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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이사야 59장 강해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풀며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2-01-18 00:00:00
조회수 : 4,740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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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9장 강해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말씀 이사야 591-이사야 5921

요절 이사야 5916절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이스라엘은 죄로 인하여 멸망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중보할 중보자를 찾지만 중보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중보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이사야 591-3절은 2인칭 복수로, 4-8절은 삼인칭복수로, 9-15절은 일인칭 복수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일을 하십니다. 이사야서의 총주제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1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114절에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임을 싫어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이 친히 구원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지 않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이스라엘은 금식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손이 짧아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함이 아닙니다.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함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이 잘 안 될 때 하나님도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나의 죄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도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도 생각해야합니다. 나의 불행이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안에서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짧은 생각에는 우리의 죄로 잘못된 것 같지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주세요하는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지혜를 주세요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가 좋은 기도요, 바른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못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받지 못하는 원인이 나에게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기도하는 것을 갖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받을 그릇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은 손을 펴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먼저 깨끗이 씻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실려고 해도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받을 수 없어서 괴롭지만 하나님은 주실 수 없어서 괴롭습니다.

 

(죄악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 놓았고)

 

2,3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악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들의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워서 그들의 보지 못하게 하였고 귀를 막아서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복 주시려고 하지만 그들의 죄악으로 복을 주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서는 죄를 제거해야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손에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피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손에서 이웃의 피를 흘리는 죄악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웃을 미워하고 해치고자 하는 살인의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 아름답게 기도하는 말 뒤에 하나님은 그들이 거짓말하고 악독을 말하는 것을 듣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해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였습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성공만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는 악독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제사와 기도만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함께 받으십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고 기도하면서 우리의 삶에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나의 희생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진실하고 겸손히 회개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기도는 감사이고 다음은 회개기도입니다. 우리가 달라는 간구는 그 다음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는 한 마디 인사차하고 계속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답답한 소원으로 가득차 있으므로 간구만 나옵니다. 그래서 감사 회개 다음에 간구를 해야 합니다.

 

(사법부의 타락)

 

4절을 보십시오.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하나님은 계속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합니다. 사법부는 모든 판단의 기준입니다 사법부가 정의로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법부가 타락하였습니다. 그들은 공의대로 진실하게 판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재판하지 않았습니다. 뇌물에 따라서 재판하고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서 재판을 하였습니다. 중심으로 보지 않고 겉에 나타난 부귀 권세를 보고 재판하였습니다.

어느날 변호사에게 도와달라고 하였더니 변호사가 이 사건을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줄까요? 물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공의가 없습니다. 우리도 검사도 판사도 믿을 수 없습니다. 행정은 잘못될 수 있어도 사법은 행정과 별도로 독립된 곳입니다. 사법은 공의롭게 되고 어느 쪽으로든지 치우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어디 가서도 공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사법부의 판결을 믿지 않습니다. 공의대로 소송하지도 않고 진리대로 판결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복을 주시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허망한 우상을 의뢰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지 못하고 거짓을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온갖 흉계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악한 생각을 하고 죄를 짓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독사의 알을 품으며)

 

5-7절을 보십시오.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단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고 사단이 있었습니다. 사단은 죽이는 자입니다. 그들은 독사의 알을 품는 독사와 같았습니다. 독사에서는 수많은 알이 나오듯이 그들은 수많은 죄를 낳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의 사건이 터지면 줄줄이 비리가 나옵니다. 꼬리를 짜르고 죄를 감춥니다. 본체가 나오면 사회가 무너집니다. 죄를 들추는 것이 겁이 납니다. 독사의 알을 먹는 자는 죽습니다. 그 알을 밟으면 독사가 나와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거미줄을 짜서 사람을 잡기 위해서 얽어놓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미줄로 다른 사람을 해치고 자신의 유익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짠 것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을 가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만든 옷은 다 거짓입니다. 그들의 죄악으로 이익을 얻는 행위는 자신에게 무익합니다.

그들의 손에는 남을 해치는 포악한 행동이 있습니다. 그들의 발은 행악하기에 빠릅니다. 선을 행하는 것에는 느리고 죄를 짓는데는 빨랐습니다. 그들은 아무 죄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데 빠르게 움직입니다. 고스톱치고 게임하고 노름하는데 빠릅니다. 나이트클럽가고 술먹는데 빠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데는 아주 느림보입니다. 말씀보는 데는 느려터졌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악합니다. 그들의 사상이 타락하였습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평안의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과 평안을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악한 생각을 합니다. 자업자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길에 황폐와 파멸을 두십니다.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습니다. 그들은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들어서 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곧게 가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따라서 굽은 길을 갑니다. 그 길을 밟는 자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평화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평강의 왕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죄사함의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회개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예루살렘이 평화의 길을 몰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슬퍼하십니다. 그 후에 40년 후에 예루살렘은 망합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죄악으로 총명이 흐려집니다. 어떤 때는 답답합니다. 이것이 슬픈 일입니다.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실수가 아니라 더 큰 악에서 온 결과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일을 잘 처리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 속에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이 있으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멍청해집니다. 그런 실수를 할 필요가 없는데 그런 실수를 합니다. 그런 멍청한 일이 속출합니다. 평화의 길을 모르는 것이 죄 때문입니다. 몰라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죕니다. 능력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런 것도 죄입니다. 죄악이 점점 쌓여서 무식하고 무능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로마서에서 인용하여 인류가 다 죄인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죄악의 결과)

 

9,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이사야서의 주제가 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부터 일인칭으로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기도를 듣지 않는다는 말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많이 맞았는데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은 결과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의와 공의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정의와 공의가 멀리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의와 공의의 빛을 바라나 실제는 캄캄한 어둠 가운데 행할 뿐입니다. 소원은 있는데 소원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빛을 바라나 빛이 없고 평화를 바라나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소원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원에 합당한 행위가 중요합니다. 뜻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어떤 뜻이냐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이 없었고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는 심판의 어둠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모든 죄를 인정합니다.

예수님이 감람산 언덕을 보면서 울며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평화의 길이 숨겼다고 하십니다. 모두가 안정을 원합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악이 있습니다. 회개가 없습니다. 마음에 빛이 있어야 합니다. 빛이 있어야 앞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이 아무리 밝아도 빛이 없으면 앞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눈을 떠야 하고 동시에 빛이 있어야합니다. 객관적인 빛이 있어야 하고 주관적인 빛이 있어야합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이 은혜로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삼손이 힘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기둥을 엎을 만큼 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소경이 되면 지혜와 인격 소유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소경과 같이 두루 더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므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맹인같이 담을 더듬어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밝은 대낮에도 황혼 때같이 길을 가다가 넘어졌습니다. 이팔청춘의 꽃다운 나이에도 그들은 넘어져 죽은 자 같았습니다. 그들은 사망권세에 시달려 무력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이 지식이 있어도 돈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돈 때문에 넘어집니다. 그들은 밝은 대낮에도 넘어집니다.

 

(우리의 허물이 심히 많으며)

 

11,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은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통으로 곰같이 부르짖었습니다. 비둘기같이 슬피 울었습니다. 정의를 바라지만 정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바라지만 구원은 그들에게서 멀었습니다. 그들은 권세자들의 억압을 받았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외칩니다. 소원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 됩니다. 아무리 정의를 바라고 있고 실현해보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깊은 곳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죄와 허물이 주님 앞에서 심히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죄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허물이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런 죄가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자신이 신이 되는 죄로 그들은 공의를 잃어버렸습니다. 평화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속인 죄를 회개함)

 

13,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낳으니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충성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속였습니다. 하나님을 복종하여 따르지 못하고 딴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포학과 패역으로 가난한 동족을 해치며 짓밟았습니다. 마음 속에는 항상 속임수를 꾸며 대며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회개 없는 기도는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정직한 마음을 가진 다음에 우리의 기도가 상달됩니다. 은혜를 달라고 하지만 진실과 충성심이 없습니다. 복을 달라고 하지만 복을 받을 그릇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달란다고 다 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돈을 달라고 한다고 마음대로 줄 수 없습니다. 돈의 가치를 모르고 쓸 줄을 모릅니다. 그 나이에 돈을 주면 인생을 망칩니다. 돈 대신에 채찍을 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안 주는 것이 사랑이고 거절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어린 아이같이 달라고만 합니다. 진정한 회개 없이 줄 수 없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 일을 맡깁니다. 작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 큰 일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회개가 먼저입니다. 공의와 진실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완고함이 있습니다. 그러면 총명이 흐려지고 판단이 흐려집니다. 컴퓨터 부속하나가 망가지면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거짓말을 잉태합니다. 빛을 발한다고 하지만 공의를 발한다고 하지만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많은 소원도 거짓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구하는 것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들이 거짓으로 바라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먼저 찾아야합니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아십니다. 그들이 공의를 진실로 구하기까지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직하고 진실해야합니다. 마음에 거짓말이 있습니다.

간디는 한 마디 거짓말해서 나라가 독립되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거짓으로 세운 나라는 거짓으로 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틴루터킹 목사님은 한 평생 존경한 사람이 간디입니다. 킹의 전시실에는 킹의 유물보다 간디의 유물이 많습니다. 이 두 사람은 정직함을 바랐습니다. 이들은 비폭력을 갖고 운동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의와 정직을 추구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북한 동포를 위해서 기도만 하였지 물질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실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물질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북한 동포를 위해서 기도한 것이 거짓된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자 정의와 공의가 이스라엘에게서 멀리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성실과 정직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죄로 인하여 고통가운데 있었습니다.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개혁을 외치지만 개혁이 되지 않습니다. 개혁을 말하는 사람들 마음 속에 개혁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으면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복을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겸손히 무릎을 꿇는 것이 먼저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복잡한 문제로 고민할 때 있습니다. 그는 회의를 중간에 멈추고 기도실에 기도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문제를 놓고 시시때때로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5,16절을 보십시오.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이사야는 이스라엘 당시의 죄악상을 회개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함이 없어졌습니다. 악을 떠나서 믿음으로 사는 자가 탈취를 당합니다. 그들에게서는 정의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받으시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정의가 없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의와 공평이 있을 때 하나님은 은혜를 더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높이며 순종하며 정의를 지킬 때 기뻐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런 혼란을 바로잡을 정치적인 지도자가 한 사람도 없고 옳은 말을 하는 예언자가 전혀 없는 것을 보시고 탄식하십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많은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당시에 사람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합니다. 영성을 잃어버립니다. 양심이 없으면 사람이냐고 합니다. 잘못된 사람들을 보면 사람답지 못하다고 합니다. 도덕성이 있어야 하고 사람다워야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져야합니다. 식물인간은 살았을 뿐 정신이 없습니다. 또 하나 동물인간이 있습니다. 움직이지만 사람이 아닙니다. 영성이 온전해야합니다. 영이 이성을 지배하고 이성이 육체를 지배해야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동물성이나 식물성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6장에 노아홍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을 장례식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시체들뿐입니다. 사람이 하는 짓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악마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가고 동물과 악마들만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중재할 자가 없습니다. 사람이 없지만 중보자가 있어야 합니다. 몇 사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종자처럼 보존해 둘 사람이라도 있어야합니다. 선지자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면 기대할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심판자가 없습니다. 제사장이 없습니다.

한 두사람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 하나 때문에 버티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죄악으로 가득차서 망합니다. 롯도 있지만 소돔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딸을 주면서 관계하라고 합니다. 구원받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사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저쪽에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롯을 구원하십니다. 조금 구원 받을 근거는 있지만 중보의 기도가 합하여 구원받습니다. 롯은 손님대접하고 천사를 귀히 여깁니다. 그는 떠나라고 할 때 미련없이 떠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끝이 됩니다.

중보자가 있으면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중보자가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은혜로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말해 주는 중재자가 없습니다. 이제는 끝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수 없습니다. 기다려볼 가치도 없습니다. 인내도, 가치가 있을 때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중재자가 되십니다. 자신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중재자가 되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스스로 공의를 세우셨습니다. 스스로 중보자 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전신갑주를 입으시고)

 

17절을 보십시오.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은 전신갑주를 입으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십니다. 공의가 사람들의 몸을 보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심으로 공의를 이루십니다. 구원을 머리에 투구로 삼으십니다. 구원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보호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머리처럼 가장 중시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심판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죄에 대한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십니다. 속에서까지 죄를 멀리하십니다. 구원의 일에 대한 열심을 겉옷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공의를 이루시고 구원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니까?

하나님이 전신갑주를 입으신 것은 바울이 우리 성도들에게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한 것과 유사합니다. 예수님만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전신갑주를 입어야합니다. 사도바울은 구원의 투구를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서 평안의 신발을 신고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로 심장을 막는 호심경을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중보자가 되어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투구를 쓰셨지만 우리는 중보자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투구를 쓸 수 있습니다.

 

(친히 보복하시는 하나님)

 

18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의 복음을 영접하는 자는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구원의 복음을 영접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법에 따라서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원수에게 보응하며 세계의 모든 열방들에게 보복하십니다.

 

(온 세상이 여호와를 경외함)

 

19절을 보십시오. “서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쪽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심판하시자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납니다. 해가 지는 서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합니다. 해돋는 동쪽에서 하나님을 믿고 여호와의 영광을 두려워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처럼 친히 오십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세계만민을 친히 심판하십니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2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구속자 예수님이 시온에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구원을 베푸십니다. 백성을 기대하는 것이 없습니다. 야곱의 자손 가운데 죄과를 떠나는 자를 구원하러 친히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이 회개한 자를 다 구원하시는 구원자로 이스라엘에게 임하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지난 날에 모든 것이 잘못되어 의라고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종말적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회개가 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죄를 멈춘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지난날 내가 잘못했습니다.’ ‘바로 해보고자 해도 고칠 수 없습니다.’ ‘내가 바르게 해도 안 됩니다라고 합니다. 혀를 빼물고 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줍니다. 복음은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거절하면 심판이 기다립니다. 그때는 주님의 의가 직접 나타납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언약)

 

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일방적으로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영원토록 그들을 떠나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입에서와 그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에게 성령과 말씀을 보내사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말씀과 성령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고 성령이 오십니다. 말씀과 성령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받고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교회입니다. 말씀 없는 성령은 신비주의입니다. 성령 없는 말씀은 이성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고 일방적으로 나타난다고 하십니다. 후손들에게 이어가면서 말씀과 셩령이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과 성령에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마음에 우리의 생각을 돌립니다. 말씀과 성령을 영접하면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하시는 구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을 이를 아시고 스스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스스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공의를 이루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성령과 말씀을 주셔서 그들을 살리십니다. 아멘!

 

이사야 59장 강해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말씀 이사야 591-이사야 5921

요절 이사야 5916절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이사야 59장 강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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