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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창세기 42장 강해 속이 깊은 요셉의 사랑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8-01-14 00:00:00
조회수 : 5,605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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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2장 강해 속이 깊은 요셉의 사랑
말씀 창세기 42장 1-창세기 42장 38절
요절 창세기 42장 24절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많이 오해합니다. 감정대로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은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정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는 속이 깊은 사랑입니다. 말씀을 따라서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변화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요셉을 통하여 이런 속이 깊은 사랑을 배웁니다. 요셉의 속이 깊은 사랑으로 죄악된 형들이 열두지파의 조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속 깊은 사랑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책임 있는 자가 없는 야곱의 아들들)

1-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바라만 보고 있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저자는 공간적 배경을 요셉이 있는 애굽에서 야곱이 있는 가나안으로 옮깁니다. 가나안에도 애굽처럼 기근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식구는 70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먹고 사는 것이 막막했습니다. 이미 야곱은 늙고 자식들은 중년을 넘었습니다. 자녀들은 곡식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녀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만 보고 있느냐?” 책망하였습니다. 바라만 보지 말고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오라는 말입니다. 무책임하게 있지 말고 책임 있게 생활하라는 말입니다. 장성한 자녀들은 늙은 부모를 공양하여 효도를 해야 합니다. 야곱은 자녀들이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오도록 보냈습니다.

(야곱의 베냐민에 대한 애착)

3-5절을 보십시오.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요셉의 형 열 사람은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곡식을 사기 위해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막내 베냐민을 애굽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베냐민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하나 남은 아들입니다. 야곱은 라헬의 다른 아들인 요셉이 짐승에 찢어 죽은 줄 알고 있습니다. 야곱은 베냐민도 재난을 당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요셉을 잃은 상처가 베냐민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였습니다. 야곱에게 요셉은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습니다. 야곱의 내면에는 길이 라헬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베냐민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들들에게 곡식을 사오라고 보냈습니다.

(요셉 꿈의 불완전한 성취)

6-8절을 보십시오.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형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에 갔을 때에 요셉은 총리로서 곡식을 팔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총리인 요셉에게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요셉의 꿈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요셉은 과거 형들의 곡식 단이 일어나서 요셉의 곡식 단에게 절하고 열한 별이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우역곡절이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셨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요셉은 이들을 보며 꿈을 생각하였습니다. 요셉은 꿈이 다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의 꿈에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분명 꿈에서는 열한 별이 절하였는데 지금 열 명의 형들만 절했습니다. 요셉의 친동생 베냐민이 없었습니다. 혹시 베냐민도 자신처럼 사고를 당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볼 때 착잡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형들은 분명히 13년 전에 요셉을 팔었던 사람들입니다.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을 하여도 모른 체하던 사람들입니다. 요셉의 머릿속에는 형들이 자신을 팔 때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을 것입니다. 요셉이 이런 형들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요셉의 속이 깊은 사랑)

요셉은 과거의 상처를 생각하고 복수할 수 있습니다. “이 놈들을 당장 감옥에 하옥하라. 그리고 주리를 틀어라.”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잔인한 복수극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나요? 형들의 자녀들은 다시 요셉에게 복수를 할 것입니다. 이는 복수의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다음은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으니 형들을 살갑게 대하는 것입니다. “형님, 내가 하나님 믿고 형들을 용서했어. 형들도 하나님 믿어야 해. 응” 그러나 이렇게 무조건 용서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인본주의 사랑입니다. 당장은 서로 좋습니다.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형들의 내면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용서는 죄의 반복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책망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눅17:3) 우리는 마음 속에서는 죄를 용서하더라도 회개하거든 용서를 선포해야 합니다. 회개치 않은 상태에서 형들을 용서하면 형들은 언제 다시 요셉을 배반할지 모릅니다. 형들은 요셉이 언젠가 자신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요셉을 암살할지 모릅니다.
다음은 요셉은 속으로는 형들을 미워하며 겉으로는 친절히 대하는 것입니다. 친절한 금자씨처럼 겉으로는 웃으며 잘 대해줍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기회를 봐서 그들을 철저히 복수하는 것입니다. 복수를 통하여 모든 한을 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가져옵니다.
마지막은 요셉은 속으로는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차갑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변화되기까지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변화될 때까지 해산의 수고를 감당해야합니다. 이런 사랑을 하면 얼마동안은 사랑을 하는 사람도 괴롭고 상대방도 괴롭습니다. 주위 사람들도 괴롭습니다.
요셉은 이 네 번째를 선택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형들에게 많은 아픔을 주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도 아픔을 주었고 친동생 베냐민에게도 아픔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아픔을 주더라도 그들이 회개했을 때 비로소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이 사랑은 가장 어려운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회개시킨 후 용서를 선포할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속으로는 형들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을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지었습니다. 므낫세는 하나님께서 괴로움을 잊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께서 창성케 하셨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이름을 짓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요셉은 마음으로 형들을 이미 용서하였습니다.(41:51,52) 그러나 실제에서 용서를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이들의 죄를 회개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모른 체하고 엄한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형들에게 정탐꾼 누명을 씌운 요셉)

9-12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요셉은 형들을 정탐꾼으로 누명을 씌웠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강간범 누명쓰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누명쓰는 훈련을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형들을 훈련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막무가내로 이 나라의 비밀을 캐러온 정탐꾼이라고 형들을 몰아붙였습니다. 형들은 자신들은 정탐꾼이 아니라고 합니다.

(형들의 진실을 테스트하는 요셉)

13-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형들은 가나안 땅에 사는 한 사람의 12 아들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합니다. 막내 아들은 집에 있고 한 아들은 없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요셉을 팔고도 팔았다고 못하고 그냥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그들의 말을 꼬투리 잡아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였습니다. 형들이 막내아우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 정탐꾼인 증거라고 합니다. 막내 아우를 데리고 오라고 하여 진실함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사실 막내 아우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과 형들이 정탐꾼인 것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요셉이 무조건 그들에게 간첩으로 누명을 씌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들의 내면의 문제를 보았습니다. 그들의 내면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정탐꾼은 진실하지 못한 자입니다. 그들은 요셉을 팔고는 아버지에게 요셉이 짐승에 물려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요셉이 그냥 없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거짓말로 베냐민이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특성입니다.
사탄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사탄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입니다. 사탄은 겉으로는 광명한 천사처럼 보일지라도 속으로는 사람을 죽이고자 합니다. 잠시는 좋게 대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사람을 죽입니다. 사탄은 거짓말하는 죄를 통해서 일합니다.
형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였으나 속으로는 사탄의 자식들이었습니다. 큰 형 르우벤은 서모와 잠을 잤습니다. 둘째 셋째 형 시므온과 레위는 처참한 살인을 하였습니다. 넷째인 유다는 며느리와 잠을 자고 동생을 팔았습니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구원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까? 이들은 도저히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고 내면이 성령으로 변화되어야합니다. 요셉은 이들이 죄를 회개하도록 돕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와서 진실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진실된 사람으로 사람을 돕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진실 훈련을 위해 형들을 삼일 구속하는 요셉)

16-17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요셉은 형들 전부를 억류하고 한 사람만 가서 아우를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베냐민 아우를 데리고 오라고 하여 꿈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의 진실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주신 꿈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돕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삼일 동안 가두어 두었으나 형들은 아무도 가나안 땅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가두어 두자 여러 사람이 고통하였습니다. 이들의 회개를 돕는 요셉도 속이 탔습니다. 형들을 그냥 오랫동안 감옥에 가두어 두면 가나안 땅에 아버지와 동생이 굶어죽을 지 모릅니다. 아버지 야곱과 그 자녀들도 자식들이 곡식을 사러가서 오지 않자 기다리는 고통이 컸을 것입니다. 형들도 삼일 갇혀 있는 동안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방 땅에 와서 간첩으로 몰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셉은 이런 아픔이 있어도 형들을 사흘 동안 가두어서 사흘 동안 회개의 기회를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의 독실함, 진실함을 갖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고자 하였습니다. 사흘이 되어도 한 명이 가지 않자 요셉은 다시 베냐민을 데려오도록 새로운 방향을 주었습니다.

(진실한 자가 되어 구원 받도록 방향을 줌)

18-20절을 보십시오.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함을 밝혔습니다. 형들이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죄를 회개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짓을 회개하고 진실하기를 원했습니다. 한 사람을 인질로 잡히고 다 가서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진실함을 인정하여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반복하여 그들의 진실함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15)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16)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20)
왜 진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일까요? 거짓말을 하면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여러 번 거짓말을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진실해야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거짓말쟁이는 지옥 불에 들어갑니다. 진실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단국대 다니는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아버지가 육군의 장군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교원대 음악과 교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육군 중사였습니다. 어머니는 가정 주부였습니다. 그는 그의 거짓말이 들통나고도 나중에 또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를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심지어 그가 단대 학생이라는 것까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우리와 그 형제와의 관계는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짓고 나서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간음과 살인을 하고 거짓말로 속였을 때 성령께서 그를 떠나셨습니다. 다윗은 회개하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진실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는 영어로 truth로서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순교자들이 왜 순교합니까? 예수님을 안 믿는다고 한 마디 거짓말을 하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실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제가 회개하고 나서 가장 기뻤던 것이 바로 진실한 내면입니다. 나는 이제 속을 다 뒤집어도 거짓이 없다는 것에 너무나 행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나에게 성령님을 충만히 부어주셨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베냐민을 데리고 와서 간첩이 아니라는 진실함을 증명하라고 하였을 때 형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형들의 진실한 회개)

21-2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형들은 우리 범죄하였도다고 말하며 회개하였습니다. 형들은 공동 책임의식을 갖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나 요셉에게 현재 고난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요셉만을 더 편애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우리가 철이 없어서 그랬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은 서로에게 “그건 너 바로 너, 너 때문이야!”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범죄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괴로움을 보고 돕지 않아서 괴로움이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괴로움을 통해서 요셉의 괴로움을 이해하였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형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요셉은 형들의 회개를 다 알아 들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회개를 들었을 때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형님들! 나에요. 나” 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좀더 신중하고 철저하였습니다. 형들이 말로는 회개하였지만 내면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죄 문제는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의 문제 중에 하나는 용서가 좋다고 용서를 남발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아도 무조건 용서하라고 합니다. 한번 회개한다고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여 용서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이 말씀을 배우기까지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쉽게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철저히 죽으셨습니다. 죽는 시늉을 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철저히 고통을 받으시며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는 두 단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을 마음으로 용서해야합니다. 다음에 용서를 선포해야합니다. 우리는 마음으로는 용서해도 쉽게 용서를 선포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완전히 죄에서 벗어나 내면이 변화되기까지 참고 기다려야합니다. 훈련을 주어야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훈련을 주는 사람도 사실은 힘든 것입니다. 한 사람의 회개를 돕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셉의 첫 번째 눈물)

24, 25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요셉은 형들을 떠나서 옆방에서 그들이 모르게 울었습니다. 안도와 기쁨의 눈물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속으로는 뜨겁게 형들을 사랑했지만 겉으로는 엄하게 대했습니다. 요셉은 울고 돌아와서 둘째인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 결박하였습니다. 첫째 형은 리더가 되어 동생들을 인도해야합니다. 그래서 둘째 형 시므온을 선택하였습니다. 열 명의 형들이 가서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에 기초한 사랑)

요셉이 왜 그렇게 베냐민에게 집착하는 것입니까? 베냐민에 대한 남다른 사랑 때문입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요셉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꿈은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꿈대로 열한 명이 다 절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말씀에 기초하여 형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사랑은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압논의 사랑이 나옵니다. 그는 이복누이인 다말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어느 정도 사랑했는지 그를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파리하게 말라가고 병이 났습니다. 이는 사랑한 것 맞죠? 맞습니다. 이것이 요즘 젊은이들이 대부분 하는 사랑입니다. 상대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사랑합니다. 압논은 다말이 문병 온 것을 틈타 강제로 몸을 범하였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욕망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것보다 더 다말을 미워합니다. 이것이 감정적인 사랑이요. 육신적인 사랑의 한계입니다.
요즘에 부모들은 자식을 사랑합니다. 자녀를 하나 둘씩 낳으면서 그 사랑은 매우 지극 정성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손자를 사랑합니다. 그냥 사랑의 감정이 생기는 대로 사랑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다 보니 자식들이 자립심이 없어집니다. 부모님의 돌보심이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식들이 버릇이 없어집니다. 사랑하는 감정을 속이고 죄에 대해서는 엄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녀가 밥상에 올라가도 잘한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식을 망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따라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랑은 거짓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사랑해야합니다. 이것이 속 깊은 사랑입니다. 요셉은 시므온을 인질로 잡고 아홉 명의 형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들에게 사러온 곡식을 넣어서 보내고 돈도 함께 보냈습니다. 그들에게 길에서 먹을 양식까지 챙겨서 그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의 회개를 돕되 아버지 야곱과 식구들에게 식량을 주어서 구원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발견하는 형들)

26-2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형들은 곡식을 나귀에 싣고 떠났습니다. 한 사람이 나귀에게 곡식을 주려고 풀어보았더니 돈이 자루 아귀에 있었습니다. 이는 뒤의 말씀을 참고할 때 요셉의 순수한 호의였습니다. 그들은 돈이 도로 있는 것을 보고 도둑으로 몰릴까봐 오히려 혼이 나서 떨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그들은 이 문제를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 편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아주 중요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 편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혼 누가 하신 것입니까?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까? 나를 장학생이 되게 하신 것 누가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임 가운데 준영 목동은 지금까지 매번 수석입니다. 그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닙니다. 저는 그 비결이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그분이 무슨 비법을 소개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대답은 “하나님이 하셨지요.”였습니다. 저는 그분이 예배에도 자주 빠지고 하여 그렇게 대답할 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와! 박수를 칩시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을 믿은 믿음 편에서 바라보아야합니다.

(베냐민을 데려가야한다고 설득하는 아들들)

29-3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형들은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그들이 훈련 받은 일을 아버지 야곱에게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왜 시므온이 인질로 잡히고 오지 못 했는가 이야기하였습니다. 왜 막내인 베냐민을 애굽에 데리고 가야하는가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도록 설득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죄로 인한 야곱의 상처)

35,36절을 보십시오.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이야기를 마치고 그들이 자루를 열어보니 각 사람의 자루에서도 돈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아직도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전혀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자식들이 요셉에 대한 거짓말로 야곱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요셉과 시므온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베냐민까지 빼앗아다가 죽인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라헬과 요셉을 잃고 나서 마음 속에 깊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죄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가 되게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야곱이 라헬에 대한 집착하고 요셉에 대해서 편애한 것을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미숙한 르우벤)

37절을 보십시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르우벤은 아버지에게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말합니다. 르우벤의 말도 매우 과격합니다. 르우벤의 아들도 야곱에게는 손자입니다. 아들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손자를 죽이라니 이는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이는 이들의 내면이 아직 변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감정에 기초하였습니다. 이들이 열두 지파의 조상으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변화되어야합니다.

(베냐민에 대한 야곱의 집착)

38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야곱은 르우벤의 말을 듣고도 베냐민을 데려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베냐민에 대한 집착이 매우 컸습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만약 베냐민이 죽으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베나민도 죽을까봐 그를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베냐민을 잃으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의 아들 베냐민에 대한 집착이 대단합니다. 상대방이 없으면 죽는다는 말은 사랑이 아닌 집착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는다고 함께 죽는 것이 사랑입니까? 아들의 생명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녀를 사랑하지만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이런 야곱에게는 라헬과 베냐민에 대한 자유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야곱과 모든 야곱의 자녀 모두에게 자유함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결론 거짓되지 않은 사랑)

야곱이나 형들이나 마음에 상처나 죄로 인하여 인생이 어두웠습니다. 이들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치료가 필요하였습니다. 요셉은 간첩 훈련을 통하여 형들의 회개를 도왔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어떻게 이렇게 도울 수 있었을까요? 이는 하나님이 요셉을 그렇게 훈련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죄없는 요셉을 노예로 성폭력범으로 몰아서 지금까지 훈련시켰습니다. 요셉은 이런 하나님의 훈련을 받으며 내면이 겸손하고 포용력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될 만큼 내면이 강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 깊은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애매한 고난을 받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애매한 고난을 받을 때 사람들과 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때 우리의 내면의 죄를 회개하기에 힘을 써야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도 마찬가집니다. 감정을 따라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서 속 깊은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진실된 사람이 되게 해야합니다. 우리 모두 속이 깊은 사랑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2장 강해 속이 깊은 사랑
말씀 창세기 42장 1-창세기 42장 38절
요절 창세기 42장 24절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창세기 42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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