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장 강해 이부 주께 하듯 하라
골로새서 3장 18-골로새서 3장 25
요절 골로새서 3장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오늘 말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부부와 부자 그리고 주종 간의 윤리를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충만하였으면 우리의 삶도 충만해야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삶 속에서 충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충만한 관계를 가져야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려야합니다.
(아내는 복종해야 함)
18절을 보십시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가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입니다. 부부가 있고 자녀가 있습니다. 부모보다 부부가 더 가까운 관계입니다. 부자는 일촌이지만 부부는 무촌입니다. 부모와 자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게이지만 부부는 헤어지면 남입니다. 부부는 서로의 의무를 해야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주안에서 복종해야합니다.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고 기다려주어야합니다. 아내는 믿는 남편에게 더 잘해야합니다. 이는 주안에서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질서입니다.
하나님은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아내를 가정의 몸으로 세우셨습니다. 남자를 먼저 만들고 아내를 나중에 만들었습니다. 아내가 먼저 타락하고 남자가 나중에 타락했습니다. 몸과 머리는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머리와 몸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로 모시고 모든 일에 순종하였습니다. 자신을 누이라고 하는 말에도 순종하였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지켜야합니다. 하나님은 남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나중에 만드셨습니다. 여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당시는 세상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평등이 사라졌습니다. 교회에서만큼은 여자의 위치가 너무 높아졋습니다. 교회에서 자매들의 역할이 너무 커졌습니다. 교회에서 역전되었습니다. 역기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아내는 남편을 주님 대하듯이 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존중히 여겨야합니다. 영적인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 충만한 것입니다.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함)
19절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남편들은 연약한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몸의 일부입니다. 아담은 여자에게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신의 몸의 일부처럼 사랑해야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삽니다. 특히 여자는 사랑을 먹고 삽니다 남편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합니다. 아내를 윽박지르지 말아야합니다. 가르치지 말아야 합니다. 잔소리하지 말아야합니다 명령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인정해주어야합니다. 유행가에 있는 것처럼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하지 말아야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합니다. 여자를 존귀하게 여기고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듯이 해야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내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져야합니다. 사라는 잘못 동역하여 첩을 얻었고 그로 인해 가정에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감당하였습니다. 이삭은 리브가가 야곱이 복을 받게 할지라도 그의 책임으로 알고 다 감당해주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해야함)
20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해야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표시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부모에게 순종하면 그것이 자녀에게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목의 금사슬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는 부모를 욕하거나 치면 반드시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복을 받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야 하나님 이미지가 좋습니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에게 이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고 약속하여주셨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순종하여 보아스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는 다윗의 할머니요.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야곱의 방향에 순종하여 결혼하였고 야곱은 이삭의 방향에 순종하여 결혼하였습니다. 그들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해야함)
21절을 보십시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유교는 효는 가르치지만 부모의 의무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부모의 의무를 가르치십니다. 아비들은 자녀를 심하게 책망하여 노엽게 하지 말아야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해야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꿈과 소망을 심어야합니다. 기를 꺾지 말아야합니다. 믿음을 심어야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책망하여 회개하도록 도와야합니다. 야곱은 회개치 않는 자녀들의 죄를 책망하는 유언을 하였습니다. 자녀를 너무 비인격적으로 대하여 그들을 낙심케 해서는 안 됩니다. 청소년들이 불행한 세 가지 이유가 성적이나 외모나 부모라고 합니다.
(종은 눈가림만하지 말아야함)
22절을 보십시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바울은 종의 윤리를 길게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에는 종들이 80프로는 되었습니다. 당시의 종들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당시의 종들은 물건입니다. 돼지가 돼지우리에 살듯이 노예들은 노예 우리에 사는 것입니다. 노예는 도덕성이 없습니다.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라면 하는 것입니다. 저 남자와 자라면 자는 것입니다. 노에는 양심도 없습니다. 옷도 없고 신발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은 세리나 창녀들을 영접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못마땅하여 비판합니다. 당시의 교회는 노예를 사람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노예가 나올 때 그를 형제로 영접하여 주셨습니다. 주인과 노예가 평등하였습니다.
지금도 돈있다고 서로 차별합니다. 교회에 이상한 사람이 와서 냄새가 나면 어렵습니다. 술냄새가 나도, 옷이 좋든 나쁘든 어둔 과거를 알고 있든 없든 이들을 평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영원한 나라에 갈 사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전에 우리나라 초기 교회에 백정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백정이 초대 장로가 되었습니다. 양반들이 백정과 같이 교회를 다닐 수 없다고 하여 나가서 따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홍문사골 교회입니다.
당시에 노예가 주인을 죽이고 반항하였습니다. 그래서 노예를 사슬에 묶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종을 하나님의 자녀로 대접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을 복음화 하는데 노예가 큰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노예는 착하였습니다. 노예를 풀어주었습니다. 주인들에게 인간적인 주인도 있습니다. 노예들이 자고 있는 곳에서 노래소리가 들려 옵니다. 주인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주인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인이 듣고 감동하였습니다. 나도 예수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소문이 퍼지자 주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기독교는 가장 고상한 종교로 추앙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도망가지 않고 주인을 섬깁니다. 이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떤 노예들은 주인을 비판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주인이니까 충성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힘있는 노예들 중에서 신앙을 이유로 불순종합니다.
남편이 예수님 믿으면 믿지 않는 남편보다 더 잘해야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예수 믿으면 함부로 합니다. 식은 밥 먹이고 빨래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예수 믿으니까 참아주고 믿어줄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해야하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아내가 예수 믿는 것을 기회로 남편이 제멋대로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을 근거로 내가 아무렇게나 해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나오는 노예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노예에게 자발적인 순종을 말합니다. 신앙 안에서 순종합니다. 노예와 비노예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억지로 하면 노예입니다. 자유로 하면 자유인입니다. 여자가 무슨 팔자로 이렇게 밥만 하고 시장 바구니 들고 다니냐하면 노예입니다. 남편은 돈을 벌어와서 온라인으로 입금되고 다 빼앗긴다고 하면 노예입니다. 자발적으로 하면 자유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면 노예입니다. 벌 받을까봐 하면 노예입니다. 억지로 하느냐 형식적으로 하느냐 보상을 바라고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칭찬받으려고 하면 삯군입니다. 그분을 위해서 하는 것은 자랑입니다. 기쁨이요. 영광으로 하면 자유인입니다. 자유는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입니다.
내가 자유인이냐 종이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신의 상전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부하 직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부하직원은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에게 순종해야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과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위선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회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사람은 초라해집니다. 보든 안 보든 진실되고 충성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을 신경쓰면 못쓰게 됩니다.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합니다.
만하탄 중앙 우체국에 이씨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우편물을 가리고 있는데 순경이 들이닥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을 끌고 갑니다. 왜 그러느냐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씨에게 상을 줍니다. 그래서 상받을 때 동료를 체포해 가느냐 물었습니다. 씨씨티비를 보니 옆의 친구가 돈 봉투같은 것을 훔쳤습니다. 이씨는 그것도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남이야 보든 말든 충성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진실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경건한 성실입니다. 하나님이 보신다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신경써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해야합니다. 마음을 담아서 해야합니다. 정성을 다해서 해야합니다. 성의를 다해서 해야합니다.
교회 꽃꽂이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특송을 할 때도 성의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프랑스 루이 십사세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콜베르가 포목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25세 때 옷감 하나를 호텔에 숙박하고 있는 은행의 직원에게 가져다 주고 돌아왔습니다. 가게에 돌아와 보니 옷감을 잘못 알고 돈을 배로 받아왔습니다. 주인은 그 사람이 돈많아 괜찮다고 그냥 가만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원은 그 돈을 갔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포목점에서 해고되었습니다. 그것을 들은 은행의 직원이 불러서 점원을 은행직원으로 시켰습니다. 그가 정직함이 인정되어 나중에 올라가 프랑스 재무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주께 하듯하라)
23절을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주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데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섬겨야합니다. 종들은 주인을 주님께 하듯이 대해야합니다.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합니다. 주인을 세우신 하나님을 보아야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하듯이 주인을 대해야합니다.
(주님이 상을 주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상을 주님께 받을 줄 알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상주시고 심판하시는 분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사람이 주는 상보다 크고 좋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한 종에게 상을 주십니다. 불의를 행하지 말아야합니다. 불의를 행하면 주님께 심판을 받습니다. 종들은 주님의 상주시고 심판하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윤리는 예수님을 힘입어하는 것이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상주심을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며 해야합니다. 제가 아내를 대할 때 생기는 문제를 극복한 것도 그 안에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여 우리 교회가 성숙한 공동체가 되게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상전은 공평해야함)
4장 1절을 보십시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여기서 상전은 노예의 상전을 말합니다. 노예와 상전이 가까이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압구정동에 사는 가정부가 그 교회에 갔습니다. 가정부들만이 따로 모였습니다. 교회에 같이 왔을 때 형제자매와 똑같이 가정부를 대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그것이 안 되었습니다. 다른데서 야 너 하듯이 교회에서도 야 너라고 대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무너졌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똑같이 형제자매로 대해야합니다. 운전기사나 파출부에 대해서 똑같이 대해야 합니다.
상전에게 너희에게 하늘의 상전이 있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노예들 앞에 상전입니다. 그들은 종을 죽여도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상전 위에 상전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삽니다. 하나님 앞에서 노예와 상전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윗사람이지만 내 위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내가 재판장이 되었다면 하늘에 재판장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법적으로 내가 상전이지만 위에 상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내가 남을 심판하지만 나도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상전들은 하늘에 상전되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도 종입니다.
바울은 상전도 처지를 바꾸어 종의 위치에서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종에게 어떻게 해야하는가 알 수 있습니다. 종은 상전에게 공평을 베풀어야야 합니다. 당시에 상전은 내가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만이 참 법입니다. 내 마음대로 된다 안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법 안에서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상전들은 그렇게 종에게 공평을 베풀어야 합니다.
(결론)
우리의 사회 윤리는 하나님을 사이에 둔 윤리입니다. 하나님을 대하듯이 해야합니다 .주안에서 해야합니다. 주님의 상과 벌을 생각하며 해야합니다. 겉으로만 하지말고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주께 하듯이 보디발이나 바로를 섬겼습니다. 다니엘은 주께 하듯이 바벨론 왕을 섬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할 대 하나님이 상을 주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아멘!
골로새서 3장 강해 이부 주께 하듯 하라
골로새서 3장 18-골로새서 3장 25
요절 골로새서 3장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