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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욥기 34장 강해 하나님과 욥, 둘 다 의롭다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0-04-16 00:00:00
조회수 : 3,603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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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4장 강해 하나님과 욥 둘 다 의롭다

말씀 욥기 341-욥기 3437

요절 욥기 3412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연설에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욥이 교만하지 않게 연단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두 번째 연설에서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말들에 대해 책망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전지하신 능력,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공의을 말함로써 욥의 죄를 책망합니다. 인간은 결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시비해서는 안 됩니다.

 

(무자비한 공격자, )

 

1-9절을 보십시오. “엘리후가 말하여 이르되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지혜 있는 자들은 세 친구들이나 엘리후의 주위에 있는 부락민들입니다. 엘리후가 그들을 지혜자로 호명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지혜자들에게 자신의 말을 듣고 귀를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입이 맛을 분별하듯이 무엇이 선한가, 무엇이 정의로운가 분별하자고 합니다. 진리의 여부를 조사하여 판단해보자고 합니다.

엘리후는 그들에게 고난의 문제와 관련해 욥의 입장과 자신의 견해 중 어느 것이 옳은지 판결해 보라고 합니다. 엘리후는 주위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욥은 자신이 의롭고 정당하고 허물이 없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부인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거짓말쟁이라 하셨고, 화살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죄없는 자신에게 화살을 쏘는 나쁜 분으로 비방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제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27:2).

물론 욥은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으며, 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을 무자비한 공격자로 여기는 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엘리후는 욥이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 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녔다고 합니다. 사실 욥이 그런 사람들과 함께 다니지 않았지만 욥이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은 그런 자들과 동류라는 말입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공의를 비방하기를 물마시듯이 하였다고 합니다. 갈증으로 괴로워하던 사람이 물을 발견하고서는 거침없이 들이키듯이 그는 하나님을 비방하였습니다. 욥이 하나님에 대하여 난폭한 행위를 했습니다. 마치 거친 물살이 소용돌이치듯 욥의 입이 하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고대 근동인들은 매일 당하는 사건들에 대하여 먹고 마신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사나운 바람을 만났을 때 강한 바람을 마셨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10-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욥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마친 엘리후는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얼마나 의로우시고 그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증명함으로써 욥의 말을 반박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정의를 변호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불의하지 않고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

엘리후는 총명한 자들은 내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10절에서는 총명이 어떤 사실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란 뜻으로 쓰였습니다. 엘리후는 누구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말을 옳다고 인정할 것이라고 외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악이나 불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말합니다.

그는 욥의 불경건한 태도가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가리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일생을 통해 걸어온 길에 따라 정확히 보응하십니다. 각자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보응은 구약성경 중 특히 지혜 문학에 빈번히 나타납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왜곡하여 하나님의 신실성에 정면 도전하였다고 보았습니다. 진실로는 정말로 그렇고 말고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않으십니다.

욥은 의로운데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의로운 자에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고난을 주셔서 더 정금같이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의인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고난은 반드시 악인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의롭지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아벨 세례요한도 의인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고난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믿음을 주십니다. 이 땅에서도 사람들에게 존경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공의가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 공의는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공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살아야합니다.

공동소유인 이웃집이 도장을 찍어주지 않아서 교회 이층을 이년 동안이나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웃집 아줌마를 중풍으로 치심으로 이층을 올리게 하셨고 그 아줌마의 입을 통해서 우리의 교회는 하나님의 불이 내려오는 교회라는 말을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진입로를 막은 것을 통하여 새로운 더 좋은 길을 내시고 상수도 공사를 하시고 도시가스 공사를 하는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아멘!

 

(공의로운 창조주)

 

13-22절을 보십시오.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상을 그에게 맡겼느냐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그는 왕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 하시며 지도자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 그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12절에 이어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들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께 땅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그분께 이 땅을 돌보라는 임무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입증하는 가장 궁극적인 기반은 하나님 만유의 주()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사람은 흙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정하시고 사람의 영과 목숨을 거두시면 모든 육체가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14절은 하나님의 영과 호흡이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되심을 밝히면서, 영과 호흡이 제하여졌을 때의 결과를 말합니다.

아울러 엘리후는 하나님은 결코 자기만 생각하시는 이기적인 분이 아니라 만물을 사랑하시는 창조주시라고 말합니다. 혈기 있는 자들은 육신을 가진 자를 가리킵니다. 구약 성경에서 273회나 사용된 이 말은 인간의 몸, 혈연 관계, 인류, 생물 등 피조된 생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육신을 가진 자들은 다 죽습니다. 사람은 그 근원인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모든 생명체 또한 멸절하게 됩니다. 그들은 존재 자체가 멸절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존재는 하나님의 신과 기운으로 인해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떠나면 사람은 죽음입니다. 인간을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존재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에게 불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엘리후는 욥이 총명이 있다면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통치자요, 재판관이시므로 결코 정의를 굽게 하지 않는 분이라고 합니다.

엘리후가 강력히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총명은 이해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찌 세상을 다스리겠느냐는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공의를 귀중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에 세상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구약성경에는 공의가 하나님의 통치에 기초가 된다는 사상을 말합니다.(96:4-13).

의로우신 전능자는 하나님의 칭호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왕과 지도자와 고관과 부자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그들은 피조물입니다. 무용지물은 무가치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다 윤리적인 의미를 첨가하여 불한당, 악당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외모로 대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높여주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왕이나 지도자나 고관이 악을 행했을 때 높여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자의 낯을 봐서 불공평하게 대우하지 않으십니다. 부자를 편애하지 않습니다. 왕족과 부자들이 불의한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편애를 받으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결코 그들을 편애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창조하신 공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하나님은 부자들을 한밤중에 순식간에 데려가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하십니다. 하나님은 손을 대지도 않고 세력있는 자를 제하십니다. 하나님은 더 강한 힘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의 능력으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그 걸음걸이를 살피십니다. 행악자가 하나님 앞에서 숨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는 불공평이 없음을 언급함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변론하였습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므로 하나님은 공의롭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눈을 사람의 길 위에 두셨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너무도 엄격하게 살피고 징책하신다고 불평조로 말한 바 있습니다(7:17-20). 그러나 여기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을 공의로운 통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범죄자들에게는 몸을 숨길만한 어떤 장소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므로 그 감찰하시는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139:7-1223:249:2-4). 이러한 사실은 욥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31:4).

 

(하나님의 공정성과 즉각성)

 

23-2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 사이에 뒤집어엎어 흩으시는도다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눈 앞에서 치심은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깨달아 알지 못함이라.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하게 하며 빈궁한 사람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하나님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조사하지 않고도 세력 있는 자들을 아시고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과 그 판단의 즉각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를 표현할 때 꺾으려고를 사용하였습니다(24:1911:16). 24절에서는 사실 여부에 대해 굳이 조사할 것 없이 심판하실 정도로 모든 사람의 행위를 아시며, 그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예상치 않게 갑작스럽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 사이에 뒤집어엎으시고 흩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아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밤 사이에 엎으실 정도로 급작하게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보다 많은 사람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심판을 연기하실 수 있습니다(벧전3:9). 하지만 한번 심판을 작정하시면 마치 한밤중에 도적이 뚫고 들어오듯이 신속하고도 갑자기 임하십니다. 그리고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그때는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행위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권력자들을 뒤엎으심으로 다시는 그들이 권좌에 복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모든 길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 빈궁한 자를 억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사람의 목전에서 문자적으로는 그들이 보는 곳에서, 공개적인 장소에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을 공식적으로, 법적인 의의를 가지고 벌하십니다.

아울러 이러한 공적인 징계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경종이 되기도 합니다. 그의 모든 길은 하나님이 정하시고 명하신 법도와 원칙 또는 교훈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도와 원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깨달아는 주로 이성적인 지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죄악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들의 죄악된 행동을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28절입니다. 엘리후는 박해자요 폭군으로서의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사용해서 도와주고 보살펴야 할 가난한 자와 눌린 자들을 도리어 핍박하므로 그 원성과 울부짖음이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게 하였습니다. 그 소리는 곧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신원입니다. 하나님은 압제당하는 자들의 절규와 신음 소리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들으십니다.

 

(하나님과 욥, 누가 잘못하였는가?)

 

29-3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 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 슬기로운 자와 내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내게 말하기를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아무도 하나님을 정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시면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서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잠시 혹은 길게 침묵하시는 이 침묵은 가난한 자들의 신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시는 효과적인 침묵입니다.

누구도 감히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정죄는 악하게 행동하다라는 뜻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범법자로 몰아 붙이는 가증스러운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법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은혜)을 악한 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떠한 은혜도 베풀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멸망의 길에 버려두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들, 하나님의 법과 공의를 무시하고 짓밟는(27) 사람들의 폭정으로부터 무고한 백성들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내가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참회하라고 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여 죄를 고백하고 그에 합당한 형벌을 감당하여 사하심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죄에 대한 고백 뒤에는 내게 가르치소서간절한 청원이 이어집니다. 제가 행한 범죄 중에 제가 깨닫고 있는 것 이외의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기도하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욥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은, 혹시 욥 자신도 모르고 있는 죄악과 범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욥은 나중에 엘리후의 이런 말의 영향을 받고 회개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의 판결을 불복한다고 하여, 하나님이 욥이 원하시는 것을 해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느냐고 묻습니다. 물론, 결정은 욥이 할 일이고, 엘리후가 할 일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고 계신 것을 말씀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불복한다고 하여 욥의 뜻대로 재판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엘리후가, 욥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형벌의 방법과 의미에 대해 거부하고 반대를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설의적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네 뜻대로 잘못을 인정하겠느냐? 묻습니다.(KJV, Should it be according to thy mind?).

엘리후는 여기서 욥에게 하나님의 보응하시는 공의로운 방법에 애매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면 욥 자신이 알고 있는 보응의 참다운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해보라고 요구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그 방법을 모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엘리후의 말에 동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이 무식하게 말하고 지혜롭지 못하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욥이 자신의 의견을 진술했을 경우,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들의 반응이 어떠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엘리후는 그들의 판단이 욥을 정죄하는 자신의 판단과 일치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욥의 뜻대로 재판해 달라는 욥의 제안은 기본적인 지식(상식)도 없는 무식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혜없다는 말은 이성적인 판단, 심사 숙고한 결과, 사려 깊고 신중한 행동이 없다는 말입니다.(14:219:149:22). 또한 이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따라서 35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에 대해 불평하는 욥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식한 것인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엘리후의 지적은 엘리후 자신만이 아니라 욥의 말을 들은 지혜로운 자는 누구든지 그 반박에 동의하여 욥의 진술에 올바른 지혜가 없음을 지적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는 욥을 지적함)

 

36,37절을 보십시오.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그가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엘리후는 욥이 끝까지 하나님께 조사 받기를 원합니다. 그는 욥이 죄에다 반역까지 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시험받기를 원하다고 기원하면서 욥의 회개를 권고하고 있습니다.(31,32). 손뼉을 치다는 조롱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엘리후는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욥의 행동이 하나님을 조롱하는것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엘리후가 말하는 핵심은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다가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시오. 심판장이신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고 욥은 악한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악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의)

 

엘리후는 이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합니다. 우리는 엘리후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엘리후의 말은 로마서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니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십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엘리후의 말이 조금 지나쳤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지나치게 주장하다가 욥을 너무 죄인으로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롭다는 말에 우리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이 죄악되다는 말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특히 욥이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약탈했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못합니다. 욥은 전혀 그런 적이 없습니다.

욥이 의를 주장하다고 하나님의 의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의를 주장하다가 욥을 죄인으로 몰고가는 것도 잘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의롭고 욥도 의롭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엘리후가 왜 이런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까? 그가 하나님의 정의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에게도 고난을 주십니다. 죄없는 자에게 고난을 주시기도하십니다. 정의롭다면 반드시 악한 자에게만 고난을 주신다는 그의 생각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시지만 그분은 때로 의인에게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죄인에게만 고난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욥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욥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욥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부족하였습니다. 우리는 의인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의인에게 주시는 고난은 죄에 대한 심판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단련하시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불순물을 제거하시고 정금과 같이 만들기 위해서 의인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의미로 고난을 주십니다. 아벨의 고난이나 세례요한의 고난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으로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고 사람을 사랑해야합니다. 사람들에게 의로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욥기 34장 강해 하나님과 욥 둘 다 의롭다

말씀 욥기 341-욥기 3437

요절 욥기 3412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욥기 34장 강해 끝입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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