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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아모스 7장 강해 다림줄로 재시는 하나님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08-06 00:00:00
조회수 : 3,976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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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7장 강해 다림줄로 재시는 하나님
아모스 7장 1-아모스 7장 17
요절 아모스 7장 8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6장에서는 세 번째 설교의 계속으로 이스라엘의 안일과 교만을 치십니다. 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에게 장차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세 가지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본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1-6절로 두 환상이 나옵니다. 첫 번째 환상은 메뚜기를 보내어 모든 식물을 먹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환상은 불이 바다를 삼키는 것인데 이는 극심한 가뭄을 뜻합니다. 그러나 선지자 아모스의 중보 기도로 인해 두 차례나 이스라엘 나라가 망할 뻔한 재앙이 정지됩니다. 이것은 실재로 이루어집니다. 앗수르의 첫 번째 공격은 므나헴 왕 때 디글랏-빌레셀 3세(745-727)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므나헴 왕이 많은 조공을 바쳐 물러갔습니다(왕하 15:19). 두 번째 공격도 반앗수르 정책을 시도한 베가의 통치 때에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베가가 죽은 후에 호세아 왕을 꼭두각시로 세우고 물러갔습니다(왕하 15:29). 두 번째 부분은 7-9절: 다림줄의 환상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계시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보 기도가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세 번째 살만에셀이 공격하여 이스라엘이 멸망함으로 성취됩니다(왕하 17:3-60). 마지막으로 10-17절에서는 거짓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를 벧엘에서 내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림줄로 우리를 재시고 마지막 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배우고자 합니다.

(메뚜기 재앙에 대한 경고)

1-2a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메뚜기를 지으시매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주 하나님이 요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께서 재앙에 쓰실 메뚜기 떼를 만드십니다. 두벌갈이의 씨가 움돋을 때입니다. 곧 왕에게 바치는 곡식을 거두고 나서, 다시 두 번째 뿌린 씨가 움돋을 때입니다. 메뚜기 떼가 땅 위의 푸른 풀을 모두 먹어 버렸습니다. ‘왕에게 바치는 곡식을 거두고 나서’라 함은 왕의 허가가 내린 때에 민중이 풀을 벤다는 뜻으로 공적으로 벤 것을 가리킵니다. 메뚜기는 수만 마리씩 떼를 지어 다니며 모든 식물을 먹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메뚜기 재앙을 내립니다. 메뚜기 재앙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애굽의 10개 재앙 중에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는데 그 중에 8번째 재앙이 바로 이 메뚜기 재앙입니다. 이 하나님의 메뚜기 떼가 한번 지나가면 땅의 모든 식물과 나무와 심지어 집의 문이나 창문틀까지도 모두 먹어치워 버립니다. 더 이상 그 땅에는 먹을 것이 남아있지 못합니다. 사람이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하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이스라엘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스라엘도 똑같이 애굽과 같이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엘 시대에도 메뚜기 재앙을 내렸습니다. 2절: 그러나 아모스는 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중보 기도합니다.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었습니다. 이제는 채소 같은 것을 먹을 차례입니다. 즉 나라 전체가 망할 위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메뚜기 재앙은 장차 이스라엘을 침략할 앗수르 군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모스의 중보기도와 응답)

2b-3를 보십시오.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으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바로 그 때 선지자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합니다. 원래 아모스는 남쪽 유다 사람입니다. 그러나 북쪽 이스라엘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을 걸고 전하며 간절히 중보 기도합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는 요나처럼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어리다는 것은 이제 곧 이스라엘의 국력이 쇠하여 약한 나라가 됨을 뜻합니다. 약해진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아모스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까지는 백성에게 매서운 심판의 메시지만 전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 눈물로 간절히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는 진실로 북쪽 이스라엘을 사랑한 남쪽 선지자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 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을 얼마나 사랑하며 위하여 중보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모스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기도에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헌신된 종의 기도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기도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자신의 사랑하는 조카인 롯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다고 할 때 간절히 중보기도하여 의인이 10명이라도 있으면 심판하지 말라고 중보기도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소돔과 고모라에 10명의 의인이 있으면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열 명의 의인이 없을 지라도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구원하셨습니다. 아모스도 이 아브라함의 마음과 같이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 긍휼의 하나님께선 아모스의 중보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모세도 재앙당하는 바로와 애굽을 위해서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믿는 자의 중보기도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현실적으로 양들을 도와주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양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자신을 믿는 자들의 중보기도를 기뻐 받으시고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양들의 믿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성령으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믿는 양들이 많이 나오게 하심을 믿습니다.

(불심판과 중보기도)

4-6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또 아모스에게 불로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얼마나 그 불의 힘이 큰지 바다 깊숙한 곳까지도 마르게 하고 육지까지 태우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지만 심판하실 때는 비정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충 대충 하시는게 없으십니다. 무엇이든지 확실하게 처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계시록에 보면 불을 내려서 지구를 멸하십니다. 여기서 ‘불’ 재앙은 ‘메뚜기’ 재앙보다 더욱 강한 재난, 즉 극심한 가난을 비유합니다. 이 재앙은 우연이 아닙니다. 주 여호와께서 명하여 보내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재앙을 당할 때 그것이 우연히 오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우연이란 없습니다. 또한 이 심판은 메뚜기 재앙보다 더 심각한 양상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 우리가 이것을 거부하면 더 큰 심판이 기다립니다. 하지만 아모스는 야곱이 미약하니 어떻게 설 수 있느냐고 합니다. 야곱은 진흙으로 된 연약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체질을 아십니다. 그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불심판의 뜻도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기도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긍휼로 받아주셨습니다. 아모스의 기도는 다시 응답을 받습니다. 아무리 세계를 멸망케 할 불의 징벌이 바다와 육지를 내린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피해를 당치 않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북한은 메뚜기가 지나간 것처럼 황폐합니다. 이 때 우리는 아모스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북한을 위해 간절히 중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북한에 메뚜기도 지나갔고 불심판도 임해서 극도로 피폐해 있습니다. 우리는 서독이 동독에 지원한 것 못지않게 아니 더 많이 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더욱더 앞으로의 남북 평화통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남쪽에서 온 아모스가 직접 북이스라엘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기도한 것처럼, 연변과 평양 과기대 등을 통해 북한에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해서도 또한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중보기도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아모스가 중보기도를 한다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 자체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림줄을 이스라엘 가운데 두시고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림줄 심판)

7-8절을 보십시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다림줄을 드리우고 쌓은 성벽은 똑바로 단단히 쌓은 담으로 하나님의 진리로 세운 이스라엘 나라 또는 사마리아 성을 상징합니다. 여호와께서 다림줄을 잡고 서신 것은, 그 담을 헐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다림줄(율법)의 기준으로 보니 이스라엘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림줄을 벽돌이 곧게 쌓였는지 측정하는 도구인데 수평을 이루지 못하면 지금까지 싼 벽돌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쌓을수록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림줄은 담을 쌓을 때에도 쓰이지만, 헐 때에도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찍 이스라엘을 많이 용서하셨지만 앞으로는 용서하시지 않고 멸망시키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직접 자신의 기준을 정하시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하시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은 사랑하지 않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시고 훈련을 통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악인을 무한정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아무리 견고하게 보이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따라 쉽게 허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고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빨리 깨닿고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교만함에 빠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회개하고 공의를 행해야합니다.

(혼합주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9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이삭의 산당들은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삭을 존경하는 뜻으로, 이삭이 예배드리던 곳곳마다 산당을 세웠던 것입니다(요 4:22). 그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욱 숭배하는 경향을 가진 미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들의 제사 내용도 미신의 요소를 가졌습니다. 사람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성소들도 위의 이삭의 산당을 말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축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던 우상은 물론이고, 부강한 지방에서 이방 우상을 함께 섬기는 것을 심판하십니다. 한편 이삭의 산당, 웃음의 산당(이삭은 웃음임)은 즐거움의 제단을 뜻할 수도 있는데 어쨌든, 그들이 기쁘게 우상을 숭배하던 제단이 황폐할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특히 유일신 여호와께서 얼마나 혼합적인 신앙을 싫어하시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은 당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절실히 요청됩니다. 그 잘못된 것이 산당, 성소, 여로보암의 집이었습니다. 산당에 우상이 가득하고, 거룩한 성소에 바알, 태양신이 들어와 있고, 여로보암의 집에 송아지 우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다림줄로 볼 때 이것은 가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나름대로의 다림줄로 여로보암을 따라 벧엘에서 송아지 우상을 섬겼습니다. 송아지 우상은 잘못된 주춧돌이고 이 위에 세워진 것은 모두 삐뚤어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죄악을 회개치 않으면 결코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처한 환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자기 기준을 가지고 건축을 합니다. 담(문화)을 쌓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이 여호와의 기준인 성경 말씀의 다림줄로 측량하십니다. 그 때 세상적인 가치관을 기초로 쌓은 것들은 다 무너지고 심판을 받습니다. 특히 우상은 자기 욕심을 기준으로 쌓은 담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다림줄이 치십니다. 우리는 이런 나름대로 다림줄을 회개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이삭의 산당과 이스라엘의 성소를 파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여로보함의 집 바로 이스라엘의 왕궁을 칼로 치셔서 그들을 이방 민족의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가 많으신 분이시지만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해서는 하나라도 용서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에서 멀리 하고 죄가 있어도 항상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다림줄 예수님)

저도 하나님 앞에서 많은 죄악들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습니다. 여러번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목자님들의 말씀을 듣지 않고 육신의 정욕대로만 살았습니다. 저도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심판에 영영 죽을 수 밖에 없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 목자님들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저를 바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여러 징계들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 찬송 드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었으니 이제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다림줄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다림줄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깊이 소유하기를 기도드립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를 기도드립니다. 재물이나 사람이나 육신의 정욕이나 편안함보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다림줄 성령님)

현재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다림줄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자에게는 모두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8장 6절“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여 생명과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9절“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하시는 일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이제부터 육신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성령님을 따라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심판의 다림줄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령님을 따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날마다 이 성령님을 의지하여 성령님의 주시는 생각을 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항상 충만하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날마다 발견하고 깊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해야합니다. 말씀을 잡고 날마다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날마다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 성령님을 더 잘 배우고 성령님께 인도되어 사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모스를 반역자로 고발한 아마사)

10,11절을 보십시오.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참된 예언을 하던 아모스 선지자가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는 패역의 도시 벧엘에서 큰 박해를 받았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사는 제사장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고 편안한 생활을 지키려하였습니다. 아모스는 사람과 양떼를 기르는 목자요 뽕나무를 키우는 농부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아모스는 선지자도 아니고 선지지의 아들도 아닙니다. 목자요, 뽕나무를 재바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여러 이방 민족들과 유다와 북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아모스의 그런 행동은 북이스라엘의 기득권층의 눈에 좋게 보일 리 없었습니다. 당시는 북이스라엘은 매우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모스의 그런 심판의 메시지는 듣기 좋을 리 없었습니다. 특히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눈에는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를 반역죄로 왕에게 거짓 고발하여 그 땅에서 쫓아내려 하였습니다. 아마샤는 적어도 벧엘에서는 가장 여로보암의 신임을 받는 대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락을 위해 종교를 도구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자의 통치 논리를 합리화시키는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이런 자는 종교적 신념보다는 현실의 안주에 더 급급하다가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나라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샤는 여로보암의 나라를 치겠다.(9절)는 말을,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라는 자극적인 말로 바꿉니다. 또한 아모스의 멸망에 대한 예언(5:5 6:7)은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아모스 예언의 핵심은 빼고 증언합니다(5:4, 6). 이것은 아마샤가 여로보암을 자극하여 자신의 주장과 반하는 예언을 하며 자기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아모스를 반역자로 몰아 해치려는 고의적인 과장입니다. 아마샤의 분노와 질투는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적 설교와 사역이 얼마나 열성적이고 계속적이며 강력했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마 5:11-12)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니 그 말을 듣는 종교 지도자들은 귀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은 언제나 참된 지도자를 국가의 권세를 이용하여 모함합니다.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그는 아모스가 모반하여 여로보암의 패망을 예언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모스가 여로보암의 패망을 예언한 것은 회개하고 패망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모스는 여로보암이 회개하고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기보다는 아모스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참된 충고를 듣지 않는 사람은 그 충고를 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충성스러운 말이 듣기에는 거북해도 겸손히 들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장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기 싫고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마샤는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모스를 쫓아내는 아마사)

12-13절을 보면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아마샤가 이렇게 아모스를 모함해도 여로보암 왕은 아무런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마샤는 직접 아모스를 쫓아낼 공작을 합니다.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를 선견자로 비하하며 유다 땅으로 도망치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유다에서 떡이나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이스라엘로 와서 예언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아마사는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의 권세로 아모스의 입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나라와 지옥심판의 메시지를 듣기 싫어하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가르치지 않고 오직 축복의 메시지만을 가르쳐 하나님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심판의 메시지는 가르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모스)

14,15절을 보면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아모스는 종교 지도자도 아니고 종교에 관련된 직업을 가진 자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목자고 뽕나무를 재배하는 농부였습니다. 아모스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하실 때 듣고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위대해 보이는 거 같지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느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본문에도 나오듯이 사람들은 전혀 듣지를 하려 하지 않고 기득권층에서 반발을 사고 생명의 위협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사람만을 부르셔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가지고 있는 타이틀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과 확신입니다. 이런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아무리 세상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위협하고 조롱해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모스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고 어떠한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명자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아모스를 대적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UBF도 평신도로 캠퍼스에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사는 곳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식 교회 같게 보이지도 않고 목사 안수도 안 받은 사람이 어떻게 말씀을 전하냐고 묻고 의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적인 타이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셨기에 담대하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있을 때 아무리 힘든 고난과 핍박이 와도 담대하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모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대로 순종한 것처럼 이 죄인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마사에 대한 심판의 예언)

16,17절을 보십시오.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고하지 말라 하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고 자신의 권위와 힘으로 위협했으나, 아모스는 아마샤에게 너 자신이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의 권위로 싸웁니다. 아마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마샤의 아내는 성읍 가운데 창녀가 되게 하십니다. 자녀들은 칼에 엎드려집니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집니다. 아마샤는 더러운 땅에서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게 됩니다. 회개치 않는 자들의 결국은 파멸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그 죄대로 갚았더라면 그들이 모두 다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오늘까지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나의 나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는 항상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둘째로, 하지만 주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 죽기 전에 믿겠다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셋째로,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일어날 일로 예언된 일조차도 간절한 기도로 심판이 보류되는 응답을 받습니다.(대하 7:14 요일 3:22). 그러나 이 중보 기도는 당장의 효험은 있었으나 백성들의 진정한 회개가 뒤따르지 않았으므로 궁극적인 해결은 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제적 행동이 수반되는 진실한 회개만이 하나님과 인간을 절대 화해 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넷째로 참된 신자가 모함을 당할 경우가 많이 있으나 이에 결코 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함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모함하고 비판할 때, 자기도 같이 화를 내면서 상대를 비판하는 사람은 그리 깊은 인격의 소유자가 못됩니다. 조용히 그 비판을 들으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히려 그 비판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면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참으로 귀한 종인 것입니다. 거짓된 자는 세상 세력을 의지하지만 참된 신자는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참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쓰신다는 사명감으로 일합니다. 그는 바로 이 소명감 때문에 그 원수들도 무서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7장 강해 다림줄로 재시는 하나님
아모스 7장 1-아모스 7장 17
요절 아모스 7장 8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아모스 7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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