적 혹은 그들에게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엄중한 경고(삼상31:10)를 하고자하였습니다. 이처럼 나무에 다는 것은 히브리와 페르시아에 유행했던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21:22 6:11).

왕은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수산에는 조서가 내렸고, 하만의 열 아들의 주검은 장대에 매달렸습니다. 여기에서 왕이 내린 조서의 내용이 혹자의 주장처럼 유대인들에게 다음날도 싸울 수 있다는 것만을 허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하수에로는 다음날의 싸움과 하만의 아들들의 시체를 나무에 달 수 있게 한 조서를 동시에 내린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가 하만이 매어 달렸던 높은 나무(7:9, 10)에 일부 달렸고, 그 나머지도 그 옆에 새로 세웠을 나무에 나란히 달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죽은 시체를 나무에 다는 것은 그 시체에 대한 대단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그와 관계한 사람에서까지도 심한 모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의 시체를 나무에 달아서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자 하였습니다.

 

(재산은 손대지 않고 목숨만 죽임)

 

“15. 아달월 십사일에도 수산에 있는 유다인이 모여 또 삼백 명을 수산에서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고16.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 명을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수산의 유다 사람들은 아달월 십사일에 한 곳에 모여서, 수산에서만도 삼백 명을 죽였으나, 역시 재산은 빼앗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300명을 죽인 행위는 왕이 내린 새로운 조서(14)에 따른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의 삼백 인은 1213일에 미처죽이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에스더서 저자는 재산에는 손대지 않았다는 이와 같은 표현을 15절 뿐만 아니라 10절과 16절에도 기록하여 유대인들의 바른 행위와 그들의 살륙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왕이 다스리는 각 지방에 있는 나머지 유다 사람들도, 지방별로 함께 모여서 조직을 정비하고, 자체 방어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는 수산 이외의 지역 유대인이 왕의 조서를 어떻게 실행했는지를 보여줍니다(6). 그들은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며 자위권을 발동하였습니다.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는 것도 생명을 보호하여와 동일한 의미로 봐야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어느 특정한 지역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22). 그들은 원수들을 무려 칠만 오천 명이나 죽였으나, 역시 재산은 빼앗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자들입니다. 수산 이외의 지역에서 살해된 대적의 숫자 칠만 오천 인은 수산에서 하루 동안 살해된 숫자 500명에 비하면 조금 많은 듯합니다.

 

(잔치를 베푼 14일과 15)

 

“17. 아달월 십삼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사일에 쉬며 그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 18.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은 십삼일과 십사일에 모였고 십오일에 쉬며 이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긴지라

 

수산성 외에서 복수한 것은 아달월 십삼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사일에는 쉬면서, 그 날을, 잔치를 하면서 기뻐하는 날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16절에 언급된 유대인들의 정당한 행위가 언제 이뤄졌는지를 분명히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수산에 사는 유다 사람들은, 십삼일과 십사일에 모여 일을 벌였으므로, 십오일에는 쉬면서, 그 날을, 잔치를 하면서 기뻐하는 날로 삼았습니다. 수산 지역의 유대인들은 왕의 특별한 조서에 따라 십 사 일에도 대적들을 물리쳤습니다(15). 그러나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은 십 삼 일 하루 동안에(8:12) 대적들을 진멸하였기 때문에, 그 다음날 14일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수산성 외에는 14일에 잔치함)

 

“19. 그러므로 시골의 유다인 곧 성이 없는 고을고을에 사는 자들이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

 

19절은 16, 17절의 결과로서 수산 이외의 지역 유대인들이 1214일을 경축일로 지키게 되었던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는 앞에 언급된 내용의 결론을 유도하는 접속사가 됩니다(2:24 6:6). 따라서 여기의 그러므로는 19절이 16, 17절의 결론에 해당됨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의 이 용어는 대체로 어떤 습관의 유래에 대해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성벽이 없는 여러 마을에 사는 유다 사람들이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정하고, 즐겁게 잔치를 벌이면서,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은 까닭도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촌촌은 고을 고을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요새화되어 있지 않고 탁 트인 마을 혹은 도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촌촌과 고을 고을은 곧 요새화되어 있었던 수산과 대조되는 수산 이외의 다른 모든 지역들을 가리캅나다. 이처럼 수산 이외 지역의 유대인들이 명절을 십 사 일로 정한 것은, 그들이 그 전날에는 대적들과 싸우고 그 날에는 안식을 얻고 잔치를 베풀었었기(17)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산에 사는 유대인들은 십 오 일에야 쉴 수 있었기(15, 18) 때문에 명절이 다른 지역 유대인들과는 달리 십 오일이었습니다(21).

여기의 명절은 문자적으로는 좋은 날이라는 뜻으로서, 그 날에 있었던 상서로운 역사적 사건을 계속 기억하기 위해 특별히 정한 기념일이었습니다(12:14). 이 날에는 모든 노동을 그치고 그 날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되새기며 하루를 보냈습니다(8:17).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성탄절 등에 주로 행하는 선물 교환과 거의 흡사하게 예물을 주고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같이 함으로써 상호 연대감을 증진시키려고 했었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관습은 오늘날에도 유대인들 사이에 계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듯합니다.

 

[14일과 15을 명절로 삼음]

 

“20.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원근을 막론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21.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지키라

 

모르드개는 이 모든 사건을 다 기록하여 두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유대인들이 왕이 내린 조서에 따라서 대적들을 진멸한 일(5, 15, 16)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대적들을 진멸한 후 그 다음날을 명절로 삼아 쉬면서 잔치 등을 베푼 일(17-19)을 아울러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직면했던 위협과 파멸의 위험에서 보존된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 말이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기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르드개는 다만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하여 그간의 사건 개요를 기록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멀든지 가깝든지, 아하수에로 왕이 다스리는 모든 지방에 사는 유다 사람들에게 글을 보내서,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명절로 지키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모르드개는 부림절이 정례적인 공식적 절기로 지켜지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한 규례를 세워는 ~위에를 뜻하는 전치사와 함께 사용되어, 어떠한 일을 특정한 어떤 사람이 필연적으로 행하도록 의무를 부과시키는 것을 말합니다.(4:7 119:106). 그러므로 이는 어느 날을 잡아서 기리고 경축할 것을 정한다는 의미를 강하게 나타냅니다. 수산의 유대인들이 아달월 십 오일을 자신들의 경절로 삼은 전례(18), 그밖의 지역 유대인들이 아달월 십 사 일을 경절로 삼은 전례(19)를 모두 존중하여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 날)

 

“22.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그 날에 유다 사람이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는 쉬다 혹은 안식하다, 조용하다란 뜻이 있는 동사입니다. 22절의 이러한 표현은 유다 백성들이 대적들의 위협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조용히 지내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동사로부터 16절에 언급된 벗어나며나 17, 18절에서 쉬며로 번역된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그 날에 유다 사람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고, 초상날이 잔칫날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슬픔(42:28 13:2 23:33)은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라는 왕의 조서가 내려졌을 때 온 유다 백성들이 느꼈던 감정이었습니다(4:1, 3). 그들의 기쁨은 대적들을 모두 무찌른 후 잔치를 통해서 발산되었습니다(17-19). 여기서 애통이라는 명사는, 비탄, 애도라는 의미로 자신의 멸망을 예견했던 하만의 심정을 표현한 형용사와 동족의 단어입니다(6:12). 또한 이 명사는 하만에 의해 내려진 조서로 공포에 사로잡혔던 유대인의 마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4:3). 이와같이 이 용어의 사용에는 유다 사람들이 가졌던 극도의 슬픔의 감정을 나타내려는 본서 저자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길한 날은 19절의 명절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길한(good)이라는 말에는 좋은, 선한, 아름다운, 기쁜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 악이 바뀌어 선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모르드개는 그 이틀 동안을, 잔치를 벌이면서 기뻐하는 명절로 정하고,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로 지키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모세 율법이 명령하고 있는 절기를 지키는 구체적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16:14 8:10). 유대인들은 절기를 이같은 방법으로 지킴으로써. 자신들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 감사하였습니다.

 

(해마다 명절을 지킴)

 

“23. 유다인이 자기들이 이미 시작한 대로 또한 모르드개가 보낸 글대로 계속하여 행하였으니

 

그래서 유다 사람들은, 모르드개가 그들에게 글로 써서 지시한 대로, 자기들이 시작한 그 명절을 해마다 지켰습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들이 대적들을 물리친 그 다음 날에 시행했던 행사를 근거로 해서 부림절 절기를 제정하기 위한 글을 유대인들에게 보냈었습니다(20, 21). 따라서 여기에 표현된 자기들의-시작한 대로라는 말은 모르드개의 보낸 글대로와 동일합니다. 계속하여 행하였으니. 원어는 응낙하다, 착수하다, 받아들이다, 취하다 란 의미의 동사의 강조형으로서, 기쁨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8:7 2:10 19:20).

 

(부림절을 제정하게 된 배경)

 

“24.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모든 유다인의 대적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기를 꾀하고 부르 곧 제비를 뽑아 그들을 죽이고 멸하려 하였으나 25.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왕이 조서를 내려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던 악한 꾀를 그의 머리에 돌려보내어 하만과 그의 여러 아들을 나무에 달게 하였으므로26.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유다인이 이 글의 모든 말과 이 일에 보고 당한 것으로 말미암아 27. 뜻을 정하고 자기들과 자손과 자기들과 화합한 자들이 해마다 그 기록하고 정해 놓은 때 이 두 날을 이어서 지켜 폐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28. 각 지방, 각 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두 날을 기념하여 지키되 이 부림일을 유다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고 그들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기념하게 하였더라

 

22절부터 26절까지는 부림절이 제정되기까지의 배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다 사람의 원수 아각의 자손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은, 유다 사람들을 죽여 없애려고, 주사위의 일종인 부르를 던져서, 유다 사람들을 다 없앨 날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죽이고는 패배케하다 혹은 부수다의 뜻을 가진 동사 의 부정사로서, 큰 능력을 동원하여 상대를 멸절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2:15 10:10 4:15 삼상7:10). 한편, 이 용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적을 칠 때 나타나는 대패배를 가려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14:24 2:15).

그러나 에스더가 그 음모를 왕 앞에 말하였습니다. 왕은, 하만이 유다 사람을 해치려고 꾸민 악한 흉계가 하만 자신에게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하만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아들까지도 장대에 매달도록, 글로 써서 조서를 내렸습니다. 왕이 하만의 형벌과 관련한 조서를 내렸다는 사실이 본서에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총리대신을 처형하는 문제는 너무나도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왕은 구두 명령 이외에 그것을 문서화한 별도의 명령을 신하들에게 하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사위의 일종인 부르라는 말을 따라, 이 두 날을 불러서 부림이라고 하였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그러므로를 뜻하는 말이 있습니다(19). 따라서 26절부터 28절까지는 앞 부분의 결과에 해당됩니다. 그 중 26절은 어떻게 해서 부림절이라는 절기 명칭이 정해지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르는 제비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입니다(3:7). 그런데 26절에는 이 용어가 복수 형태로 쓰여져 있어, 부림 절기로 지켜지는 날이 두 날이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이 모든 사건은, 유다 사람 스스로가 직접 보고 겪은 것이며, 모르드개의 글에도 적혀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의 모든 말은 모르드개가 부림절 제정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 전부를 가리킵니다(20). 이 일에 보고 당한 것은 그들이 보았고 그들에게 일어난 일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적절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곧 24, 25절의 내용인 바, 그들이 경험한 것이 모르드개의 글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뜻을 정하고 이 두 날을, 그들과 자손과 그들에게 귀화하는 모든 사람이, 해마다 정해진 때에, 글에 적혀 있는 대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명절로 삼았습니다. 뜻을 정하고는 21절의 한 규례를 세워와 동일한 동사입니다. 그러나 21절의 한 규례를 세워라는 표현은 부정사(不定詞)임에 반하여, 본 단어는 일반적 형태로서 부림절을 제정하기로 한 사람들의 의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와 자손은 부림절이 그 당대 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계속 지켜지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한편, 화합한 자들은 합하다 혹은 함께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의 수동 분사로서 이방 종교를 포기하고 여호와의 종교를 받아들여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14:1 56:3 2:11). 즉 이방인 개종자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이 두 날을 연하여는 유대인들이 혹시 한 날만을 부림절로 지키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따라 언급된 말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수산에 사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최초에 그랬던 것처럼(18). 1215일 하루만을 절기로 지킬 가능성이 있었고, 그의 지역의 유대인들은 1214일 하루만을 절기로 지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19). 여기서 폐하지 아니하기로는 페르시아의 법이 절대로 변개될 수 없었던(1:19) 사실을 염두에 두고 부림절 절기의 지킴에 대해서도 매우 강하게 강조한 듯합니다.

사실 선지자도 제사장도 아닌 모르드개가 제정한 부림절은 언뜻 생각하면, 결코 신적인 권위라고는 전혀 없는 절기처럼 느껴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부림절이 제정되게 된 과정을 목격치 못한, 즉 체험치 못한 그 후손들은 그 부림절 절기를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컸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부림 절기의 지킴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에 나타난 작정하고는 23절의 계속하여 행하였으니와 동일한 어근과 의미의 단어입니다. 28절은 내용상 27절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반복을 통하여 본서의 저자는 부림절이 반드시 지켜져야 했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두 날은, 유다 사람이면, 어느 지방 어느 성읍에 살든지, 모든 집안마다 대대로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 날입니다. 각 도, 각 읍, 각 집에서은 모든 지역, 모든 공동체, 온 가족이 부림절을 예외없이 지켜야 할 필요성을 암시합니다. 대대로는 부림절이 후대에도 계속 지켜져야 할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강조를 반영이라도 하듯 히브리인들은 오늘날까지 이 부림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폐하지 않게 하고- 문자적으로는 지나쳐 버리지 않도록입니다. 27절의 폐하지 아니하기로와 동일한 의미의 어휘입니다. 이틀 동안 계속되는 부림절은 유다 사람들로서는 거를 수 없는 명절이 되고, 자손에게도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부림절을 확정하는 두 번째 편지)

 

“29. 아비하일의 딸 왕후 에스더와 유다인 모르드개가 전권으로 글을 쓰고 부림에 대한 이 둘째 편지를 굳게 지키게 하되30. 화평하고 진실한 말로 편지를 써서 아하수에로의 나라 백이십칠 지방에 있는 유다 모든 사람에게 보내어 31. 정한 기간에 이 부림일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가 명령한 바와 유다인이 금식하며 부르짖은 것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자기 자손을 위하여 정한 바가 있음이더라32. 에스더의 명령이 이 부림에 대한 일을 견고하게 하였고 그 일이 책에 기록되었더라

 

아비하일의 딸 에스더 왕후는, 유다 사람 모르드개와 함께, 전권을 가지고 두 번째로 편지를 써서, 부림절을 확정하였습니다. 본문구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모르드개가 쓴 서신 이외에(20) 또 다른 서신이 유대인들에게 보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그것은 다음에 나오는 둘째 편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글을 쓰고는 여성 3인칭 단수입니다. 주어가 에스더와 모르드개 두 사람이어서 3인칭 복수 동사가 사용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여성 3인칭 단수 동사가 사용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 여기의 글을 쓰는 일, 다시 말하여 편지를 쓰는 일이 에스더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은 아마도 첫째의 서신을 보낸(20) 때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후, 즉 공식적으로 제정된 부림절이 최초로 돌아오기 얼마 전쯤에 보내졌을 것입니다. 전권(全權)으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어근은 이기다, 압도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권위, 권력, 힘 등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문자적인 의미보다도 진정으로, 또는 감동적으로란 해석이 더 어울리는 듯합니다. 굳이 지키게 하되는 21절의 한 규례를 세워서와 동일한 어휘,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위로와 격려의 말이 담긴 그 편지는, 아하수에로 왕국 백스물일곱 지방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들에게 발송되었습니다. 화평하고 진실한 말로는 에스더가 쓴 둘째 편지의 내용이 주로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그 둘째 편지는 유대인들에게 에스더 자신의 선한 뜻을 표현하기 위한 인사말, 곧 화평이 있으라라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이 여전히 신실한 유대 여인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진실한 말로 메워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말, 즉 평안할지어다(4:17) 혹은 만한하옵소서의 변형일 것입니다. 써서는 엄밀히 말하여 히브리 원문에는 이를 표현하는 말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뜻이 잘 통하도록 하기 위한 번역자의 삽입인 듯합니다. 유다 모든 사람에는 당시 팔레스틴에서 살던 유대인들도 포함됩니다(3:13). 보내어는 3인칭 남성 단수로 쓰여졌습니다. 이러한 서술은 결국 둘째 편지가 에스더의 주도 아래 쓰여졌고(29), 모르드개에 의해서 전국에 보내졌음을 시사합니다.

이 편지는, 이틀 동안 계속되는 부림절을 확정짓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와 에스더 왕후가 지시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다 사람들 스스로도 기꺼이 부림절을 명절로 확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드드개가 첫째 편지를 보냈던 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비록 20-22절에 보면 첫째 편지가 모르드개 단독으로 보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상 그 편지는 에스더의 지원 혹은 지지 아래 보내졌을 것이 뻔합니다. 다만 그 편지를 보내는 일의 주도자가 모르드개였을 뿐이었습니다. 그 자손들도 그 때가 되면, 금식하며, 슬피 울면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리고 마치 유다인이 금식하며 부르짖는 것을 정했던 것과 같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르드개의 첫 번째 서신(20-22)에는 금식과 부르짖음에 관한 명령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르드개의 서신 내용 가운데는 슬픔과 애통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는 사실(22)에 근거하여, 그의 서신 내용 중에는 금식과 부르짖음에 관한 명령이 담겨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모르드개는 유대인들이 대적을 물리친 그 다음날 안식하며 잔치했던 일에 근거하여 그 날을 명절로 지키게 했듯이(22), 유대인들이 하만의 명령으로 1213일을 인하여 금식하며 부르짖은 것(4:3)에 근거하여 금식과 부르짖음도 그 명절 행사 중의 하나로 지키게끔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금식과 부르짖음이 부림절의 두 날 곧, 1214일과 15일 중 어떤 날에 행해지게끔 명령됐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부림절에 관한 규정은, 에스더의 명령으로 이렇게 확정되고, 그것은 글로 기록되었습니다. 에스더의 명령은 에스더가 보낸 둘째 편지를 가리킵니다(29). 에스더의 명령으로 부림절을 지키는 방법과 날짜(21, 26-28)등을 확정하였습니다. 견고히 하였고는 27절의 작정하고와 동일한 동사이며 같은 의미입니다. ‘그 일이 책에 기록되었더라의 책은 문자적으로 그 책으로서, 에스더서도 아니고 모르드개가 보낸 편지도 아닙니다. 이것은 에스더서를 쓰는 데 사용된 자료, 즉 당시 모르드개가 기록했었을 유대인들만의 역대 일지였던 것 같습니다. 본서의 저자는 바로 이 역대 일지를 통하여 모르드개의 첫째 편지와 에스더의 둘째 편지 내용도 알수 있었을 것입니다.

에스더 9장 강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 부림절

에스더 91-에스더 932

요절 에스더 922.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에스더 9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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