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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욥기 35장 강해 성령 충만하나 이해가 부족한 엘리후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0-04-17 00:00:00
조회수 : 3,915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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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5장 강해 성령은 충만하나 이해가 부족한 엘리후

욥기 351-욥기 3516

요절 욥기 3514절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오늘 말씀은 엘리후의 마지막 변론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욥의 고난은 욥을 겸손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다가 하나님의 의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하나님의 의를 주장하다가 욥을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엘리후는 욥을 깊이 이해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지못하여 욥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씀의 은혜는 있었느나 인생의 연륜이 부족하였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과 함께 하나님의 훈련으로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을 배웁니다.

 

(의롭게 산 것이 유익이 없다는 욥)

 

1-4절을 보십시오.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지마는 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엘리후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욥이 합당하냐고 묻습니다. 합당하게는 올바르게 라는 뜻입니다. 공의로 사용되고 심판이라는 표현으로 400여 회나 사용되었습니다.(8:332:411:54:4 ) 하나님보다 욥이 의롭다는 것을 공의롭게 여기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의로워도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계획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의롭게 살아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 겸손해야합니다.

욥은 자신이 의로워도 고난을 당하자 의가 소용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욥은 자신의 의가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범죄하여도 나에게 손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엘리후는 이런 욥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한 대로 복을 주십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먼 안목으로 보아야합니다. 인생을 전체적으로 보고, 역사 속에서 우리를 보아야합니다. 하늘나라까지 확대시켜 보아야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공의롭게 사는 것이 분명히 유익입니다.

 

(인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5-8절을 보십시오.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

 

엘리후는 욥에게 하늘을 보라고 합니다. 구름을 보라고 합니다. 높은 궁창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공의를 불신하는 욥에게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초월성을 깨달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생각할 때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범죄하여도 하나님께는 영향이 없다고 말합니다. 욥이 범죄하여도 지구는 동일하게 돌고, 구름은 그대로 움직입니다. 욥이 의로워도 하나님께 유익을 드릴 것이 없습니다. 엘리후는 욥이 이미 범죄했지만 하나님의 성품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고 위대한 분이시기에 인간의 그 어떤 악행으로도 그분의 성품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욥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는 말씀은 6절을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로움에 무관심하시거나 인간의 죄악에 대해 방관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신론(自然神論)에 의하면 신은 일단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는 스스로 진행되도록 자연 법칙을 두시고 하나님은 일체 피조세계의 일을 간섭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의 절대적 초월성을 강조하는 사상입니다. 여기서 엘리후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이 아닙니다. 욥이 의롭게 살았다고 하나님께 유익을 드렸으므로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사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드렸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을 드린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합니다. 다만 악이나 선행은 사람에게 해가 되고 악이 되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는 아무 이익을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8절에서 인간이 그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의 영광에 무엇을 더하거나 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엘리후는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 영향을 받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일 뿐이라고 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자신이 불평하는 것의 정당성을 제시해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신 분이시기에,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의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더욱이 자신의 기대에 어긋났다고 해서 불평하는 일은 더욱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로 하나님의 공의가 훼손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로 하나님께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밤에 노래를 주시는 하나님)

 

9-11절을 보십시오.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

 

엘리후는 다시 주제를 바꿔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불의가 있습니다. 연약한 자는 학대를 많이 받아 부르짖습니다.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학대는 압박을 가하고 사기치고 폭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학대라는 단어는 권세나 권력의 남용 혹은 국가적인 지배의 폭압성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복수로 사용된 것은 그 만큼 폭압의 강도가 큰 것을 의미합니다. 9절은 억울하게 압박받는 백성들의 고통과 그들을 짓누르는 폭력적인 세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난 받는 자들이 도움을 부르짖고, 심지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 하나님을 불의한 분이라고 원망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욥도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24:12).

그러나 엘리후의 대답은 다릅니다. 엘리후는 그들이 밤에 노래를 주신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래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에게 주시는 용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근심이 사무치는 밤중에 노래를 주심으로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밤에 노래를 주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도 하나님을 찾고 찬양해야합니다. 엘리후는 사람들이 땅의 짐승들이나 하늘의 새보다도 우리를 더 지혜롭게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괴로울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땅의 짐승들 이상으로 사랑하시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른 동물보다 더 존귀한 존재로 대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동물을 통하여 사람을 가르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짐승들이 자기들의 고통을 부르짖는 것을 통해 인간들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도리어 노래를 부름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 만물을 통해서 지혜를 깨달아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그러한 배려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짐승보다 더 지헤롭게 되고 짐승들의 지혜를 배우라고 말합니다.

 

(과연 욥은 헛되게 부르짖고 있는 것인가)

 

12-1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악인은 교만으로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12절에서는 백성들을 폭압하는 자들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는 거기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은 대답지 않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부르짖음에 대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들의 부르짖음이 헛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헛된 부르짖음은 듣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십계명 중 제 3계명의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20:7)에서 망령되이가 바로 헛되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는(12) 이유가 헛된 부르짖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엘리후가 욥의 부르짖음 일체를 단순히 헛된 것으로 단정한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는다는 것은 헛된 소리라고 말합니다. 전능자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헛되다고 말합니다.

개역개정에 따라서 보면 엘리후는 압박받는 자들이 자기들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태도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지 않고 아예 관심조차 두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판단을 호소하며 기다리는 욥의 태도가 거짓되다고 공박합니다. 그는 욥이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욥은 괴로울 때 하나님의 말씀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진심을 토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왜 욥이 하나님을 이용하였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에 기초하여 욥이 기도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섣부른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욥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는 것은 욥이 죄악되어서가 아닙니다. 욥의 인내를 테스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정금처럼 연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뵐 수 없고 하나님이 판단하심을 기다릴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판단하신다는 말이 욥기에 빈번히 등장하는 법정적 용어로서 사용되었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당당히 자기의 송사 문제를 제출해 놓고 최종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무죄로 선언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때까지 욥을 신뢰하고 인내하고 계십니다.

엘리후는 욥의 이런 기도를 보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할 위선적인 호소라고 말합니다. 엘리후의 눈에는 욥의 이런 태도가 헛된 부르짖음라고 말합니다. 욥이 악인이므로 하나님이 욥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당장 대답지 않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욥이 악인이라 응답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욥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십니다. 욥도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모순을 피하기 위하여 어떤 번역에서는 욥에게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번역하는 곳도 있습니다. 욥을 죄인으로 보는 엘리후의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왜 엘리후가 이런 실수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기다리다가 응답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도 천천히 응답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엘리사벳의 기도를 천천히 응답하였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식견이 부족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엘리후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좋은 충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사랑하여 고난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훼손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공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인격적이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욥이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린다는 것도 비판하였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인내가 소용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더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에 다양하게 사랑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의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며 복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려야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육십이 년 동안 나의 죄악을 인내하여주셨습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인간중심적인 자를 참고 인내하여주셨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 성경 66권 강해를 완성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시고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훈련하시면서도 나를 사랑하시고 인격적으로 신뢰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세우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가정과 교회에 왕이 되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말씀을 들으러 천안으로 몰려올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인내하겠습니다. 이 고난의 터널이 끝나고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찬란한 하나님 나라를 가정과 교회와 국가에 세우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벌을 주지 아니하신 하나님)

 

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엘리후는 하나님이 벌을 주지 않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욥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욥의 분노에 벌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욥은 그의 입을 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하나님에 대한 교만과 죄에 대해 징벌을 하지 않으시고 인내하셔서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헛되이는 보통 이스라엘이 섬기던 헛된 신들을 묘사할 때 사용되어 종종 우상으로 번역되었습니다(32:21왕상 16:13,262:5). 또한 생명이 짧은 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39:5,694:11144:449:4).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말이 엘리후에게는 헛되고 어리석은 말로 여겨졌습니다. 욥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결백을 주장한다고 지적합니다. 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무지한 자의 소행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내린 징벌 외에 남은 징벌을 내리지 않아서 욥은 더욱더 하나님을 공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심판한 것이 부족하여 악한 욥에게 더 심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불난 데 기름을 붓는 사람입니다. 이로써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이 끝이 맺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

 

우리는 엘리후를 통하여 짧은 신앙 경륜이 가져오는 문제를 봅니다. 그는 성령 충만하여 바른 말을 하였습니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교만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욥이 죄인이라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다양한 신앙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인생 체험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이해가 부족하였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하면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더욱 풍부한 이해를 가져야합니다. 성경 66권을 전체적으로 공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현실에서 검토해 보아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욥기 35장 강해 성령은 충만하나 이해가 부족한 엘리후

욥기 351-욥기 3516

요절 욥기 3514절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욥기 35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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