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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느헤미야 5장 강해 경제 개혁의 윤리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4-11-07 00:00:00
조회수 : 4,361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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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5장 강해 경제 개혁의 윤리

느헤미야 51-느헤미야 519

요절 느헤미야 56.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외부적으로 산발랏 일당의 방해 공작이 점점 거세어지는 와중에,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이스라엘 민족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습니다. 본장은 이렇듯 심각한 사회, 경제적 문제를 느헤미야의 과단성 있는 결단과 주도하에 극복해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부르짖음)

 

“1.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백성 사이에서 유다인 동포를 원망하는 소리가 크게 일고 있었습니다. 부인들이 더 아우성입니다. 큰 부르짖음은 성경에서 대개 극한적인 고통의 결과로서 나타납니다(18:2127:3411:612:30). 일부 백성들이 심각한 환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여자들까지 부르짖은 것을 볼 때 문제가 심각하였습니다. 특히 백성의 환난이 한 가정의 생계문제와 직결된 절박한 것이었습니다.(왕하 4:16:268:3). 원망하는데는 ...에 대해서 혹은 ...을 대항하여의 뜻입니다. 앞의 백성과 그 아내가 형제 유다 사람을 향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형제 유다 사람은 구체적으로, 가난한 백성을 상대해서 고리 대금(高利貸金)을 한 사람들을 말합니다.(7). 여기서 느헤미야가 그들을 굳이 형제 유다 사람하여, 그 고리대금업자들이 피해자와 동족들이라는 점을 부각시켜서 그들의 몰인정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동족들에 대해서 고리대금을 하는 일은 율법도 금하는 일이었습니다.(25:35-3723:19), 그들은 상식적 판단으로도 지탄을 받아 마땅했습니다.

 

(빚을 지게된 세 가지 유형)

 

“2.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3.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4.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2-4절에 나오는 불평은 모두 심각한 빚 문제와 연관된 것입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여기서 열거되는 불평들은 몇몇 개인의 사례들이라기보다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두루 퍼져 있었던 일반적인 문제를 대표한 사례들입니다. 이러한 빚더미에 눌리게 된 이유나 배경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 유형은 빈민들이 고리 대금업자를 원망한 것입니다. 그들은 가족수(家族數)가 많음으로 인하여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우리 아들딸들, 거기에다 우리까지, 이렇게 식구가 많으니,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아가려면, 곡식이라도 가져 오자고 합니다. 빈민들이 반드시 돈만을 빌린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그들은 돈 뿐만 아니라 곡식과 새 포도주, 기름도 빌렸었습니다(11).

흉년은 고리 대금업자를 원망한 빈민들의 두번째 유형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흉년에 배가 고파서 곡식을 얻느라고, 우리는 밭도 포도원도 집도 다 잡혔습니다. 빚의 원인으로서 언급된 흉년은 사실 첫 번째 유형(2)과 세 번째 유형(4)의 빈민들이 빚을 지게 된 근본적 혹은 간접적 원인이 됐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흉년의 시기에 도탄에 빠지는 자들은 대다수의 가난한 백성들이었습니다. 부요한 자들은 창고에 저장된 곡식이 있었으므로 어지간한 흉년에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곡식을 고액에 팔아 넘겨 폭리를 취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밭과 포도원과 집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 만큼이나 귀중히 여겨지던 전재산(全財産)이었을 것입니다. 흉년을 위하여는 문자적으로는 그 흉년 동안에입니다. 따라서 본절의 흉년은 과거의 흉년이라기보다는 그 당시에 진행되던 흉년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팔레스틴에 큰 흉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1:6, 9-11). 아무튼 페르시아 시대에 흉년이 잦았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팔레스틴, 특히 기브온 지역은 이스라엘 초기 시대만 해도 엄청난 포도의 생산이 있었으나 페르시아 시대에 들어서서는 그 생산량이 급강하했었다고 합니다. 분명 이와같은 현상은 포도 생산에만 국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리 대금업자를 원망한 빈민의 세 번째 유형으로서 그 원인을 세금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왕에게 세금을 낼 돈이 없어서, 밭과 포도원을 잡히고 돈을 꾸어야만 했다고 합니다.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도다 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밭과 포도원에 대한 왕의 세금을 위하여 돈을 꾸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개역 성경의 번역은 약간 잘못이 있습니다. 밭과 포도원에 대한 왕의 세금은 그 땅에서의 평균 산출량에 근거해서 거둬 들였던 토지세의 일종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페르시아 정부에게 또다른 세금들을 바쳤습니다(4:1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폐르시아 식민지 민족보다 세금 부담이 더 과중했기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납세 문제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까닭은, 이스라엘 사회의 경제적 형편이 극도로 피폐했던 때문이었습니다. 이 같은 경제적 형편에 처하게 된 것은 흉년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입니다(3). 물론 백성들이 성벽 재건 공사에 동원되어 농사를 짓는 일 등의 경제 활동을 영위치 못한 것도 한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공사가 불과 오십이 일만에 끝났음을 감안한다면(6:15) 성벽 재건 사업은 이스라엘 경제를 피폐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빚을 진 결과)

 

“5.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5절의 내용은 위의 세 가지 유형의 빈민들(2-4)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될 것입니다. 이들이 빚을 갚지 못함으로써 다다르게 된 극단의 상황인 것입니다. 또 더러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우리의 몸이라고 해서, 유다인 동포들의 몸과 무엇이 다르냐고 합니다. 이들은 채무자나 체권자 모두 동족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같은 말을 통해서 가난한 채무자들은 채권자들의 무자비함을 확연히 드러내려고 합니다(1). 우리의 자식이라고 해서 그들의 자식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그런데도 우리가 아들딸을 종으로 팔아야 한다고 합니다. 사실 채권자들이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들의 자녀를 노예로 데려가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동족의 자녀를 노예로 데려올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경제적인 곤경에 처했을 경우 유대인들은 가족 구성원을 담보로 삼아 돈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이 경우에 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면 채무자의 딸이나 아들, 그의 아내, 심지어 채무자 자신이 채권자의 종으로 봉사해야 했으며(25:39, 40), 7년째 되는 해에는 다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15:12-18).

만일 채권자들에게 죄를 묻는다면, 동족을 종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난한 자들로부터 고리(高利)를 취했다는 것입니다(7). 우리의 딸 가운데는 벌써 노예가 된 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본절에서 종 된 자가 있으나는 문자적으로 종으로 복속됐으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성적(性的)으로 정복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에서(7:8) 이는 채권자의 성적 욕구 해결을 위한 대상이 되는 일이나 채권자의 첩이 되는 일등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빚 때문에 팔려간 여종은 남종과는 달리 성적(性的)인 문제에 있어서 채권자의 처분을 따라야 했습니다(21:7 이하).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채무자의 자녀들이 채권자의 노예가 된 것이, 빚을 갚지 못해서 소유물을 빼앗긴 다음에 이뤄졌다는 사실입니다. 채무자들이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일차적으로는 토지 등의 재산을, 그 다음에는 자녀들까지 채권자에게 빼았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밭과 포도원이 이미 다 남의 것이 되어서, 우리는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다고 합니다.

 

(느헤미야의 분노)

 

“6.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그들의 울부짖음과 탄식을 듣고 보니, 느헤미야 또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부자들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경제적 가혹 행위, 즉 고리 대금을 통한 재산 및 자녀들의 탈취 사실을 듣고 분노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 일당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쌓는 일에 대해서 노하였던 것과 같이 크게 노하였습니다(4:1, 7). 결국 이것은 온유한 인물 느헤미야가, 그 어느 때보다 일치 단합이 요구되는 때에 그것을 깨뜨리는 부자(富者)들의 횡포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귀족과 민장들을 꾸짖은 느헤미야)

 

“7.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느헤미야는 그들이 울부짖는 내용을 신중하게 살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중심에 계획하고로 나옵니다. 계획하고는 심사 숙고하다의 의미가 있는 아랍어에서 온 단어입니다. 느헤미야가 가난한 유대인들의 불쌍한 형편을 반전(反轉)시킬 수 있는 방도를 연구하였습니다. 고리대금을 한 유력한 자들을 거기서 돌이키게 할 방법을 연구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경제적 횡포를 자행하는 부자들을 향해 분노의 감정이 솟구 치는 중에서도 차분하게 사태의 해결책을 강구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주도면밀하고 냉철한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귀족들과 관리들에게, 어찌하여, 같은 겨레끼리 돈놀이를 하느냐고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귀인과 민장을 꾸짖은 것은 다투다, 뒤흔들다, 꾸짖다 혹은 변론하다 등을 뜻하는 단어로서, 여기서는 고소하다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NIV). 칠십인역에서는 꾸짖다는 말을 상당수 사법적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귀인과 민장의 죄를 거론하는 문맥이라는 점 등으로 볼 때, 고소하다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귀인과 민장은 앞에서는 그 형제 유다 사람으로 언급된 자들입니다(1). 이들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치부(致富)하였고, 또한 그 부()를 이용해서 자기의 재물을 늘려간 자들입니다. 취리를 하는도다는 짐을 지우다, 빚쟁이 노릇을 하다, 이자를 거두다(RSV), '이자를 강요하다'(NIV) 등의 여러 해석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결과적으로 타인과 원한 관계를 형성케 하는 행동을 주로 나타낸다는 점에서(삼상 22:2) 이자를 강요하다는 의미가 정확합니다.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하겠기에, 느헤미야는 대회를 열었습니다. 귀족들과 관리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느헤미야의 일차적 꾸짖음이 귀인과 민장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대회를 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공개적인 모임에서 그들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18:15-17). 대회의 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약공동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33:4) 저희를 쳐서는 문자적으로는 그들을 향하여 혹은 그들을 대항하여의 뜻이지만 구체적으로는 귀인과 민장들을 공개적으로 정죄하고 책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동족을 이방인의 종으로 삼은 자들)

 

"8.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느헤미야는 우리는, 바벨론의 이방 사람들에게 팔려서 종이 된 유다인 동포를, 애써 몸값을 치르고 데려왔다고 합니다. 유대인인 몸값을 치렀다는 말은 에스라 및 느헤미야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있었을 때 이루어졌던 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바벨론이나 페르시아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동토 중 가난한 사람이 그 땅의 이방인에게 노예로 팔렸을 경우 율법의 명령에 따라(25:47-49) 그 속전을 지불하고 거기서 해방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개역 성경에 나오는 속량하였거늘은 바로 세우다, 획득하다, 소유하다. 사다등과 같은 여러 의미를 지니며 특히 돈이나 기타의 대가를 주고 무엇을 되사는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쓰입니다(25:10삼하 12:32:713:1).

그런데 지금 당신들은 동포를 또 이방인에게 팔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느헤미야 등이 페르시아에서 자신의 동족을 노예 생활 중에서 속량한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야만적 행위입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동족의 종살이를 했던 히브리인들도 제7년 째 되는 해에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으며(25:40, 41), 동족인 히브리인을 이방인에게 노예로 파는 일은 율법상으로 엄금되었습니다(21:8). 결국 본문과 같은 물음을 통하여 느헤미야는 귀인과 민장(7)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도록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더러 그들을 다시 이방인에게 사오라는 말이냐고 묻습니다. 이렇게 말하였으나, 그들 가운데 대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고리 대금을 한 귀인과 민장들이 느헤미야의 논리에 설복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죄악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에 아무런 변명의 여지도 없이 다만 침묵했을 것입니다(8:7-10).

 

(이자를 받지 말자고함)

 

“9.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10.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11.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

 

8절에서 자신의 선행을 근거로 해서 귀인과 민장들의 악행을 간접적으로 책망한데 이어, 9절에서 느헤미야는 그들을 직접적으로 책망합니다. 느헤미야가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귀인과 민장들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이미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소극적 인식으로는 그들을 완전히 악행에서 손떼게 하기에 심히 미흡하였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처럼 자신의 책망을 계속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당신들이 한 처사는 옳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의 부도덕 혹은 무자비하게 살면 이방인들이 실제로 비방하였습니다(2:23, 24). 느헤미야는 최소한 노예에 관한 율법 규정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일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방인 원수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거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느헤미야도 그의 친족도, 그리고 내 아랫사람들도, 백성에게 돈과 곡식을 무이자로 꾸어 주고 있다고 합니다. 형제는 느헤미야의 친 형제들을 뜻할 것입니다(1:24:237:2). 종자들은 느헤미야의 측근 혹은 그의 직계 부하들을 의미합니다(4:16).

우리가 이제부터는 백성에게서 이자 받는 것을 제발 그만두자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순수한 동기, 즉 동족들을 도우려는 동기에서 돈 등을 꾸어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우리라는 말을 써서 자신도 백성들을 향한 선한 일에 적극 참여할 당위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22:2525:3623:19) 누구보다 뼈저리게 인식하고, 또한 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솔선하여 이행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의 권면은 더욱 큰 호소력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재물을 꾸어주고 그에 따른 정당한 이자를 받는 일 자체는 정죄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이윤을 추구하는 탐욕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책망합니다. 특히 본문과 같은 다급한 상황 속에서, 느헤미야는 아예 이자를 기대하지 말고 꾸어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아테네의 위대한 개혁자인 솔론(Solon)B.C. 594년경 이와 유사한 정책을 채택한 사례가 있습니다. 10절의 권면을 구체화 시킨 실천 방법입니다 그러니 당신들도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과 집을 오늘 당장 다 돌려달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본래 가난한 채무자들의 것이었으나, 그들이 빚을 갚지 못해서 채권자에게 넘어간 담보물이었습니다. 감람원은, 백성들이 채권자에게 빼앗겼다고 한 것들(3, 5)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람, 즉 올리브가 그 당시 유대 지방에서 중요한 농산물 중의 하나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감람원도 채권자들에게 필요시 능히 제공될 수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돈과 곡식과 새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꾸어 주고서 받는 비싼 이자도, 당장 돌려달라고 합니다. 취한바 돈이나...기름은 채권자들이 채무자들로부터 받아낸 이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백분지 일은 그 당시 채권자가 자기들이 준 빚에 대해서 적용했던 월리(月利)였던 것 같습니다. 이 같은 금리는 사실상 당시 페르시아의 금리가 연 20% 이상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별로 높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가난한 자에게서 이자를 취하는 일을 율법으로 금했습니다.(22:2525:36).

그 당시에는 흉년과 성벽 재건하는 일로 백성들의 경제 형편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 즉 연 12%라는 금리는 매우 가난해서 먹을 것조차 없는 백성들에게는 과중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려 보내라는 밭과 같은 담보물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곡식등의 이자에 관련해서는, 이미 받은 것은 돌려보내며 또한 앞으로 받을 것은 포기하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12).

 

(채권자들을 결단시킴)

 

“12.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그 말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하고

 

12절은 느헤미야의 노력이 열매를 맺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모두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채권자들이 채무자들로부터 빼앗은 담보물과 이미 부당하게 취했던 이자에 대해서 돌려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다 하겠다고 합니다. 앞으로 받을 이자의 포기하고 요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곧 제사장들을 불러 모으고, 그 자리에서 귀족들과 관리들에게 자기들이 약속한 것을 서약하게 하였습니다. 느헤미야의 이 같은 조처는, 채권자들의 결단을 종교적으로 승화시켜서 그들이 자신의 결단을 번복치 못하게끔 하였습니다. 사실 공중 앞에서의 결단은 체면이나 분위기 등의 불순한 동기에 의해서 이뤄질 수 있었으므로 다시 번복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어쨌든 채권자들은 제사장 앞에서 신앙적 차원의 서원을 했던 관계로, 그 서원이 신실하게 이행될 때까지 제사장의 감독을 받아야만 했습니다(3:6-13).

 

(행치 않는 자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함)

 

“13.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느헤미야는 또 그의 주머니를 털어 보이면서 말하였습니다. 여기의 옷자락은 물건을 나를 때 흔히 사용되는, 마치 앞치마와 같이 생긴 겉옷의 무릎 부분을 말합니다. 떨치며는 흔들어 비우다의 뜻으로서 무엇을 운반하고자 옷자락의 아랫 부분을 손으로 쥐었다가 그것을 뿌리치듯이 세게 놔버리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할 경우 그 옷자락에 담긴 것은 땅에 쏟아져 내리게 됩니다.

옷을 떨치는 것은 저주를 선포하는 상징적 행동입니다(10:1418:6).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은 그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예언의 메시지의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 백성들에게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주지시켰습니다(왕상 1130-3213:1-1127:2-114:1-17 ). 이 서약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집과 재산을 이렇게 다 털어 버리실 것이오. 그런 자는 털리고 털려서, 마침내 빈털터리가 되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리 대금을 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소유물을 거둬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집과 산업은 그 고리 대금을 한사람이 자랑으로 여기던 그의 전 재산을 뜻합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말하자,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아멘! 하며 주를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불미스럽다(9)고 할 수밖에 없는 고리 대금 및 그에 따른 노예의 양산(量産) 사건이 말끔히 해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백성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총독의 녹을 받지 않은 느헤미야)

 

“14.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부터 본장의 마지막 부분(19)까지는 느헤미야가 자칫 잘못하면 이스라엘의 상류 계급층과 충돌을 빚을 소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앞부분(6-13)에서와 같이 사회, 경제적 개혁을 도모할 수 있었고 또한 성공할 수 있었던 근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근저는 곧 그의 청렴결백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에 유다 땅 총독으로 임명받아서, 아닥사스다 왕 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와 그의 동기들은 총독으로서 받아야 할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 자신이 페르시아 왕에 의해 임명된 총독임이 처음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그에게 상당한 권력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되었습니다(2:9). 총독은 18절에서 페하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를 떠났던 때로서, B.C. 444년이었습니다. 아닥사스다왕 삼십 이 년은 B.C. 433년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삼십 이 년에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가서 페르시아 왕실의 주관(酒官) 역할을 하다가 B.C. 432년경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귀환하였습니다(13:6).

느헤미야가 녹을 받지 않은 것은 백성들의 경제적 형편이 너무도 비참했었던 때문입니다. 그는 백성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사도 바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이기 위해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봉사하였습니다(고전 9:살후 3:8). 페르시아 제국 내의 지방 총독들은 중앙 정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몫을 위해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리를 포기하였습니다. 내 형제는 문자적로는 내 형제들로서 느헤미야와 함께 총독부의 일을 맡아 수행했던 관리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여기에 느헤미야의 친동생 하나니가 포함된 것은 자명합니다(1:27:2). 총독의 녹 중 녹은 문자적으로는 떡의 의미로서 총독에게 마땅히 돌아갈 생활비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전 지도자와 다른 느헤미야)

 

“15.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그런데 느헤미야보다 먼저 총독을 지낸 이들은 백성에게 힘겨운 세금을 물렸습니다. 에스라서를 통해 느헤미야가 귀환하기 전에는 스룹바벨(세스바살)이 유일하게 유대 총독으로 묘사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1:83:84:21:1). 어떤 학자들은 실제로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와의 사이에는 유대에 다른 총독이 파견되지 않았다고 단정합니다. 반면에 두 총독 사이에 엘나단(Elmathan), 예호에셀(Yehoezer), 아자이(Ahzai) 등의 총독이 있었고 느헤미야 이후에는 바고히(Bagohi), 에헤즈키야(Yehezgiah) 등의 총독이 부임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하나를 고집할 만한 확정적인 증거는 다소 희박합니다.

하지만, 당시 페르시아의 행정적 한계를 고려하건데 유대 땅에 일시적으로 총독 부재 현상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본문의 이전 총독들이란 유대 지방에까지 행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마리아 총독들을 가리킨다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사실 산발랏만 하더라도(2:10) 느헤미야가 유다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곳 백성들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영향력의 행사로 인하여 유다 백성들은, 그 필요성은 절감하면서도 예루살렘 성벽을 복구하지 못했었습니다(4:21). 토색하여는 무겁다 혹은 누르다 등의 뜻이 있는 동사의 사역형으로서, 세금 징수나 노역등의 많은 짐을 지우거나 강압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왕상 12:10, 119:1).

이전의 총독들은 양식과 포도주와 그 밖에 하루에 은 사십 세겔씩을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였습니다. 양식은 음료로 사용됐던 포도주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18절의 소와 양과 기타 곡식을 뜻할 것입니다. 또는 ...워에도 혹은 ...에 덧붙여서(besides)의 의미입니다. 결국 본 문구는 은 사십 세겔이 먼저 기본적으로 징수되었고 여기에 더해서 양식과 포도주가 각 개인의 밭이나 포도원 등의 재산 소유 정도에 따라서 별도로 징수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본절의 은 사십 세겔은, 한 세겔이 보통 노동자의 나흘치 품삯이었으므로 무려 석달여의 품삯에 해당하는 많은 액수였습니다. 그리고 이토록 많은 액수에 해당하는 은과 양식과 포도주 등은, 본절의 토색하여와 하나님을 경외하여 라는 문구들을 통해서 볼 때, 징수되어 총독 자신의 개인적 용도로 사용됐음이 분명합니다. 이것들은 한 가정에서 매년 징수됐던 것이라기 보다는, 전 백성들로부터 사사로이 징수됐던 것들의 하루 평균 분량일 것입니다. 총독들 밑에 있는 사람들도 백성을 (압제)착취하였습니다. 본절의 압제하였으나는 원래 통치하다 혹은 지배하다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상전 노릇을 톡톡히 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을 가리킵니다(109:168:9).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두려워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느헤미야가 전임 총독들과는 달리 폭정(暴政)을 행하지 않을 수 있었던 으뜸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들에게 짐을 지울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세금을 거두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곤궁에 처한 백성들에 대한 형제애 때문이었습니다(18). 결국 느헤미야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가장 크고 귀한 두 계명(22:37-40)을 나름대로 실천하고자 애썼던 셈입니다. 느헤미야는 경천애인의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 자신이 사리 사욕을 취하는 등의 폭정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부하 관리들의 월권 행사를 금지시켰습니다.

 

(부를 축적하지 않은 느헤미야)

 

“16.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느헤미야는 성벽 쌓는 일에만 힘을 기울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전 총독들이 성 역사를 적극 방해한 것(4:17-20)이나 백성의 지도자들이 성 역사에 참여치 아니한 것(3:5)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이 성 역사를 위하여 페르시아왕의 술관원이라는 편안하고 영화로운 자리(2:1)를 포기하고 그 먼 곳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그 일을 시행하는 동안 옷도 못벗고 감독과 경비를 하는 등 수고를 하였습니다.(4:23), 심지어는 그 일을 방해하는 무리로부터 죽음의 위협까지도 받았습니다(6:2). 그렇다고 느헤미야 일행이 밭뙈기를 모은 것도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고리 대금을하여 그들로부터 땅을 빼앗지 않았습니다(10).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으며, 그것을 상실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조차 파기되는 것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27:1-11). 따라서 당시 유대 사회에 횡행했던 토지 몰수 사례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이었는지가 자명해집니다. 느헤미야의 아랫사람들도 뜻을 모아서, 성벽 쌓는 일에만 마음을 썼습니다.

느헤미야의 종자들은 앞에 언급된 총독의 종자들이 백성들의 상전 노릇을 한 것과 너무도 대조됩니다(15). 사실 느헤미야의 종자들은 성 역사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성 역사에 참여하고 있던 백성들을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었습니다(4:16, 23). 느헤미야는 본이 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청렴결백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부를 축적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더러운 이를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신을 위한 지도자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지도자였습니다.

 

(백성을 섬긴 느헤미야)

 

“17.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18.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느헤미야의 식탁에서는, 유다 사람들과 관리들 백오십 명이 그와 함께 먹어야 했습니다. 통치자가 자신의 참모나 신하를 부양하는 것은 고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풍습이었습니다(왕하 25:29). 느헤미야가 많은 사람들을 자기의 상에서 함께 먹게 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지극히 당연하였습니다.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은 오히려 유다 사람들 즉 민장들(KJV, the jews and rulers LB, Jewishofficials)로 이해됩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반적 구성원으로서의 유다 사람들을 자신의 상에서 먹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변 여러 나라에서 느헤미야에게로 온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특별한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 들린 이방인 외교관들일 것입니다. 사실 페르시아정부에 의해 임명된 총독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하는 페르시아 외교 관리나, 페르시아 중앙 정부를 목적지로 하는 애굽 등지(等地)의 외교 관리가 업무차왔거나 잠깐 경유하여 쉬었다가 가려고 할 때 그들을 환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습니다. 사실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음식의 양은 그 밖의 보조적 음식을 더할 경우 4, 5백명은 능히 먹일 만한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많은 양의 음식을 대기 위해서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들로부터는 합법적인 돈일지라도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하루에 황소 한 마리와 기름진 양 여섯 마리, 날짐승도 여러 마리를 잡아야 하였습니다. 여기서 살진 양은 깨끗이 하다, 선택하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에서 온 단어로 선택한 혹은 손으로 뽑은이란 뜻입니다. 닭은 가금류(家禽類)로서의 닭이 아닌 들새 종류를 가리킵니다(4:178:8). 또 열흘에 한 차례씩은, 여러 가지 포도주도 모자라지 않게 마련해야만 하였습니다. 이것은 포도주를 마실 기회가 열흘에 한 번씩 주어졌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포도주는 중근동 사회에서는 일종의 음료였음을 볼 때, 항상 식탁 위에 올려졌을 것입니다. 다만 총독부가 그것을 열흘에 한 번씩 한꺼번에 준비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각종 포도주 다음에는 별도의 수량을 표시하는 단어 많이의 의미가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물질을 페르시야에서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총독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녹까지 요구하였다면, 백성에게 얼마나 큰 짐이 되었겠는가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 자신이 합법적으로 지출하는 비용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로부터 거둔 세금이 아닌 자기 자신의 사재(私財)로 충당했음을 뜻합니다(14). 느헤미야가 자신의 필요를 위해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치 않았던 중요한 이유는 백성의 부역이 중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15절에서 이같이 한 이유를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한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백성들을 하나님 안에서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부역은 구약 성경에서 봉사 혹은 노동 등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입니다(29:278:1128:18). 여기의 부역은 백성들이 성벽 재건에 동원되서 애쓰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를 좀더 넓게 문맥적으로 보면 성벽 재건에 따른 백성들의 수고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왕실에 바쳐지던 각종 세금(4절스 4:13)등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는 기도)

 

“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는 나의 하나님,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하는 모든 일을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느헤미야는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상급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실을 옹호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선행을 근거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4:4, 513:22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이 오직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자각 속에서, 하나님과 동료 유대인들을 향한 자신의 헌신이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상주심을 믿을 때 자신의 부를 축적하지 않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5장 강해 경제 개혁의 윤리

느헤미야 51-느헤미야 519

요절 느헤미야 56.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느헤미야 5장 강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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