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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스가랴 12장 강해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11-28 00:00:00
조회수 : 5,539
스가랴 12장 강해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스가랴 12장 1-14
요절 스가랴 12장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예루살렘에 대해서 경고해주는 말씀입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수천 년을 내다보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한절 한절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한 말씀 한 말씀이 예언이면서 역사를 함축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스가랴는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민족적인 이스라엘과 신령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시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여기 경고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맛사이니 협박하는 예언(threatening Prophecy)을 가리킵니다. 스가랴는 경성하지 않는 자를 깨우치기 위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창조자로 칭하는 목적은, 그가 창조적 능력으로써 아래 말씀하실 위대한 일을 하실 자이심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하늘을 펴신다 함은, 하늘에 무수한 천체들을 유지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물질계에 하신 일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일입니다. 오늘날 발달된 문명도 천체들의 세계 곧, 우주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발달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크고 오묘합니다. 땅에 터를 세우심은 또 한 가지 그분이 하신 놀라운 일입니다. 땅은 어떻게 그 궤도대로 운전되도록 구조 되었는가?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사람 안에 심령 을 지으신 자도 전능하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심령은 위에서 말한 하늘이나 땅보다 오히려 만들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심령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술잔으로 만드신 하나님)

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모든 민족에게 취하게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이르리라” 이스라엘은 취하게 하는 잔입니다. 그 잔을 공경하는 자는 성령의 술에 취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포도주 잔처럼 생각하고 정복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이곳을 점령하다가 망합니다. 이제,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잔으로 만들어 주변의 모든 민족을 취하게 하고, 비틀거리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는 날에는, 유다의 여러 성읍들도 다 포위를 당할 것입니다. 열국은 예루살렘을 취하려고 왔으나 드디어 힘을 잃고 패망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에루살렘이 저들에게 마취제 같이 된 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성경에서 취하게 하는 음료로 비유됩니다(사 41:17).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통하여 열국에게 진노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교회가 이방인에게 성령의 술을 공급하는 곳이 됩니다. 그러나 교회를 박해하는 자는 이스라엘은 사약과 같은 것이 됩니다. 그들은 독이 든 술을 마시고 망할 것입니다. 교회를 치는 자는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무거운 돌이 되게 하신 하나님)

3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그것을 드는 모든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그 날에, 세상 모든 이방 민족이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집결할 것입니다. 그때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바위가 되게 할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힘을 다하여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바위를 기초로 하여 집을 짓는 자는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위를 들어올리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지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여기 모든 국민은 열국의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열국은 예루살렘을 치려다가 도리어 자기들 편에서 손해를 보고 맙니다. 이 돌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단 2:45 사 28:16 슥 3:9 눅 20:17 마 21:44). 그들은 돌을 들려고 하지 말고 그곳에 자신의 집을 지으려고 해야합니다. 마르티는, 여기 무거운 돌에 대한 말씀은, 헬라에서 예루살렘으로 수입된 경기의 풍습에서 왔다고 합니다. 청년들이 힘겨루기를 하면서 무거운 돌을 쳐들었는데 그리 하다가 흔히 몸을 상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적국을 꺾으심)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보고 모든 민족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말을 쳐서 놀라게 하고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고 눈을 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적군들의 병력을 권능으로 꺾을 것을 예언하십니다. 놀라게 하거나 눈이 멀게 하여 패전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왕하 6:18 삿 7:22 삼상 14:20).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돌보십니다. 그런 일은 역사상 있었습니다(삼상 7:5-11 느 1:11 사 37:36). 이 말씀에 기록된 세 가지 재앙(놀라게함, 미치게함, 눈 멀게함) 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내릴 것입니다. 모세가 일찍이 말한 바도 있습니다(신 28:28).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언제나 천벌로 망합니다. 불란서 왕이 기독교를 반대하며 개혁자 안드류 리베트를 위협할 때에 리베트는 왕에게 담대히, “하나님의 교회는 많은 쇠망치를 부러뜨린 쇠모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힘이 되신 여호와)

5절을 보십시오. “유다의 우두머리들이 마음속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주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지라” 그러면 유다의 지도자들은 속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주를 힘입어서 강하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예루살렘 거민들이 힘이 됩니다. 그들(예루살렘 거민들)이 하나님 곧, 만군의 여호와의 택한 백성이므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힘이 됩니다.(10:12, 3:2, 1:17, 2:11). 시 87:2 참조. 이렇게 단체의 일이 잘 될 때에는, 그 단체의 성원들이 서로 높입니다. 남이 나에게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힘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화로같게 하시는 하나님)

6-7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내가 유다 지도자들을 나무 가운데에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민족들을 불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들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살게 되리라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주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날에 유다지도자들은 화로와 같고 곡식단 사이에 횃불과 같게 하십니다. 사이에 있는 화로와 횃불은 주위를 따뜻학 하고 불태웁니다. 그들을 영접하는 자는 어둠을 밝히고 따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대적하면 그들은 좌우에 에워싼 모든 민족을 불사를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곧, 복음 전도자들이 모든 불신앙과 죄악의 적들을 이기고 교회도 왕성케 할 것에 대한 비유한 것입니다. 교회의 원수들은 언제든지 교회를 없이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교회(예루살렘 사람으로 비유되었음)는 늘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집(곧 이스라엘 왕족이나 예루살렘 거민)과 꼭 마찬가지로 유다 지방 백성도 사랑하십니다. 그는 오히려 성벽이 없는 유다 지방 사람들을 먼저 구원하십니다(렘 9:24 고전 1:31 고후 10:17 갈 3:28 눅 10:20 약 2:5). 그날에 유다 사람을 예루살렘보다 먼저 구하시고, 예루살렘 사람처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유다 지방을 예루살렘보다 먼저 구원함은, 구원이 하나님께로서 온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유다 지방은 예루살렘과 달라서 성벽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원이 거기 먼저 임하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다윗의 족속을 하나님 같이 하심)

8,9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이방 나라들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그날에는 약한 자가 다윗과 같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하나님의 사자 같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 사람들을 강하게 회복시켜주십니다. 신약 시대에 신자들이 어떻게 큰 은혜 받을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 약한 자라는 말은, 넘어진 자(Stumble)를 의미합니다. 넘어진 자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올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다윗의 족속은 다윗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의 집은 다윗의 왕통을 의미합니다. 그 영광이 그리스도(다윗의 후손이심)로 말미암은 구속 사업으로 하나님같이 나타났습니다. 스가랴는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더욱이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라는 명칭은 실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위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염두에 둔 것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그 날에 예루살렘을 치러오는 사람을 멸하십니다. 사람은 아무리 힘써도 성공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엇을 목표하시고 힘쓰시는 것은 그대로 다 이루십니다. 그는 교회의 원수들을 멸하실 것을 힘쓰신다고 하셨으니, 교회의 원수들은 그 앞길이 캄캄할 뿐입니다.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심)

10,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그 날에 하나님은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팔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면 바로 죽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창으로 찔러서 죽은 것을 확인합니다. 그들이 십자가에서 찌른 메시야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보며 죄를 애통합니다. 마치 장자를 잃었을 때처럼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그들이 살인하였습니다. 만왕의 왕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바로 나의 죄라고 생각하며 슬퍼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찔린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를 보면서 우리는 애통합니다. 이것은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 끝에 일어난 회개 운동으로 성취되기 시작한 것입니다(행 2:37-41).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 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고난을 생각하고 애통하는 것은,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그들의 죄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혹 우리가 잘못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우리는, 기뻐할 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생각 밑에서 죄를 아프게 여겨야 합니다. 자기 죄에 대하여 통분히 여길 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슬퍼할줄 모르는 자는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라고 하였습니다(약 4:9). 본문에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라고 했으니, 이는 진정한 슬픔을 의미하며, 깊은 슬픔을 의미합니다. 자기 죄가 메시야를 죽인 일에 대하여 이런 진정한 슬픔을 가진 자들은 진정한 영적 희열을 가집니다.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은, 요시야 왕이 거기서 전사한 때에 유대인 들이 슬퍼하였음을 의미합니다(대하 35:22). 유대인들이 추앙하던 왕의 죽음은 그들의 큰 슬픔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메시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신자들의 슬퍼할 일입니다. 그들은 단지 육체적 슬픔이 아니고 회개의 슬픔을 가지니 신령한 슬픔입니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다 눈물을 소유합니다. 눈물 없이는 십자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눈물은 부드러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부드럽지 않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으니 어찌 십자가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곧 눈물 의 골짜기를 지남이 없이 하나님의 품에 이르는 길은 없다. 실망, 낙담, 응답되지 않는 기도, 이것이 있고서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실망, 낙담할만한 때에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함)

12-13절을 보십시오.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인 그들의 죄가 너무 크게 깨닫고 애통합니다. 각 족속들이 따로 따로 애통합니다. 다윗의 족속은 유대의 왕족이고, 나단의 족속도 그러합니다(나단은 다윗의 아들임). 그리고 레위의 족속은 제사장 족속이고, 시므이의 족속도 그러합니다(시므이는 레위의 증손임-민 3:18). 스가랴가 여기서 왕족과 제사장족을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케 합니다. 여기 따로라는 말이 열 한 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회개의 애통을 진실하게 또는 착실히 가져야 할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애통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자 모두가 다윗보다 더 강한 자가 됩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횃불과 같고, 돌과 같고, 하나님과 같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들을 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들을 통하여 세계 만민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스가랴 12장 강해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스가랴 12장 1-14
요절 스가랴 12장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스가랴 12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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