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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느헤미야 2장 강해 영광스러운 공동체 세우기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4-11-01 00:00:00
조회수 : 3,377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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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2장 강해 영광스러운 공동체 세우기

느헤미야 21-느헤미야 220

요절 느헤미야 217.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왕에게 예루살렘 성 건축을 요청하고 왕의 허락을 받습니다. 느혜미야는 예루살렘 돌아와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자고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다시는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말자고 합니다. 우리가 수치를 인식하였으면 우리는 그 현실을 돌아보고 영광스러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왕 앞에서 수심 있는 느헤미야)

 

"1.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2a.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이었습니다. 니산월은 유대 종교력으로 정월에 해당합니다. 하나니등이 페르시아에 도착했던 기슬르 월 9월입니다(1:1). 그렇다면 11절의 기슬르 월이 아닥사스다 제 이십 년이었다고 할 경우, 본절의 니산 월은 아닥사스다 이십 일 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십 년이라고 표기된 까닭은, 그 당시 느헤미야가 왕의 재위 년수를, 디스리 월(양력으로 9-10)부터를 새해로 간주하는 유대 민간력을 좇아 계산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슬르(1:1)이나 본절의 니산 월은 동일한 년도에 속하는 셈이 됩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술을 따르는 일을 맡았습니다. 왕의 앞에 술이 있다는 것은 그 당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사실 페르시아의 왕들은 이와 같은 잔치를 매우 자주 베풀었었습니다(1:3 5:6). 이것은 고대 중근동 국가들의 일반적 관습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때 아닥사스다 왕은 바벨론에서의 월동을 마치고, 니산 월(양력으로 3-4 ), 즉 봄이 되었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있던 수산 궁으로 다시 돌아왔을 것입니다(1:1).

아무튼 왕이 베푼 잔치는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가 왕에게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1:11). 느헤미야는 민족적 재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서 그토록 가슴 아파하면서도 결코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요청을 올릴 가장 적절한 기회를 찾으면서 계속 하나님께 기도해 왔음이 분명합니다. 왕에게 술을 따라 드리는 어느 날입니다. 어떤 이들은 바사 왕실에 술 관원이 여럿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느헤미야가 술을 올릴 차례가 온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느헤미야의 얼굴에는 수색이 있었습니다. 이전에 수심이 없었더니는 여기의 없었더니()를 진실로()로 보고 진실로 내가 그의 면전에서 근심했었다라고 하는 해석하는 새번역도 있습니다. 왕의 앞에서를 전에(레파님)로 보고 내가 전에는 근심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해석하는 개역개정의 해석도 있습니다. 맛소라 본문을 그대로 유지하되 왕의 앞에서(레파나이우)의 왕을 비인칭으로 번역한 그것으로 보고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그 소식 앞에서 근심하지 않았다라고 개역성경처럼 해석하기도 합니다.

느헤미야가 그 전에는 항상 밝은 얼굴로 자기의 소임을 다했습니다. 술은 기쁨을 위한 것이요 술을 따르는 자는 기뻐하여야 하지만 느헤미야는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왕께서는 그의 안색이 평소와는 달리 좋지 않은 것을 보셨습니다. 왕은 안색이 좋지 않구나.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느헤미야의 기도(1:11)가 응답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사실 술 관원이 흥()을 최고조로 돋우어야 할 직책에 있으면서 도리어 연회장에서 슬픈 얼굴을 하고 다니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것을 주최한 왕에 대한 무례함으로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왕이 느헤미야에게 연민 어린 관심을 보인 것은,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결과입니다. 근심은 앞의 수색과 어근에 있어서는 동일하며, 7:3에서는 슬픔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황폐함을 왕에게 말함)

 

"2b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3.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그때에 느헤미야는 너무나도 황공하여 대답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왜 이 같은 두려워하였는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왕이 연회장내에서 느헤미야가 슬픈 얼굴을 한 것으로 인해 진노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사업이 아닥사스다의 명령에 따라 그의 즉위 초기에 중단됐음을 느헤미야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에스라 4:11, 21). 따라서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의 일로 예루살렘에 가겠노라고 아닥사스다 왕에게 요구하는 일은, 곧 아닥사스다에게 그가 이전에 내렸던 명령을 번복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는 또한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라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 부담이 뒤따랐습니다.

느헤미야는 임금님, 만수무강 하시기를 빕니다. 고대 중근동의 왕들에 대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찬사형의 인사입니다(왕상 1:31 24:4 3:9 5:10 6:6, 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사에 왕의 호감을 사려는 느헤미야의 의도가 담겨 있음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소신의 조상이 묻힌 성읍이 폐허가 되고, 성문들이 모두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듣고서, 울적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 탓이라고 아뢰었습니다.

열조의 묘실, 즉 조상의 무덤은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시 되었습니다. 특히 왕족 및 귀족들에게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따라서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라고 언급한 것은 아닥사스다 왕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외부의 침입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곳으로 간주토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닥사스다 왕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에 따라 예루살렘(4:20 )이라는 고유 지명 대신 성읍을 사용합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여기서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을 사용했다면, 아닥사스다 왕으로 하여금 자신이 이전에 사마리아 관리들의 요청에 따라 그곳에 성벽쌓는 일을 중지시켰던 사실을 쓸데없이 상기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을지도 모릅니다. 느헤미야가 유다 지파 출신으로서, 그의 조상들이 예루살렘에 살았었음 암시해줍니다(1:6).

황무하고는 말라붙다 혹은 죽이다의 뜻을 갖는 동사 하레브에서 온 형용사로서, 인간 혹은 자연의 피조물 등이 특별한 원인에 의해서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106:9 19:5 34:10 26:9 6:6). 따라서 이것은 하나니가 예루살렘의 형편을 느헤미야에게 보고할 때(1:3) 사용한 단어, 훼파되고 보다 더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있습니다. 또 소화되었사오니는 문자적으로 불에 의해서 먹혔다의 뜻으로서 1:3의 소화되었다 보다 강조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수치로 인하여 근심한 이유를 아닥사스다왕에게 아뢰었습니다.

 

(하나님께 묵도하는 느헤미야)

 

"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은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느헤미야에게 간청할 기회를 주기 위한 질문입니다. 이때 아닥사스다 왕은 이미 느헤미야를 위해 어떤 배려라도 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나서 대답하였습니다. 여기서 묵도하고는 간청하다 혹은 기도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팔랄의 재귀적 강의형으로서, 간절한 소원을 품고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로써 매어 달리는 것을 가리킵니다(삼상 1:17 왕상 8:33 왕하 19:20 20:2). 느헤미야는 자신의 소원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정확하게 전달되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전달된 자신의 소원이 왕에 의해서 호의적으로 기쁘게 열납될 수 있기를 바래서 드려졌음이 분명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요구하는 느헤미야)

 

"5.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6.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느헤미야는 왕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면, 임금님께서 소신을 좋게 여기시면, 소신의 조상이 묻혀 있는 유다의 그 성읍으로 저를 보내 주셔서, 그 성읍을 다시 세우게 하여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성벽재건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간청했던 것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공동체성 회복은 당시 왕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세상 지도자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법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은 성 중건의 부차적 요소들일 뿐입니다. 성의 건축은 구체적으로 성벽의 복구를 뜻합니다(3). 그 때에 왕후도 왕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고대 중근동 국가에서는, 왕이 국사(國事)와 관련된 귀빈을 맞이하고 있을 때는 왕후가 내전(內殿)에 있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자리였던 관계로 인하여 왕후도 왕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왕후는 관례적으로 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왕의 발()곁에서 왕의 얼굴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으며 왕과 왕비가 이런 자세로 있는 동안 신하들은 그 주변에 모여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가 본절에서 왕후가 함께 있었음을 특별히 밝히고 있습니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호의적 반응을 보인데는 왕후의 영향력 행사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왕후는 아닥사스다 왕의 유일한 정비(正妃)였던 다마스피아(Damaspia)로 봅니다.

왕은 그렇게 다녀오려면 얼마나 걸리겠느냐?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느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를 자신의 곁에서 떠나 보내기를 아쉬워했습니다. 이 문구는 동의적 대구법의 표현 방식입니다. 따라서 몇 날에 행할 길이며와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소요되는 전()기간을 묻는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이러한 반복적 표현을 써서 느헤미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왕이 기꺼이 허락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는 얼마가 걸릴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가 다시 올 날을 직접 정하지 않고, 느헤미야에게 직접 정하도록 한 것은 느헤미야에 대한 세심한 배려임이 분명합니다

 

(총독들에게 통행권 보장을 요청하는 느헤미야)

 

"7.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느헤미야는 왕에게 덧붙여서 말씀드렸습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소신이 유다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의 총독들에게 보내는 친서를 몇 통 내려 주시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총독들은 작은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 관리를 가리킵니다(8:36). 유프라테스 강 서편에는 이러한 관리들이 많았었던 것 같습니다.

에스라의 경우 와는 달리 느헤미야는 다분히 정치적인 명목으로 귀환을 요청하고 있습니다(7:10과 비교). 따라서 그는 팔레스틴으로 가는 여행 길에 페르시아의 지방 관리, 특히 사마리아 관리로부터 적대적인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자신에 대한 적대 행위를 피하기 위해서 필요 적절한 증표를 왕에게 요구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건축 자재를 요청하는 느헤미야)

 

"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또 왕실 숲을 맡아 보는 아삽에게도, 나무를 공급하라고 친서를 내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의 삼림에 대해서는 레바논의 삼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성전공사를 위하여 레바논으로부터 목재를 들여온 일이 있었습니다.(왕상 5:6 3:7) 예루살렘 성벽을 완전히 새로이 복구하기 위해서(3) 필요한 막대한 양의 목재는 레바논 산지를 제외하고는, 적당한 조달처가 없었습니다. 건축용으로 적절한 나무는 오직 레바논 산지에서 벌목되는 백향목뿐입니다. 느헤미야가 그 나무로 성전 옆에 있는 성채 문짝도 짜고, 성벽도 쌓고, 소신이 살 집도 짓게 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영문은 성전 북쪽에 위치 했었던 요새 혹은 망대입니다.

하나넬 망대(3:1)는 바로 이것의 한 부분으로 추측됩니다. 이곳은 성전의 보호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후대에 들어서서는, 바로 이 자리에 헤롯대왕에 의해서 안토니아 영문이 세워졌었습니다. 성곽 건축에 목재가 직접적인 재료로 사용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됩니다. 다만 성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필요하였을 것이며 성곽에 속한 여러 문()을 세우는 데 필수 불가결하였을 것입니다(3:3, 6). 아무튼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 목재가 성곽 건축과 관련해서 사용되었습니다.

느헤미야의 거할 집은 문자적으로 내가 들어 갈 수 있는 한 집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거할이 특정한 임무의 수행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다는 점(대상 12:17, 23, 38 16:33 19:3)에서 볼 때, 여기의 집은 총독의 관저로 사용할 처소를 의미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형제 하나니(1:2)와 더블어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됐을때 머무를 처소에 대해서도 상의를 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집을 수리해서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왕의 질문(4)에 대해 이처럼 즉각적으로 필요한 것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아닥사스다왕이 수산궁에 없는 동안(1:1) 하나님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1:4 - 11) 그는 그 성벽 재건을 위한 구체적 계획까지 세워 놓았습니다.그의 하나님이 선하신 손길로 잘 보살펴 주셔서, 왕이 그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왕이 강 서쪽 총독에게 조서를 보냄)

 

"9.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9절의 내용과 왕의 허락 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적 공백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요세푸스는 그 기간을 무려 5년으로 잡습니다. 그러나 몇 달 간의 기도(2:1)와 안타까운 마음의 간청을 했던 느헤미야가 5년씩이나 참고 기다렸으리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극히 짧은 기간 내에 페르시아를 떠났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장교들과 기병대를 딸려 보내어, 그와 함께 가게 하였습니다. 이 같은 모습은, 페르시아 군대의 호위를 거절했던 에스라의 그것과는 분명하게 대조됩니다(8:22) 그렇가도 느헤미야가 팔레스틴으로의 귀환 길에 폐르시아 군대를 대동한 것은 그가 에스라보다 불신앙적이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느헤미야의 역할이 에스라와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총독이라는 자격(5:14)으로 예루살렘에 간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율법 교육을 목표로 했던 에스라의 신앙적 차원의 여행과는 표면적으로는 달랐습니다(7:10).

틀림없이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가 자신의 술관원이라는 특별한 신분의 소유자임을 감안하여 부관을 보냈을 것입니다. 유다 지역의 총독이라는 중대한 직분을 부여받은 자라는 점을 십분 감안하여 호위병들을 딸려 보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길을 떠나,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의 총독들에게로 가서, 왕의 친서를 전하였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근심함)

 

"10.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10절과 같은 이방인들의 반응은, 성전 재건 사업에의 참여 요청이 거부된 사건(4:1-6)이 있은 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냉전 상태가 매우 심화되었음을 잘 보여 줍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이 우선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산발랏이 사마리아의 총독으로서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문서에 나타나는 두 아들의 이름에 공통적으로 여호와를 뜻하는 어미(語尾)가 달려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대의 대제사장 가문과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다는 점(13:28)에서, 이들은 나름대로 여호와를 섬겼던 자들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이들의 종교는 지극히 혼합주의적이었기 때문에(4:1, 2)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지녔던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호론은 윗 벨호론과 아랫 벨호론(16:3, 5)중 어느 하나를 의미합니다. 이곳은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산발랏은 바벨론식 이름으로서, (月神)이 생명을 주신다의 뜻입니다 종노릇을 하던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도 이 소식이 들어갔습니다. 여기의 종 신하 혹은 부하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비야는 산발랏의 휘하에 있던 인물이었던 셈이 됩니다(6:17, 18).

암몬 사람은 반드시 도비야가 암몬 지역 출신이었거나 혹은 암몬 땅에 살고 있었음을 의미치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도비야는 대제사장과 친밀하게 연락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아 자신을 여호와를 섬기는 자로 자처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13:4), 암몬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선하심이라는 의미를 갖는 유대식 도비야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가능성은 다소 희박합니다. 다만 도비야의 조상이 암몬 사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의 형편을 좋게 하려고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몹시 근심하였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총독의 이같은 반응은 성벽재건의 방해 공작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에 따른 두려움입니다. 예루살렘의 부흥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가 유다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을 상실할 가능성에 따른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사탄에게는 큰 근심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밤에 은밀한 순찰)

 

"11.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12.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기에서 사흘 동안 쉬고 났습니다. 느헤미야는 오랜 여행에 따른 심신의 피로를 풀고자 하였습니다. 그 동안 예루살렘의 정확한 상황을 청취하고자 하였습니다. 도모하려는 사업의 성공을 위해 사흘 동안 기도하였습니다. 이 같은 모습은 에스라에게서도 발견됩니다(에스 8:15, 32).

느혜미야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예루살렘에서 일하도록 하신 것을, 그는 그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그는 느헤미야 자신의 성벽 재건 계획이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알려질 경우 그 사업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심각한 난관에 봉착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 대적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해 오지 못하도록 은밀히 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심지어 자신의 동족에게까지 말하지 아니한 까닭은, 그들의 상당수가 산발랏 및 도비야와 결혼 등 이모 저모로 인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6:18 13:28).

밤에 수행원을 몇 명 데리고 순찰을 나섰습니다. 그에게 짐승이라고는, 그가 탄 것밖에 없었습니다. 간접적인 보고로만 들은 예루살렘의 형편을 직접 확인 파악하고자 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밤에 순찰한 것도 자신의 이런 확인 활동이 발랏과 도비야와 내통하고 있던 유대인에 의해서 감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의 두어 사람은 문자적으로 소수를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느헤미야의 형제 하나니등을 가리킬 것입니다(1:2). 오직 느헤미야만이 짐승을 탄 것은, 최대한으로 대적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짐승은 일반적으로는 말과 나귀 모두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말은 콧소리를 심하게 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기서 느헤미야가 탄 짐승은 나귀였을 것입니다.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은 불탄 현실 확인함)

 

“13.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더라

 

밤에 그는 골짜기 문을 나섰습니다. 여기의 골짜기 문은 예루살롑의 남서쪽에 위치한 힌놈의 골짜기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한 문()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하필 이 문을 택한 이유는 그 지경이 가장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용 샘(용정)을 지나 거름 문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 성벽을 살펴보니, 성벽은 다 허물어지고, 문들도 모두 불에 탄 채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용정으로는 문자적으로 용정의 앞쪽으로입니다. 이 용정은 힌놈의 꼴짜기와 기드론 계곡의 합류점에서 남쪽으로 약 210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욥의 우물입니다. 분문(똥문)은 골짜기 문에서 약 450m, 1천 규빗의 거리에 있었습니다(3:13). 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의 최남단에 위치했으며, 예루살렘에서 나온 온갖 쓰레기, 심지어는 성전의 희생 제사 때 나온 짐승의 똥까지 이문을 통해서 힌놈의 골짜기에 버려졌었습니다(7:31, 32). 느헤미야가 직접 확인한 상황은 하나니의 보고 내용과 동일하게 섬문은 무너지고 성벽은 불탔습니다(1:3).

 

(은밀성의 유지하는 느헤미야)

 

"14. 앞으로 나아가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15. 그 밤에 시내를 따라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본 후에 돌아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 돌아왔으나 14. 앞으로 나아가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15. 그 밤에 시내를 따라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본 후에 돌아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 돌아왔으나16.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족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아니하다가

 

느헤미야는 앞으로 나갔습니다. 우측, 즉 동쪽으로 기드론 골짜기를 내려다 보면서 북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샘 문과 왕의 연못에 이르렀습니다. 샘문은 분문에서 북쪽으로 대략 120m 정도에 위치했으며 그 바로 앞에는 실로암못이 있었습니다. 왕의 못은 3:15에서는 셀라 못으로 지칭되고 있는 실로암 못입니다. 그 때에는, 그가 탄 짐승이 더 나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곳이 무너져내린 성벽의 잔해 및 온갖 쓰레기 등으로 메워져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발굴 작업을 통하여 이 기록이 실제 사실이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그 날 밤에 느헤미야는 계곡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느헤미야가 나귀에서 내려서 걸어 올라간 것을 가리킵니다. 그가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기드론 시내 쪽으로 내려간 후 그 시내를 따라서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가면서, 성벽을 둘러보고, 다시 골짜기 문을 지나 되돌아왔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북쪽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본절에는 생략되었으나 느헤미야가 성벽 탐사를 계속 진행하여 끝까지 다 돌았던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성벽의 북쪽과 북서쪽은 그다지 심각하게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절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느헤미야가 성벽의 북동쪽 모퉁이까지 살펴봄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중도에서 돌아온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무난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북쪽 성벽 지역에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 느헤미야 일행이 눈에 뛸 가능성이 컸으리라는 추측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조사 활동이 이처럼 비밀리에 진행 됐던 까닭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벽 재건 계획이 누설될 가능성이 매우 큰 때문이었습니다(12절 주석 참조). 그 때에 느헤미야가 유다 사람들이나, 제사장들이나, 귀족들이나, 관리들이나, 그 밖에 직책을 가진 어느 누구에게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관리들은, 그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무엇을 하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방백들은 광범위하게 사용된 단어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그의미를 정의하기 곤란합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회중들에 의해서 선출된 백성의 대표들로 봅니다. 이 단어는 스9:2에서는 두목이라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방백보다는 한 계급 낮은 신분으로 묘사됩니다(에스 9:2). 이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유다 사람 제사장 귀인 방백은 당시 유다 공동체를 구성했던 대표적인 네 계층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합니다. 여기의 유다 사람은 반드시 유다 지파 사람만을 의미치 않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유다 지파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인구수에 있어서 가장 컸던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이처럼 표현했을 뿐입니다. 제사장은 포로 후 시대라는 그 당시 상황에서는, 행정 및 경제의 측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분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중 종교적 세력을 대표하는 신분으로 암시되는 듯합니다. 귀인은 그 문자적 의미로는 자유로운 자이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신분이었으며 또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알수 없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의 권세를 갖고 있던 신분 정도로 추측될 뿐입니다. 방백들은 제사장과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행정 분야를 관장하던 신분이었던것 같습니다. 그 외에 일하는 자들은 성벽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을 위한 성벽건축을 제안함)

 

"17.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성벽을 건축하자는 느헤미야의 발언(發言)이 암행 탐사가 있었던 때로부터 얼마의 기간이 경과한 후에 행해졌는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팔레스틴으로 돌아온 후 삼일 간 숙고할 기회를 가졌었고(11), 직접적인 자신의 조사 활동을 통해서 모든 정황을 파악했을 것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암행 탐사 그 다음 날에 이와 같은 발언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돌아보고 난 다음에, 그는 비로소 관리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환한지 3일밖에 되지 않은 느헤미야가 본토의 유대인들과 깊은 연대 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곤경은 1:3에서는 환난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성벽을 갖고 있지 못했던 예루살렘 거민들이 이방인들의 상습적인 노략으로 인해 처하게 된 어려운 상황을 가리킵니다(1:3).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문들은 불탔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읍시다. 남에게 이런 수모를 받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유다의 다른 주요 성읍들은 나름대로의 방어용 성벽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오직 유다의 심장부이자,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만 방어용 성벽이 없어 노략을 계속 당한다는 사실은 그 도시의 주민 뿐 아니라 다른 곳에 사는 백성들에까지 수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벽을 건축하는 일은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말합니다. 당신들의 영광을 위해서 성전을 건축하자고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영광을 위해서 십계명의 성벽을 건축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도우신 일을 말함)

 

"18.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헤미야는 또한 그의 하나님이 선하신 손길로 그를 잘 보살펴 주신 일을 보고하였습니다. 왕이 그에게 성벽 건축을 하도록 한 말을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 참여토륵 한 신앙적 원동력이 되었습니다(7:6).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 재건을 주저하고 있었던 현실상의 이유는 산발랏과 같은 사마리아 관리의 방해(4:7 - 16)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관리의 참소에 따른 아닥사스다 왕의 성벽재건 중지령(中止令 )등의 정치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성벽 재건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느헤미야에 대해서 아닥사스다 왕이 호의를 베풀었던 사실은 상당한 용기를 불어 넣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2-9). 이렇게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 성령의 역사를 말했더니 그들은 공사를 시작하겠다고 그에게 다짐하였고, 힘을 내어, 기꺼이 그 보람있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힘을 내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선한 일을 위하여 자신들의 손을 스스로 강하게 했다의 의미입니다(삼하 2:7). 성벽 재건 사업이 미미하기는 하지만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해줍니다(JB).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성벽 재건을 시도했었습니다(4:12).

 

(산발랏과 도비야의 협박)

 

"19.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이 일이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노릇을 하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랍 사람 게셈에게 알려졌습니다. 아라비아 사람은 앗수르 시대부터 페르시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요단 동부 지역의 지배 계급이었습니다 게셈이라는 이름은 애굽 땅에서 발견된 B. C. 5세기말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은 그릇에 그 아들 카이누와 함께 여신 한-일라트(Han-ilat)에게 헌신한 자로서 새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람어 비문에서는 게달의 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요단 동쪽 및 남쪽 지역을 다스리던 자였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게셈이 도바야와는 달리 산발랏의 휘하에 있었던 한 관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6:2에서 이 게셈이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과 함께 느헤미야에게 대면(對面) 요청을 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자명해집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로 와서 당신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요? 왕에게 반역이라도 하겠다는 것이오하면서, 그들을 업신여기고 비웃었습니다. 대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 시도를 중단시키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무기입니다. , 하나는 조롱이며 또 하나는 협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업신여기고는 마땅히 귀중히 여겨져야 할 어떤 대상을 오히려 우습게 여기는 태도를 가리킵니다(대하 30:10 22:7 17:5).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라는 질문은, 일찍이 아닥사스다 왕이 사마리아 관원들의 참소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복구사업을 중지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동체를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면 사탄은 이를 정치적인 것으로 바꾸어 우리를 박해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협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 사업은 중지령을 내렸던 아닥사스다왕의 새로운 허락과 명령에 따라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심)

 

"20.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2-절에서 느헤미야는 산발랏 등의 적대적 태도에도 블구하고 자신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사항(7-9)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의 이 같은 태도는 인간의 어떠한 훼방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을 반영합니다. 아울러 산발랏 일당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느헤미야에게 허락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느헤미야가 이미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산발랏 일당은 도리어 왕의 명령을 무시하면서까지 성벽 재건을 방해하고자 기를 썼던 셈이 됩니다. 느헤미야가 나서서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꼭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같은 느헤미야의 확신에 찬 응답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궁극적으로 보호하고 형통케 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던 실제적 체험(1:11)에 근거하였습니다.

성벽을 다시 쌓는 일은 그분의 종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당신들이 차지할 몫이 없다고 말합니다. 주장할 권리도 기억할 만한 전통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의 문제에 대해서 간섭할 하등의 명분이나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4:2, 3). 여기서 기업은 이스라엘의 땅 분배와 관련해서 사용된 법정적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용어는 자신의 반역 의사를 표명할 때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삼하20:1 왕상 12:16) 볼 때, 여기의 기업도 없고는 산발랏 등이 이스라엘 백성의 일에 절대적으로 참여할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입니다. 권리는 행정 구역으로서의 유다에 대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있는 법적 권리를 가리킵니다. 앞의 기업이 시민권의 문제와 관련 있다면, 이것은 행정권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권리는 종교적 의식에의 참여권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느헤미야 2장 강해 영광스러운 공동체 세우기

느헤미야 21-느헤미야 220

요절 느헤미야 217.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느헤미야 2장 강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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