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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느헤미야 4장 강해 외부의 공격을 이기는 법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4-11-04 00:00:00
조회수 : 3,391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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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아서 4장 강해 외부의 공격을 이기는 법

느헤미야 41-느헤미야 424

요절 느헤미야 4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어떤 할머니가 딱 한가지 은사만 있어서 쓰임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은사는 비판하는 은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들은 목사님은 그 은사를 나에게 쓰면 쓰임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비판이 두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비판은 분별의 의미로 쓰임입니다. 여기에는 사랑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파괴적인 비판은 미움이 들어 있습니다. 사단은 이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비판을 통하여 우리를 망하게 하고자 합니다.

 

(산발랏의 분노)

 

“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유대인들이 성벽을 다시 쌓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산발랏은, 몹시 분개하며 화를 내었습니다. 그는 유다 사람을 비웃었습니다. 산발랏이 성벽 재건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것은 그 작업이 시작되기도 전입니다. 유대인들 중에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사전에 이미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3:1, 4) 1절에는 산발랏만이 유대 백성을 훼방하는 자로 묘사되고 있는 까닭은, 그가 유대 백성을 훼방하는 일에 선동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견해는 여러 명의 훼방자가 동시에 언급될 때도, 그 이름이 항상 그들 중 첫번째에 위치한다는 사실로써도 분명해집니다(72:10, 19 6:1, 2, 5). 산발랏이라는 이름은 달신(月神)이 그에게 생명을 주었다라는 말인 바벨론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2:10에 호론 사람이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아마도 그는 에브라임 지파 남쪽 지역인 벧호론에서 출생한 듯합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성전은 이 산발랏에 의해 건립되었고 산발랏은 자기 사위를 이 성전의 대제사장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크게 분노하며, 비웃는 산발랏의 반응은, 2:19에서 보다 한층 강렬한 것입니다. 6:2에 가서는 느헤미야를 살해하려고까지 하는 것으로 발전됩니다.

 

(산발랏이 사마리아 군대를 선동함)

 

“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산발랏은. 자기 동료들과 사마리아 군인들이 듣는 데에서 말했습니다. 자기 형제들은 의논 대상이 될만한 자신의 직속 부하들을 가리킵니다. 물론 여기에는 도비야도 포함될 것입니다(3). 사마리아 군대는 페르시아 정부가 파견한 수비대라기보다는 해당 지역별로 조직된 부대인 듯합니다(4 : 23). 산발랏은 이 군대를 이용해서 유대백성을 물리적인 힘을 동원해서라도 괴롭힐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8). 사실 페르시아 정부의 지배력이 제국 내의 곳곳에 직접적으로 미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산발랏의 이같은 사악한 생각은 실천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힘도 없는 유다인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냐? 고 말합니다. ‘미약한은 쇠퇴하다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나무가 시들어 말라 비틀어지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16:8 24:17). 특히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주로 소망이 없는 암울한 상태를 가리킵니다(19:8 4:3). 산발랏은 유다사람을 무시하였습니다. 이 성벽을 다시 쌓는다고? 여기에서 제사를 지내겠다는 거냐? 유대인들이 드리려는 제사를 성벽 재건사업이 마쳐질 때에 드려지는 감사의 제사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대 백성이 성벽 재건을 완료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는 조롱의 의미로 말합니다. 아니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초자연적인 힘으로 성벽을 재건하고자 하는가라는 식의 빈정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루 만에 일을 끝낸다는 거냐? 대충 건축하려는가 유다 백성들을 무능한 자들 이라고 하는 조롱입니다. 불타 버린 돌을 흙무더기 속에서 다시 꺼내서 쓸 수 있다는 거냐고 빈정거렸습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이 성벽 재건에 사용할 석재(石材)를 확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조롱입니다.

 

(도비야의 조롱)

 

“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산발랏의 곁에 서 있는 암몬 사람 도비야도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다시 쌓으면 뭘 합니까? 돌로 성벽을 쌓는다지만, 여우 한 마리만 기어올라가도 무너지고 말 겁니다. 도비야가 산발랏의 곁에 서 있는 것을 볼 때 산발랏의 측근 혹은 직속 참모였음을 보여줍니다. 여우는 구약에서 7회 나오며(15:4 63:10 2:15 5:18 13:4) 여우는 대개 혼자 다닙니다. 도비야는 한 마리의 여우가 밟아도 성벽이 무너지는 형편없는 것이라고 조롱한 셈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벽은 훌륭한 공성(攻城) 무기로 오랫동안 공격한 후에야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과장된 조롱임이 분명합니다.

 

(원수들을 향한 느헤미야의 기도)

 

“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5.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느헤미야는 비난을 듣고 기도합니다. 느헤미야의 탄원적 기도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그분의 뜻대로,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사업이 원수들에 의해서 멸시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드려지고 있습니다.(5:19 9, 14 13:14, 22, 29, 31 69:22-28 79:12 109:6-20). 우리의 하나님, 들어주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업신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업신여김은 조롱하다 혹은 모욕하다의 의미이며 노략거리는 전리품을 뜻합니다. 여기서 느헤미야는 이처럼 발음이 매우 유사한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하여 언어유희를 살리고 있습니다. 제발, 우리에게 퍼붓는 그 욕이 그들에게 되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고, 남의 나라로 끌려가게 하여 주십시오. 느헤미야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업신여기는 행동, 즉 그 원인으로 말미암아 노략거리를 당하는 그 불행이 그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노략당하는 것은 고대 중근동 민족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환난이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역시 그와 같은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민족입니다(4:9, 10).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마시고, 그들의 죄를 못 본 체하지 마십시오. 그들이야말로 성을 쌓고 있는 우리 앞에서 주님을 모욕한 자들입니다. 여기의 덮어두지는 죄의 용서를 가리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지 말라고 합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렘 18:23 에도 나옵니다. 이러한 표현은 예레미야 시대나 느헤미야 시대에 공히 익숙한 것입니다. 악은 자기 악으로 인하여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비방하는 악에 직접 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악으로 망합니다. 우리는 악을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벽이 전부 연결됨)

 

“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유대인들은 기도한 후에 성 쌓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백성이 마음을 모아서 열심히 일하였으므로, 성벽 두르기는 마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들여 열심히 일했다는 말은 역사할 마음이 있었다의 뜻으로서, 참여자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마음 자세가 성벽 재건 사업이 크게 진척될 수 있게 된 중요한 원인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들이 열심히 하여 예루살렘 성이 예루살렘의 성벽에 의해서 완전히 둘러싸여 졌습니다. 그러나 높이는 반밖에 쌓지 못하였습니다. 반밖에는 원문상으로는 단지 절반까지 혹은 중간까지라는 뜻만 있으므로, 이 말은 성벽의 길이나 넓이에도 적용될수 있으나 높이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성벽이 원래 계획했던 것의 반정도의 높이로 쌓여졌습니다. 그들은 대적의 공격을 이기고 믿음으로 성을 건축해 나갔습니다.

 

(산발랏의 두 번째 분노)

 

“7.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이방인들의 적대감이 점증되고 있었듯이(1), 적대감을 품고 있던 이방인들의 숫자도 급격히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때에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랍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라비아 사람들은 페르시아가 중동을 재패했을 무렵에 팔레스틴의 동부인 요단 동편과 남부인 네게브 지방을 거주지로 삼기 시작했었습니다. 바로 이 족속의 한 분파를 다스리던 자가 게셈이었습니다(2:19). 암몬 사람들은 그 당시 요단의 동쪽 지역 및 심지어는 요단의 서쪽 강변에서도 살던 민족이었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블레셋 족속들이 거주했던 지역 전반에 걸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군데군데 무너진 벽을 다시 잇기 시작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몹시 화를 내었습니다. 성의 중수는 상처의 치유 혹은 상처 위로 새 살이 돋아나는 것을 가리킵니다(58:8 8:22 30:17 33:6). 건축과 관련한 이러한 표현은 대하 24:13에서도 나타나는 바, 이는 일반적으로 두루쓰인 관용적 문구인 듯합니다. 이 표현에는 예루살렘의 번영을 기원하는 느헤미야의 각별한 염원이 담겨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고자 하는 대적들의 음모)

 

“8.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그들은 한꺼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성을 치기로 함께 모의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꾀하기를은 묶다 혹은 음모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 동사로서, 어떤 질서 체계를 깨뜨리거나 혹은 어떤 대상을 망하게 할 목적으로 집단적인 이기심에 따라 배반하는 행위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되었습니다(삼상 22:8 왕상 16:16 대하 25:27). 요란하게 하자는 문자적으로 예루살렘(혹은 그)에게 상처를 입히다의 의미입니다. 여기서 그곳에게의 그는 남성 단수라는 점에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 사업을 주도하고 있던 느헤미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개역 개정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다 사람을 쳐서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를 암살하고 유대인을 멸하고자 하였습니다. 산발랏은 당시 사마리아의 총독이었으므로 느헤미야의 귀한을 허락하는 왕의 조서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직 과거에 내린 성벽 재건 금지령만(4:21-23) 내세우며 심지어 무력행사까지 감행하려 했습니다(2). 이러한 독자적인 무력 행사는 명백한 불법 행위였으며 더구나 느헤미야가 합법적 절차에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에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는 산발랏 일당의 조급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시사하며 또한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중앙 정부의 통제력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이들의 비난으로 느헤미야와 유다 사람들은 힘이 빠졌을 것입니다.

 

(기도하고 방비하는 느헤미야)

 

“9.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그래서 유대인들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비병을 세워, 밤낮으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9절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사태의 해결을 부탁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능한 방책을 강구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해 활용하고자 하는 느헤미야의 신앙적 자세는 본서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예컨데, 하늘의 하나님께 목도하고 왕에게 고하여(2:4, 5),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며(4-6), 주를 기억하고...싸우라(14)등이 그러합니다.

 

(낙심하는 백성들)

 

“10.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그런데 유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노래가 퍼지고 있었습니다. 흙더미는 아직도 산더미 같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낙심은 산발랏 일파의 협박(8)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흙 무더기는 바벨론 군대의 공격 때에 파괴된 성벽과 그 밖의 것들의 잔해를 뜻합니다. 이것들은 성벽이 재건되고 있거나 혹은 재건되어져야 할 곳에 높이 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할 일이 태산처럼 많습니다. 짐을 짊어지고 나를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 힘으로는, 이 성벽 다 쌓지 못할 것이라고 부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짊어지고 나를 힘이 없다는 것은 성벽 재건에 참여한 백성들의 심신이 매우 지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상당수가 성벽 재건에 참여치 않았음에 따라 참여한 소수의 작업량이 많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꾼 중에서 파수꾼으로 차출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산발랏을 위시한 대적자들의 위협이 날로 심해져 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적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의 주도하에 거의 절반에 달하는 정도의 공사를 이룩했지만(6) 대적들의 위협이 더욱 살벌해지자(8) 큰 불안과 낙담에 빠져버렸습니다. 이제 대적들은 유다사람들을 살해할 의도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성벽을 건축하는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원수들의 위협과 동족들의 호소)

 

“11. 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12.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유다 사람들은 게다가 우리의 원수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쳐들어와서 우리를 죽여서, 일을 못하게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원수들 가까이에서 사는 유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올라와서, 그들이 사방에서 유대인을 치려고 한다고, 열 번이나 일러주었습니다. 이 부분은 느헤미야가 파수대를 더 보강할 수밖에 없었던(13) 절박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북쪽으로는 산발랏을 위시한 사마리아 사람들, 동쪽으로는 암몬 사람들, 그리고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사람들, 또한 서쪽으로는 아스돗 사람들이라는 대적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7). 따라서 본절의 느헤미야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한 유다 사람들은 유다 땅의 외곽 지역에 거주하던 백성들입니다. 유다 땅의 변경에 살던 벡성들 중 성벽 재건에 참여치 아니한 사람들은 산발랏 등의 군사적 움직임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그들의 공세를 방어할 요량으로, 성벽 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자신의 고향으로 데려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을 열 번이나 말하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산발랏 일당의 계략이었습니다. , 대적들은 유다. 변경에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도록 만들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성벽 재건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게 해서 성벽 재건을 중단케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경비를 세운 느헤미야)

 

“13.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그래서 느헤미야는 백성 가운데서 얼마를 가문별로, 칼과 창과 활로 무장시켜서, 성벽 뒤 낮은 빈터에 배치하였습니다. 성 뒤 낮고 넓은 곳은 비록 성벽이 일부 쌓여있기는 했지만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하여 적의 침투가 예상되는 취약 지점이었던 때문에 군사를 배치하였습니다. 또한 유다 백성들을 노출된 곳에 세움으로써, 산발랏 일당에게 일전 불사(一戰不辭)의 군사적 대응 능력을 보여 주려는 것도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낮고는문자적으로 가장 낮은 장소 쪽에의 뜻입니다. 그리고 넓은 곳은 헐벗은 언덕이나, 평탄하고 장애물이 없이 노출된 장소를 뜻합니다. 또한 성 뒤는 성벽의 예루살렘 성읍 쪽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서게 하고는 모시다 혹은 서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의 사역형으로서, 특정한 직책을 수행케 하기 위하여 일정한 장소 혹은 지위에 있게 하는 것을 주로 가리킵니다(9절 삿 20:28 왕상 12:6 왕하 9:17 4:14). 종족을 따라 한 것은 군사 조직 내의 효율성을 증대케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종족 혹은 씨족끼리는 협조가 더욱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었겠기 때문입니다. 칼은 이스라엘 역사상, 근접전(近接戰)이 벌어졌을 때 가장 많이 사용됐던 중요한 무기였습니다. 또한 창은 가까이 있는 적을 찌르는 데 사용됐으며 활은 약 600m의 사정거리를 갖는 강궁(强弓)과 약 270m에서 360m 정도의 사정 거리를 갖는 경궁(經弓) 모두를 가리킵니다.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싸우라)

 

“14.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돌이번 후에 백성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느헤미야는 귀족들과 관리들과 그 밖의 백성들을 격려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의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귀인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의 권세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2:16 5:7 13:17). 민장은 다른 곳에서는 방백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남은 백성은 앞의 귀인과 민장 계층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을 뜻합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위대하고 두려운 주님을 기억하고, 형제자매와 자식과 아내와 가정을 지켜야 하니, 싸우리가 하였습니다. 지극히 크고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는, 달리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능력을 강조하는 형용사로 사용되었습니다(18:11 대상 16:25 5 76:1 86:10). 두려우신은 두렵다 혹은 두려워하다의 수동형분사로서, 많은 경우에서 종말론적으로 악인들에게 진노를 쏟아부으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강조합니다(1456:6 2:11 2:11: 4:5). 심판주 하나님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 문구는 모든 악한 자들을 권능의 하나님께서 대신 벌하여 주실 것을 믿고 백성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뜻입니다(14:9 1:29, 30 삼하 10:12). 우리가 대적을 이기는 길은 심판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옛 선조들이 믿음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대적들과 용감하게 싸웠던 사실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하나님이 친히 그 백성들을 위해 대신 싸우사 승리를 가져다 주신 엄연한 역사적 사실(14:13, 14)을 믿음의 눈으로 확고히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비록 당시의 성벽 파수대는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했고 실전 경험도 없는 군대였으며 그 무기 또한 상대적으로 열세하였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느헤미야의 확신이었습니다. 이미 느헤미야는 파수대를 종족 단위로 편성한 바 있습니다(13). 자신의 가족과 친척을 위해 싸운다는 비장한 각오야말로 숫적인 열세를 메꾸어 주는 큰 활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대적의 꾀를 파하신 하나님)

 

“15. 우리의 대적이 우리가 그들의 의도를 눈치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일하였는데

 

드디어 유대인의 원수들은 자기들의 음모가 우리에게 새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지휘 하에 무장을 한 채 조직적으로 파수하는 등 철저한 방어 체계를 갖췄다는 사실을 대적이 첩자들을 통해 들었다는 뜻입니다(13, 14). 대적들의 계획은 기습 공격으로 단숨에 살륙을 감행하거나(11) 무력의 과시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성벽 재건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주도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욱 강하게 무장하여 적극적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이게 됨으로써, 대적들의 계획은 오히려 무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실제로 무장한 병사들이 강한 정신력으로 지키는 성읍을 공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전투가 장기화되면 그 분쟁의 소문이 아닥사스다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될 것이고 결국 산발랏 일당은 왕명을 거스린 죄과까지 치러야할 터였습니다. 그들은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음모를 헛되게 하셨으므로, 유대인들은 모두 성벽으로 돌아와서, 저마다 하던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싸우십니다.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들의 계획을 부수셨다 의 뜻입니다. 이와 매우 유사한 표현이 에스라 4:5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에스라서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원수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획이 좌절됐음을 말합니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에스라서에서 사용된 독특한 표현을 여기서도 다시 사용한 까닭은,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부각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악인의 꾀에 망하게 하십니다.

 

(싸우면서 일하는 유대인들)

 

“16.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17.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18.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비록 산발랏이 쳐들어오려고 했던 긴박한 상황은 지나갔지만, 그래도 느헤미야는 여전히 잔존했었던 일말의 공격 가능성으로 인하여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 날부터 느헤미야가 데리고 있는 젊은이 가운데서, 반은 일을 하고 나머지 반은 창과 방패와 활과 갑옷으로 무장을 하였습니다. 그 때는 문자적으로 바로 그 날의 의미로서, 느헤미야가 산발랏의 음모를 감지하여 백성들을 무장시킨 그 날(9, 13)을 말합니다. 산발랏이 자신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가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 계획을 포기한 그 날(15)도 말합니다. 내 종자 내 수하는 느헤미야처럼 유다 출신들로서 느헤미야가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던 특별한 집단을 말합니다. 종자라는 단어는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하인을 가리킵니다(21:27 삼상14:6 25:5 삼하1:5 왕상19:3) 느헤미야가 자신의 종자들에게 파수 의무를 보다 많이 맡긴 까닭은 그들이 다른 백성들보다 훈련이 많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또한 보다 훌륭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관리(민장)들은 성벽을 쌓고 있는 유다 백성 뒤에 진을 쳤습니다. 민장은 군사적 조직체로서의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항상 지파 내지는 씨족 중심으로 군대를 조직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13절 민 2:1-34), 여기의 민장는 한 씨족의 지도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백성들 사이에서 연락을 담당했을 것이며 유사시에는 백성들을 전투 체제로 즉각 전환시키는 책임을 맡은 자들로 짐작됩니다. 짐을 나르는 이들은, 한 손으로는 짐을 나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기를 잡았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종자와는 달리 성벽 재건에 전념하되 유사시에는 적을 물리치는 데 동원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을 건축하는 자는 원문상 16절의 유다 온 족속을 수식하는 문구로 봐야 합니다(NIV). 담부하는 자들은 자재(資材)를 운반하거나 흙과 무너졌던 성벽의 잔해를 치우는(10)등의 조역(助役)을 담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재 운반등의 일을 위해서 성밖에서도 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에서 작업 환경은 건축하는 자에 비해서 보다 열악(劣惡) 했을 것이 뻔합니다. 각각...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다는 말씀에서 히브리 원문에는 각각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습니다. 담부하는 자는 자신들의 작업의 성격상 성 밖에서도 일을 해야만 했던 관계로 호신(護身)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여 한 손에 병기를 잡았습니다. 또 그 일의 성격상 한 손에 병거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병기는 우가릿 문서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오래된 것으로서, 멀리 던질 수 있는 창, 돌을 날려 보낼 수 있는 무기를 모두 의미합니다. 특히 본절의 담부하는 자들이 주로 흙이나 무너진 성벽의 잔해 위에서 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돌을 날릴 수 있는 무기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입니다. 성벽을 쌓는 이들은 저마다 허리에 칼을 차고 일을 하였습니다. 건축하는 자는 앞의 담부하는 자와는 달리 성벽을 쌓는 일을 담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두 손을 모두 사용해야만 하는 일의 성격때문에 칼을 허리에 찰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팔수는 느헤미야의 곁에 있게 하였습니다. 나팔수는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 그것을 예루살렘 외곽에 흩어져서 성을 쌓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입니다(19, 20 ). 이같이 나팔을 불어서 위급함을 알리는 연락체계는 고대국가들에서는 꽤 보편적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우리는 학교일과 하나님의 일을 동시에 해야합니다. 직장일과 하나님의 일을 해야합니다. 이들의 자세는 평신도의 좋은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심)

 

“19. 내가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공사는 크고 넓으므로 우리가 성에서 떨어져 거리가 먼즉 20.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21. 우리가 이같이 공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으며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느헤미야가 나팔 부는 자를 자신의 곁에 세워둔(18) 이유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귀족들과 관리들과 그 밖의 백성에게 지시하였습니다. 그는 하여야 할 일이 많은 데다, 일하는 지역이 넓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가 성읍의 둘레 전체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성벽을 따라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차라리 우리가 성벽을 따라서 각 사람들로부터 나뉘어져 있다로 번역함이 더 나을 것입니다. 결국 이는 백성들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으로 적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가해져 올 때 거기에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든지 나팔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모여와서, 우리와 합세하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서 싸워 주신다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우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대신 싸우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도구로 삼아서 원수와 싸우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이 방어되고 또한 당신의 백성이 안전하게 사는 것이 철저하게 당신의 뜻이므로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싸웁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싸우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 곧 성전(聖戰)일 수밖에 없습니다(5:13-5) 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은 아무리 우수한 무기와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도,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127:1)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에 전적으로 공감하기 마련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른 새벽부터 밤에 별이 보일 때까지 일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시간 동안 노역을 감당했었음을 강조하는 시적(時的) 표현입니다. 아울러 이는 백성들의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반수는 창을 들고 일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자도록 방향을 줌)

 

“22.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이 기간에 느헤미야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였습니다. 밤에는 저마다 자기가 데리고 있는 부하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와 묵으면서 경계를 서고, 낮에는 일을 하라고 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명령한 이유는 아마 외지(外地)에서 공사를 위해 온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 인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저녁에 일이 마쳐지면 자기의 집으로 가서 자려는 경향이 있었던 때문으로 짐작됩니다. 만일 백성들이 집으로 돌아가도록 방치할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고향에 왕래하는 도중 적의 기습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예루살렘의 작업장으로 복귀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침마다 집에서 돌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야기되는 혼란과 공정(工程)의 답보 현상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고향이 멀어서 저녁마다 갈 수 없는 사람과 가까운 데 고향이 있어서 저녁마다 집으로갈 수 있는 사람 사이에 위화감이 생길 가능성도 있습니다. 밤마다 발생할 예루살렘 시내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으로 인해 적의 야간 습격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위의 모든 문제들로 인해 성벽 재건 공정이 늦어질 가능성 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한 이 종자들은 16절의 종자와는 다릅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여기서 자신의 종자를 언급하는 것이라면 16절에서 처럼 내 종자라고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그 종자는 백성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데리고 온 노예일 것입니다. 실제로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백성들에게는 여섯 명당 한 명씩의 노예가 있었습니다(2:64, 65).

 

(옷을 벗지 않고 자는 사람들)

 

“23.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

 

느헤비야도, 그의 형제들도, 그가 데리고 있는 젊은이들도, 그를 따르는 경비병들도,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잠을 잘 때 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물을 길러 갈 때에도 무기를 들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오분대기조와 같이 긴장의 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아서 4장 강해 외부의 공격을 이기는 법

느헤미야 41-느헤미야 424

요절 느헤미야 4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느헤미야 4장 강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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