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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느헤미야 12장 강해 성벽 봉헌식의 기쁨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4-11-18 00:00:00
조회수 : 4,372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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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2장 강해 성벽 봉헌식의 기쁨

말씀 느헤미야 121-느헤미야 1247

느헤미야 1243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시종일관과 시종여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까지 일을 완수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벽을 시작할 때와 마칠 때 감사합니다.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인구 재정착 작업을 마친후 (11), 먼저 이스라엘의 존재 기반인 여호와 신앙의 종교적 제도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의 가계를 조사합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따라온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

 

“1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돌아온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이러하니라 제사장들은 스라야와 예레미야와 에스라와 2 아마랴와 말룩과 핫두스와3 스가냐와 6 스마야와 요야립과 여다야와 7 살루와 아목과 힐기야와 여다야니 이상은 예수아 때에 제사장들과 그들의 형제의 지도자들이었느니라르훔과 므레못과 4 잇도와 긴느도이와 아비야와 5 미야민과 마아댜와 빌가와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따라서 함께 돌아온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룹바벨과 및 예수아는 바벨론으로 부터의 제1차 귀환을 주도했던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였습니다(2:2). 따라서 1절부터 7절까지에 언급되는 제사장 가문은 모두 일차 귀환 대열에 속했었습니다.

1-7절 외에 12-21절과(느헤미야 초기시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 10:2-8(느헤미야후기 시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에도 제사장 목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라야는 대상 9:11에는 아사랴로 나옵니다. 에스라는 에스라서의 저자인 에스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학자들은 이 에스라가 10:2의 아사랴의 축약형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마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의 뜻입니다. 말룩은 14절의 말루기와 동일한 듯합니다. 통치하는의 뜻입니다. 핫두스는 대적자의 뜻입니다. 스가냐는 14절 및 10:4과 같이 스바냐로 고쳐야 할 것입니다. 르훔은 하림의 오류로 추정됩니다(10:52:39). 므레못은 15절의 므라욧의 바른 이름입니다. 높은 곳들의 의미입니다. 잇도는 10:5의 오바댜의 바른 이름입니다. 보다 후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12-21)에도 잇도(16)로 나오는 것을 보면 오바댜는 필사자의 잘못인 것 같습니다. 긴느도이는 긴느돈의 오류인 듯합니다(1610:6). 침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바로 아바야 제사장 가문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1:5). 미야민은 운이 좋은의 뜻입니다. 마아댜는17절의 모아댜와 동일한 듯합니다(10:8). 여호와의 장식품의 뜻입니다. 빌가는 10:8의 빌개와 동일합니다. 스마야는 18절과 10:8에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요야립 앞에만 그리고의 의미를 갖는 접속사 와우가 있습니다. 본서의 저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앞의 스마야까지와 여기의 요야립부터를 확연히 구분하려고 시도합니다(19). 추측컨대 이는 요야립 가문부터, 어떤 원인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언약에 인을 치지 못했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요야립 이하의 가문명들이 10장의 인친 가문의 명단 중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로써 어느 정도 뒷받침됩니다. 요야립은 여호와께서 아심의 뜻입니다. 여다야는 여다야라고 불리워지던 대제사장 가문의 일족(一族)입니다(2:36). 여다야는 여호와께서 알고 계시다의 의미입니다. 살루는 20절의 살래와 동일한 듯합니다. 무게를 단의 의미입니다. 아목은 20절에서도 다시 언급됩니다. 깊은의 의미입니다. 힐기야는 여호와의 분깃의 뜻입니다. 여다야는 6절의 여다야처럼 대제사장 가문 출신일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는 제사장들이 24반차로 구분되어 번갈아가며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규정된 바 있습니다.(대상 24:1-19), 그러나 1-7절에 열거된 제사장들의 수효는 22명입니다. 그렇다고 느헤미야 시대에 와서 22반차로 의도적으로 재구성했으리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따라서 1-7절에서는 24반차 중 2개의 명단이 생략되었다고 봅니다.

 

(대제사장 예수아의 자손들)

 

“8 레위 사람들은 예수아와 빈누이와 갓미엘과 세레뱌와 유다와 맛다냐니 이 맛다냐는 그의 형제와 함께 찬송하는 일을 맡았고 9 또 그들의 형제 박부갸와 운노는 직무를 따라 그들의 맞은편에 있으며

 

레위 사람은 예수아와 빈누이와 갓미엘과 세레뱌와 유다와 맛다냐이고 그 가운데서 맛다냐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찬양대를 맡았습니다. 그들의 동료 박부갸와 운노는 예배를 드릴 때에 그들과 마주 보고 섰습니다. 8절의 명단들은 가계명으로 봄이 타당할 것입니다. 비록 일차 귀환 당시에는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밖에 없었지만(2:40) 약 백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레위 사람들의 인구가 증가하였습니다. 에스라가 레위 사람들을 바벨론에서 데려왔기(8:15-20) 때문에 이처럼 가문의 숫자도 늘어났을 것입니다.

 

(포로시대에 활동했던 제사장)

 

“10 예수아는 요야김을 낳고 요야김은 엘리아십을 낳고 엘리아십은 요야다를 낳고 11 요야다는 요나단을 낳고 요나단은 얏두아를 낳았느니라

 

10절과 11 절은 포로 귀환 시대에 활동했던 대제사장의 계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대상 6:3-15에 나타난 아론으로 부터 바벨론 포로 때까지의 대제사장 족보의 연장입니다. 물론 포로 기간, B.C. 586년부터 B.C. 538년까지는 대제사장이 없었습니다. 예수아는 스룹바벨과 함께 최초로 귀환했던 인물입니다(2:2). 그는 B.C. 520년 경의 성전 재건 공사를 재개하는 데 참여했음이 분명합니다(5:2). 그러나 예수아가 성전이 준공될 때까지 살아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8:15-18). 요야김은 예수아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 역할을 했습니다(12, 26). 요야김은 여호와께서 일으키실 것이다의 뜻입니다. 엘리아십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귀환한 해인 B.C.458년 이전에 이미 대제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10:6).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적극 방해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내통하는 등의 이적(利敵) 행위를 하기도 했습니다(13:4, 5, 28). 그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이키실 것이다입니다. 요야다는 느헤미야의 후기 시대에 대제사장으로 활동했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 하나는 사마리아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됐었습니다(1328).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알고 계신다입니다.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유월절 기략이라는 유대 문헌에 따르면 요야다의 재직 기간은 삼십육 년으로 되어있습니다. 요나단은 22, 23절의 요하난과 동일 인물인 듯합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요하난이 페르시아 총독 바고아스의 환심을 사서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던 동생 예수아를 살해하였던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요하난은 애굽에서 발견된 B.C. 410년 경의 파피루스 문서에서도 그 이름이 언급됩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의 총애하심입니다. 얏두아는 요세푸스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얏두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당시의 대제사장입니다. 그렇다면, 알렉산더의 예루살렘 입성이 B.C.332년이었으므로, 본서가 B.C.5세기 후반 (421-400년 경)에 기록됐었다는 입장은 손상을 입게 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10, 11절의 족보가 후대의 어떤 인물에 의해 가필(加筆)되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합니다.

 

(제사장의 족장들)

 

“12 요야김 때에 제사장, 족장 된 자는 스라야 족속에는 므라야요 예레미야 족속에는 하나냐요 13 에스라 족속에는 므술람이요 아마랴 족속에는 여호하난이요14 말루기 족속에는 요나단이요 스바냐 족속에는 요셉이요 15 하림 족속에는 아드나요 므라욧 족속에는 헬개요16 잇도 족속에는 스가랴요 긴느돈 족속에는 므술람이요 17 아비야 족속에는 시그리요 미냐민 곧 모아댜 족속에는 빌대요18 빌가 족속에는 삼무아요 스마야 족속에는 여호나단이요 19 요야립 족속에는 맛드내요 여다야 족속에는 웃시요 20 살래 족속에는 갈래요 아목 족속에는 에벨이요21 힐기야 족속에는 하사뱌요 여다야 족속에는 느다넬이었느니라스가랴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

 

여기서부터 21절까지에서는 제사장 21반열의 이름 각각과 그 각각의 우두머리 이름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에 제사장 체계가 새로 정비되고, 성전 제사가 엄정히 드려졌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사실 요야김이 대제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시기는, 성전이 재건된(B.C. 516) 직후였으므로 당연히 성전 제사가 철저히 드려졌을 것입니다. 요야김 때는 에스라나 느혜미야가 귀환하기 얼마 전의 시기를 가리킬 것입니다. 분명치는 않지만 예수아의 대제사장 재직이 B.C. 490년까지였다면. 요야김은 에스라의 도착(B. C. 458)직전까지 대제사장에 있었을 것입니다. 므라야는 모반의 뜻입니다.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은총을 베푸셨다의 뜻입니다. 므술람은 동맹한의 뜻입니다. 여호하난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심의 뜻입니다. 말루기 족속은 2절의 말룩과 동일합니다. 요나단은 여호와께서 주셨다의 뜻입니다. 요셉은 그가 더할 것이다의 뜻입니다. 아드나는 즐거움의 뜻입니다. 헬개는 할당된의 뜻입니다. 시그리는 기억할만한의 뜻입니다. 미냐민 곧 모아댜 족속 이 두 이름은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아마 필사자의 오류로 미냐민 족속의 우두머리 이름이 누락됐을 것입니다(5). 빌대는 구출된의 뜻입니다. 비가 족속은 5절의 빌가와 동일합니다. 심무아는 소문 혹은 풍문의 뜻입니다. 여호나단은 여호와께서 주셨다의 뜻입니다. 요야립 족속은 본 제사장 가문 명단중 유일하게 이 앞에만 그리고의 뜻인 접속사 와우가 있습니다. 그 앞의 가문과 구별하는 것입니다. 맛드내는 자유로운의 뜻입니다. 웃시는 힘센의 뜻입니다. 갈래는 경솔한의 뜻입니다. 에벨은 건너편의 뜻입니다. 하사뱌는 여호와께서 생각하셨다의 뜻입니다. 느다넬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의 뜻입니다. 21절과 23절도 10, 11절처럼 후대의 삽입인 듯합니다. 다리오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페르시아 역사상 세 명 등장합니다. 그러나 문맥상 본문의 다리오는 유다의 대제사장 얏두아와 동시대 사람인 다리오 3(B.C. 335-331)를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합니다.

 

(역대지략에 기록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

 

“22 엘리아십과 요야다와 요하난과 얏두아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이 모두 책에 기록되었고 바사 왕 다리오 때에 제사장도 책에 기록되었고 23 레위 자손의 족장들은 엘리아십의 아들 요하난 때까지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며

 

역대 지략은 여러 가지 명단과 기록을 담은 공식적인 성전 연대기로 추측됩니다. 요하난은 약B.C.400년까지 대제사장직에 있었습니다. 최후의 선지자 말라기도 바로 이 시대에 활동했었습니다.

 

(성전에서 맡은 레위인들의 임무)

 

“24 레위 족속의 지도자들은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라 그들은 그들의 형제의 맞은편25 맛다냐와 박부갸와 오바댜와 므술람과 달몬과 악굽은 다 문지기로서 순서대로 문안의 곳간을 파수하였나니 26 이상의 모든 사람들은 요사닥의 손자 예수아의 아들 요야김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 때에 있었느니라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령대로 순서를 따라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고

 

레위 사람의 우두머리는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 왕이 지시한 대로, 동료 레위 사람들과 함께 둘로 나뉘어 서로 마주 보고 서서 화답하면서,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24,25절의 레위 사람들의 명단은 개인의 이름이 아닌 가문의 이름임이 분명합니다. 하사뱌는 포로 귀환 후 생긴 레위 사람의 가문일 것입니다(8, 21). 세레뱌는 하사뱌와 마찬가지입니다. 그 형제의 맞은편에 있다는 것은 레위 성가대가 교송(交頌) 형식으로 찬양을 드렸음을 의미합니다(9절스 3:11). , 두 파트로 나뉘어 서로 마주보며 찬양하였던 셈입니다.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다윗이 신정 왕국 이라엘의 예배 체계를 신실하게 확립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용어인 듯합니다(대하 8:14). 다윗이 노래하는 자들의 반차를 정한 것은 대상 25장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맛다냐와 박부갸와 오바댜와 므술람과 달몬과 악굽은 성전 문지기입니다. 이들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각 문들에 딸린 창고를 지켰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요사닥의 손자이자 예수아의 아들인 요야김과, 총독 느헤미야와, 학자인 에스라 제사장 시대에 활동한 사람들입니다. 노래하는 자(11:17)들이 문지기기의 역활도 병행했었다는 추측은 불필요한 듯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바댜까지의 세 사람을 24절의 후미에 붙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경우, 맛다냐와 박부갸 사이에만 유일하게 있는 접속사 와우를 오바댜와 므술람 사이로 옮기면 노래하는 자와 문지기 사이의 구별이 뚜렷해집니다. 6절의 요야립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면, 이 같은 구별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므술람은 대상 9:17절 및 에스라 2:42 등을 볼때, 살룸의 오류임이 분명합니다. 문지기들이 지켰던 곳간은 성전에 부속되어 있던 문안의 곳간들입니다(10:38, 39). 요사닥은 바벨론에 붙들려간 여호사닥 대제사장과 동일 인물이며(대상 6:15), 예수아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대제사장(2:2)입니다. 요야김과...느헤미야와...에스라 여기의 세 사람이 모두 동시대(同時代)의 사람들임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의 요야김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귀환한 B.C.458년 이전에 죽었을 것입니다. , 에스라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요야김의 아들 엘리아십이 대제사장의 직책에 올라 있었습니다(10:6).

 

(느헤미야의 성벽 봉헌식)

 

“27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바는, 본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성곽 봉헌식 행사가 언제 실시되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인구 재정착 사업을 끝마친 후에 봉헌식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원래 봉헌식이라는 것은 집이든 성곽이든 준공 직후에 시행되는 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보편적 관습이었으나(6:14-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시급한 예루살렘 성의 방비 문제(7:4)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정한 기쁨으로 봉헌식을 실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落成)되었다는 것은 6:15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되어서, 봉헌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레위 사람을 찾아내어, 예루살렘으로 데려왔습니다. 연대기적으로 혹은 내용상 당시에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의 징수 등의 목적으로 유다와 베냐민의 각 성읍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11:36) 그들은 평소에는 자신들에게 배당된 성읍에서 살았지만, 자신들의 봉사 순서가 돌아오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예루살렘으로 와야만 했습니다(대하 23:2). 감사의 찬송을 부르며, 심벌즈를 치며, 거문고와 수금을 타며, 즐겁게 봉헌식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봉헌식을 행하는 것은 성전 봉헌식 때 솔로몬이 사용했던 방식의 답습입니다(대하 5:12, 13). 제금은 이 단어의 복수 형태가 잘 보여주듯이, 마치 솥뚜껑처럼 생긴 한 쌍의 금속을 부딪혀 소리내는 악기로서 현대의 심벌즈와 유사합니다. 요세푸스는 비파 악기의 현()이 열 둘임을 중언하고 있습니다. 수금 현이 셋 밖에 없는 것으로부터 열 둘 되는 것까지 다양했었습니다. 특별히 귀족들에 의해서 많이 사용된 고급 악기였던 관계로, 은 혹은 상아, 심지어는 금으로 장식되었다고 합니다. 앞의 비파보다는 크기가 작았습니다.

 

(노래하는 자들이 모여듬)

 

“28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29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이에 노래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주변 여러 마을 곧 느도바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벳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판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이 노래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주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예루살렘 사방 들은 때때로 평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둘레에는 말 그대로의 들은 없다는 점에서. 본 문구는 다만 예루살렘 일대의 주변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입니다. 느도바 사람의 동네는 베들레헴의 동남쪽 가까이 위치했던 작은 마을인 것 같습니다. 벧길갈은 예루살렘 동북쪽 약 26km지점의 길갈과 동일 지역인 듯합니다. 아스마웻 들은 예루살렘 북동쪽 약 8km지점 베냐민 지경(2:24)을 말합니다. 노래하는 자들을 예루살렘 사방에 동네를 세운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 봉사에 쉽사리 참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무튼 이 문구는 노래하는 자들이 앞절과 본절의 전반부 처럼 쉽사리 예루살렘에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성벽 낙성식을 위한 정결 예식)

 

“3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몸을 깨끗하게 하는 예식을 치른 다음에, 백성과 성문들과 성벽을 깨끗하게 하는 예식을 올렸습니다. 성벽 봉헌식에 앞서 정결례를 행함 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추고 있습니다. 정결케 하다의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94회 나오며 거의 의식적 혹은 윤리적 정결과 관련 하여 사용됩니다. 특히 부정했던 자를 다시 회복시켜 의식 절차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해주는 정결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가장 흔히 사용되었습니다.(22:4-7).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 한 것은 금식, 성적 욕구의 절제, 속죄제를 드리는것 등을 가리킵니다. 일반 백성들은 옷의 세탁(19:10, 14), 목욕 및 물을 뿌림(8:719:12) 등을 통해 정결케 했을 것입니다. 성문과 성 이것들 또한 정결케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는 성벽 재건 도중 성벽에 부정한 것들이 접촉되었거나 혹은 거기서 부정한 일들이 저질러졌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23:14). 그것들을 정결케 하는 방법은, 개인의 가옥을 정결케 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우슬초로 새의 피를 거기에 뿌리는 방식이었음이 분명합니다(14:49-53).

 

(두 무리로 성벽위를 돌게 함)

 

“31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느헤미야는 유다 지도자들을 성벽 위로 올라오게 하고, 감사의 찬송을 부를 큰 찬양대를 두 편으로 나누어 서게 하였습니다. 한 찬양대는, 오른쪽으로 거름 문 쪽을 보고 성곽 위로 행진하게 하였습니다.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한 느헤미야의 조처는 서쪽 성곽의 중앙부 곧 골짜기 문(2:13)에서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같이 볼 수 있는 까닭은, 느헤미야가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온 직후 성벽의 파괴 정도를 관찰하기 위한 경로를 바로 이 골짜기 문부터 잡았기 때문입니다.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는 레위 사람들 중 아삽 자손들을 가리킵니다(27-2911:17).

성 위로 행렬을 지어 가게 하는 독특한 의식적(儀式的) 행동은, 그 성벽이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과 인도에 따라서 재건되었음을 감사 및 고백하는 데(27)그 목적이 있었습니다(48:12-14). 물론 거기에는 예루살렘의 방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한다는 의미도 담겨있었을 것입니다. 이 대열은 골짜기 문(2:13)에서 남쪽으로 향하여 약 450km 떨어져 있던 분문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각 팀은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맡았습니다. 악기대와 성가대가 앞서고 뒤에 백성들이 따릅니다. 골짜기 문에서 출발하여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갔습니다. 성벽을 다른 방향으로 가서 성전에서 만나서 성전으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완성된 성벽을 걸으며 찬양을 부릅니다.

성벽 재건하느라고 힘쓴 52일의 감사입니다. 그들은 성벽의 돌 하나하나를 밟으면서 내 손으로 하였고 완성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만났을 때는 하나님이 이 성벽을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것을 감사했을 것입니다. 불과 세달 전까지만 해도 무너진 성읍이 그들의 땀과 눈물로 새예루살렘으로 변형되었습니다.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습니다. 이런 기쁨이 예루살렘 성 멀리까지 들렸습니다. 이런 기쁨에 모두가 동참해야합니다. 우리가 함께 성벽을 건축한 사람만이 그 감사와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성벽을 건축하지 않은 사람은 이 기쁨을 동참하기 어렵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한 무리의 앞장을 섬)

 

“32 그들의 뒤를 따르는 자는 호세야와 유다 지도자의 절반이요 33 또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과 34 유다와 베냐민과 스마야와 예레미야이며 35 또 제사장들의 자손 몇 사람이 나팔을 잡았으니 요나단의 아들 스마야의 손자 맛다냐의 증손 미가야의 현손 삭굴의 오대 손 아삽의 육대 손 스가랴와 36 그의 형제들인 스마야와 아사렐과 밀랄래와 길랄래와 마애와 느다넬과 유다와 하나니라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37 샘문으로 전진하여 성벽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 길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호세야가 이끄는 유다 지도자의 절반이 에스라 뒤를 따르고, 이 대열의 인도자는 학사 에스라였습니다.(36). 선두에는 찬송하는 레위인들이 위치했고 그 뒤에 에스라가 위치했습니다.(12:32) 여기의 유다 방백은 반드시 유다 지파의 방백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지파를 막론한 이스라렘 백성들의 방백을 가리킬 것입니다. 호세아는 레위인으로 전문 음악인과 일반백성들의 찬양대를 조성하였습니다.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 이들을 방백들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성벽 봉헌식에 있어 레위인과 제사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본문 전후의 문맥을 고려해볼 때 레위인 혹은 제사장의 명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합니다. 유다와 베냐민은 평민들의 집단을 가리킴이 분명합니다. 스마야와 예레미야는 두 제사장 가문의 이름입니다(12, 18). 제사장의 자손 몇이 잡은 나팔은 레위 사람들에 의해서 간혹 사용되었을 뿐(대상 16:42)이고, 에스라가 앞장서고 제사장의 자손들이 나팔을 잡았습니다. 나팔은 주로 제사장들에 의해서 다뤼지던 악기였습니다. 이 악기는 특별한 종교적 행사 혹은 사건의 축하를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삼하 6:15대하 7:629:26-28). 잡았으니라는 번역은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그 다음에 나오는 이름들이 나팔을 잡은 사람의 구체적 명단인 양 착각케 한다는 점에서. 잡았고라고 해야 보다 타당합니다. 물론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은, 원문상 본 문구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단어인 스가랴 사이에 그리고를 뜻하는 접속사 와우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긴 합니다. 하지만 본 문구 뒤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모두 레위 사람들이 분명한 이상, 잡았고로 고쳐 번역함이 보다 자연스럽습니다. 맛다냐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레위 지파의 아삽 자손이었습니다(11:17).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찬송의 책임을 부여받았던 레위 사람이었습니다(대상 16:4-7대하 5:12). 한편, 스가랴는 느헤미야 시대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약 500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나므로, 여기의 육 대 손이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습니다. 차라리 자손으로 번역함이 무리가 없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스가랴의 형제로 앞절의 스가랴처럼 아삽 자손들이라는 사실을 시사해줍니다. 아사렐은 하나님께서 도우심의 뜻입니다. 밀랄래은 말이 많은의 의미입니다. 느다넬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의 뜻입니다. 하나니는 은혜로움의 뜻입니다. 다윗의 악기는 레위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악기들, 곧 제금, 수금, 비파 등을 가리킵니다(27절대상 15:16, 19-21). 이처럼 제금. 수금, 비파를 다윗의 악기라고 한 까닭은, 그 악기의 사용이 다윗에 의하여 레위 사람들에게 명령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대상 15:16).

학사 에스라가 앞선 것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에스라라는 인물이 차지하던 비중을 잘 보여줍니다. 비록 그는 느헤미야와 같은 정치적 권세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 각성이 그의 종교적 역량에 힘입은 바가 컸음을 감안한다면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습니다(8:1-12). 성벽을 타고 행진하던 에스라 일행이 일단 성벽에서 내려왔다가 올라갑니다. 사실 에스라의 일행은 샘문이 가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성벽에서 일단 내려왔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반대쪽의 성벽으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다윗 성의 층계는 샘문을 통하여 성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되었었습니다. 바로 이 계단을 통하여 에스라의 일행은 성의 안쪽으로 들어갔음이 분명합니다. 다윗의 궁 윗 길의 길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는 성벽의 뜻이 있을 뿐입니다(14:223:51:18). 동향(東向)하여 수문에 이른 것은 에스라의 일행이 샘문 북쪽의 성벽 끝을 출발하여 그 성벽을 따라 계속 진행했었음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수문이 느헤미야 당시에 재건된 성벽의 바깥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이 문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왔습니다. 본문의 수문을 3:26에서처럼 수문과 마주 대한 곳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가장 무난합니다.

 

(총독 느헤미야가 또 다른 무리의 앞장을 섬)

 

“38 감사 찬송하는 다른 무리는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과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벽 위로 가서 화덕 망대 윗 길로 성벽 넓은 곳에 이르고

 

다른 한 찬양대는 반대쪽으로 행진하게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의 절반과 더불어 그 뒤를 따라서 성벽 위로 올라갔습니다. 마주는 반대로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는 에스라에 의해 인도되는(36) 한 대열이 성을 따라 우측으로 돈 데 반해, 또 느헤미야가 이끄는 다른 한 대열은 좌측, 즉 북쪽으로 돈 것을 가리킵니다. 느헤미야가 그 대열의 인도자였지만, 그 대열의 선두에는 아삽 자손의 노래하는 자들이 위치했었습니다. 이같은 순서는 에스라에 의해 인도된 대열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여기의 풀무 망대 윗길은 다윗의 궁윗길과 마찬가지로 풀무 망대에 이르는 성벽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37절 주석 참조). 한편, 이 풀무 망대 윗길로와 다음의 성 넓은 곳에 이르고 사이에는 경유하여라는 단어가 삽입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골짜기 문에서 출발하여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이 땀흘린 것을 스스로 만끽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을 밟으며 자신의 손으로 돌맹이를 쌓아올리고 보수공사를 했고 처음에는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처음에 황폐한 성을 바라보면서 암담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완성된 것을 볼 때 느헤미야는 기뻤습니다. 남이 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손으로 하는 것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돌과 흙에 땀과 눈물이 베어있는 사람만이 느끼는 기쁨입니다. 예수님도 그 기쁨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성전건축을 한 사람들에게는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두 무리가 하나님의 전에서 만남)

 

“39 에브라임 문 위로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멈추매 40 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가 하나님의 전에 섰고 또 나와 민장의 절반도 함께 하였고41 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고 42 또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으며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느헤미야가 이끄는 무리는 에브라임 문 위를 지나, 옛 문과 물고기 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서, 양 문에까지 이르러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멈추었습니다. 감사의 찬송을 부르는 두 찬양대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역시 백성의 지도자 절반과 함께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섰습니다. 에브라임 문은 북쪽 성벽의 서쪽 부분에 있던 하나넬 망대(3:1)와 함메아 망대 사이의 문입니다. 감옥문은 수문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어느 지점에 위치했을 것입니다. 본절은 감사 찬송하는 두 떼는 하나님의 전에 섰고 느헤미야를 포함한 민장(民長)의 반은 느헤미야와 함께 있었다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성전에서의 봉헌식을 주관하던 성직 계급과 평신도들의 분리되는 모습이 생생히 비쳐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에스라에 의해 인도된 무리들과 느헤미야에 의해 인도된 무리들은 각기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서 성전에서 서로 만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장은 32절에서 언급되는 방백과 본질상 동일할 것입니다. 본절부터 43절까지에서는 성벽 봉헌식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본절에 언급 되는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임이 분명합니다. 만일 이것이 가문의 이름이라면 제사장 가문 목록에 실려있어야 했을 것입니다(12-1110:2-8). 마아세야...에셀이 함께 있으며 원문에는 함께 있으며 에 해당되는 말이 없습니다. 아무튼 마아세야...에셀 등도 41절의 제사장처럼 나팔을 불던 제사장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는 반드시 노래만 했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히 이 찬송하는 무리 속에는 악기를 잡은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36). 그 감독 예스라히야는 노래하는 자와 악기를 잡은 자 모두에 대한 지휘자였던 것 같습니다.

 

(성벽 봉헌식의 큰 즐거움)

 

“43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그 날, 사람들은 많은 제물로 제사를 드리면서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기쁘게 하셨으므로, 여자들과 아이들까지도 함께 기뻐하니, 예루살렘에서 기뻐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린 제사는 주로 감사의 화목제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24:529:283:37:206:17왕상 8:63). 그때 백성들은 제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불살라서 바친 후(3:11). 그 나머지의 부분 중 일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7:29-34),그 잔여분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을 것입니다(12:17,18).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벽을 성공적으로 재건할 수 있도록 해주신 일(6:15,16)로 인하여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성경은 여자들이 슬퍼하며 애통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고 있으나(11:4031:1549:31:8), 기뻐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여기에 나옵니다. 따라서 본절의 언급은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쁨이 너무나도 컸음을 더욱 확연히 보여줍니다. 백성들이 기뻐 환호하는 소리가 매우 커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백성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직접 수고하여 성벽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땀과 눈물로 주님의 일을 할 때 이런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전 지대가 놓여졌을 때도 백성들의 소리가 무척이나 컸었지만,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소리였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분별되지 못했었습니다(3:13). 본절부터 47절까지에 언급된 사실은 봉헌식이 성대히 거행된 이후 나타났던 바람직한 결과였습니다.

 

(레위 사람을 서포트하는 것으로 인한 백성들의 기쁨)

 

“44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때문이라

 

그 날, 사람들은 헌납물과 처음 거둔 소산과 십일조 등을 보관하는 창고를 맡을 관리인을 세웠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고마워서, 관리인들을 세우고, 율법에 정한 대로,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돌아갈 몫을 성읍에 딸린 밭에서 거두어들여서, 각 창고에 보관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 날에는 봉헌식이 있었던 직후의 어느 시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는 헌물의 수령 및 관리를 담당할 사람을 임명하였습니다. 전에 느헤미야는 곳간을 담당하는 레위 사람과 입회인 자격의 제사장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10:38). 제사장들은 처음 난 가축이나 과일 그리고 포도주와 기름 등을 백성들로부터 받았습니다(10:35-37).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으며(10:38) 그 십일조의 십분지 일은 제사장에게 다시 돌려졌었습니다(18:26). 유다 사람들이 봉헌식을 통하여서 성직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귀중하고 필요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하였습니다.

유다 사람은 지파를 막론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곧 평민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섬길 수 있음에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종들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유다백성들이 그렇게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보면서 기뻐하였습니다. 기쁨은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려야합니다. 텔레비전이나 유흥가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하는 일)

 

“45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명령을 따라 행하였으니 46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지도자가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정결예식을 베푸는 일을 맡았습니다. 노래하는 사람들과 성전 문지기들도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이 지시한 대로 맡은 일을 하였습니다. 옛적 다윗과 아삽 때에도 합창 지휘자들이 있어서, 노래를 불러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45절에서는 희생 제사 등과 관련된 봉사를 하는 제사장 및 레위 사람, 그리고 노래하는 자 및 문지기 모두 그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는 말할 나위없이 백성들이 성직자들을 물질로 뒷받침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섬기는 일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직무 혹은 직분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이 성전 봉사와 관련하여 담당하던 제반사(諸般事)를 가리킵니다(3:7대상 23:32대하 7:644:8). 결례(潔禮)의 일에서 결례는 성전 봉사와 관련하여 자신들의 부정(不淨)을 정결케 하는 노력을 가리킵니다(대하 30:1944:26). 자신 뿐만 아니라 성물을 정결케 하는 일도 포함될 것입니다(대상 23:28).

다윗과...솔로몬의 명을 좇은 것은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 뿐만 아니라 앞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문구입니다. 즉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봉사도 다윗과 솔로몬이 정한 규례대로 시행되어졌던 것입니다. 본절은 노래하는 자들이 다윗과 솔로몬의 규례대로 봉사했다는 45절 후반부의 언급을 보충하기 위한 의도에 따라 기록된 듯합니다. 본절 초두에 있는 왜냐하면의 뜻인 접속사 키는 본절이 45절 후반부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느헤미야는 노래하는 자들이 규례에 따라 봉사했다는 사실이 역사적 합법성에 근거한 것이므로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노래하는 자의 두목은 복수입니다. 이것은 다윗 당시에 아삽을 포함한 세 사람의 두목이 있었다는 사실과 잘 합치됩니다(대상 6:33,39,4415:17). 그 나머지 둘은 헤만과 에단이었습니다. 찬송과 감사는 신구약을 막론한 모든 성도들의 찬양에 담겨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주제일 것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의 사례비를 줌)

 

“47 스룹바벨 때와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주되 그들이 성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에도,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이들과 성전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주었습니다. 백성은 레위 사람들에게 돌아갈 거룩한 몫을 떼어 놓았고, 레위 사람들은 다시 거기에서 아론의 자손에게 돌아갈 몫을 구별하여 놓았습니다. 본절은 포로 귀환 시대에 성직자들이 특별히 존중되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는 곧 포로 귀환 시대 전()기간을 가리킵니다. 날마다 쓸 것...그 구별한 것 -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들은 십일조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일 뿐입니다. 노래하는 자들...문지기들...레위 사람들 - 구약 시대에 있어서 이들은 모두 레위 지파의 후손, 즉 레위인들이었으며, 그래서 모두 기업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주는 십일조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십일조 제도가 세워진 모세 시대 심지어는 사울 시대까지 레위인들 중 노래하는자들과 문지기들은 구별되지 않았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백성들로부터 징수한 십일조 중 십분지 일을 제사장에게 주었습니다.(10:3818:26). 성벽 봉헌식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의 일이 회복되었습니다. 레위인 찬양대와 성벽파수꾼도 복귀하였습니다. 그들이 맡은 직분에 종사하도록 십일조를 바치기 시작하였습니다. 44절 하반절에 유대인들이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즐거워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흐지부지 되었었습니다. 오랜만에 레위인이 자신의 직분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 섬기는 일을 지금까지 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사장은 제사드리고 레위인은 찬양하고 파수꾼은 파수를 봅니다. 레위인이 자신의 하는 일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본래의 직분에 종사하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들을 물질적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면서 보는 기쁨이 됩니다. 성벽 재건한 자들과 이들의 공통적전인 기쁨의 원천은 주님께 헌신한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됩니다.

느헤미야 12장 강해 성벽 봉헌식의 기쁨

말씀 느헤미야 121-느헤미야 1247

느헤미야 1243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느헤미야 12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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