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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느헤미야 8장 강해 말씀을 듣고 울며 기뻐하는 백성들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4-11-10 00:00:00
조회수 : 5,468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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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8장 강해 말씀을 듣고 울며 기뻐하는 백성들

느헤미야 81-느헤미야 836

요절 느헤미야 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모택동은 문화혁명으로 수천만 명을 죽였습니다. 그때 혁명동기인 등소평이 숙청되었습니다. 등소평 별명은 오뚜기입니다. 그는 세 번 네 번 넘어져도 다시 딛고 일어납니다. 그는 시골에 쫓겨가서 보리죽도 먹지 못하면서 나에게 기회가 온다면 중국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는 실권을 잡은 후에 모택동을 높입니다. 문화혁명을 한 사람들을 다 끌어안았습니다. 그는 중국의 역사에서 최고의 인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최암흑기에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느헤미야압니다. 느헤미야가 개혁을 성공시킨 원리가 네 가지입니다. 첫째가 기도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의 개혁은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진행하고 기도로 마칩니다. 둘째가 도덕적인 투명성입니다. 바늘 하나 실 하나 사욕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부동산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12년간 월급을 받지 않고 사재를 털어서 백성을 섬깁니다. 셋째, 모든 국민이 마음을 합하였습니다. 제사장이 앞장 서고 노동하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팀웍을 이루어서 백성들이 함께 일합니다. 넷째, 말씀 앞에서 단합시킵니다. 개혁이 피로증이 올 때 그는 성경공부를 하고 힘을 얻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말씀을 공부하고 울며 기뻐하는 백성들이 나옵니다.

 

(새해에 말씀을 공부하고자 함)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8장에서부터 에스라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에스라는 에스라 10장의 사건 이후에 모습을 감춘 후 무려 14년 후에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에스라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문제로 온 나라가 법석이었으며 또한 고리대금으로 인한 경제적 문제로 나라가 떠들썩했는데도 성경의 무대에 일절 나타나지 않은 것은 왜였을까요?

느헤미야가 B.C.435년에 팔레스틴의 총독으로 부임한 후에 페르시아 왕실의 소환으로 거기에 약 1년간(B.C.433) 다녀온 것처럼(13:6), 에스라도 에스라서 10장 사건이 마무리 지어진(B.C. 458) 후의 어느 시점에 바벨론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B.C.444년경에 다시 돌아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의 칠 월은 종교력으로서의 칠 월이며, 민간력으로는 일 월이고. 태양력으로는 구 월 혹은 시 월입니다. 그런데 에스라, 느헤미야 양서(兩棲)를 막론하고 거의 민간력만을 사용하다가 여기서 특별히 종교력을 쓴 까닭은, 8장이 초막절 절기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9, 11, 14, 16, 18).

모든 백성이 한꺼번에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것은 일월 일일 나팔절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23:23-2510:12029:1-6). 이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어 이 날을 기렸습니다. 이 날을 기리는 목적은 먼저 종교력의 관점에서 보면 안식의 달인 일곱 번째 달을 맞아 봉헌하기 위함이었고. 또한 민간력의 관점에서는 여호와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새해 첫날을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수문 앞 광장은 성전 동문과 성벽 사이의 공터를 가리키며 에스라 10:9의 하나님의 전 앞 광장과 동일한 곳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이 수문은 기혼 샘(the Gihon Spring)과 연결되었습니다. 종교적 행사가 주목적인 백성들이 성전과 가까운 곳에 모였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느헤미야와 백성은 학자 에스라에게,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라고 청하였습니다. 징치지도자가 종교지도자를 초청합니다. 학사 에스라에게...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한 것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각한 영적 기갈 상태에 빠져 있었음을 보여줍니다(삼상 7:2).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는 바로 이같이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극히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돌아오자마자 백성들은 그로부터 율법의 가르침을 듣기 원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책은 모세 오경일 것입니다.

 

(말씀을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다 모임)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일곱째 달 초하루에 에스라 제사장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에 나왔습니다. 제사장 에스라와 같은 표현은 에스라가 백성들을 가르칠 자격의 소유자임을 암시합니다. 그가 실력적으로도 자격자임을 암시하는 표현은 1절의 학사 에스라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모두 나와 있었습니다.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은 아주 작은 어린이를 제외한 이스라엘 사람 모두, 즉 많은 사람들이 에스라의 율법 해석을 들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강조적 표현입니다(31:11).

이스라엘 백성은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말씀들 뿐만 아니라 여러 의식(意識)들에 내포된 의의 등을 통해 지혜와 영적 깨달음을 얻었습니다(12:26, 274:66:6이하31:12, 13). 영적 이해가 결여된 미신이나 맹신은 이교의 특징이었고(44:18, 19), 이스라엘의 멸망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4:6). 나라가 부흥하려면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에 기초하여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율법책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4.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에스라는 수문 앞 광장에서, 남자든 여자든,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에게 새벽부터 정오까지, 큰소리로 율법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백성은 모두 율법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율법에 대한 백성들의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때 거기에 모인 백성들은 무려 6시간 이상 말씀을 듣고 있었던 셈입니다(19:920:7). 이같이 오랜 시간 동안 말씀을 받는 일에 열중했다는 것과 더불어, 그들이 날이 밝자마자 모였다는 것도 그들의 열심을 잘 드러내줍니다.

학자 에스라는 임시로 만든 높은 나무 단 위에 섰습니다. 여기의 강단은 구약 성경에서 항상 망대 혹은 성곽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11:48:9왕하 9:17대하26:9). 그 때 에스라가 특별히 마련된 매우 높은 단() 위에서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그 때 에스라의 가르침을 들으러 온 사람의 수효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높은 망대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2).

그렇게 높은 곳에서 가르쳐야 모든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한 그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오른쪽으로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가 서고, 왼쪽으로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 섰습니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사장들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안식일 날 회당에서 몇몇 사람이 율법을 번갈아가며 봉독하였듯이, 본문의 13인도 에스라 곁에서 차례로 율법 내용들을 읽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일어서서 말씀을 듣는 백성들)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습니다. 모든 백성이 일어서는 백성들의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의 외적인 표현입니다.(3:2029:82:1).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또 순종할 자세로 들었습니다.

 

(여호와를 송축하고 경배하는 백성들)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율법을 가르치기 직전에 에스라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유다인들의 회당 예배시에도 성경 말씀을 봉독하기 전에 여호와를 송축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절차가 에스라 시대에도 여전히 적용된 것이라 보여집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 중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이 발견되기는 하지만(9:3210:1732:18), 동일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람어나 페르시아어의 고대 문헌에서는 이와 동일한 표현이 자주 발견됩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표현이 바벨론적 기원을 갖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실 본서를 기록했던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서 출생하여 거기서 성장했습니다. 아무튼 위대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이 크며, 또한 그분의 통치권이 온 세상에 미침을 뜻합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모두 손을 들고 멘! 아멘!하고 응답하였습니다.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경배하는 것은 에스라의 송축에 대한 백성들의 삼중적 응답입니다. 그 중 손을 들고 광대하신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을 만큼 부족한 자신을 시인하였습니다. (952821342). 백성들은 잠시 후 에스라에 의하여 들려질 율법 말씀을 통하여 영적 기갈이라는 부족을 채움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은 아멘 아멘 응답하고는 하나님이 광대하시다는 에스라의 말에 백성들이 온전히 동감했습니다(5:13).

아멘이라는 표현이 집회시 회중들의 응답으로 사용된 예는 다윗 시대 때부터 발견됩니다(대상16:36). 후에 이것은 회당에서도 사용되었고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고전 14:16). 회중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께 경배하였습니다. 몸을 굽혀...경배하였느니라는 하나님에 대한 공경심의 외적인 표현입니다(대하7:3). 이러한 행동이 끝난 후에는 다시 일어나서 에스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몸을 굽혀에 해당하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 15회 등장하며. 항상 경배하다는 말과 함께 언급됩니다(24:26, 4843:284:3112:27).

 

(말씀을 가르치는 레위인들)

 

“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레위 사람인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는, 백성들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율법을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에스라 등이 강단 위에서 율법책의 한 부분을 낭독하고 나면, 회중들의 중간 중간에 끼어있던 레위 사람들이 그 주변의 백성들에게 그것을 다시 낭독한 후 그 의미를 가르쳐 주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아, 블라야와 그 밖의 레위 사람들로 번역함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예수아 블라야도 레위 사람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아는 그가 구원하실 것이다의 뜻이며 블라야는 여호와께서 구별하셨다의 의미입니다. 바니는 세워진의 뜻으로 르흠의 부친입니다(3:17). 세레뱌는 에스라와 함께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했던 사람입니다(8:18).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열()을 보내셨다입니다. 야민은 오른 손의 의미입니다. 악굽은 교활한의 의미입니다. 호디야는 느헤미야의 언약서에 인친 두 명의 레위 사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10:10, 13). 그 의미는 유대인 여자입니다. 마아세야는 4절의 마아세야와 동일인 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의 일입니다. 그리다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했다가 다시 내보냈던 사람입니다(10:23). 그 의미는 불구가 됨입니다.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셨다의 뜻입니다. 요사밧은 에스라가 귀환하면서 함께 가져온 물품들을 인수한 사람으로 그의 부친은 예수아입니다(8:33). 본서 11:16에서는 하나님의 전 바깥 일을 맡은 자로서 언급됩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판단하신다입니다. 하난은 은총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 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 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해석하여 는 분명히 하다 혹은 쪼개다의 뜻이 있는 동사의 강조형입니다. 당시의 유대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오래했던 사람들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대부분은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의 그 뜻을 해석하여가 해설의 의미를 담고 있음은 물론이고. 히브리어로 기록된 모세 오경을 아람어로 구술 번역해 주는 것을 가리키기도합니다.

 

(말씀을 듣고 우는 백성들)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습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울었습니다.(대하 34:193:20) 그래서 총독 느헤미야와, 학자 에스라 제사장과,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들은 정치지도자 종교지도자 사회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날은 주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고 모든 백성을 타일렀습니다.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학사 에스라 라고 두 사람이 동시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 두 사람이 동시대 인물이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줍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에게 각기 적용된 직함 곧 총독과 제사장 겸 학사는 그들의 사역이 성격상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 한 사람은 정치적 행정적 사역을, 또 한 사람은 종교적 사역을 주로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위의 두 사람은 상호 보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총독이 본서에서 느헤미야가 자신을 가리킬 때 적용한 총독(페하) 보다는 높은 직책이라고 보고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부분(10:1)8-10장은 느헤미야가 기록하지 아니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강 서편 전체를 통할하는 총독을 가리키는 3:7에서도 페하가 사용된 점 등으로 미루어, 히브리어 직함만으로 위의 주장을 고집하기는 무리일 것입니다. 일렀다는 말은 말하다를 뜻하는 동사 3인칭 단수형입니다. 히브리 어법상 단수 동사에 복수 주어가 자연스럽지는 않으나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나팔절은 그 성격상 마땅히 기뻐하며 즐거워 해야 할 절기였으므로 오늘은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23:24, 2529:1-612:7, 12).

 

(기뻐하는 것이 힘임)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돌아들 가시오. 살진 짐승들을 잡아 푸짐하게 차려서, 먹고 마시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살진 것은 짐승의 가장 먹기 좋은 부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레위기에서 먹지 말도록 금지하고 있는 기름 부위와는 전혀 다릅니다. 단 것은 포도즙에 물을 섞은 음료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사실 고대 증근동 사회에서는 이러한 음료가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잔치 분위기가 충분히 날 수 있도록 흥을 돋울만한 진미(珍味)들을 먹으라는 명령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차리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먹을 몫을 보내 주라고 합니다. 여기의 예비치 못한 자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먹고 마실 수 없는 자들을 뜻합니다. 아마 여기에는 주로 가난한 자들과 나그네들이 포함될 것입니다(16:14). 유대인들에게는 즐거운 날에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자들을 돌아보아 필요한 것들을 제공함으로써 함께 즐거움에 동참토록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습니다(삼하 6:199:22). 이와같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사랑을 베푸는 일은 이 축제를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백성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풂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회상하며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다 같이 즐거워합니다. 오늘은 우리 주의 거룩한 날이오. 주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니, 슬퍼하지들 마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힘은 산꼭대기 혹 방파제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본 문구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방파제 혹은 보호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백성들이 비록 통회해야 할(9) 죄를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계속 고뇌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죄사함의 하나님을 믿고 기뻐히야 합니다. 회개 후에 오직 사죄를 하시는 여호와를 의지함으로써, 그들은 방파제가 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백성들은 울지 말고 성일을 지킴으로써 여호와를 기뻐해야만 했습니다.

사람의 제일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만을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제1). 사도 바울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했으면 기뻐해야합니다.

 

(레위 사람도 성일에 근심하지 말라고 함)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달래면서,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슬퍼하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본절에서 언급되는 레위 사람들의 행동은 마치 단순한 반복 내지는 불필요한 행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한 것을 회중들 틈의 레위 사람들이 다시 읽어주고 해석해 주었듯이(7, 8) 의사 소통 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레위인들의 중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즐거워함)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모든 백성은 배운 바를 밝히 깨달았으므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며, 없는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면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본절의 강조점은 백성들이 에스라의 명령을 그대로 준수했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본 절에서도 에스라의 율법 해석의 권위와 그 효력이 강조되고 있음에 유의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율법이 수여된 이래로 오랜 세월이 경과하면서 삶의 양상이나 민족적 상황이 변화하였기 때문에 율법 자체가 상징적인 권위를 지니고는 있지만 실제적인 면에서는 마치 골동품처럼 여겨졌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에스라의 율법 해석을 통해 비로소 그 율법 조항들은 실천적인 생명력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먹고 마시고 크게 즐거워하게 됩니다.

 

(말씀을 더 배우고자 모여든 족장들)

 

“13.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이튿날에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각 가문의 어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함께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자 에스라에게로 갔습니다. 에스라의 말씀 운동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이튿날 은 1-12절의 사건이 있은 그 다음 날입니다. 종교력으로는 72. 민간력으로는 12일이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은 모두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지도급 인사들은 계속 에스라 곁에 남아서 말씀을 보다 확실히 배우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가족은 물론이고(6:6, 7) 여타 백성들을 지도하고 교육하기 위한 실천적 목적에서 율법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10, 12). 백성의 족장은 한 가문의 우두머리를 가리킬 것입니다(7:8). 밝히 알고자 하여는 원래 이해하다 혹은 가르치다등의 뜻이 있는 동사의 사역형으로서, 배움을 통하여 어떤 지식에 통달하고 그 결과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됩니다(삼상 18:14대하 30:2232:8).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성전 봉사 이외에도 백성들을 가르치는 책임도 있었습니다(10:11대하 17:8, 98:7-94:62:7, 8). 학사 에스라의 곳은 학사 에스라의 주변에 입니다.

 

(초막절을 지키라는 명령)

 

“14.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그들은 성경공부를 하다가,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축제에는 초막에서 지내도록 하라는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서 명령하신 말씀이 율법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에스라가 족장 및 종교 지도자들(13)과 함께 율법 말씀을 연구하던 중 초막절에 관한 가르침을 발견하였습니다. 초막절은 715-22일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나팔절과 초막절 사이에 있는 절기인 대속죄일(710)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이색적입니다. 율법의 낭독, 해설 및 여호와의 은혜를 찬양하는 즐거운 분위기 등과 관련된 본문의 문맥에 근거하여 대속죄일 행사에 관한 기록을 생략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칠월 절기에 초막에 거하라는 명령은 레 23:34 29:12 16:13에 대한 자유스런 인용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칠월 절기는 초막절을 가리킴이 분명합니다. 초막절의 준수 목적은 출애굽 후 광야 생활 중 인도,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고 기억하며, 토지 소산의 추수를 마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여호와의 은혜를 기념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초막에 사용하는 나무들)

 

“15.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한지라

 

또한 그들은 책에, 산으로 가서 올리브 나무와 들올리브 나무와 소귀나무와 종려나무와 참나무의 가지를 꺾어다가, 초막을 짓도록 하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 말을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규례, 특히 초막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언급하신 나무들 중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 이외의 것들은 레 23:40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레 23:40에는 본절에 없는 버들이 나옵니다. 감람나무는 지중해 연안국들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8:8에 의하면 가나안 정복 이전의 시기부터 가나안 땅에도 있었습니다. 들 감람나무는 왕상 6:23, 31, 32에 따르면 이 나무가 목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나무에서는 감람유는 거의 산출되지 않았습니다. 화석류는 나무의 둥치가 없는 관목(灌木)의 하나로서 잎이 무성한 상록수입니다(41:1955:131:8, 10, 11). 팔레스틴의 종려 나무는 그 높이가 성인 신장의 약2-3배 정도이며 잎이 많이 달린 줄기 하나의 길이도 성인의 신장 만큼은 됩니다(15:2723:4033:992:127:8). 기타 무성한 나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잎이 넓어서 그늘을 만들기에 적절한 나무일 것입니다.

 

(초막절을 지킴)

 

“16.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그래서 백성은 나가서,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지붕 위와 마당과 하나님의 성전 뜰과 수문 앞 광장과 에브라임 문 앞 광장에 초막을 세웠습니다. 16절은 초막을 지었던 장소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지붕 위에는 중근동 지역의 가옥들은 그 지붕이 평평하여 초막을 세우기에 적절하였습니다(2:6삼상 9:25).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집 지붕 위에 초막을 지었을 것입니다. 뜰 안에 초막을 지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전 뜰에는 다음의 두 곳과 함께 타지역 백성들의 초막을 짓는 장소로 사용됐을 것입니다. 에브라임 문은 예루살렘의 북서쪽에 위치했었습니다(12:39왕하14:13). 따라서 에브라임 문 광장은 예루살렘의 북쪽에 있던 성전과는 가까왔었습니다.

 

(초막절의 기쁨)

 

“17.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모든 사람이 초막을 세우고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사로 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라는 명칭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이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 같은 명칭은 비록 혈통적으로는 히브리인들이지만 제2의 출애굽 운동에 동참하지 않고 계속 바벨론에 머물고 있었던 사람들과 온갖 희생을 각오하고(2) 귀환한 사람들을 예리하게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3:84:16:19-21).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렇게 축제를 즐긴 일이 없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최초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때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초막절 절기가 여호수아 시대로부터 그 당시까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 낱낱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초막절을 지켰을 것이며, 그 이후에 초막절을 지킨 사실에 대해서도 성경이 증거합니다(21:19왕상 8:2, 65왕하23:22대하 30:2635:18). 특히 최초의 귀환 직후에도 초막절을 지켰습니다(3:4). 따라서 본 문구는 여기의 초막절 행사가 모세 율법이 말하는 근본 정신에 매우 합당하게 지켜졌음을 뜻할 것입니다.

 

(초막절날 성경공부)

 

“18.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초막절 절기가 모세 율법의 가르침대로 지켜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31:11). 에스라는 첫날로부터 마지막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백성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규례대로 성회를 열었습니다.

백성들의 절기 지키는 일이 결코 유야무야(有耶無耶)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절기를 지켰습니다. 백성들은 그 동안 전혀 노동하지 않으면서(23:35, 36) 가난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하나님께서 풍성한 수확을 주신 데 대해 감사하였을 것입니다(23:3916:13). 백성들이 그 초막 생활을 통해서 선조들의 광야 생활을 상기했을 것임은 물론입니다(23:43). 여기서 성회는 마치다를 뜻하는 동사에서 온 명사로서 어떤 행사의 엄숙한 종결 혹은 그와 관련한 의식을 말합니다.(왕하 10:201:131:145:21). 아무튼 본 문구도 초막절 절기가 율법대로 시행됐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8장 강해 말씀을 듣고 울며 기뻐하는 백성들

느헤미야 81-느헤미야 836

요절 느헤미야 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 8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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