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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창세기 44장 강해 유다의 대속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8-01-15 00:00:00
조회수 : 6,391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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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4장 강해 유다의 대속
말씀 창세기 44장 1-창세기 44장 34
요절 창세기 44장 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우리가 지난 말씀에서 본 것처럼 유다는 자신이 베냐민에 대해서 담보를 하겠다고 하며 아버지 야곱에게 베냐민을 보내도록 설득하였습니다. 야곱은 베냐민이 죽으면 죽으리다는 믿음으로 베냐민을 보냈습니다. 형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에게 갔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에게 다섯 갑절의 음식을 주어서 형들의 시기심이 사라졌는가 보았습니다. 형들은 베냐민과 함께 먹고 즐기며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제 형들의 문제는 다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다 철저하게 형들을 훈련시킵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는 데 신중에 신중을 기합니다. 요셉은 아주 철저한 사람입니다. 이런 훈련을 시킬 때 유다가 베냐민을 대속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놀라운 대속의 비밀이 나타나 있습니다. 유다의 대속으로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모두가 살아납니다. 전혀 쓸모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믿음의 조상으로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대속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변화시킵니다. 책망이나 심판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비밀이 대속의 원리 속에 들어있습니다. 대속이 불화한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만들어줍니다. 이 시간 대속자가 된 유다를 통하여 대속의 원리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형들이 베냐민과 함께 슬퍼하지를 테스트함)

1-3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

요셉은 베냐민을 도둑으로 몰아서 형들의 반응을 보고자 합니다. 요셉은 전에 형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요셉은 이번에는 형들을 도둑으로 몰아서 훈련시킵니다. 모두를 도둑으로 몰지 않고 베냐민만을 도둑으로 몹니다. 전에는 베냐민에게 다섯 배의 음식을 주어서 베냐민과 함께 기뻐하는지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베냐민을 도둑으로 몰아서 베냐민과 함께 슬퍼하는가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형들을 도둑으로 모는 요셉)

4-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가서 그대로 말하니”

형들은 애굽에서 곡식을 사 가지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형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여 멀리 가기 전입니다. 요셉은 청지기를 보내서 요셉이 점을 칠 때 쓰는 은잔을 왜 도둑질해 가져갔느냐고 책망합니다. 너희는 선을 악으로 갚는 나쁜 놈이라고 하였습니다. 도둑도 간첩과 동일하게 남을 속이고 물건을 훔치는 자입니다. 도둑도 사단적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사단적인 거짓의 죄악을 회개시키고 있습니다. 형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공동책임을 지고자하는 형들)

7-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

청지기가 도둑으로 몰자 형들은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들은 결단코 도둑질은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자루에 있던 돈도 다시 가져왔는데 우리가 당신의 은금을 도둑질 하겠느냐고 합니다. 그들은 은잔이 발견되면 발견된 자는 죽을 것이요. 자신들은 종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결백을 주장하며 공동으로 죄에 대한 책임지고자 하였습니다.
청지기는 은잔이 발견되면 그 사람만 종이 될 것이요. 다른 사람은 죄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공동책임을 지게 하지 않고 개인책임을 묻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공동체 의식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급히 자루를 풀었습니다. 나이 많은 르우벤에게서부터 나이 적은 베냐민에까지 조사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냐민의 잔에서 요셉의 은잔이 나왔습니다. 청지기의 말대로 이제 은잔이 나온 베냐민만 종으로 애굽에 돌아가면 됩니다.
전에 같으면 형들은 베냐민을 종으로 잡히게 두고 자신들만 가나안 땅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나는 아니라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베냐민 때문에 고통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요셉을 애굽에 팔았던 그들은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자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고 모두 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베냐민과 공동책임을 지고자 하였습니다.

(함께 노예가 되고자 하는 유다)

14-15절을 보십시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다시 요셉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형들은 모두 요셉에게 엎드렸습니다. 모두가 요셉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요셉은 너희가 어찌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내가 점을 잘 쳐서 그런 일을 잘 밝혀내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유다는 그들을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이때 유다가 형제들을 대표하여 말합니다. 유다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과거 요셉을 팔았던 죄악을 발견하고 회개합니다. 그들은 베냐민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악이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유다도 요셉처럼 하나님의 주권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다는 공동책임을 지고 다 함께 종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베냐민만을 종으로 삼고자 하는 요셉)

17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요셉은 계속하여 형들을 시험합니다. 요셉은 결코 공동책임을 지우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종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베냐민에 대한 형들의 반응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요셉의 훈련 방법은 한 마디로 하면 누명 씌우기 훈련입니다. 여러 사람 중에서 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알고자 합니다. 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게 하고 다른 사람이 고난당한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봅니다. 때로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런 훈련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공동체 가운데 한 사람이 고난을 받게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 대해서 함께 고통하는지 아니면 고난당하는 사람을 고소해하는 지를 봅니다. 형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베냐민에 대한 야곱의 사랑을 아는 유다)

18-20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 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유다는 요셉에게 양해를 구하고 베냐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유다는 자신들에게 노인이신 아버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한 어머니가 남기신 아들이 둘이 있는데 형은 죽고 막내 베냐민만 살았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베냐민을 특별히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오면 아버지가 죽을 정도이므로 데리고 애굽으로 오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이 생명처럼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유다는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유다는 이전에 요셉을 팔면서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적으로 성숙하여 아버지의 아픔을 헤아리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죽게 할 수 없다는 유다)

21-2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 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 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그런데 요셉이 막내 아우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곡식을 살 수 없다고 하여 할 수 없이 베냐민을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베냐민을 보내면서 베냐민이 죽으면 아버지가 슬퍼하며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사랑하는 베냐민이 돌아가지 못하면 아버지 야곱은 슬퍼하며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유다는 아버지가 베냐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고 함께 아버지의 슬픔에 동참하였습니다. 유다는 이렇게 장황하게 베냐민을 사랑하는 야곱에 대해서 말하며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유다는 야곱 아버지의 생명과 베냐민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다고 말합니다. 베냐민이 아버지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 야곱은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아버지를 죽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느냐고 합니다.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고자 하는 유다)

32-34절을 보십시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 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유다는 자신이 베냐민에 대해서 책임지기로 약속했음을 말합니다. 베냐민을 돌아가게 하지 않으면 영원히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유다가 약속대로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잡힐 테니 베냐민은 돌려보내 자유를 달라고 합니다. 자신을 죄수로 가두고 베냐민을 보내서 베냐민과 아버지를 살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대신 갇힘으로 베냐민도 살리고 아버지도 살리고자 하였습니다.

(유다의 대속의 원리)

45장 일절을 보십시오. l"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유다의 회개를 보고 요셉은 모든 사람들을 물리치고 자신을 드러냅니다. 대성통곡을 하며 자신이 바로 요셉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형들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선포합니다. 무엇이 요셉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을까요? 여기에 엄청난 복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요셉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대속의 원리입니다.
대속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상대방을 대신하여 자신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고 베냐민을 자유하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대속의 원리입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애굽에 보내주고자 한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유다가 대속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베냐민을 보내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베냐민을 담보한다는 말을 듣고 보내고자 결정합니다. 담보하는 것이 대속입니다. 우리가 보증서서 망한 사람을 봅니다. 성경에도 보증서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유다는 생명을 보증서서 망하고자 하였습니다. 유다는 베냐민에 대한 대속으로 자신이 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창세기를 읽으며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다가 메시야의 조상으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메시야의 예표와 같이 생활하고 흠이 없는 요셉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유다는 우리가 잘 알듯이 요셉을 팔은 인신매매범입니다. 창녀집에 들어가 잠을 잤는데 그 사람이 며느리여서 며느리와 잠을 자고 쌍둥이를 낳은 씻지 못할 죄를 지은 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다를 통하여 다윗이 오고 메시야가 온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속에도 숨어 있는 것이 대속의 원리입니다.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희생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다를 메시야의 조상으로 축복하였습니다. 이제 창세기를 거의 마쳐갑니다.
창세기를 공부하며 나에게 또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어떻게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도 조상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 엘리에셀이 이삭의 결혼을 도운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아주 믿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처에서 난 이스마엘도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에서 난 쌍둥이 에서마져도 믿음의 조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엘리에셀이나 이스마엘이나 에서가 믿음의 조상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들은 자격이 없습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나은 자식들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넘긴 사람입니다. 불신자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을 판단한 기준으로 형평성 있게 야곱의 열두 아들도 판단해 보아야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들보다 나은 자들입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면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는 줄 알고 첫날 밤에 신방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라헬의 언니 레아가 라헬 대신 왔습니다. 야곱은 원치 않게 두 명의 아내를 얻었습니다. 라헬은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 종 빌하를 주어서 단과 납달리를 낳았습니다. 레아도 그 종 실바를 주어서 갓과 아셀을 낳았습니다. 잇사겔은 정력제를 라헬에게 주어서 남편을 사서 낳은 아들입니다. 우리가 전 조상들에게 적용했던 기준으로 이들에게 적용하여 판단하면 그들은 아무도 믿음의 조상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후처의 자식인 이스마엘을 제외한 것처럼 후처의 자식들 네 명은 우선 믿음의 조상에서 제외해야합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여덟 명입니다. 이 여덟 명도 조금더 살펴 보면 더욱 가관입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서모 빌하와 잠을 잤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혈기로 살인극을 벌였습니다. 유다는 창녀와 잠을 잤습니다. 잇사갈은 정력제를 주고 산 아들입니다. 이들은 다 믿음의 조상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도 쓸만한 사람 한 사람 찾으라고 하면 요셉입니다. 우리가 윗 조상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요셉 한 사람만 믿음의 조상으로 놓고 다 제외시켜야합니다.
우리가 이들이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들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을 그냥 은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은혜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받을 만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진노를 베푸실 자에게 진노를 베푸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전혀 은혜 받을 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자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가치관의 혼란이 생깁니다. 어떻게 이들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우리가 본문을 보면 이들이 믿음의 조상이 된 원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속의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베냐민이 잡히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잡혀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잡히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는 내가 나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때 유다가 대속자로 나섭니다. 베냐민과 다른 형제들을 대신하여 유다가 잡힙니다. 유다가 대신하여 형들은 모두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형들의 죄를 대신하여 유다가 대속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형들까지도 모두 믿음의 조상으로 쓰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들의 죄악으로 요셉도 속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아버지 야곱도 고통하였습니다. 이들이 고통을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훈련을 받았을 때 이들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변화되기까지 여러 사람이 희생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시지요?

(인간 구원의 원리는 대속이다)

대속의 원리는 인간 구원의 원리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고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심판을 받은 후에 우리는 지옥 불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지옥의 고통도 맛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고난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보면서도 한 가지 이해 안 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왜 고난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서 거의 죽게 됩니다. 발가벗겨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힙니다. 쇠사슬에 매여서 로마로 갑니다. 스데반이나 야고보는 순교를 당합니다. 왜 사도들에게 이런 고난이 꼭 있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대속의 원리를 알고 나면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대속은 예수님 한 분으로 끝나고 우리는 복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서 십자가는 대속의 원리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대속의 원리는 예수님 한 분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며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죽는 것도 대속의 원리입니다. 대속을 통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대속의 원리는 생명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여자들은 한 생명을 낳기 위해서 입덧을 하는 고통을 맛보아야합니다. 해산의 수고도 해야 합니다. 한 아이가 자라기 위해서 똥 오줌을 받아내는 고통도 해야합니다. 왜 이런 고통을 겪는 것입니까? 이는 대속의 원리입니다. 부모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한 생명이 자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을 해야 생명이 자라납니다. 심지어 사마귀나 달팽이나 가시고기는 자신의 자녀가 자라게 하기 위하여 자신은 온전히 죽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몸으로 자식의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씨에는 배젖과 배아가 있습니다. 배아가 완전히 죽어서 배아의 거름이 되어줍니다. 그때 배아는 자라날 수 있습니다. 오봉선사는 중국에서 출가하여 타이완에 가서 불도를 전합니다. 오봉선사의 실천에 매료된 사람들은 오봉선사를 왕처럼 떠받듭니다. 오봉선사는 그들에게 사람을 죽여서 제사드리는 인신공희의 풍습을 없애라고 합니다. 그러나 타이완 사람들은 그 악습을 없애지 않습니다. 오봉 선사는 그러면 어느 날 어느 곳에 가면 빨간 보자기를 쓰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타이완 사람들은 좋아라 하며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않고 그를 죽였습니다. 죽이고 보니 그가 그들이 그렇게 존경하는 오봉선사였습니다. 이를 알고 통곡한 사람들은 악습을 없앴다고 합니다. 내가 희생함으로 서로 사랑합니다. 용서합니다. 축복합니다.
모세가 대신 나를 죽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 간에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초등부 수련회를 갔습니다. 너무 더워서 아주 피곤하였습니다. 초등학교 이학년들이 바닥에 오줌싸는 대회를 했습니다. 유초등부 부장 장로님이 가셔서 그것을 치워주셨습니다.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다 청소하였습니다. 장로님이 세 시간 걸려서 청소하는 것을 보고 아이들은 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을 희생제물로 던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으면 됩니다. 4세기 때 텔러마크사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수도사인데 성령께서 로마로 가라고 합니다. 로마에는 검투사의 싸움으로 축제 분위기로 가득하였습니다. 검투사는 한 사람이 죽어야 게임이 끝납니다. 사람을 죽이는 못된 경기입니다. 수도사는 검투사 사이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멈추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검투는 멈추지 않습니다. 결국 수도사는 검투사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하지만 수도사의 희생을 통해서 검투사의 경기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대속의 은혜)

영적인 생명의 세계는 더욱 대속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냥 저절로 예수 믿은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주신 분이 잇습니다. 말씀을 가르쳐주신 분이 있습니다. 나의 죄로 인하여 함께 고통한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우리를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한 분들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감사도 해야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나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희생할 때 다른 사람들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나는 새 생명을 얻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지 않는 것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지금 캠퍼스에 제자양성의 위기입니다. 사학년들이 졸업하면 남는 자가 몇명 없습니다. 저는 이 생각을 하면 밥 맛이 없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서 심각성을 갖고 지난 주 금식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우리는 이제 빚진 자입니다. 우리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우리도 한 양을 위해서 희생하기를 기도합니다. 대속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시대가 바뀌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이 바뀌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대속의 원리를 배워야합니다. 내가 대속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교회 가정 학교 그리고 사회가 변화될 줄을 믿습니다. 아멘!

창세기 44장 강해 유다의 대속
말씀 창세기 44장 1-창세기 44장 34
요절 창세기 44장 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창세기 44장 강해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52 [창세기] 창세기 50장 강해 요셉의 영광 오요한 2008-01-22
51 [창세기] 창세기 49장 강해 분량대로 축복한 이스라엘 오요한 2008-01-19
50 [창세기] 창세기 48장 강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야곱 오요한 2008-01-19
49 [창세기] 창세기 47장 강해. 이스라엘의 소망 오요한 2008-01-18
48 [창세기] 창세기 46장 강해 야곱의 애굽 이민 오요한 2008-01-15
47 [창세기] 창세기 45장 강해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오요한 2008-01-15
46 [창세기] 창세기 44장 강해 유다의 대속 오요한 2008-01-15
45 [창세기] 창세기 43장 강해 맡김으로 얻는 행복 오요한 2008-01-15
44 [창세기] 창세기 42장 강해 속이 깊은 요셉의 사랑 오요한 2008-01-14
43 [창세기] 창세기 41장 강해 총리가 된 요셉 오요한 2008-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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