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컨텐츠 바로가기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연구자료

2018 여름수양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작성자 : john444
작성일 : 2018-07-14 00:00:00
조회수 : 407
여름수양회 4강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 메시지 최종 수정안
2018년 6월 25일
부활하여 제자들을 직접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 부족한 종이 여름 수양회 말씀 메시지를 감당하고자 합니다. 사람의 의지와 지식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의 뜻을 증거하는 메시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여름수양회를 열게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UBF생활은 오래되었으나, 학생 때를 통틀어 처음으로 감당하는 메시지에 많은 부담이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제 얼굴에 집중하지 마시고, 말씀에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베드로간의 사랑이야기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저버리고,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먼저 사랑하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상황과 조건을 보지 않고 언제나 큰 사랑으로 먼저 다가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분이 보내신 그분의 양을 사랑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파트1 순종이란 무엇일까요?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1절 전반절에 ''그 후'' 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이미 여러 사람에게 모습을 보여셨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부재로 슬퍼하는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는 그 의심을 풀어주시고자 구멍난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직접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디베랴 호수에 계십니다. 왜 거기 계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님의 제자 7명이 거기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상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고, 심지어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손으로 확인까지 한 바 있습니다. 심지어 그런 도마조차도 여기 디베랴 호수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왜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낙심에 빠져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은 생계(문제)였을 것입니다. 맏제자로서 그를 따르는 다른 제자들의 생계도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이후 제자들에게 2번이나 나타나셔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증거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 생계문제 앞에서 베드로는 철저히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과거 그의 직업이던 어부로서의 삶을 상기시키고, 다른 제자들의 생계문제까지도 함께 해결해주고자 다시 어부의 길을 걸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3절 후반절에 보면 그 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못잡았다고 합니다. 너무 오래 일을 쉰 탓일까요? 실력이 떨어진 걸가요?(걸까요?) 베드로는 아마도 예수님을 만나던 때가 불현듯 떠올랐을 것입니다. 과거 밤새 수고하였음에도 고기를 잡지 못하던때 자신을 부르시던 예수님이 떠올랐을 겁니다. 슬프고, 서러운 밤이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은것도 슬픈데, 자신이 과거 어부라고 니들 내가 먹여살리마 하며 데리고 온 제자들 앞에서 빈그물, 빈 그물이라니요. 그는 예수님이 보고싶었을 것입니다. ^^
4절을 보십시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날이 새어갈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디베랴 호수가에서 고기 잡는 배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마음이 어떠셨을까? 예수님께서 2번이나 나타나 부활을 알리셨는데, 정작 그들은 지금 이 바닷가에서 엄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완전히 믿지 못한것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온몸의 피와 물을 다 쏟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이기에 예수님이 2번이나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지만, 도무지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절망적 현실앞에 놓인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조차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현실문제 앞에 쉽게 나약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의 현실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이고, 나 먹고 사는 문제는 현실이니까. 하는 이분법적 사고로 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이 디베랴 호수가에 와있는 것이고,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보기보단 세상에 져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먼저 본것입니다. 실패의식란 무섭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조차도 실패의식에 빠지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희망이 사라진 미래, 삶 앞에서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보다 십자가에서 고통스러워 하시는 예수님만 보였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음에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의 일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때도 많습니다.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할 것 같은 때도 있을 것입니다. 피투성이 같은 삶으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 같은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만 그런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옆에서 직접 모시고,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을 실제로 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먹고 살일이 걱정되서, 입에 풀칠하려고 과거 잘나가던 어부였다는 베드로 말에 홀딱 넘어가 다들 만선의 로또 꿈을 꾸며 우루루 디베랴 호수에 고기잡으러 와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보다 더 실패의식에 젖어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마는 여기 있으면 안될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옆에서 직접 모시지도 못했고, 예수님의 실제 육성을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실패의식에 힘들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요. 제가 절망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것도 위로가 됩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디베랴 호숫가에 계십니까? 이런 못난 제자들을 섬기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부정하고, 당신의 부활도 못 믿겠다고 하고, 자기 살길을 도모한 제자일지언정, 예수님은 그저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을 보고 사랑하신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이고 은혜로운 사랑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버리고, 나를 배신한 사람을 내가 먼저 가서 사랑으로 감싼다니요. 그럼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으로 섬기시는지 살펴볼까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근하게 ''얘들아'' 하십니다. 친구처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최대 관심사 고기의 유무를 물으십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먼저 고기 유무를 물으셨을까요? 그냥 ''얘들아 나다. 너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너희 선생님이다'' 하시면 될텐데요. 왜 그러셨을까요?
제자들은 지금 직업전선에서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지고 와서 기분이 매우 않좋은 상태입니다. 베드로 형의 능력에 의심을 품었을 것입니다. ''진짜 어부 맞나?'' ''배 살때 들어간 내 투자금 날리는 거 아냐'' ''사기 같어'' 하루밤 사이에도 돈이 걸린 문제 앞에서는 부모형제고, 친구도 없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하루만 늦게 오셨어도 제자들끼리 소송을 하거나 티격태격 싸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실패와 원망, 짜증과 의심이 난무하는 상황 가운데 예수님은 Fishing Business 의 성공유무를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생활, 직업, 학업에 예수님은 절대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실패와 절망의 상황에 예수님은 Fishing Business 를 통해 제자들과 접촉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능력에 대한 절망을 통해 자만심, 교만함으로 비지니스가 제대로 될 수 없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떠나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철저하게 스스로에게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어떤 처방을 내리십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은 것이 놀라운 사건일가요? 제가 볼때는 아닙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물을 내리라고 하는데도, 한마디 대꾸도 없이 그물을 내린것이 놀라운 사건입니다. 상황을 한 번 살펴봅시다. 이들은 밤새 그물을 던져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피곤하고 힘든 상황일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고 합니다. 글쎄요. 이런 상황에서 ''당신 누구요? 당신이 누군데 우리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는거요?'' 하는게 정상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말에 순종해서 그물을 그냥 내립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상황에 대해 절망했고, 실패에 따른 고통으로 내면이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잃은 것도 모자라 사업도 망하게 생겼으니 그 고통이 오죽했겠습니까? ''어이구, 예수님을 잃은 것도 비참한데, 저 사기꾼 같은 형한테 속아서 투자금 다 날리게 생겼네'' 사업을 하는 저로선 정말 피부로 와닿게 비참합니다. 이렇듯 바닥까지 낮아지고 낮아지자, 제자들은 왠 이름모를 사람의 말조차도 순종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요?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능력으로는 안돼! 저형 아무래도 어부 아니야. 확실해... 그렇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결과는 올레~~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순종으로 사업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투자금도 않날리고, 베드로의 면도 살려주셨습니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부활의 주님은 먼데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계시고, 치열한 현장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한다고 하고, 삶 가운데 능력의 예수님을 모릅니까? 바로 교만때문입니다. 자기 안의 자아가 살아 꿈틀데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역사를 하실 수 있습니까? 내가 할 수 있다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일 하실 수 있습니까? 그물을 내리라는데도 ''밤새 해봤어요! 해봐도 안되요'' 하며 안 내린다는데 무슨 도리가 있습니까? 현실문제에 직접 개입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도 자아의 벽에 둘러 쌓인 교만한 사람앞에서는 도리가 없으십니다. 물고기를 그물이 찢어지게 잡아주시려고 해도 그물을 내리는 순종을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저는 공기조형물을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조형물을 제작하는 업을 하고 있다보니 회사에 디자이너들이 대부분 미대나 디자인과 출신들이 많습니다. 속된 말로 그림 밥 좀 먹은 사람들입니다. 회사에 처음 신입이 들어오면 제일먼저 스케치나 드로잉 연습을 많이 시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입들은 이 과정을 싫어합니다. 아니 학교 내내 그림 그렸고, 그림도 수준급으로 그리는 우리한테 드로잉을 하라니, 우리를 뭘로 알고... 하는 감정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회사에 온 직원들의 드로잉 실력은 모두 제각각이고, 또 그림의 스타일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회사는 회사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존재하고 그 스타일을 통일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회사만의 고유한 디자인을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을 아무리 설명하고 설득해도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을 사람들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한편, 자신의 실력이나 수준을 생각하지 않고, 회사 대표인 제 말을 믿어주고, 따라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도 모두 그림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라고 왜 전문가로서의 자존심이나 그림그리는 사람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회사 대표인 저를 믿어주고, 그림도 전공하지 않았지만, 회사의 선배로서 저의 지도방향을 믿어주고 따라준 직원들은 이제 회사의 팀장급으로 우뚝서서 회사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30명도 안되는 작은 회사를 운영함에도 이러한데, 부활의 주님을 순종함으로 따를때는 어떠한 일이 생기겠습니까? 우리안에 복잡한 현실은 늘 함께 있을 것입니다. 현실에 주저앉을때가 많습니까? 제자들도 실패에 주저앉았습니다. 비참한 내 현실이 절망적입니까? 제자들도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절망과 실패를 제자들이 스스로 극복했습니까? 제자들이 자기계발 도서를 통해 극복했습니까? 외부 투자를 받아 극복했습니까? 아닙니다. 스스로는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았습니다. 실패를 통해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낮아졌습니다. 교만이 처절하게 부셔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마음안에 들어오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체험하는 일은 낮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성을 &#51922아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내 뜻이 꺽여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병에 걸렸을때 낫기 위해서는 의사의 바늘과 칼로 인한 고통을 용납합니다. 그것은 병을 고치는 의사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치료하시고, 나를 살리시고, 나를 부활시키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복종이 아니라 기꺼이 순종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부활의 예수님으로 인해 순종의 축복을 경험하는 제자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절망과 실패를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죽음조차도 이기신 부활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시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우리 문제를 내려놓으십시오. 다만, 낮은 모습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물을 내리는 순종을 통해 이 순간도 살아 역사하시는 부활의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파트2 사랑이란 무엇인가?
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이제 제자들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순종을 하자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말을 듣고 제일 먼저 반응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베드로입니다. 우스게소리입니다만, 거짓말장이에 가짜 어부가 될 수도 있는 순간을 예수님이 구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들어 예수님께 헤엄쳐갔습니다. 그는 현실의 문제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열정파 제자였습니다. 화끈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의는 갖춰야 겠기에 겉옷을 두르고 물에 뛰어든 것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다른 제자들은 천천히 100미터쯤 되는 거리를 노를 저어 왔습니다. 그곳엔 숫불이 있고, 예수님께서 생선과 떡으로 음식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밤새 비지니스에 지치고 허기진 제자들을 손수 음식으로 대접하셨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서도 제일 먼저 반응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베드로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이런 열정을 배워야합니다. 무엇을 하던, 어떤 일을 하던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사랑도 열정적으로, 일도 열정적으로 합니다.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이뻐하시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잡아온 물고기를 육지에 올려 세어보니 153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
상당히 뻘쭘한 상황입니다. 제자들 모두 예수님이 예수님인줄을 앎에도 어느 누구도 감히 묻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또, 나서서 먼저 음식을 먹기도 어려워했습니다. 자신들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2번이나 보고도 먹고살 문제 때문에 고기잡이 하러 와있는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고, 그럼 사업이라도 잘해야하는데 망한 비즈니스 때문에 부끄럽고,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바로 알아보지 못한것도 부끄럽고, 밤새 지치고 허기져서 힘든 상황에 예수님이 해주시는 맛있는 밥냄새에 이성을 잃어가는 자신들의 뻔뻔한 식욕도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시고, 따듯한 음식과 섬김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너 나한테 3번이나 하아~~~~ 왜 그랬어~~?'' 이러시지도 않았고, 도마에게 ''너 손꾸락으로 내 옆구리 넣어 봤잖여'' 이러시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조용히 따듯하게 섬겨주셨습니다. 뻘쭘해하는 제자들이 먼저 음식을 선뜻 먹지 못하자 예수님께서 직접 떡을 가져다 제자들의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목이 메일것 같습니다. 감격스러우면서도, 죄송한 마음이 같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먼저 사랑해주시고, 섬겨주신 것에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고민 전체를 단번에 해결해주셨습니다. 어업 비즈니스 문제는 153마리의 물고기로, 먹는 문제는 예수님이 손으로 직접 먹여주심으로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삶의 실제적인 문제앞에 제자들로 하여금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경험을 시켜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자들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제자들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를 허락하셨고, 조반을 허락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찾아와 제자들을 섬김으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피해 디베랴 바닷가로 도망간 제자들을 포기하시지 않앗습니다.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실패의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다시금 제자의 자리, 잃어버린 축복의 자리로 회복시켜주시고자 하셨습니다.
10절 말씀에 예수님이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절에는 분명, 육지에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제자들이 생선을 너무 맛있게 먹어서 생선이 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더 구워주시고자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뜻도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충분히 생선을 준비해 놓으셨겠지만, 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을 굳이 베드로의 손으로 가져오게 하신 것은 주님께서 실패한 베드로를, 제자들을 직접 잡은 물고기처럼 다시 주님의 역사에 참여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물이 넘치도록 물고기를 잡은 것처럼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다시 주님의 역사로 초대하시고자, 피싱을 하신것입니다. 베드로가 가져온 물고기는 단순히 음식으로서의 물고기가 아니라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졌던 제자들이 다시금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제자들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제자로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능력도, 인성도, 자질도 부족한 제자들을 버릴만도 하시건만,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왜 입니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고, 모자라도 예수님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완전 무결하시기 때문에 결함 투성이인 제자들도 사랑하실 수 있습니다.
결함투성이 부족한 자를 먼저 사랑해주신 주님은 제가 예수님을 실망시킬 때도 저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저 없이도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데 부족한 것이 없으십니다. 인간적으로는 버릴만도 한 카드를 주님은 먼저 다가와 다시 보듬어 안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에 버릴 카드를 버리지 않고 쓰십니다. 세우십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절망에 빠져 도망가려할 때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모자라고 부족하고 저질스럽다고 스스로 책망하지 마십시오. 멍청하다고 늙었다고 몸이 약하다고 아프다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실패가 너무 많아 다시 해볼 용기가 없다고 낙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셔서 우리를 낚으셨습니다.

파트3 내 양을 먹이라.
15, 16, 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이제 예수님은 식후 티타임을 가지십니다. 그리고, 뻘쭘해하는 베드로에게 벼락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가 이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만, 만약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따로 불러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면 그 자리가 정말 섬뜩하지 않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전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알고도 입에 풀칠하고자 다른 제자들을 꼬득여 비지니스를 도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독대에서 예수님께로부터 큰 책망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은 나를 사랑하냐이십니다. 어라~. 책망이 아니라 사랑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3번이나 반복해서 이 질문을 하십니다. 17절 후반절 말씀처럼 베드로가 근심하며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뒤끝이 있으시다. 내가 3번 예수님을 부인하였기에 예수님께서도 3번 내게 물으신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 등골이 서늘했을 것입니다. 뒷머리가 쭈뼛 섰을것 같습니다. 웃으면서 때리는 매가 맞는 사람은 더 아픕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이 몰라주실까봐 걱정하며, 겸손히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3번씩 반복하여 질문을 하신것은 예수님께서 뒤끝이 있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그 어떤 사람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예수님은 그 고백을 듣기 원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혈기 왕성한 활동적인 사람입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베드로는 행동에 주저함이 없고 스피릿이 넘치는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열정과 꿈으로 인해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예수님을 통한 신분상승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꿈을 사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문제를 정확히 꽤뚫어 보신것입니다. 그리하여, 3번이나 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내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베드로 내면의 근본 문제를 예수님은 치료하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보다, 자신의 꿈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냐는 물음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여기에 오셨는지, 왜 순종함으로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지, 또 생선과 떡으로 섬기셨는지 이제는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없는 동안 느꼈던 고독과 외로움, 절망의 깊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실때라야만 자신의 존재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3번의 반복된 질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베드로 네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냐를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깨닫게끔 하신것입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으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베드로의 입을 빌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고백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사랑하였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실패와 고통, 고난을 이겨내는 능력의 예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네가 원하고, 네가 원했던 능력의 예수님이 이것이더냐? 보란듯이 베드로의 마음을 꾀뚫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베드로의 입을 빌려 너를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 고백이후에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과 동시에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나를 먼저 더 사랑해주셨지만, 지금도 세상에서 고통받는 나 같은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해야할 일은 바로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우리가 새롭게 내려야 할 새로운 그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 무엇을 더 사랑합니까? 저는 1974년 4월24일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울산에서의 기억은 별로 없고요, 어릴 때 수원으로 이사와서 거의 경기도민으로 살아왔습니다. 어릴때부터 활발하고 명량한 아이였지만, 가정불화와 학교폭력으로 중학교때부터 심각한 정서적 불안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때는 제게 가해진 폭력을 타인에게 되돌려주며, 중학교 기간동안 억눌렸던 감정을 해소하곤 했습니다. 또한, 기독교에 매우 배타적이고 비판적이어서 학교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심하게 핍박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던중에 단국대학교 재료공학과에 입학하고, 등록금을 내러 온 농협지점에서 박이수 목동님께 피싱을 당했습니다. MT라는걸 꼭 가야하는지도 몰랐었는데, 무조건 와야 한다는 협박성 발언에 처음 UBF천안 센터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말씀공부를 하고, 성경을 읽는데 왜 그렇게 이해가 안되고, 신화 같은 내용을 믿으라고 강요하는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게 “예수를 비판하려거든 알고 비판하자”는 이상한 자존심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말씀공부를 했습니다. 제 목자님이 마가 목자님이십니다만, 마가 목자님이 저녁 기도시간에 하신 기도내용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온겸순 목자가 제발 자기 같은 양을 치게 해주십시오” 하는 기도입니다. 저주의 기도 같았습니다. 계속 예수님은 없어 없다고 그 증거를 찾자고 하던 말씀공부를 통해 되려 제게 예수님이 계시다는 확실한 믿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유아기와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저의 이익과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였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복을 받고, 예수 믿으면 성공할 것 같고, 예수 믿으면 돈을 많이 벌것 같았습니다. 저에게 예수는 무당의 부적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제가 성공하고 제 꿈을 이루는데 있어 예수는 그저 심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살고 예수가 죽었습니다. 죽은 예수를 내 방패막이 삼았습니다. 내게 불리할 때만 방패처럼 예수의 피와 살을 찾았습니다.
2005년 처음 에어바이블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2년반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내 꿈을 제대로 이뤄보겠다고 당차게 사표를 내고 뛰어나와 사업을 하였습니다. 현실은 너무나도 냉정하고, 차가&#50911습니다. 아무런 인지도도 없는 회사의 견적과 제안을 어느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매일같이 퇴사전 회사의 사장님께 무릎꿇고 빌며 다시 재입사 하게 해달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1년이 지나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매달 월급이라고 집에 가져가는 돈이 50만원이 채 안되었습니다. 이게 과연 무엇인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매일매일 회사에 나와 있는 것이 지옥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왜 내가 이런 선택을 해서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나 스스로를 저주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나의 그리 길지않지만, 나름 인정받던 그 전 회사 생활에서 얻은 경험에 기초한 수많은 도전은 실패를 맞게되고, 수많은 자기계발 서적을 탐독하며 얻은 방법들은 한계에 부딪쳐 어떻게 난관을 극복해야 할지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절망적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아내에게 ‘내가 괜한짓을 해서 모두를 고생시키는 것 같아’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당췌,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밤새 수고하며, 그물을 내렸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게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즈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적같은 성경을 꺼냈습니다. 그간 바쁘고, 사업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거의 꺼내보지 않았었는데 말입니다. 정말 바닥에 바닥을 맛보고 갈데가 없다고 느끼는 순간, 예수님은 저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빈그물을 앞에 두고 절망에 빠져 있을때, 예수님은 디베랴 강변에 계신것과 같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 어떠한 희망도 갖기 어려운 상황에 예수님은 말씀으로 저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제가 힘든것을 먼저 아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악착같이 스스로 하겠다고 했고,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도와주시겠다고 해도 ‘됐어요’ 하며, 거절했습니다. 아직까지는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저를 예수님은 묵묵히 지켜봐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을때, 빈그물에 허탈해 하고 있을때, 먼저 다가와 말씀으로 손 내미셨습니다. 저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저는 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 전 직장에서 엄청난 능력자로 인정받았습니다. 모두 잘할 거라고 했습니다. 저의 사업 수완을 믿었습니다. 누구보다 변화에 민감하고, 누구보다 배우기 좋아하며, 누구보다 지식 습득에 빠르다고 자평해왔습니다. 그런 제가 얻은 것은 바닥중에 바닥입니다. 저의 존재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뼈져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죽고 나서야 예수님은 말씀으로 배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물을 던질 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만. 저를 먼저 찾아오시고 제게 손 내밀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 그물에 제 교만을 같이 달아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지 않는 법을 상황과 조건을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나를 잡지 않고 예수님을 잡는 방법을 몸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렇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여전히 앞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업은 힘들었습니다. 50만원 월급은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망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물이 찢어지게 물고기를 낚게 하신 능력의 예수님께서 깜깜한 밤과 같은 내 앞길에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가졌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살아가고, 어제와 같은 조소와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변화되지 않는 상황가운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은 저를 계속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랬기에, 거절 당해가는 견적서와 풀리지 않는 일에도 낙담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50만원 월급밖에 못가져가도 망하지 않을거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뿌듯햇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있기만 하면 내가 뭐 다른 것을 할 것도 없이 그저 예수님 안에 있을 수 있음을 감사했습니다. 낙심한 저를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없어졌습니다.
인생은 드라마가 아닙니다. 단언컨데, 예수님은 드라마를 안보신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다고 하루아침에 로또 맞듯이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겸손의 훈련, 사람들의 조롱과 냉대를 웃어넘길 수 있는 아량을 가르치셨습니다. 내 능력보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볼 수 있는 눈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랬기에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수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사업 성공스토리를 써야 은혜가 될런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간증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통한 성공 스토리에 촛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메시지는 예수님이 저와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기에 망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것이 작지만 직원 28명의 에어바이블을 일구는 은혜의 밑거름이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저를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제가 절망적인 실패의 경험 가운데 빠졌을때도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잊고 현실문제에 빠져 아둥바둥 할때도 예수님은 측은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시며,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저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먼저 다가와서 먼저 사랑해주셨습니다. 예전에는 능력으로만 역사하시는, 그래서 성공의 삶으로 이끄시는 예수님만을 기대했습니다. 제게 실제적인 이득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님만을 바랬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는 했지만, 예수님을 이용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저를 내치지 않으시고,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제가 겪은 모든 고난을 이겨내게 도와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게 예수님의 사랑을 상기시키십니다. 발버둥 치듯이 예수님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고 투정 부리는 제모습을 알게하셨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울며 떼쓰듯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이제 영적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 같습니다. 이런 제게 예수님은 젖 뗐으니 이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예, 제게 주신 예수님의 사랑 감사합니다. 저와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손수건 가슴에 달고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영적 유치원생들을 제게 보내주십시오. 제가 먹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먹이셨듯이 제가 먹이겠습니다.
제게 주신 어린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믿어 순종함으로 길이 보이든 안보이든 말씀의 그물을, 저희 직원들에게, 사랑의 그물을 내리기를 원합니다. 제가 에어바이블을 운영하고 에어바이블에서 주님을 체험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저희 직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 압니다. 제게 주신 사랑 때문에 주님의 사랑때문에 회사 직원들을 사랑하고, 말씀과 기도로 그물 내려 그물이 찢어지게 낚아 올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회사 직원들이 단순히 월급받는 종업원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보내신 주님의 어린양인줄 믿습니다. 제게 주신 사랑이 흘러넘쳐 직원들에게 흘러들어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어린양을 믿음과 사랑과 감사로 감당하게 도와주십시오. 요한복음 6장 39절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 분이 내게 주신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그것이다. 요절 말씀 붙잡고 기도하게 도와주십시오.
에어바이블을 수많은 양을 건져내는 영적 유치원으로 삼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부족한 종이 기도와 말씀으로 바로 설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회사를 운영함에 있어 믿음의 본이 되게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사랑과 향기가 저로 인해 퍼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이 보내주신 어린 양들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랑과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주님 바라보고 순종함으로 감당하길 원합니다.
(제가 지난 주 기도하면서 생각한 것인데 직장에서 목장 모임을 가졌으면 합니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할 것인데 처음에는 식사하고 한주간 기뻤던 일 힘들었던 일을 나누는 모임입니다. 시간은 적절한 시간으로 하시고 처음에는 함께 식사하고 잠깐 기도하는 모임인데 올 사람은 오라고 초청하면 좋겠습니다. 어느정도 모임에 틀이 잡힐 때까지는 저나 마가 목자님이 가서 함께 교제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가능한 한 기독교 색체를 띠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삶을 나누는 그런 모임으로 하는 것입니다. 점차 그곳에서 찬송도 할 수 있습니다. 메시지는 내가 메시지를 써주면 읽어도 되고 아니면 온겸손 목동님이 전해도 됩니다. 하여튼 아직 감이 잡히지 않을 수 있는데 만나서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곳에 좋은 교회가 될 것 같습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189 [여름수양회]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 john444 2019-08-09
188 [여름수양회] 영생의 샘물 john444 2019-07-14
187 [여름수양회] 2019 여름수양회 보고 오요한 2019-07-14
186 [여름수양회] 주는 그리스도 john444 2019-07-07
185 [여름수양회] 2019 다 이루었다. john444 2019-07-07
184 [여름수양회] 2019 여름수양회 오요한 이프 소감 john444 2019-07-05
183 [감사제/부활절] 2019 부활절 성찬식 메시지 오요한 2019-04-20
182 [감사제/부활절] 2019 어머니 추도예배 순서지 끝(설교 및 기도문) john444 2018-12-17
181 [가을수양회] 2018년 가을수양회 2강 독생자를 john444 2018-11-13
180 [가을수양회] 2018 가을수양회 1강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 john444 2018-11-13
1 2 3 4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