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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에스라 5장 강해 하나님의 때에 다시 시작된 성전 건축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2-11-26 00:00:00
조회수 : 4,406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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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5장 강해 하나님의 때에 다시 시작된 성전 건축

에스라 51-에스라 517

요절 에스라 5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돌아온 사람들은 대적들의 방해 공작으로 성전 건축을 중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자 선지자들을 통해서 성전 건축을 재건하도록 방향을 주었고 유대인들은 16년만에 성전을 재건합니다. 16년은 그들이 유일신 사상을 분명히 한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준비되고 예레미야가 예언한 때가 되자 다시 성전을 재건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성전재건에 대한 예언)

 

1절을 보십시오.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16년만에 성전을 재건하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학개라는 이름은 축제의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 이름은 여호와의 축제를 뜻하는 학기야(대상 6:30)의 축약형인 듯합니다. 그가 B.C. 520년 경에 활동한 선지자였으며(1:1), 솔로몬의 성전을 목격했었을 것입니다.(2:3) 그는 활동 당시 매우 연로했을 것입니다.

스가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의 의미입니다. 스가랴 또한 학개처럼 B.C. 520년 경에(1:1) 활동한 선지자로서 스가랴서의 저자입니다. 그는 제사장 가문의 후손이었던 것 같습니다(12:16). 그는 잇도의 손자가 아닌 그의 먼 후손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손자가 아들의 의미뿐만 아니라 자손 및 후손의 뜻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12:16 NIV). 그렇다면 잇도는 분열 왕국 초기의 선지자였을 것으로 추측 될 수 있습니다(대하 9:29 12:15 13:22).

그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은 언약 공동체를 위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강조하는 호칭(3:11)입니다. ‘이름을 받들어는 이름으로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전하였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하셨느니라(1:13)고 예언하는 형태입니다. 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습니다. 이들은 유다 지파뿐만 아니라 다른 지파의 사람들까지를 모두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귀환민들을 가리킵니다.

저자가 여기서 유다 사람만을 언급한 까닭은, 그들이 포로 귀환 후의 이스라엘 역사의 주역이며 또한 그들의 숫자가 제일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게을리하는데 대한 질책성의 선포였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훼방으로 인하여(4:4, 5) 성전 재건을 중단하였습니다.

그 후 대적들의 방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그 고귀한 사업을 재개하지 않았습니다(1:2). 그들의 마음에는 안일과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틈탔습니다. 선지자들은 이들을 질책하면서 성전을 건축할 때임을 말씀하십니다.(2:9 1:17 2:12 3:3). 1:15 과 슥 8:9에 따르면 성전 재건 사업이 재개된 때는 다리오 왕 2(B.C. 520) 624일입니다.

 

(성전 재건의 시작)

 

2절을 보십시오.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의 기립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중대한 일의 본격적 수행에 앞서 이뤄지는 마음의 결단을 뜻합니다(삼상 16:12 44:26 60:1).

백성들이 이 같은 마음의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도구삼아서 그들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입니다(1:14). 그들은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에만 계시는 분임을 시사하는 문구가 결코 아닙니다. 여기의 예루살렘은 문자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의 뜻으로서 전(殿)을 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작하였다는 것은 일어나의 구체적이며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이 같은 성전 재건사업의 재개는 학개가 예언 활동을 한 때부터 약 8일 만이었습니다(1:1, 14, 15). 또한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훼방으로 중단된지 약 16년 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도왔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소명과 감동을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메시지를 전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 활동이 성전 재건이 재개된 후에도 계속됐다는 점에서 볼 때(2:1, 10 1:1, 7 7:1), 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독려로써 성전 재건 사업에 일조를 한 듯합니다.

 

(성전 재건에 대한 닷드내의 질문)

 

3-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그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나아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던 당시의 유프라테스 강 서쪽을 통할했던 총독은 우쉬타니였다는 역사적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B.C. 521년경에 바벨론인들의 반란이 진압된 바 있으며, 바사 제국은 이 진압이 있은 직후인 B.C. 520년에 바벨론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서편 지역을 관활할 새 총독 우쉬타니를 임명하였습니다. 바벨론인들의 반란이 있었던 직후에 바사 황제는 그 속령들의 제반 움직임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각 관할 총독들로 하여금 지역민들의 동태를 면밀히 파악해 보도록 지시를 내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닷드내 일행의 팔레스틴 방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기의 총독 닷드내는 우쉬타니 밑에서 일하던 고위 관리였던 것 같습니다. 여기의 총독은 구약성경 내에서 장관(왕상 20:24), 방백(8:9 9:33:2, 3) 등의 의미로 번역되는 단어로서 스룹바벨의 직함과 동일하며(6:7 1:1,14), 강 서편의 광활한 지역을 다스리던 총독이 팔레스틴까지 직접 올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위와 같은 견해를 뒷받침해 줍니다.

스달보스내는 왕국을 구원하는의 의미인 듯합니다. 이 사람은 닷드내의 부하로 서기관 정도의 직책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4:8). 그 동료 또한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닷드내의 부하들로 짐작됩니다.

그들이 나아온 것은 단순히 오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로서, 성전 재건을 중단시키는 공작을 했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4:2의 나아와와는 다릅니다. 닷드내와 그 일행은 성전 재건에 대해서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달리 부정적 시각을 갖지는 않았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본절부터 6:13 까지를 자세히 살펴보더라도, 닷드내 등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증거는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닷드내가 예루살렘에 온 까닭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불평에 대해서 실상을 파악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성전을 건축하고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명령을 주었느냐 혹은 누가 너희에게 권위를 주었느냐는 말입니다.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는 에서 성곽은 목재로 된 구조물, 즉 건축물을 장식하기 위해 외부에 붙여지는 판자를 의미합니다. 바로 이같은 주장을 근거로 해서 루돌프는 닷드내등의 페르시아 관리들이 예루살렘에 온 것은 성전 재건 작업이 재개된 이후 그 공사가 상당히 진척된 시점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마치게 하였느냐는 4:13의 마치면과 동일한 단어로 현재 진행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하라고 하였다고 그들의 이름을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공사를 막지는 못하게 하심)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그러나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돌아 보셨으므로는 하나님의 눈이 ~ 의 위에 있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유다 백성을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보살피셨습니다. 저희가...역사를 폐하게 못하고 - 문자적으로 그들이 그들을 중지시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닷드내가 왕의 하달을 받을 때까지 객관적인 입장에서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34:15).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답조가 오기를 기다렸더라는 이에 관해 쓰여진 답서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여기의 기다렸더라는 원문에는 없는 것으로서, 페르시아 관원들이 성전 재건을 중단시키는 일을 유보했었던 사실을 강조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번역입니다.

 

(닷드네가 다리오왕에게 문의함)

 

6절을 보십시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인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이 다리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라

 

6-17절은 다리오왕에 대한 이러한 닷드내의 보고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건축사업이 합법적인 것인지의 여부를 알려는 목적에 따른 것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딜 보스내와 그들의 동관이 아바삭 사람이 디리오왕에게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아비삭이라는 말은 애굽 땅의 엘레판틴에서 발굴된 파피루스 문서에서 유사한 형태로서 발견되며, 그 의미는 고하는 자(Fensham) 혹은 조사하는 자 등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아바삭 사람은 페르시아 관원들의 구체적 직함이지 어떤 부족의 이름이 아닙니다(4:9 주석 참조).

 

7,8절을 보십시오. “그 글에 일렀으되 다리오 왕은 평안하옵소서 왕께 아뢰옵나이다 우리가 유다 도에 가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본즉 성전을 큰 돌로 세우며 벽에 나무를 얹고 부지런히 일하므로 공사가 그 손에서 형통하옵기에

 

닷드네 일행은 그 글에서 먼저 다리오왕에게 왕은 평안하옵소서 인사합니다. 그 글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 건축이 합법적인 것인지의 여부를 질문하기 위한 보고서를 가리킵니다. 그 글 앞에 원문에는 그들이 보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안하옵소서라는 말은 모든 평화란 뜻으로, 예컨대 하나님께서 당신의(왕의) 주권을 언제나 지켜주시길 기원합니다와 같은 인사말입니다. 이와 같은 평강을 기원하는 인사법은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유다 도에 가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성전에 나가 보았습니다. 관리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유다 사람들에 대한 불평과 관련하여 관리로서의 공무 집행을 위해 가보았습니다. 지극히 크신을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려는 것으로 보고 한글 개역처럼 해석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큰 돌로 세우며 벽에 나무를 얹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전을 큰 돌로 세우며 - 여기의 큰 돌 형용사 큰을 어근과 문맥적 상황을 감안하여 잘 다어진 돌이라고 보아야합니다. 나무가 완전히 가공된 재료임을 가리키는 말임을 볼 때 잘 다듬어진으로 보아야합니다. 세우며는 2절의 건축하기를과 동일한 단어로서, 다만 집을 짓다를 의미하는 일반적 건축 용어입니다. 나무를 얹는 것은 지진 등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할 목적으로 벽과 벽 중간 중간에 나무를 대는 것입니다. 그 공사가 형통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 장로들에게 물어보기를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느냐 하고 우리가 또 그 우두머리들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아뢰고자 하여 그들의 이름을 물은즉

 

총독 닷드네 일행은 장로들에게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우두머리의 이름을 왕에게 적어보내고자 물어보았습니다. 성전 재건의 합법성 여부를 확인키 위한 기본적 조처입니다(4)

 

11-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예전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갈대아 사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이 성전을 헐며 이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더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닷드네 일행에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천지의 하나님이라고 칭한 것은 페르시아 왕 다리오에게는 친근감 있게 들렸을 것입니다. 폐르시아의 황실은 하늘의 신 또는 하늘과 땅을 창조한 신으로 여겨지는 오르무즈드를 섬겼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칭호를 사용한 것은 타협적 의미이기보다는 오히려 도전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12절을 통해 미루어 보더라도,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 사건은 하나님의 무력함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신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 행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훈련시키고자 하는 섭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천지의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재건 사업은 다른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방해를 받거나 중지되서는 안됨을 강력히 시사해주는 말입니다.

그들은 오랜 예전에 솔로몬이 건축하였던 성전을 그들은 다시 건축하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B.C. 966년에 착공되어(왕상 6:1) 7년 후인 B.C. 959년 가을에 완성되었습니다(왕상 6:38). 따라서 제 2 성전이 건축되던 그 시기를 약 B.C. 518년 경으로 본다면 솔로몬 성전이 완공된 것은 그때부터 약 200여 년전이 되는 셈입니다.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큰 왕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의 탁월한 업적 때문에 그에게 큰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갈대아 사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1:2에서 고레스가 여호와를 지칭키 위해서 사용했던 하늘의 신과 동일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같이 하나님을 지칭한 것은 11절에서 천지의 하나님이라고 한 까닭과 동일합니다(11절 주석참조). 느브갓네살 왕이 성전을 헐며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 잡아 바벨론에 옮겨 갔습니다. 격노케 하였다는 말은 흥분하다 혹은 요동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의 사역형으로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했던 사실을 말합니다.(왕하 24:20).

갈대아는 남부 아라비아 와 페르시아만 사이의 황무한 지역에 살던 반() 유목민들 혹은 그 지역 그리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발흥했던 신 바벨론 제국을 모두 말합니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서북부에 살았던 아람족과는 구별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서 바벨론은 국가로서의 갈대아와 동격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마지막 왕조를 세웠던 나보폴라살(B.C. 626-605)의 아들로서, 당시 왕위에 있던 아버지를 대신하여 갈그미스에서의 애굽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쟁취합니다.(B.C. 605) 그는 동시에 애굽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지중해 인근의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B.C. 605년과 598년에 유다를 공격하여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B.C. 586년에는(실제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은 B.C. 588년부터 시작되었다)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느부갓네살이란 이름의 뜻은 나부(바벨론의 신)가 계승권을 지키신다 입니다. 손에 붙이신 것은 유다 왕국의 멸망이 철저히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결과였음을 분명히 시사해주는 말입니다. 붙이시매는 주다의 뜻을 가집니다.

바벨론왕은 네 번에 걸쳐서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었습니다. 첫 번째로 B.C. 605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다니엘을 비롯하여 유다의 왕족과 귀족들의 일부를 사로잡아 갔습니다(1:1-5). 두 번째 바벨론 유수는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을 배신한 것이 핑계가 되었으며, 이때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포함하여 에스겔 선지와 용사 7천명 및 기술자 1천명, 그리고 다수의 귀인들을 붙잡아 갔습니다(왕하 24:10-17). 세 번째 바벨론 유수 사건은 시드기야 왕의 배신 때문에 일어났으며 이때에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함락시키고 비천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갔었습니다(왕하 25:8). 이스마엘이 바벨론의 유다 총독 그다랴를 살해했을 때(B.C 582) 또 한차례 유다인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52:30).

 

13-15절을 보십시오.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고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금, 은 그릇을 옮겨다가 바벨론 신당에 두었던 것을 고레스 왕이 그 신당에서 꺼내어 그가 세운 총독 세스바살이라고 부르는 자에게 내주고 일러 말하되 너는 이 그릇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제자리에 건축하라 하매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였습니다 고레스를 바벨론 왕이라고 한 것은, 페르시아 스스로가 자신들을 바벨론의 합법적이고, 정통적인 계승자로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발견된 고레스의 조서는 고레스가 자신에 대해서 나는 세상의 왕, 위대한 왕, 합법적인 왕, 바벨론의 왕, 쉐르와 아카드의 왕, (세상의) 네 가장자리의 왕 고레스이다라고 언급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유다 사람들이 고레스를 바벨론 왕이라고 언급한 까닭은, 성전 재건을 허락한 고레스를 느부갓네살과 직접 연결지우려고 한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이 같은 의도는 결국 느부갓네살이나 고레스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쓰였으므로 성전의 파괴가 필연적이었듯이 성전의 재건도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강력히 암시하려는 것입니다.

고레스 왕이 성전을 건축하게 했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을 재건할수 있도록 팔레스틴으로 귀환을 허락한 것과 성전 재건의 비용에 쓸 수 있도록 바벨론 사람들로 하여금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물을 주도록 한 것(1:4)을 말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져간 금은 그릇을 그가 세운 총독 세스바살(스룹바벨) 총독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그 총독에게 이 그릇을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고 하였습니다.

15절에서는 성전 기명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시 반환된 사실에 대해서 다뤄지고 있습니다. 유다 민족의 성전 기명이 다른 민족의 신당에 보관되는 것은 유다 민족에게 있어서 엄청난 수치였으나, 이제 그 종교적 수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에 본절에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1:7 주석 참조). 실로 이 같은 종교적 수치의 모면은 다른 나라에 강제로 끌려가서 사는 정치적 수치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이 세스바살이 이르러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지대를 놓았고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하여 오나 아직도 마치지 못하였다 하였사오니 이제 왕께서 좋게 여기시거든 바벨론에서 왕의 보물전각에서 조사하사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였더라

 

세스바살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에 지대를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건축하여 왔으나 아직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유다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 행위로 인한 재건 사업의 중지(4:1-5)에 대해서 언급지 아니한 까닭은, 여기서는 다만 그 당시 진행 중이던 성전 재건 사업이 고레스의 허락에 의해 이뤄지고 있으며 그래서 그 허락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공사는 합법적임을 부각시킬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세스바살이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성전 지대를 놓는등 건축 사업을 시작한 때를 말합니다. 또한 건축하여 오다는 건축하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의 분사형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미완료적 진행형, 즉 건축해 오고 있는 중이다로 번역함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16여년이라는 상당한 기간 동안 성전 재건은 중지,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이제 왕이 좋게 여기면 바벨론 왕의 보물 전각에서 고레스왕이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서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왕이 기쁘신 뜻을 보여달라고 호소합니다.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은 왕이 판단컨대 좋게 느껴지거든의 의미(7:18 1:19)입니다. 왕의 국고는 모으다, 덮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와 집의 의미를 갖는 단어가 합해진 말입니다.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문서 보관소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페르시아 왕, 특히 고레스의 조서 사본이 바벨론에 있던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었던 까닭은, 페르시아 왕들이 바벨론 왕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과 결코 무관치 않습니다. 고레스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 태도를 취했으며 그리고 다른 종교의 파괴된 신전들을 다시 짓도록 명령했던 사실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토판이 근래에 발견된 곳도 옛 바벨론의 고토(故土) 라삽이었습니다.

다리오 왕이 성전 재건 공사를 계속 진행시킬 것인지의 여부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기쁘신 뜻 생각하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결정 혹은 의향 등의 뜻을 갖습니다. 보이소서- 문서 혹은 사람을 보내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의 사역형 미완료 시제로 결국 이것은 닷드내가 자신의 직무와 관련하여 자신이 보낸 보고서에 대한 왕의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불만을 왕의 답신을 통해서 잠잠케 하려는 닷드내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호의적 태도가 엿보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친히 일하십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 후 70년 후에 bc516년에 성전을 짓고자 친히 일하고 계십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일하시고 닷드내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구원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을 때는 내면의 성숙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16년은 내면의 성숙을 위해서 힘쓰는 시간이었습니다. 유일신 사상을 분명히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에스라 5장 강해 하나님의 때에 다시 시작된 성전 건축

에스라 51-에스라 517

요절 에스라 5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에스라 5장 강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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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에스라] 에스라 7장 강해 에스라의 결심 오요한 2012-11-26
6 [에스라] 에스라 6장 강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스룹바벨의 성전 봉헌 오요한 2012-11-26
5 [에스라] 에스라 5장 강해 하나님의 때에 다시 시작된 성전 건축 오요한 2012-11-26
4 [에스라] 에스라 4장 강해 유대인 홀로 성전 건축을 하고자하는 사람들 오요한 2012-11-26
3 [에스라] 에스라 3장 강해 대성통곡하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사람들. 오요한 2012-11-26
2 [에스라] 에스라 2장 강해 돌아온 사람들 오요한 2012-11-26
1 [에스라] 에스라 1장 강해 하나님이 감동시킨 사람들 오요한 2012-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