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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말라기 1장 강해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4-12-19 00:00:00
조회수 : 4,832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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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1장 강해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말씀 말라기 11-말라기 114

요절 말라기 18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말라기는 스룹바벨 성전을 지은 후에 쓰여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와 하나님께 감격을 합니다.

그들이 돌아와 맨처음 한 일은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성전을 짓다가 내적 외적 시련으로 16년 정도 멈추었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성전을 지어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예언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도 성전의 영광을 보고 성전을 짓도록 격려합니다.

그 후에 사년에 걸쳐서 성전을 짓습니다. 성전은 20년 정도 짓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지은 후에 감격합니다.

성전을 지은 후 다시 40여년이 흘렀습니다. 성전을 지은 후에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하나님이 큰 복을 주실 줄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메뚜기로 인하여 농사는 망쳤습니다. 포도가 익기 전에 떨어졌습니다. 아직도 바벨론 총독이 상주하고 바벨론의 식민지 아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 7가지 질문을 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런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증거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여 복을 주실 수 없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이름은 존중히 여김으로 복을 받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말라기의 말씀)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주님께서 말라기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족보나 가족은 모릅니다.

말라기는 나의 천사, 사자라는 뜻입니다.

여기 "경고"라는 말은, 재앙이나 환난을 가지고 위협하면서 책망하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초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정성이 없습니다. 형식은 있지만 신앙이 없습니다. 그들은 병든 것 저는 것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멸시한 죄를 책망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2a.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고 여호와 주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배를 드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말라기에는 일곱 개의 질문 중에 첫 번째 질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이 마음에 안 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이 성취되어야 사랑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정치적으로 독립해야 그들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병충해가 있었고 메뚜기떼의 피해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폐르시아의 식민지 아래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쁜 조건이라도 그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을 깨닫는 것은 주관적입니다.

다윗은 원수의 목전에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병들면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느 부인은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십년 동안 섬기고 있습니다. 남편은 앉히면 앉고 먹이면 먹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아직 안 죽었어요 라고 말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를 못합니다. 식물인간은 사랑의 반응이 없고 감동이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주고 아내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빙그레 웃어주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키우는데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지 못합니다. 부모는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들 소원을 다 이루어주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그들의 소원을 다 이루어주지 않아도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높은데 올라가도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여 도와 줄 것을 알고 뛰어내립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다 들어주시지 않은 것도 때로는 사랑입니다.

우찌무라간조는 임종 직전에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내 소원을 다 들어주셨으면 오늘의 내가 았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랑을 깨달아야합니다.

 

(선택을 한 사랑)

 

2b,3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을 그들의 조상 야곱에서부터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과 에서는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에서 20년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입니다. 여호와는 야곱과 에서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십니다.(25:23 9:10-17) 여호와는 뱃속에서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증거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고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자신의 고집이 강하였습니다. 서원기도를 한 후에, 하나님은 그 서원 기도를 들어주셨지만 그는 10년 동안 서원을 갚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그를 변화되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아무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을 때에 선택하였습니다. 야곱이 아무 소원도 없을 때 선택하셨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선택은 반드시 자연적 질서로 말미암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참 사랑은, 이렇게 객관적 조건에 영향을 받아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하는 주체자의 무조건적 결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많은 환난과 고난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많이 고난을 받은 민족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고난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만큼 알맞게 징계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리 징계를 받아도 망하지 않습니다. 애굽의 400년 노예살이에도 망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에게 망하고 나서 2500년 여러 나라의 식민지 살이를 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시야가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 제일의 민족으로 만들어주십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세계 모든 민족을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에 빠졌지만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 외에는 어떠한 다른 사랑의 표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확증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미리 정하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로마서 829,30)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 우리가 야곱처럼 선택받은 증거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에서처럼 버림 받은 자입니다. 이들도 예수님을 믿으면 야곱이 됩니다. 우리가 야곱입니까? 에서입니까? 예수님을 믿은 사랑은 야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1:4) 하나님은 이미 택하신 우리를 절대적인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절대적으로 사랑합니다. 선을 행할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행할 때도 사랑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해줄 때도 사랑하지만 때로는 매를 때릴 때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풍의 때나 역경의 때나 항상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합니다.

왜냐고요? 예수님을 믿은 자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셨습니다.

여기 에서를 "미워하였다는 말은, 에서를 택하지 않은 결과 그의 지은 죄대로 갚으신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에서가 받는 고난은 징계가 아니라 심판입니다. 에서가 사는 언덕은 벌거숭이로 만들고, 그가 물려받은 땅은 들짐승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에서의 자손으로 되어진 에돔 나라가 황무지가 된 것은, 맨처음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정복하러 가는 도중에 성취되었습니다.(25:9,21).

 

(에돔의 교만과 멸망)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에서의 자손인 에돔이, 비록 우리가 쓰러졌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세우겠다고 장담합니다. 에돔은 교만합니다. 에돔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힘을 믿어 어디까지든지 국세를 회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세울 테면 세워 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가 기어이 에돔을 헐어 버리십니다. 에돔은 악한 나라, 주에게 영원히 저주받은 백성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을 제일 미워하시기 때문에, 에돔이 호언장담한 바와 정반대로 하나님은 에돔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에돔은 주전 553년 바빌론의 나보니두스(주전 553543)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주전 539년 바빌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한 후 에돔은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들을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오히려 네게브 북쪽 지역(진광야-현재 이스라엘 브엘세바 남쪽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주전 332년경 알렉산더의 헬라 세력 이후 네게브 북쪽 지역에 정착한 에돔 사람들의 지역을 헬라어로 이두메아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그들 나라는 없어지고 나중에는 유대인에 동화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만하면 하나님은 그를 낮추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은 자는 그의 행위대로 망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스라엘 밖에서도 크신 하나님)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이스라엘은 에돔의 멸망을 직접 보고, 주님은 이스라엘 나라 밖에서도 높임을 받으신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밖에 이방 세계에서도 그 위엄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에돔을 멸망시키므로 역시 모든 이방에 대한 그의 주권이 확실히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은 크신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들은 에돔이 멸망 받은 것을 보고 나서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나라에도 크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6a.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크신 하나님을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이라고 하십니다.

말라기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공경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부자 관계와 주종 관계의 도덕에 근거하여 말씀하십니다.

제사장들(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의미에서)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도록 질문식으로 물으십니다. 그들이 아버지인 하나님을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하십니다. 주인인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제 주인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이 세상 모든 윤리 제도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아버지요 주가 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32: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나라로 창조하시고 또 자녀처럼 양육하셨습니다.(44:26 31:9 100:3). 그들을 어린아이같이 업어서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주가 되시어 피값으로 사서 그들을 소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며 또 두려워해야 합니다. "공경"한다 함은, 사랑함과 찬송함과 감사함과 순종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함", 노예적인 공포가 아니고 공경함에서 오는 공포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두 가지 요소는, 신앙의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멸시한 죄를 알고 이를 책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죄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아서 그들을 복주실 수 없었습니다. 멸시하는 자는 저주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6b를 보십시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이 언제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그들의 두 번째 논쟁은 그들이 하나님이 어떻게 멸시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어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멸시하였는데도 여호와를 멸시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는 마비된 심정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멸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의식으로 무성의하게 멸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사가 형식적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양들의 가난한 형편을 이해하여주고 그들이 병든 제물을 가져와도 받아주었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이해하였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였습니다.

 

(더러운 떡을 드리는 자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멸시하였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한 제사장은 여호와의 제단에 더러운 빵을 바치고 있습니다. 여기 이른바 "더러운 떡"이라는 것은, 성전 안에 드리는 진설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설병은 제단 위에 놓는 것이 아니라 떡상에 놓습니다. 여기 말씀하시는 "", "여호와의 단에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희생 제물의 고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떡이라고 한 말씀은, 21:6, 8, 17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희생의 고기를 드리되 더러운 것으로 드린 것은, 흠 있는 동물의 고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22:20-25). 제사장들은, 더러운 떡을 바치면서도 우리가 언제 제단을 더럽혔느냐고 되묻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주님께 아무렇게나 상을 차려 주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인데 눈빠진 것을 드려도 태우는 것은 다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태우면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좋은 제물은 자신이 먹든지 다른 사람에게 팔았습니다. 그들은 상품가치가 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님(주님의 제단)을 더럽게 하면서도 그렇게 한 줄 모르고 그 죄악을 부인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말로써 멸시하지는 않아도, 말보다 행동으로 멸시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무지로 하나님을 멸시하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무언 중에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는 것을 예물로 드리는 자들)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하나님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멸시하였는지 실례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제사장에게 눈먼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괜찮다는 거냐고 묻습니다.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괜찮다는 거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기에 제물을 바쳤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물은 태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여기서 위의 7절에 말한 "더러운 떡"이 바로 흠있는 제물을 바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흠있는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습니다(22 :22).

이렇게 희생 제물을 완전한 것으로 드리도록 명령한 것은(22 :21), 속죄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완전한 것에는 그들의 정성과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에서 그 고기를 섭취하심이 아니고, 그 공경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제물이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정한 대로 순종하여 최상의 것을 바쳐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장사를 하는데 깨끗한 돈만 하나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병든 것들을 그들의 총독에게 바쳐 보아라. 그가 그들을 반가워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을 좋게 보겠느냐고 하십니다. 총독에게 혼만 날 것입니다.

김정은에게 이런 것을 주면 당장 총살일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드려도 무슨 의도가 있는가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김정은과 달리 더 크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어디까지나 실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공경하는 표준을 인간 생활의 실제적인 면에서 판단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살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총독보다 못하신 분으로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만군의 주님을 보이지 않는다고 총독만도 못하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돈을 드릴 때 꾸깃꾸깃한 돈을 드리지 못합니다. 똑 같은 물건도 포장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거기에 마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천 원을 드리려고 하는데 천 원짜리가 없어서 만 원을 드리고 아까워합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러야 합니다.

예전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는 최상의 제자를 파송하였습니다. 메시지를 전할 때는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고 정성을 다하여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도 최상의 것을 드려야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받으시고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경외심이 없으면 기도를 듣지 않으심)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제사장들아 이제 하나님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으레 그렇게 기도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좋게 보시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한 기도는, 대단히 겸손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보아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겸손한 듯한 기도는 외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도가 진실하기 전에는 그것을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기도의 내용보다 먼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차라리 예물을 드리지 않는 것이 좋음)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그들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그들이 여호와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는 마음 없이 드리는 그들의 예물을 싫어하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바치는 제물도 여호와는 이제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헛된 제사는 받지 않으시므로, 성전 문을 닫아 걸으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성전을 닫으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라는 반어적인 말씀입니다.

 

(이방민족 가운데 높임 받으시는 하나님)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하박국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될 신약 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이방 민족이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 말씀에 사용된 표현들이 역시 구약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분향한다던가 제물을 드린다는 표현들은, 실제에 있어서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그런 의식 제사를 드리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4:21-24). 다만 신자들이 하나님을 공경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멸시하지만 도리어 이방인들 중에서 앞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할 자들이 많이 일어나리라고 합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 줍니다. 이런 큰 이름을 그 때의 유대인들은 그 행동 면에서 멸시하였던 것입니다.

앞으로 메시야가 오시면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여호와 이름이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곳곳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바칠 것입니다.

영국과 미국과 한국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무너졌지만 하나님은 이방인들 가운데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더러운 예물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은 최상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말라기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이 시점에서 이런 예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눈빠진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까닭입니다. 오랜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백성으로 자처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참되이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다. 이를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신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께 차려 드리는 상쯤은 더러워져도 괜찮아! 말합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관념적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주께 드리는 상은 제단 위에 놓은 소산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싫어하는 음식을 제물이라고 제단 위에 바칩니다. 그들은 지금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예배를 귀찮아하는 자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 제사드리는 이 일이 얼마나 싫증나는 일인가! 하고 말하며, 제물을 멸시합니다. 번거로운고 함은 번거롭고, 짐이 되고, 피곤함을 의미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귀찮아합니다. 사랑이 없고 마음이 없으니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귀찮습니다.

예배참석 안한 것은 아닙니다. 예배가 나를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예배 나가지니 귀찮고 안 나가자니 꺼림찍합니다. 예배가 무거운 짐입니다. 안 나가니 더 괴롭습니다. 주일날 놀러가면서 비가 오면 벼락이라도 칠 것 같습니다. 정성이 없으니 형식만 갖추어서 예배를 드립니다. 외식하는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지 않고 무거운 짐처럼 생각하고 억지로 드립니다.

코웃음하였다함은 하나님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들이 희생제물을 바침에 있어서 하필 훔친 것, 병든 것과, 저는것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을 코웃음치며 멸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훔쳤거나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이라고 가지고 오니, 여호와가 그것을 그들에게서 달갑게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고기 타는 냄새를 받지 않지 않으십니다.

정성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경건한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물건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임금 여호와 하나님)

 

“14.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짐승 떼 가운데 좋은 수컷이 있어서, 그것을 바치기로 맹세하고서도, 그것을 드리지 않고 흠 있는 것으로 바쳤습니다. 여기 이른바 는 양떼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 바치는 양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수컷을 좋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제사(무슨 소원이 있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그것이 이루어진 때에는 어떠한 감사를 하겠다는 서약의 제사를 의미함)를 드릴 때에 수컷은 못드릴 망정, 암컷들도 흠 있는 것을 드렸습니다. 수컷을 드리지 않고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은 제사를 멸시하는 행동입니다.

여기 이른바 속여’ - 라는 것은, 좋지 못하고, 흠 있는 것을 드리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제사를 잘 드린 듯이 취한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배에 왔느냐 안 왔느냐 만 봅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척하면서 자기 일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은 사람을 속여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속여 제사하는 자들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저주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도 저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사랑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어 예배당을 짓고 잘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는 예배당은 부흥되지 않고 망합니다. 그 후손이 잘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의 이름을 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합당하게 해야합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요셉의 기념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가 잠을 자는데 꿈에 보니 천사가 요셉 기념관을 떼고 마리아의 기념관이라고 지었습니다. 마리아를 찾아보니 마리아라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교회 예배당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이분은 헌금한 것이 없습니다. 그 할머니는 언덕에 오르는 말에게 말죽을 쑤어서 말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정성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재산을 드린 것보다 그 정성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임금입니다. 세계 만민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총독보다 더 크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큰 왕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여야 합니다. 우리는 직장의 상관보다 박근혜 대통령보다 하나님을 더 높여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마음껏 우리를 복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세상의 큰 임금이십니다.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실제 살아계신 하나님을 공경함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고 두려워함으로 섬겨야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마음껏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아멘!.

말라기 1장 강해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말씀 말라기 11-말라기 114

요절 말라기 18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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