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컨텐츠 바로가기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느헤미야 1장 강해 공동체의 수치를 슬퍼하는 기도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4-11-01 00:00:00
조회수 : 3,861

문제지풀이(3)

    icon1.hwp  (15.00KB)

    icon2.hwp  (15.00KB)

    icon2.hwp  (0.33MB)

느헤미야 1장 강해 공동체의 수치를 슬퍼하는 기도

느혜미야 11-11

요절 느헤미야 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에스라서에서 13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입니다. 예루살렘은 성벽이 허물어져 적의 침략을 받고 백성은 고통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소식을 듣고 기도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삼차 귀환이 이루어지고 성벽을 재건합니다. 모세의 언약을 갱신합니다. 성벽을 재건하여 이스라엘의 공동체성을 회복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하여 공동체성 회복을 위하여 역사를 움직이는 기도를 배웁니다.

 

(수산궁에 있는 느혜미야)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가 한 말입니다. 여기에 예언서와 달리 여호와의 말씀이란 말이 없습니다. 예언서들은, 철저하게 예언적 특성을 갖고 있는 메시지의 전달이라는 특수에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느헤미야서는 느혜미야에 의해서 이 말씀이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에스라서의 속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느헤미야에 의해 독립적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하가랴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 희귀한 이름으로서, 그 의미는 여호와의 흑암입니다.

느헤미야는 포로 전후기를 막론하고 대단히 흔했던 이름으로서, ‘여호와께서 위로하신다입니다. 바로 이 이름의 축약형이 나훔입니다(1:1).

아닥사스다왕 이십년 기슬르월, 그가 도성 수산에 있을 때입니다.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 년은 B.C. 445년을 가리킵니다. 기슬르월은 태양력으로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에 해당되는 달()입니다. 이때 아닥사스다 왕은 당시 느헤미야가 머물러 있었던 수산 궁에 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왕들은 대개 겨울에는 바벨론을, 여름에는 메대의 악메다를 휴양지 삼아 거기서 통치하였기 때문입니다. 봄이나 가을이 되어야 느헤미야가 있는 수산 궁로 돌아왔습니다(6:2 1:2).

느헤미야가 고국으로부터의 급박한 소식을 접하고서도(2, 3) 즉시 왕에게 부탁하며 귀국할 수 없었던 이유도 왕이 바벨론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느헤미야가 자신의 괴로운 심정의 자초지종을 아뢰고서 귀환 허가를 받은 것은 니산월(2:1), B.C. 4443, 4월에 해당되는 때였습니다. 4개월이 흐른 후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 느혜미야)

 

“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느헤미야의 형제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유다에서 왔습니다. 하나니는 느헤미야의 친동생인 것으로 추정됩니다(7:1, 2). 나중에 그는 느헤미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느헤미야를 돕는 관리로 임명되었습니다(7:2).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는 은혜로우셨다이며, 하나니아라는 이름의 축약형입니다.

이들이 하나니를 우두머리로 해서 수산궁 와서 예루살렘의 급박한 상황을 페르시아 왕궁의 고위직에 있었던 느헤미야에게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니는 페르시아나 바벨론에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니가 자신의 친형 느헤미야와 헤어져 에스라를 따라 B.C. 458년에 팔레스틴으로의 귀환 대열에 합류 했었음을 암시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리로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곳에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은 어떠한지, 예루살렘의 형편은 어떠한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느헤미야가 고국 소식에 목말라, 급박한 상황을 현장에서 체험하고 그것을 알리려고 급히 찾아온 동생의 일행이 보고를 하기도 전에 먼저 질문하였습니다. 형편을 물은즉은 구걸하다, 간청하다, 질문하다 등의 뜻으로서 자신에게 필요한 어떤 것을 간절하게 요구하는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됩니다(3:22 5:25 왕상 3:1 30:6 )

 

(예루살렘의 황폐한 소식을 전하는 하나니)

 

“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그들이 느헤미야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하다고 합니다. 이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말합니다(2:1). 유대인들은 포로 생활이란 커다란 수치였으므로,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은 곧 수치를 면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9:13 참조).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업신여김을 받고 수치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이 성벽이 무너지고 숫자가 적고 무장을 갖추지 못해서 이방인들의 노략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가난하여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가 고레스나 다리오 때에 이미 페르시아의 독립된 한 속령으로 인정받았으며, 학개가 스룹바벨을 유다 총독으로 지칭하였습니다.(1:1).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다고 합니다. B.C.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황폐케 되었습니다. 에스라 4:7- 24에 기록된 르훔과 심새등이 성전 건축을 훼방하였습니다. 예루살렘 함락은 본문 시점로부터 무려 140여 년 이전에 발생한 오래된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본문의 정황은 최근에 발생한 충격적인 요소가 전달된 것으로 보면 성전 건축 훼방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에스라서와 본서 사이의 공백 기간인 12년 사이에 몇 차례의 성벽 재건이 시도되었으나 그때마다 대적들의 방해로 훼방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반역을 한다고 모함하고 아닥사스다 왕은 이를 인정하였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느혜미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 말을 듣고서, 느헤미야는 주저앉아서 울었습니다. 예루살렘 거민들이 성벽없이 살고 있음으로 해서 주변 민족들로부터 여러 가지 면에서 괴로움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울었습니다. 유다 백성의 죄로 인하여 삼 주 동안 슬퍼했던 다니엘의 모습과 유사합니다(10:2). 골리앗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모욕 받는 것을 보고 분노한 다윗의 마음과도 유사합니다.

느헤미야는 바사 제국의 고관으로서 누리는 현세적 영화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광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민족의 환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자기 자신의 일처럼 고뇌하였습니다. 그는 슬픔에 잠긴 채로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며 금식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간절함을 표시로 금식하였습니다. 에스라(10:6), 에스더(4:16), 다니엘(9:3), 사무엘(삼상 7:5, 6)들도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께 기도)

 

“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주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페르시아인들이 자신들의 신 오르무즈드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1:2). 느헤미야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철두철미한 여호와 신앙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위대하고 두려우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기서 크고는 큰, 위대한, 힘센 등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로서 이 말이 인격에 적용될 때, 그 인격의 존귀성 혹은 다른 사물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의미합니다.(57:10 71:19 76:1). 주를 사랑하는 이들 곧 주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이들과 세운 언약을 지키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는 주의 계명을 지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구체적 방식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십계명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언약은 언약 상대자에게 베푸는 긍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적 사랑을 포기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를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르도록 사랑하십니다. 이 같은 사상은 신명기등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5:10 7:9).

느헤미야는 언약에 기초하여 이제 주님을 사랑하니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의 주는 강력한 능력의 소유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호칭입니다. 느헤미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존재들 위에 뛰어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단 9:4의 기도 내용과 내용상 유사합니다. 아마 느헤미야는 B.C. 535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니엘서에 매우 익숙했던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니 기도를 들어달라고 기도합니다.

 

(느헤미야의 회개 기도)

 

“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이제, 이 종 느헤미야가 밤낮 주 앞에서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드리는 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살펴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신분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원문에 있는 하욤 즉 지금 혹은 오늘이라는 단어가 탈락되어 있습니다. 이 하욤은 느헤미야가 그날부터 당장 기도에 돌입했음을 말해줍니다.

그의 주야를 막론한 기도는, 그 당시 왕이 수산궁에 없었던 관계로 왕이 그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관한 비보(悲報)를 접한 것이 양력으로 11월 중순 경(1)이고, 아닥사스다왕이 바벨론의 휴양지에서 3월 중순 경에 돌아왔다고 한다면(1) 느헤미야의 특별 기도는 약 4개월 동안 계속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를 거역하는 죄를 지은 것을 자복합니다. 그는 저와 저의 집안까지도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주로 포로로 끌려가기 이전의 범죄 행위를 자복합니다(8, 9). 에스라가 그랬듯이(9:6, 7), 느헤미야도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죄인양 생각하고 자복합니다. 그는 시공간(視空間)을 막론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철저한 연대 의식을 소유하고 회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고 귀를 기울여 달라고 솔로몬처럼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솔로몬은 일찍이 만일 백성들이 범죄하여 타국 땅으로 끌려간다고 해도 그들이 회개하는 기도를 하면 그것을 응답하여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게끔 해달라고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왕상 8:46 - 53 대하 6:36 - 40). 특히 솔로몬은 회개하는 백성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관련해서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했었습니다(왕상 8:52 대하 6:40).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 하시기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대하 7:15)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느헤미야는 그와 같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애원하고 있습니다. 결국 느헤미야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마치 포로 시대의 상황으로 보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 등지에서 여전히 귀환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같이 기도합니다. 예루살렘도 포로로 끌려갔을 당시의 상황에서 대부분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나의 아비집은 느혜미야가 다윗의 직계 후손이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온 이스라엘과 함께 범죄의 자리에 동참했던 자들로서의 느헤미야의 조상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주께 매우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주의 종 모세를 시키시어, 우리에게 내리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우리가 지키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계명과 율례 그리고 규례는 동일하게 모세 율법을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입니다.(119:15, 16). 이와 같은 동의어의 삼중적 반복(9:13, 14)은 전반부의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와 뚜렷이 대비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여기서 동의어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중의 죄를 범했다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수치를 당하는 것은 죄때문입니다.

물론 위의 세 단어가 모세 율법의 각기 다른 세 가지 측면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계명은 언약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요구된 특별 조건인 십계명으로(7:11), 율례는 반복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규정된 것(7:10)으로, 그리고 규례는 자신의 신분에 합당한 행동 규범 혹은 선악의 분별을 가능케 해주는 기준(7:10)입니다. 이 단어들이 철저하게 율법의 각기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의 모든 국면들이 이 세 가지에 모두 내포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에서는 다른 역사서와는 달리 모세 율법이 강조되는 특징을 보여줍니다(1:8 8:1 9:14 10:29 13:1 3:2 6:18 7:6).

 

(말씀에 기초하여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함)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주의 종 모세를 시키시어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종은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대리자였음(18:15)을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모세 율법은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에 의해서 반드시 지켜져야만 했습니다.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흩을 것이요 같은 말씀은 레위기 26:27 - 45과 신명기 30:1 - 5을 해석적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범죄하는 것은 배은망덕(背恩忘德)하게 행동하거나 불충성하게 행동하다의 뜻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은혜를 잊고 다른 신을 찾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주께서 우리를 여러 나라에 흩어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국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일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멸망당하는 와중에서 또 다른 제 삼국으로 피신한 일도 포함됩니다.(왕하 25:26 42:10 - 22 43:1 - 13) 따라서 열국은 앗수르, 바벨론, 애굽 등을 가리킵니다. 흩을 것이요라는 말의 주된 초점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가 되게 하신 역사적 사실에 맞추어져 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면, 쫓겨난 우리가 하늘 끝에 가 있을지라도, 주께서 거기에서 우리를 한데 모아서, 주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하신 그 말씀을, 이제 기억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레위기 26:27 - 45과 신명기 29:14 - 30:10까지의 기록을 축약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돌아와서는 죄악된 마음에서의 돌이킴, 곧 회개를 의미합니다(7:12 8:6). 회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의 축복된 상태로 회복되기 위한 필수 요건이었습니다(4:30 30:2 왕상 8:33 대하 6:243:10).

여기서 쫓긴 자는 양을 몰거나(22:1) 메뚜기 떼를 쫓아내는 행동(2:20)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는 말입니다. 불법한 행동으로 인하여 벌을 받아 원래 있었던 곳으로 부터 멀리 추방된 사람을 가리킵니다(삼하 14:13 16:3 30:17). 특히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중 에스라서에 특별히 많이 나오는 사로잡힌 자(2:1 3:8 4:1)와 동의어로서 사용됩니다. 포로된 이스라엘은 회개할 때 다시 본토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무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27:13 34:4, 16: 4:6 3:19).

하늘 끝은 가장 먼 곳을 의미합니다.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은12:5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서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름은 곧 한 인물의 전인격 그 자체를 의미했다고 하는 점에서, 내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두려고는 임시로 거주하다의 뜻에서 나온 말로 거처로서의 뜻을 갖습니다. 성막이라는 단어가 이와 동일한 어근을 갖는 동족어입니다. ‘택한은 대개 종교적인 목적에 따라 특별히 하나를 구별시키는 행위를 가리킵니다.(17:5 왕상 11:13 105:26 2:23), 곳은 성경에서는 대개 종교적인 이유 및 목적 때문에 구별된 경배 처소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12:14 9:27 삼상 5:11 왕상 8:7 대상 15:1). 느헤미야는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은 주의 백성임)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께서 크신 힘과 강한 팔로 건져내신 주의 종이며, 주의 백성입니다. 구속하신은 대신 값을 지불하거나 그에 상당하는 대체물을 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던 한 개인에 관한 소유권을 넘겨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종은 문자적으로 당신의 종이고, 주의 백성도 당신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소유임을 보여주는 단어들입니다. 언약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은 신분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신 때문이었습니다. 큰 권능과 강한 손이라는 표현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음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나옵니다(6:19:11 3:244:345:15 7:89:26,29).

느헤미야는 바로 이와 같은 문구의 사용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과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동일선상에 올려놓습니다. 출애굽 때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이전의 형편으로 완전히 회복될 것에 대한 느헤미야의 간절한 염원을 반영합니다. 사실 에스라는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을 제2의 출애굽으로 암시했으며(1:11 주석 참조). 특히 훨씬 후기의 쿰란 공동체에서는 그것을 새로운 출애굽으로 단언하였습니다.

 

(은혜를 구하는 느헤미야)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주님, 종의 간구를 들어달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주의 종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은 팔레스틴에서 느헤미야를 찾아온 하나니 일행을 가리킵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니 일행을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의 형편을 느헤미야에게 전달하기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썼던 때문입니다. 그들은 온갖 위해(危害)요소가 도사리고 있었던(8:21, 22, 31) 1,400Km의 길을 자청해서 행()하여 느헤미야에게 왔습니다. 이들은 팔레스틴 본토의 경건한 유대인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이제 주의 종이 하는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여 주시고 왕에게 자비를 입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형통하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이 시작한 일을 그 과정과 결과까지 성공적으로 이끄시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입니다(24:21, 40,56 왕상22:12). 이 단어는 성경에서 항상 그 주어가 하나님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는 느헤미야의 소청이 왕에 의해서 기꺼이 받아 들여지도록 기도하는 것(2:3 - 6 )입니다.

느헤미야가 중요 직위에 있었으면서도 이 같은 염려를 한 까닭은, 그가 페르시아왕들이 어떤 때는 신하들에게 호의를 베풀다가도 곧 그 태도를 급변시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왕에게 소청하러 나갔을 경우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왔음을 이유로 왕이 진노하는 것(4:11)에서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자신이 왕에게 소청을 했을 경우 그것을 불쾌히 여겨서 심지어는 선대(先代)의 왕들이 내린 조서까지도 무효로 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이 사람입니다. 이것은 세상 나라의 왕에 대한 느헤미야의 시각을 잘 반영해 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는 세상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는 피정복민들의 생과 사를 좌우할 수 있는등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특별한 인물이었던 아닥사스다 왕을, 신앙적인 시각에 따라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으로서만 보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팔레스틴으로 가고 못가고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렸다고 보았습니다.

그 때에 느헤미야는 왕에게 술잔을 받들어 올리는 일을 맡아 보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여기서 이처럼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은 앞의 이 사람이 아닥사스다 왕임을 시사해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왕에게 소청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아무튼 느헤미야가 하나니 일행이 팔레스틴으로부터 오기 전에 이미 술 관원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수산 궁에 있었다는(1) 점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회복을 위해서, 우리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슬퍼하는 기도,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말씀에 기초하여 현실을 인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투쟁하면서 기도해야합니다. 성벽은 바로 세상과 교회의 경계입니다. 성벽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마음 아파하며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가 기독교 공동체를 영화롭게 하고 우리 교회 공동체를 영화롭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느헤미야 1장 강해 공동체의 수치를 슬퍼하는 기도

느혜미야 11-11

요절 느헤미야 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 1장 강해 끝.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908 [느헤미야] 느헤미야 4장 강해 외부의 공격을 이기는 법 오요한 2014-11-04
907 [느헤미야] 느헤미야 3장 강해 다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 오요한 2014-11-04
906 [느헤미야] 느헤미야 2장 강해 영광스러운 공동체 세우기 오요한 2014-11-01
905 [느헤미야] 느헤미야 1장 강해 공동체의 수치를 슬퍼하는 기도 오요한 2014-11-01
904 [스바냐] 스바냐 3장 강해 이스라엘을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오요한 2014-10-25
903 [스바냐] 스바냐 2장 강해 심판을 피하는 길 오요한 2014-10-25
902 [스바냐] 스바냐 1장 강해 심판으로 요시야를 도우시는 하나님 오요한 2014-10-25
901 [나훔] 나훔 3장 강해 니느웨를 심판하시는 이유 오요한 2014-10-20
900 [나훔] 나훔 2장 강해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면 오요한 2014-10-20
899 [나훔] 나훔 1장 강해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 오요한 2014-10-20
1 2 3 4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