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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스바냐 1장 강해 심판으로 요시야를 도우시는 하나님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4-10-25 00:00:00
조회수 : 3,979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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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 1장 강해 심판으로 요시야를 도우시는 하나님

스바냐 11-스바냐 118

요절 스바냐 1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스바냐에 말씀은 다른 선지자들의 말씀과 메시지의 방향이 다릅니다. 다른 선지자의 말씀은 회개하면 용서하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스바냐는 회개하는 요시야를 도와서 백성들이 철저히 회개하도록 돕습니다.

 

(요시야왕 때 주신 말씀)

 

“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 때에, 주께서 스바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선지자 스바냐가 사역을 하던 때는 요시아왕 시대였습니다. 당시 국제적으로는 강대국 앗수르가 본국 사정으로 인해서 서쪽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요시아 왕이 철저한 개혁을 시행하고 국토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왕하 22:1-23:20). 유다의 왕에는 좋은 왕과 좋지 않은 왕이 있습니다. 좋지 않은 왕이 좋은 왕보다 휠씬 더 많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권력자는 좋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권력이 문제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선한 사람이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들이 지배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분은 정신병자가 지배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히틀러는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스탈린 레닌도 그렇습니다. 레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합니다. 러시아 10월 혁명에 레닌은 불안하고 초조로 가득차서 안절부절 못합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은 좋은 왕입니다. 8살에 왕이 되어 31년 왕을 합니다. 그는 20살이 되면서부터 왕권을 잡고 우상숭배를 제합니다. 다 타락한 성전을 중건합니다. 성전에 비가 세고 짐승이 드나는데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는 성전수리를 하다가 성경잭을 발견합니다. 그 성경을 읽으면서 모든 백성이 회개합니다. 그는 훌륭한 왕입니다. 선지자 스바냐는 그의 아버지가 구시이고, 할아버지는 그달리야이고, 그 윗대는 아마랴이고, 그 윗대는 히스기야입니다. 선지자가 자신의 족보를 소개하는 것은 스바냐가 유일합니다.

 

[우상을 제거하시는 하나남]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3.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요시야왕은 몇백 년 섬기던 우상을 제거합니다. 요시야 왕이 제한다고 해도 백성들의 마음에 우상을 다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 마음이 백성까지 내려가지 못합니다. 북한은 삼대 혁명 곧 사상, 기술, 문화혁명을 하자고 합니다. 사상이나 문화까지 바꾸자는 것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잘 바뀌지 않습니다.

중국에 절간에 보니 절간 앞에 향로의 직경이 삼 미터는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향을 넣는데 제련소 굴뚝 같이 연기가 오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문화혁명이라고 하여 생각을 바꾸려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우상숭배를 바꾸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합니다. 정치적인 변화는 와도 신앙과 문화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요시야왕이 우상을 없애라고 합니다. 성전을 보수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성경을 읽으며 부흥회를 합니다.

그러나 국민들 사이에는 여기저기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에 가서는 우상에게 절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혼합주의입니다.

하나님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말끔히 쓸어 없애겠다고 하십니다. 지면에서는 노아의 홍수 때를 상기시키는 단어로(6:7 7:4) 특별한 수식어가 붙지 않는 한 지역적인 땅의 한계를 넘어선 세상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진멸하리라는 문자적으로 완전히 쓸어버리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철저하며, 그 정도가 매우 심하게 하십니다. 여호와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쓸어 없애고, 공중의 새도 바다의 고기도 쓸어 없애십니다. 남을 넘어뜨리는 자들과 악한 자들을 거꾸러뜨리며, 땅에서 사람들의 씨를 말리십니다. 여호와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거치게 하는 것은 우상을 가리키거나 남을 넘어뜨리는 자들로 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짐승,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그리고 우상을 악인들과 더불어 파멸시키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특별히 저자는 진멸하고를 두 번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엄격하며 정도가 심한 것으로 철저한 파멸을 초래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요시야왕이 모든 우상을 진멸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우상을 진멸하겠다고 하십니다. 우상을 제거하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쓸어버린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마음은 있지만 실행능력은 없습니다. 마음은 있으나 추진력이 없습니다. 나는 행하지만 가족과 교회와 사회를 바꾸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요시야가 바로 서면 하나님이 친히 우상을 제거하신다고 하십니다. 요시야왕에게 힘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분명히 하면 하나님이 시행하십니다. 선한 사람이 능력이 없고 악한 자가 힘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한 자와 함께 하시고 그들을 도와주십니다.

 

(혼합주의를 제거하심)

 

“4.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5.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6.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여호와가 손을 들어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치십니다. 손을 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것을 시사합니다(5:259:12,17,21).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은 크게 다섯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이 곳에 남아 있는 바알 신상을 없앱니다.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의 신으로, 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알은 농경신으로 다산을 주관하는 풍요의 신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주민들이 섬기던 바알을 섬겼습니다. 여기서 바알의 남아있는 것은 요시야가 개혁을 추구했지만 많은 바알 숭배 사상이 남아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바알 우상을 파괴하실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우상을 없애십니다. 이방 제사장을 부르는 그마림이란 이름도 뿌리 뽑으십니다. 그마림은 히브리어 케마림을 음역한 것입니다(왕하 23:5 10:5). 이것은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제사장들을 가리키던 명예로운 칭호였습니다. 그마림에 이어 기술된 그 제사장들을 70인역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마림을 보충 설명하고자 부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알의 남은 것들만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이방 제사장들조차 모조리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을 섬기는 자들을 멸하십니다. 이들은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별과 달을 숭배하는 의식은 가나안과 바벨론에서 흔히 행해졌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가나안과 바벨론의 영향을 받아 왕정 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별과 달을 숭배하였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4:19 왕하 21:3,5 8:2 19:13 44:8-10).

하나님은 선지자 스바냐를 통해서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도 예외 없이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에게 맹세하고 주를 섬기면서도 말감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을 앱애십니다. 70인역에서는 이것이 암몬 족속의 신이었던 밀곰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캄은 바알을 지칭하기 보다는 암몬 족속의 신인 밀곰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이러한 말감은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서 산당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어(왕상 11:5-8,33 왕하 23:13)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악에 빠지게 했던 우상 중의 하나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맹세한 후에도 말감을 섬기는 종교적 혼합주의를 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혼합주의는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때에 예루살렘에서 흔히 자행되던 죄악이었습니다(왕하 16:3). 말감은 몰렉신의 일부입니다. 땅에 있는 지신地神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로 결정하신 대상은 배교자들과 불신앙자입니다.

찾지도(비케쉬)와 구하지도(다라쉬)는 신명기서와 예언자들은 이것을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과 연관시켜서 사용하기보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과 연관시킵니다(4:29 5:4-6). 여호와를 찾고 구하는 자는 내적으로, 도덕적으로 여호와만을 바라며 그 계명을 즐겨 행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유다 거민들 중에는 하나님을 바라기는커녕 도리어 내면적, 도덕적으로 배교하거나 불신앙에 빠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도 옛날에 섬기던 말감을 버리지 못합니다. 마음 속에 풍속 속에 귀신을 버려야합니다.

요즘도 손없는 날 골라서 이사가고자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손 있는 날 이사해야 합니다. 결혼식을 날 잡아서 어느 날 몇 시에 하자고 합니다. 한 가정은 믿음이 있는데 다른 집은 안 믿습니다. 사람들이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 안하면 꺼림직해 합니다. 신앙적으로 문화혁명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감성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은 내가 치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앞서서 시행하십니다. 주를 등지고 돌아선 자들, 주를 찾지도 않고 아무것도 여쭙지 않는 자들을 여호와가 없애 버리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는데 우상을 갖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년 믿고 집사 되었는데 부적도 떼지 못합니다. 가정예배 마치고 나오면서 부적을 비로소 떼고 나옵니다. 그 부적을 시어머니가 부쳐놓은 것이라고 떼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합니다.

 

(잠잠히 징계의 의미를 생각해야 함)

 

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지금은 요시야 왕때에 된 일을 보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시야왕은 어려서 왕이 되어 우상을 멸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좋았으나 백성들 전부가 거룩하게 살지 못하였습니다. 우상을 제거하였으나 우상숭배가 완전히 없어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일월성신과 말감을 맹세합니다. 정치적으로 우상을 없앴지만 문화화되지 못하고 생활화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심판합니다. 외적인 개혁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마음에서 개혁을 해야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우상을 섬기는 혼합주의에 빠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성화의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혼은 구원받았으나 우리의 생각과 감성이 바뀌는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부터 하나님을 믿는다고 결심하지만 과거의 의식구조가 그냥 나타납니다. 영혼이 구원받고 의식이 구원 받고 생활이 변화되어야합니다. 이것이 바뀌지만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어떤 시련을 당하면서 잠재적인 악이 드러나고 회개합니다. 나도 이런 죄악이 있었나 자신도 놀랍니다.

야곱은 벧엘 서원을 갚으면서 비로소 우상을 없앱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합니다. 사나운 짐승을 길들이는 것처럼 한다고 합니다. 길들이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자훈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주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주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잠잠해야합니다. 스바냐는 심판의 날을 선언하기 전에 먼저 침묵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복종을 요구하는 선언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거민들이 침묵을 지켜야 하는 것은 거민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분노와 파괴가 시행될 여호와의 날이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침묵은 감히 도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의 침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치든지 그 의미를 알아야합니다. 그 일이 왜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아야합니다. 시련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야합니다.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아야합니다. 사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왜 망해야하느냐 왜 이런 일이 있느냐 묻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끊지 못하는 것을 끊게 하고 성화하지 못하는 것을 성화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바다 앞에서 독안에 든 쥐같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조용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라고 합니다. 홍해를 건넌 다음에 그들은 깨닫게 합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완전히 단절시키십니다. 엄청난 사건 속에 하나님의 세밀한 의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사를 드릴 제물을 잡아 놓으시고서, 제물 먹을 사람들을 부르셔서 성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스스로 제물을 준비하십니다. 여호와의 날에 치러질 제사의 희생은 유다 백성들입니다. 반면에 청할 자는 제사에 초청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유다 거민들을 멸망시킬 이방 국가입니다(13:1). 희생이 있고야 하나님의 의가 성취하십니다.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이 제삿날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제사의식으로 설명합니다. 유다를 제물로 받으시고 그들을 정결케 하십니다.

 

(이방문화에 물든 지도자들을 벌하심)

 

“8.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9.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여호와 주가 제물을 잡는 날이 오십니다. 희생의 날은 여호와의 날과 동의어로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셨으며 친히 심판을 시행하실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가 대신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하십니다. 방백들은 유다 거민들 중의 지도자들로서 히스기야 왕이 개혁을 행할 때에 대적하였던 자들입니다(3). 이들은 아마도 요시아 왕이 개혁할 때도 자신들의 기득권과 평안을 잃지 않기 위해서 대적하였던 듯합니다.

또한 왕자들은 유다 거민들의 지도자들이었음은 분명하나 문자적인 의미인 요시아 왕의 아들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요시아의 아들들은 매우 어렸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본문의 '왕자들'은 요시아의 친족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의 죄악은 이방 의복을 입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의복에 대해서 규정을 지으셨습니다(15:38 221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백들과 왕자들이 이방인들이 입는 의복을 즐겨 입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어겼을 뿐만 아니라 이방 관습에 젖어 여호와를 배척하고 우상을 섬겼음을 암시합니다. 권력은 재앙으로 기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요시야가 개혁을 하는데 정치가들이 왕의 뜻을 따르지 못합니다. 백성들에게 개혁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개혁하지 않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을 가져옵니다. 그들은 이방인이 입는 사치스러운 옷을 입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검소합니다.

지금도 보수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까만 옷만 있습니다. 뉴욕에서 더운 여름날에 까맣고 긴옷을 입고 일을 합니다. 아이들은 댕기를 따고 삽니다. 이스라엘은 섞어서 짠 옷을 입지 않습니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옷은 무당의 옷이라고 입지 않습니다. 그들은 검소하고 단순한 단색의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서자고 하면서 이방인의 풍속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혼합주의에 빠집니다. 겉과 속이 함께 개혁을 해야 하는데 그들의 풍속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치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의식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도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옛날에 하던 방법대로 우상섬길 때 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은 문화화 되어서 잘 모르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당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시간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사람 눈만 피하여 돌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 날이 오면, 문지방을 건너뛰는 자들을 벌하십니다. 문턱을 뛰어 넘어서는 이교 신전에서 행해지는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특별히 삼상 5:5의 다곤 신전에서 제사장들이 문지방을 밟지 않은 것과 연결되는 듯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러한 해석과 더불어 자기 주인을 우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문턱을 뛰어 넘어서는 앞서 언급된 왕자들과 방백들의 하수인들이 타인의 집을 마음대로 침입하여 주인인 왕자들과 방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약탈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하수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왕자들과 방백들의 눈에 들기 위해서 도둑질과 약탈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폭력과 속임수를 써서, 주인의 집을 가득 채운 자들을 여호와가 벌하십니다. 주인의 집을 채운 자들은 권력에 빌붙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자들을 심판하심)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11.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 12.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13.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그 날이 오면, 물고기 문에서는 곡성이 날 것입니다. 물고기문은 예루살렘 북쪽의 문입니다. 이 문을 통하여 그 날 잡은 생선을 팔려고 가져왔습니다. 상인들이 예루살렘 중심지로 가는 문입니다. 이곳은 적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방향이었습니다. 둘째 구역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산 위의 마을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날 것입니다. 둘째 구역은 어문 가까이에 추가로 세워진 문을 말합니다. 이는 어문 가까이에 있는 성읍 안쪽에 있는 문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이곳은 여선지자 훌다가 살았던 곳으로(왕하 22:14) 다른 곳에서도 제 이 구역으로 지칭되고 있습니다(대하 34:22). 작은 산들은 주변의 언덕들을 가리키기 보다는 예루살렘 성읍 내에 있던 언덕들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이것들은 여호와의 날에 이방 국가의 침략으로 파멸될 것이며 그곳에 거하던 거민들은 곡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주의 말씀입니다. 막데스에 사는 너희는 슬피 울라고 하십니다. 막데스는 히브리어 마크테쉬의 음역입니다. 이곳은 앞서 언급된 어문과 반대되는 지역인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저지대로서, 상업으로 이름이 난 지역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본절 하반절에서 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절은 침략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 침략로인 북쪽과 침략로가 아닌 남쪽에서도 예외 없이 이루어질 것을 시사합니다.

가나안 백성은 성경에서 흔히 상인들이나 무역을 하는 자들을 가리켰습니다(23:8 17:4 12:7 14:21). 여호와의 날에는 상인들도 모두 멸망당하여 막데스는 더 이상 거래를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장사하는 백성은 다 망하고, 돈을 거래하는 자들은 끊어졌습니다. 이런 일은 바벨론 군대의 침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때가 이르면, 여호와가 등불을 켜 들고 예루살렘을 뒤지십니다. 등불은 점토로 만든 기름 등잔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등불을 들고 사람을 찾는 모습은 하나님의 심판이 예외없이 행해질 것이며 아주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마음 속으로 주는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술찌꺼기 같은 인간들을 찾아서 벌하십니다.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는 예레미야도 사용한 적이 있는 속담투의 표현입니다(48:11). 이것은 이어서 나오는 구절들과 연결되어 심판의 대상이 하나님께서 역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자들임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포도주에 가라앉은 찌끼와 같아서 그냥 내버려둘 경우 질 좋은 포도주를 나쁘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관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배하시고 간섭하신다는 섭리 자체를 부정하고 하나님은 자신들의 생활과 전혀 무관한 존재라고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복도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우상입니다. 우상은 벼락을 치지도 복을 주지도 못합니다. 우상은 아무 말도 못합니다.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르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유명한 전설이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입니다. 보디발의 처가 즐거운 시간을 갖자고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보신다고 합니다. 보디발은 우상은 가려놓고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요셉은 우상은 보지 못하나 하나님은 보신다고 하고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까지 아십니다. 구하기 전에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좀더 거룩하고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깨닫고 거룩한 길로 가야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은 바벨론 사람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집도 헐릴 것입니다. 그들은 집을 지으나, 거기에서 살지 못할 것이며, 포도원을 가꾸나,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강퍅한 자들에 대한 심판 내용입니다. 자신들이 받았던 축복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재물과 집, 그리고 포도원까지도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직접적인 심판을 통해서 그들이 부인했던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철저히 심판하심)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주께서 심판하실 그 무서운 날이 다가옵니다. 큰 날은 무서운 심판을 의미합니다. 득달같이 다가옵니다. 주의 심판이 임박하였음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라는 표현은 요엘의 묘사와 비슷합니다. 요엘은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피 두렵도다''라고 묘사합니다(2:11). 그것은 여호와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정도가 매우 강할 것을 뜻합니다. 이렇듯 엄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된 심판의 대상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까이에 다가와 있습니다.

주의 날에 부르짖는 저 비탄의 소리, 용사가 기운을 잃고 부르짖는 저 절규를 들으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용사의 애곡 소리가 들립니다. 용사들이 애곡하게 됨은 자신들이 여호와의 날에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 도구인 이방 국가에 의해서 패배와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주께서 분노하시는 날입니다. 환난과 고통을 겪는 날, 무너지고 부서지는 날입니다. 캄캄하고 어두운 날, 먹구름과 어둠이 뒤덮이는 날입니다. 본절은 여호와의 날을 묘사한 것입니다. 여기서 구름과 흑암의 날은 하나님의 현현과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19:1620:214:11). 여호와는 정하신 날에 나타나셔서 분노하시며 진노하실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는 날, 전쟁의 함성이 터지는 날, 견고한 성읍이 무너지는 날, 높이 솟은 망대가 무너지는 날입니다.

본 절은 전쟁터를 연상시킵니다. 스바냐는 흔히 전쟁터를 상기시키는 경고용 나팔, 견고한 성읍, 높은 망대를 여호와의 날과 연관시켜서 하나님의 심판이 마치 전쟁과 같이 그 강도가 매우 심할 것을 암시합니다. 여호와가 사람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들은 눈먼 사람처럼 더듬거릴 것입니다. 그들은 도망갈 길을 찾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여호와 주에게 죄를 지은 탓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유다에게 내릴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은 바로 유다 거민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거부하고 우상 섬기기를 즐겨한 유다 거민에게 등을 돌리시며 반대편에 서셔서 심판하십니다. 그들의 피가 물처럼 흐르고, 시체가 오물처럼 널릴 것입니다. 생명이 무가치 하게 됩니다. 본 구절은 여호와의 날에 유다 거민에게 내릴 하나님의 심판의 정도를 나타냅니다. 유다 거민들의 피는 티끌로, 살은 분토로 변할 정도로 하나님의 심판은 엄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은과 금이 그들을 건질 수 없습니다. 은과 금은 유다 거민들이 하나님을 버리게 된 동기입니다. 그들은 은과 금을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과 그 하수인들은 오직 자신들의 물질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강포를 행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8,9). 그들이 그렇게 추구했던 은과 금도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주께서 분노하시는 날, 주의 불 같은 질투가 온 땅을 활활 태울 것입니다. 심판이 온 인류에게 확대됩니다.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눈 깜짝할 사이에 없애실 것입니다. 스바냐는 유다 거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다가 다시 심판의 대상을 모든 세계의 백성들로 확대합니다.

여기서 이 온 땅과 이 땅 모든 거민은 유다 거민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선지자 스바냐는 본장 처음에서 심판 대상을 설명할 때 지면에서라고 말함으로써 온 세상 사람들과 생물들이 심판의 대상이 됨을 강조하였습니다(3). 이제 본장을 마감하는 본문에서 스바냐는 다시금 심판의 대상을 온 세상으로 확대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여호와께 범죄한 모든 사람을 향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바냐 1장 강해 심판으로 요시야를 도우시는 하나님

스바냐 11-스바냐 118

요절 스바냐 1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스바냐 1장 강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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