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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사사기 18장 강해 형통주의 신앙의 문제점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2-05-29 00:00:00
조회수 : 3,860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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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8장 강해 단지파의 저주
사사기 18장 1-사사기 18장 31절
요절 사사기 18장 5절

새해가 되어 복받으라고 합니다. 용한 점쟁이는 해가 바뀌면 큰 대목을 봅니다. 연말연시로 1년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대부분 연인들이 결혼 전에 점쟁이를 찾아간다고 합니다. 많은 점쟁이들이 앞으로 형통할 것을 예언합니다. 점쟁이들이 형통을 예언하는 것은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BC 6세기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칠 준비를 하면서 영험하기로 소문난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가서 앞날을 물었습니다. 무녀가 준 신탁은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한다면 그는 큰 왕국을 멸망시킬 것이다” 크로이소스는 당연히 자신이 이긴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페르시아와 신나게 싸우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게 보기 좋게 패하고 리디아는 멸망했습니다. 목숨만 겨우 건진 크로이소스는 다시 델포이에 가서 무녀에게 항의 했습니다. 하지만 무녀는 “멸망한다는 그 왕국이 페르시아의 것인지 자기 자신의 것인지 묻지 않았느냐?” 라고 대꾸했습니다. 이때 크로이소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딴 예언은 나도 하겠네...” 델포이의 신탁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델포이(Delphi) 라는 뜻은 ‘애매모호한, 아리송한’ 이라는 뜻도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점장이들이 형통을 예언하는 것은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점쟁이가 득세하는 것은 사람들이 형통함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통함을 추구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형통만을 추구하면 망하게 됩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형통은 저주입니다. 단지파는 형통함만을 추구하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단지파는 기업의 땅을 구하였습니다)

18장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사사기 시대의 특징은 왕이 없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지파를 세워서 말씀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레위지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자 레위지파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래위지파는 월급을 받지 못하자 말씀을 연구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법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무정부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단지파는 더욱 심각합니다. 단지파는 라헬의 종 빌하의 소생입니다. 야곱은 단을 뱀이요 독사라고 하였습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 49:16-17). 야곱은 단이 지혜는 있으나 세상적인 지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야곱은 단이 세상적인 지혜를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뱀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지혜를 계속하여 추구하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지파의 후손이 단군의 후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 근거가 없습니다. 단지파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후 예루살렘 서쪽의 벧세메스 일대 쉐펠라(저지대)를 분배받았습니다. 동쪽으로는 베냐민과 접하였고, 남쪽으로는 유대지파와 경계를 맞대고 북쪽으로는 에브라임 지파에 이어 있습니다. 단지파는 블레셋의 아모리 족속이라는 강력한 적을 남서쪽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아모리의 세력이 팽창할 때마다 단지파는 동쪽 산악지방으로 조금씩 밀려났습니다 나중에는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서야 할 정도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단지파는 기업을 얻지 못하고 새로운 땅을 찾고 있었습니다. 단지파는 아모리족속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이 주신 땅을 얻기 위해서 마땅히 믿음으로 싸움을 싸워야 했습니다. 단지파에 훌륭한 사사 삼손이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싸웠다면 아모리 땅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삼손을 두고도 그들은 믿음이 없어서 아모리족속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싸워야할 싸움을 피하였습니다. 그들이 다른 땅을 구한 것은 불신입니다.

(단지파는 편리한 땅을 찾았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그들의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니라” 단지파는 소라와 에스디올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용맹한 자 다섯 명을 보내어서 그들이 거할 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힘들게 살아도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은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들이 어려운 약속의 땅을 떠나 쉬운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은 뱀처럼 지혜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 신자는 천하를 주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합니다. 어떤 고난의 길이라도 하나님의 뜻이면 갈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그러나 단지파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나름대로 편한 땅을 찾아나섰습니다. 그들이 정복하기 쉬운 땅을 찾아서 북으로 북으로 에브라임 땅에 사는 미가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미가는 돈을 받고 봉사하는 거짓 제사장입니다. 그들은 미가의 집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단지파의 정탐군이 미가의 제사장을 만났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미가의 집에 있을 때에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하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하여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하니라” 다섯 정탐군은 레위인 제사장이 쓰는 남쪽 사투리를 통해서 그가 남쪽에서 온 제사장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레위인이 어떻게 북쪽까지 왔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레위인은 자신이 떠돌다가 미가의 집에서 월급을 주어 이 집에서 제사장으로 섬기고 있는 것을 말했습니다.

(단지파는 형통한 길을 원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정탐꾼들은 미가의 집에 있는 제사장에게 그들이 가는 길이 형통할 것인지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가는 길이 형통한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는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형통한지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무당을 찾아가는 자와 같습니다. 무당을 찾아가면 이 대학에 가든지 아니면, 이사람과 결혼하든지, 아니면 이 사업을 하면 형통한지를 물어봅니다. 우리는 형통을 묻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대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 길에 결박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면 가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형통하기를 원합니다. 형통한 것은 번성하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통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난이 오면 사단이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형통도 있습니다. 불신자들도 형통합니다. 이건희씨도 정몽구씨도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형통합니다. 일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이지만 형통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형통은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형통하지 않고 고난이 올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사기 18장을 보면서 하나님 없이 형통한 단지파를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이 너무나 형통하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형통은 저주입니다. 단지파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교회의 성도수가 늘어서 형통하면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고 모여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인수가 많다고 좋은 교회는 아닙니다. 이단교회도 성도수는 많은 곳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말씀대로 정탐군을 돕지 않았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미가의 제사장은 정탐군들에게 형통하니 평안히 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레위인으로 제사장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는 미가의 집에서 돈으로 고용된 거짓 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진실된 제사장이라면 단지파 사람들이 약속의 땅을 떠난 것을 책망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장은 점쟁이와 같이 평안만을 예언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점성가나 예언가들은 형통하기 위해서 복채를 사고 굿을 하라고 합니다. 그들의 말대로 되지 않으면 적당히 둘러냅니다. 교회에서도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점쟁이와 같은 것입니다.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의 축복은 회개한 자에게 온다는 것을 전해야합니다. 죄를 지은 자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야합니다. 회개하고 믿음을 가진 자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해야합니다.

(정탐군은 평안한 라이스 땅을 발견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그 다섯 정탐군은 미가의 제사장을 만난 후 라이스 땅에 이르러 그들이 평안하게 거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라이스는 요단 강 계곡 상류에 있던 시돈 사람의 성읍입니다. 라이스는 레바논 산과 헐몬 산으로 둘러 있어 천연의 요새만 믿고 자치 정부나 군사 조직 없어 점령하기에 아주 좋은 땅이었습니다. 시돈의 통치 하에 있었지만 레바논 산맥이 중간에 가로막혀 시돈 사람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어(삿 18:28) 한가하고 평안하게 지내는 곳이었습니다(삿 18:7, 27). 백성들은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였습니다.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렸습니다. 정탐군들은 제사장의 말대로 형통했습니다. 이것이 단지파의 멸망원인입니다. 이곳은 형통하지만 예루살렘 성전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서 예배드리기 어려운 곳입니다.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단지파는 라이스 땅을 취하자고 합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가서 그들의 형제들에게 이르매 형제들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보기에 어떠하더냐 하니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는지라” 다섯 정탐군은 단지파에게 돌아와서 자신들이 정탐한 땅이 매우 좋으니 가서 취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가면 천연요새지이므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땅은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정탐군들은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형통한 것을 보니 하나님이 그 땅을 우리 손에 넘겨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라이스 땅은 고난없이 땅을 받을 수 있으므로 그 땅을 얻은 것은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대로 살지 않았는데 물질적인 복을 받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복을 받아야합니다.

(단지파는 기럇여아림에 진을 쳤습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단 지파의 가족 중 육백 명이 무기를 지니고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출발하여 올라가서 유다에 있는 기럇여아림에 진 치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이 오늘까지 마하네 단이며 그 곳은 기럇여아림 뒤에 있더라 무리가 거기서 떠나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이르니라” 정탐군의 말을 들은 단지파는 매우 기뻤습니다. 그들은 단지파에서 선발한 단지파의 가족 중에 육백 명을 이끌고 라이스 땅을 공격하기 위해 갔습니다. 그들은 유다에 있는 기랏여아림에 진을 쳤습니다. 사람들은 그곳 이름은 마하네 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뜻은 단의 진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곳 이름을 단의 진영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곳에 2-3년은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기럇여아림에서 오래 머문 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라이스에 가는 것에 대해서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럇여아림은 단의 남쪽입니다. 그들을 아직 라이스로 가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이 라이스로 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결국 그 기회를 놓치고 다시 북쪽에 있는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집으로 갑니다.

(단지파는 미가의 우상을 탈취하고자 합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전에 라이스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 형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하고 다섯 사람이 그 쪽으로 향하여 그 청년 레위 사람의 집 곧 미가의 집에 이르러 그에게 문안하고 단 자손 육백 명은 무기를 지니고 문 입구에 서니라” 그들이 유다지파의 땅 기럇여아림에서 갈등할 때에 단지파의 다섯 정탐꾼은 라이스에 가기 전에 에브라임 지파의 미가의 집에 있는 에봇과 드라빔과 우상을 쟁취하자고 하였습니다. 우상을 탈취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단지파의 다섯 정탐군은 자신들이 형통했던 것이 이 신상과 제사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계속 형통하기 위해서는 이 신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가치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생활의 형통입니다. 그들은 만사형통하기만 한다면 우상을 섬겨도 좋았고 강도짓을 해도 좋았습니다. 이는 참으로 위험한 신앙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다가도 고난이 있으면 믿지 않고 무당을 부르더라도 좋은 일이 있으면 믿습니다. 병만 낫고 시험에만 합격하면 누구라도 의지합니다. 사단도 우리에게 잠시 이적을 베풀 수 있고 형통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형통함의 끝이 어떠한가?를 보아야 합니다. 단 지파는 우상 숭배를 하다가 우상 숭배의 대명사가 되어 버립니다. 단지파는 앗스르의 침략 후에 소멸되어 버립니다. 계시록에 구원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숫자에서 단지파는 아예 빠져 버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도 고난이 올 수도 있습니다. 경건하게 사는 자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반드시 핍박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끝을 보아야 합니다. 그날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심판을 받고 지옥에 들어갈 것입니다. 단지파의 철학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입니다. 그들은 물질적인 탐욕에 눈이 멀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눈이 멀어서 우상이 그들을 형통하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상은 정탐군이 그들이 거할 거처를 찾을 때 좋은 말을 해주었습니다. 우상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은 귀를 긁어주는 말을 하였습니다. 죄를 책망하지 않고 격려만 하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형통하게 해준 우상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탐욕으로 미혹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미가의 집에 이르러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약탈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의 겉옷입니다. 드라빔은 가정의 수호신으로 점치거나 예언할 때 쓰는 것입니다. 왕하 16장 10절에보면 아하스 왕은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갑니다. 그들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습니다. 제사장 우리아는 그 그림을 따라서 앗수르의 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제단을 만들고 아합은 그 곳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아합왕은 앗수르가 형통하니 그 신을 섬기자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야망을 채우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메시지만 전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이 교회가 잘 되고 번창하는 것은 저주로 가는 길입니다. 고사성어 중에 ‘취금지시 불견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제나라 때 일인데 대낮에 어떤 사람이 금은방에 들어와서 금을 훔쳐 달아나다가 포졸에게 잡혔습니다. 포졸이 그를 끌고가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 금을 훔쳐가는 못난 놈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금을 훔칠 때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돈에 눈이 멀면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파 전체가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17-20절을 보십시오.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서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져갈 때에 그 제사장은 무기를 지닌 육백 명과 함께 문 입구에 섰더니 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지고 나오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하니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 단지파 사람들은 무장한 군인 육백명이 미가의 집 입구에 섰습니다. 다섯 정탐군은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도적질하였습니다. 제사장이 왜 내가 섬기는 우상을 가져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단지파 사람들은 제사장의 대우를 더 잘해줄 테니 우리와 가자고 하였습니다. 월급도 많이 주고 보너스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한 가장의 제사장이 아니라 한 지파의 아버지요 제사장으로 높은 명예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대우를 잘 해주니 그리로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목자가 월급을 많이 주고 명예를 준다고 큰 교회를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곳에 가는 것이 말씀에 기초하여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를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제사장은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갖고 그 백성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은 파우스트처럼 젊음과 물질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팔았습니다. 그를 통해서 단지파가 우상을 숭배하고 북이스라엘 전체가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단지파는 무력으로 미가를 &#51927아냈습니다)

21-2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돌이켜서 어린 아이들과 가축과 값진 물건들을 앞세우고 길을 떠나더니 그들이 미가의 집을 멀리 떠난 때에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붙어서 단 자손을 부르는지라 그들이 얼굴을 돌려 미가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 하니 미가가 이르되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고 하느냐 하는지라 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단 자손이 자기 길을 간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 단지파가 우상과 제사장을 데리고 떠나자 미가와 이웃집 사람들이 단지파를 쫓아가서 신상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단지파 사람들은 미가의 집안 사람들이 소리를 높이면 그 가족을 몰살시키고자 위협하였습니다. 아예 말도 못하게 합니다. 미가의 집안 사람들은 역부족으로 우상을 빼앗겼습니다. 미가의 집 사람들은 우상을 빼앗긴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복입니다. 단지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형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파는 라이스를 점령합니다)

27-29절을 보십시오. “단 자손이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되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거리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단 자손이 성읍을 세우고 거기 거주하면서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였더라” 단자손이 미가가 만든 우상과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로 갔습니다. 그들은 한가하고 걱정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살랐습니다. 그곳은 시돈의 지배를 받는 시돈 땅이지만 시돈과 거리가 멀어서 구원할 자가 없었습니다. 단 사람들은 라기스를 점령하여 그곳 이름을 단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거짓 제사장의 말대로 형통하였지만 그들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단지파는 우상을 숭배합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단 자손은 그곳에 우상을 세웠고 요나단과 그 자손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실로에 있었지만 그들이 실로까지 가는데 거리가 멀었습니다. 단 자손은 자기 땅에서 편리를 따라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단지파는 성공이 오히려 독이었습니다. 단지파의 성공을 통하여 한 집의 우상 숭배가 한지파의 우상숭배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한 지파의 우상숭배가 북이스라엘 전체의 우상숭배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숭배한 것은 앗수르에게 망하는 날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로 인하여 망하게 되었습니다. 단지파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저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단 지파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애기가 있습니다. 멧돼지들이 모여서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돼지들은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어느날 기도의 응답으로 그들은 인간을 만났습니다. 인간들은 멧돼지를 넓은 울타리에 가두어 두고 먹을 것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이 그들에게 형통함을 주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한 마리의 돼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멧돼지 사냥을 나왔을 때 홀로 성경책을 읽다가 인간들에게 잡히지 않았습니다. 잡히지 않은 돼지가 잡힌 돼지들의 울타리 곁으로 가면 잡힌 돼지들은 그들이 먹는 것을 자랑하며 그들이 믿는 우상이 그들에게 만사 형통케한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돼지는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녀야 하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런데 돼지들의 살이 디룩디룩 쪘을 때 돼지들은 한 마리 한 마리 도살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과연 만사 형통하던 돼지들이 복을 받은 것일까요? 단지파는 이런 돼지들처럼 되었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섬겼을 때 형통했던 것이 단 지파의 파멸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형통한 것은 사단이 주는 미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 고난이 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형통함을 갖고 신앙생활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유요셉 선교사님은 몇 번째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이는 믿음을 연단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유요셉 선교사님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진실된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은 유요셉 선교사님을 축복하시고 병특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노스케롤라이나에서 박사를 마치고 삼성에 취업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믿고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면 극력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만약 그들이 풀무불에 던져지면 하나님은 그들을 건져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형통하지 않고 비록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끝까지 섬기겠다는 것이 순수 복음 신앙인 것입니다. 어떤 형통함이 있어도 하나님이 주신 길이 아니면 거절할 수 있어야합니다. 어떤 고난도 하나님의 뜻이면 갈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이지 형통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딤후3:15) 우리가 성경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순수 복음 신앙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8장 강해 단지파의 저주
사사기 18장 1-사사기 18장 31절
요절 사사기 18장 5절
사사기 18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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