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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연구자료

07성탄 메시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작성자 : john444
작성일 : 2007-12-24 00:00:00
조회수 : 963

07년 성탄 예배 메시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말씀 누가복음 2장 1-14절

우리 주위에는 기쁜 소식도 있지만 슬픈 소식도 있습니다. 남기혁 목동이 기사시험에 붙고 농협에 취업했다는 소식은 기쁜 소식입니다 상대 교수 식당이 값싼 가격에 비하여 밥과 반찬이 맛이 있다는 것도 기쁜 소식입니다. 영화 ‘식객’을 아주 재미있게 본 것도 기쁜 소식입니다. 아산 센타의 최요셉 고성미 목자님이 노총각 노처녀에서 벗어나 아산의 일호 선교가정을 이루었다는 것도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슬픈 소식도 있습니다. 서해 기름 유출 사고는 슬픈 소식입니다. 기름값이 올라가는 것도 슬픈 소식입니다. 천안 ubf에 신입생 역사가 부진한 것도 슬픈 소식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이 시간 이 소식을 듣고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일장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명령을 내린 것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때는 유대를 로마 황제 가이사아구스도가 통치 하고 있을 때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역사책에 옥타비아누스라고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시이저의 양자입니다. 아주 멋진 미남입니다. 그는 훈남이었고 완소남이었습니다. 그는 시이저가 암살당한 후 이차 삼두 정치를 종식시키고 로마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넘어간 최초의 황제입니다.
bc509년부터 시작된 공화정은 두 명의 집정관이 일년 임기로 통치합니다. 공화정은 임기제였기 때문에 권력이 약합니다. 그래서 공화정기에 로마는 외우내환에 시달렸습니다. 국외적으로 bc264년에서 bc146년까지 100년 이상을 카르타고와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합니다. 국내적으로는 bc80-bc40년까지 40년에 걸쳐 일이차 내란이 일어납니다. 이차 내란이 우리가 흔히 아는 시이저와 폼페이우스의 일차 삼두정치입니다. 일차 삼두 정치 후에 시저가 암살되고 다시 이차 삼두정치를 하면서 전쟁에 휩쓸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오늘 주인공인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는 악티움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됩니다. 황제 통치의 로마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이름을 가이사로 고치고 아구스드 곧 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가 주장한 것이 팍스로마나였습니다. 로마의 힘에 의한 평화입니다. 그는 로마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여러 나라의 울타리가 되어서 외국과의 전쟁을 막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경찰력으로 치안을 유지하여 국내적인 평화도 가져왔습니다. 옥타비아누스 이후에 오현제 동안 로마는 실제 외우 내환이 없이 평화의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에는 평화이지 속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배국의 평화이지 식민지국가는 착취를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 천하에 대해서 “다 호적하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로마 전지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식민지 국가에 세금을 거두고 군인을 징집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명령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심지어 만삭이 된 산모 마리아가 호적하기 위해서 이백 킬로의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가난한 요셉이 목수일을 그만 두고 호적하러 가야했습니다. 절대 권력과 권위주의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유신 독재 때 우리나라는 평화로운 것 같았지만 약자는 항상 고통했습니다. 대발이 아버지처럼 아버지가 큰 소리치면 집은 조용한 것 같지만 실상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사는 것입니다. 이런 절대권력 아래서는 항상 약한 자는 슬픔을 겪어야 합니다. 가이사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은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식민지 백성의 슬픈 소식입니다.
그러나 역사가 누가는 새로운 눈으로 이 사건을 보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으로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난다는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결국 가이사아구스도의 명령으로 구약에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난다는 예언을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이사아구스도의 명령은 메시야의 탄생을 준비하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와! 참으로 놀라운 해석입니다. 가이사아구스도는 이 외에도 여러모로 복음을 예비하였습니다. 가이사아구스도가 등장하여 로마에서 세계로 길을 냈습니다.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이때에 생겨났습니다. 세계의 언어를 헬라어로 통일시켰습니다. 이를 통하여 복음이 세계로 뻗어나갈 준비를 시키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가이사아구스도를 통하여 복음을 예언대로 성취하고 복음을 세계화 시킬 준비를 하였습니다.
우리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기쁜 소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고 죄수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는 슬픈 소식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기쁜 소식입니다. 이를 통하여 요셉을 꿈을 성취하고 애굽의 총리가 될 준비를 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통하여 한국의 경제를 성장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계선교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을 통하여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개최하여 세계 속의 한국 이미지를 심었습니다. 노태우대통령을 통하여 북방정책을 하고 우리가 북방 공산권 선교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김영삼 문민정부를 통하여 IMF를 맞게 하여서 우리 국민을 겸손하게 하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통하여 IT 강국을 만들어 복음을 세계화하는 좋은 길을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를 통하여 탈권위주의 시대를 만들어서 약자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명박의 실용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형식과 구습을 타파하고 복음 전파의 효율성을 가져 올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명박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도 기쁜 소식입니다. 기름유출도 사실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다는 알 수 없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올해 천안 ubf 가운데 경외팀의 성장이 미진한 것도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천안 ubf 모임이 내적으로 체질을 개선하게 되고 10만 선교사 파송과 성경 66권 강해서를 쓰는 기초를 마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 주위에는 모든 소식이 기쁜 소식입니다. 아멘!

제이장 빈방을 내어 주는 자만이 기쁜 소식을 맞이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있는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말구유에 놓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놓인 것은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집 저집을 다니며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어느 집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산모가 들어오면 귀찮기 때문입니다. 이것 저것 신경 쓸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방을 내어주고 좁은 방에서 함께 잠을 자야 합니다. 여관에 다른 손님들이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그들은 마음이 각박해져있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가난했습니다. 권력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요셉이 부자든지 적어도 통장 정도만 했어도 자리를 양보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로 오셔서 아무도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어떤 집이라도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그 집은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 집은 영원히 성경 속에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영접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기쁨을 맛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한 기쁨의 좋은 소식을 맛보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의 방을 비워 두어야합니다. 나의 시간의 방을 비워두고 나의 물질의 방을 비워 두어야합니다. 오늘 경배프로그램을 섬기는 분들은 예수님께 시간과 마음의 방을 드린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이렇게 버림받을 것을 미리 알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53:1-3절에 보면 마굿간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습니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습니다. 우리이 보기에 흠모할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멸시하고 버렸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기 백성인 유대인도 예수님을 영접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시대 예수님은 어디계십니까? 예수님은 우리 마음 속에 왕과 주인이 되고자 오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마음 속에 두지 않습니다. 오요한 목동님은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재미있는 비유를 소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차를 타고 다닐 때 예수님을 네 곳에 모신다고 합니다. 첫째는 트렁크에 스페어타이어처럼 넣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들은 위급한 상황을 만나면 스페어타이어를 꺼내듯이 예수님을 꺼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위급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 위급한 상황만 벗어나면 예수님은 다시 스페어타이어처럼 트렁크에 방치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예수님을 뒷좌석에 모시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뒷자석에 앉은 사람을 가끔 힐끔힐끔 뒤돌아보듯이 가끔 예수님을 쳐다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리를 두고 예수님과 대화합니다. 어떤 사람은 옆좌석에 모시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과 바로 옆좌석에 가까이 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운전이나 모든 것은 다 스스로 하는 사람입니다. 운전할 때 핸들을 잡고 엑셀레이터를 밟고 브레이크를 밟고 다 자신이 합니다. 예수님은 다만 대화의 상대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사람은 예수님께 운전대를 맡깁니다. 그리고 모든 인생의 결정을 하고 힘을 내고 하는 것이 다 예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빈방을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저는 전에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은 저만치 있게 하였습니다. 나의 관심은 주일예배의 성장 양들의 성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보다는 나의 욕망이 먼저였습니다. 저는 여름수양회에서 말씀을 듣고 소감을 쓰면서 우리 예수님이 에어컨을 놓은 곳에 홀로 서서 우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자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있을 때나 직장에 있을 때나 항상 예수님께 나가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나의 마음 속에는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오는 짓눌림이었습니다. 이상하게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직장을 파트타임으로 바꾸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홀로 계신 고통인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에도 내가 늦게 끝나는 화수요일에는 아무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방도 항상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외롭고 슬퍼하고 있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이를 두고 나와 모니카 목자님이 일을 다닐 때 요한이는 눈이 빠지게 어머니를 기다리고 저녁마다 울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눈이 빠지게 예배당에 누가 오나 기다리고 동방에 누가 오나 기다리고 계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자 외로움에 울고 게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내가 예수님과 항상 함께 있고 외롭지 않게 해드리고자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때 마음에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을 영접하는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마음 속에 영접하고는 자입니다. 예수님께 나의 인생의 핸들을 맡기고 운전을 맡기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함께 하시고 큰 기쁨으로 함께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제삼장 그리스도 주의 탄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이스라엘의 남부 기후는 아열대성 기후입니다. 우리 나라와 같이 춥지 않고 겨울에는 보통 6도에서 11도의 온도입니다.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서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일년 강우량의 70%가 내리는 우기입니다. 이곳은 겨울 장마가 집니다. 이때가 초목이 잘 성장합니다. 이때 목자들은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그리스도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거할 빈방을 비우두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때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목자들은 크게 무서워하였습니다. 천사는 이들에게 성탄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온 인류 모두에게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한국 미국 호주 독일 오스트리아 중국 모든 나라 사람에게 주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영혼에서 우러나는 영원한 기쁨의 소식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좋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주가 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구원자가 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후에 슬프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인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삶의 의미도 목적도 몰랐습니다. 죄로 인하여 내면은 어둡고 운명적이었습니다. 인간은 저주 받은 삶을 살았습니다. 더구나 인간은 죄로 인하여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인하여 죽었습니다.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해서 저주를 받으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인간을 부유하게 하시기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주 하나님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점점 번성하고 강성하고 왕성해집니다. 가장 큰 축복은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영생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 김인호 형제는 하나님이 없을 때 38년된 병자와 같이 무기력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봄 수양회를 통하여 일어나 걸어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일어났습니다. 임루디아 사모님의 섬세한 사랑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백석대의 한사람으로 영화도 찍고 방학때는 매일 양식 훈련을 받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아산 센타의 빅지라 이은아 목동들의 헌신을 통하여 많은 신입생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보현 양은경 김아름 자매와 박현우 형제가들이 미움과 절망과 낙심과 무기력 열등감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분들에게 예수님의 큰 기쁨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다 그런 은혜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날 그 기쁨을 많이 잃어버린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시 그리스도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는 가운데 오늘날 큰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사장 우리는 구유의 누인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예수님을 믿고 싶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확신을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몽이나 김수로왕은 알에서 태어났습니다.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인과 곰이 사람이 된 웅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는 초라합니다. 그것은 말 구유에 태어난 것입니다. 말똥 냄새나는 곳, 파리가 윙윙 대는 곳, 찬바람이 부는 곳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구유에 태어난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표적이 됩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어머니라는 확신을 어떻게 갖습니까? 그분이 열 달 나를 뱃속에 넣고 다니다 해산의 수고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 희생을 하시고 키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하늘의 부와 명예도 버리셨습니다.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 자유로움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해서 가난한 몸으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같아지시기 위해서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의 모습으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사생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두를 이해하시고 사랑하시기 위해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이 바로 나의 그리스도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자세히 보십시오. 그곳에 그리스도의 표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못 박힌 손을 자세히 보십시오. 예수님의 채찍에 맞은 몸을 보십시오. 그곳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흔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를 확신 할 때 우리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그때 갑자가 갑자기 수많은 천군 천사가 그곳에 내려왔습니다. 웅장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합창을 불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히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것이 첫 번째 부른 성탄 예배의 합창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과 공의가 잘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평화가 임합니다. 영원한 평화가 임합니다. 이곳에 있는 한 분 한 분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마음에 큰 기쁨과 영원한 평화가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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