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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창세기 1장 강해 2부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06 00:00:00
조회수 : 3,630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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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 1장 강해 2부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

창세기 126-창세기 23

요절 창세기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단국대를 졸업한 영화배우 이은주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우울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울증의 증세는 슬픔이 지속되고 삶의 의욕을 잃고 무기력하게 되며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나라 2,30대에서는 자살이 사망원인 중 1위이며, 자살의 대부분의 원인을 차지하는 것이 우울증입니다. 요즘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슬프게 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런 슬픈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심히 기쁜 삶을 살 수 있는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여섯째 날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세 분의 하나님이 함께 만드신 인간)

 

26,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보면 제우스신은 인간을 다른 동물에 비하여 너무 형편없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사자와 달리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이 없습니다. 새와 같이 하늘을 날 수도 없습니다. 사슴이나 노루와 같이 잘 달릴 수 있는 발도 없습니다. 프로메테우스라는 신이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달리 인간을 아주 귀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복수대명사 우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동물을 만들 때와 달리 서로 상의하시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든 인간)

 

하나님은 특별히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 다르게 자신의 형상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네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많이 있습니다. 생각하고 언어를 가지고 있고 사회생활, 문화생활을 하며, 도구를 사용하고 불을 사용합니다. 인간은 창의성이 있습니다. 까치집은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까치집이지만 사람은 빌딩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육지의 동물도 날 수 없지만 인간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다른 더욱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눈과 코와 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내면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성품을 갖고 계십니다.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세 가지 인격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성품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 자신의 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밝은 빛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4:24) 인간에게 정의감과 말씀을 따라서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과 죄를 멀리하는 거룩함이 있습니다.

고무장갑을 손가락의 형상으로 만든 것은 손가락을 넣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내면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을 넣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만 남았을 뿐 대부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요즘에는 많은 과학적, 심리학적 이론들이 사람을 생물학적 존재로만 보고 접근합니다. 육적인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을 물질적으로만 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육적인 존재가 됩니다. 생각하는 것이 짐승보다 악해집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정욕대로 행하고 부끄러운 욕심을 따라서 행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고린도후서 44절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다시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사랑하여 가장 좋은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영원토록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따라서 사는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십계명 말씀으로 우리의 육신을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십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존재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빛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좀더 공의롭고 진실하고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주실 뿐 아니라 아름다운 꽃도 나무도 주시고 열매도 주시고 강도 주시고 하늘도 주시고 공기도 주시고 물도 주시고 지구도 주시고 햇빛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우주를 인간을 위해서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신 하나님은 성령보다 그 덜 귀한 생선과 떡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제적인 것도 책임져 주십니다.

 

(사명을 주신 하나님)

 

2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여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인간이 아기를 많이 나아서 기르고 그들을 온 땅에 보내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하도록 우리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지상에서 해야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명은 하나님이 인간을 보내실 때 맡기신 일을 말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서 온 것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보내셨을 때는 할 일을 주어 보냈습니다. 인간이 볼펜을 만들 때 글을 쓰기 위해서 만들었듯이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 할 일을 주셨습니다. 사명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사람은 사명이 있을 때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사명은 인간을 인간답게 합니다. 사람이 사명이 없다면, 사람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가 됩니다. 사람들이 사명을 떠나서 먹고 살기 위해서만 사는 것은 저주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 제자양성을 하라)

 

하나님은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양성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톨릭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가족계획하지 말고 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이들은 본문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이후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시대에 육신이 된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자 심히 슬퍼하셨습니다. 이들을 다 쓸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그 안에 성령이 임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영혼구원입니다.

영혼 구원을 하였으면 제자양성을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또 다른 자녀를 낳도록 해야합니다. 제자 양성은 자녀 양육과 같습니다. 여자가 임신을 하면 입덧을 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초청하여 예수님을 알도록 돕기까지는 입덧을 하듯이 고통이 따릅니다. 아기를 낳으려면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하듯이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데는 해산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 양육하는데 많은 희생과 섬김이 필요하듯이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또 다른 제자를 양성하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이런 고통이 있어도 사람들이 자녀를 낳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낳고 나면 그 고통을 다 잊어버리듯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이 성장하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평생 후회하지 않고 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녀를 낳아 양육하는 것입니다.

(세계선교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은 세계에 퍼져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향해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민족주의와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세계를 향하여 나가야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땅의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를 양성하였으면 땅의 모든 족속에게 파송하는 세계선교를 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혼구원과 제자양성 세계선교를 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함께 계셔서 우리가 세계선교를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제자들이 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두루 전했을 때 하나님이 여러 표적과 기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증거해 주셨습니다.(마가복음 1620)

영혼구원과 제자양성과 세계선교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인 사명입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영접지 않으면 생활인으로 살게 됩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됩니다. 생활인의 삶은 저주받은 삶입니다.

우리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복음으로 미개척지를 끊임없이 도전하여 정복해야 합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유비에프를 쓰셔서 지금까지 세계선교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배사라 선교사님은 2041년까지 십만 선교사 파송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한사랑 선교회에 김한식 목사도 십만 선교사 파송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임진왜란 때 율곡 이이는 십만 대군 양성을 주장했습니다. 우리 천안 유비에프도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서 오천 선교사 파송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삶)

 

우리는 인간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나라는 자연을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연을 정복하고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태양을 숭배하고 달을 숭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늘을 정복하여 비행기를 만들고, 바다를 정복하여 배를 만들었고, 달나라를 갔다 왔습니다. 불편함을 정복하여 차와 컴퓨터 텔레비전을 만들었습니다.

요즘은 자연과학이 지나치게 발달하여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자연을 정복하라는 말씀도 있지만 다음에 다스리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정복하되 조화롭고 질서 있게 다스리는 일도 해야 합니다. 탐욕적으로 자연을 정복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자연을 잘 관리해야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정복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운명도 정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운명은 없습니다. 운명적인 생각은 사단이 심는 것입니다. 사단은 기독교에도 들어와서 기독교 운명주의를 만들었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미래가 다 결정되었다고 말합니다. 결정론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인격적으로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재적으로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며 다스립니다.

하나님은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운명과 환경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망과 생명, 그리고 복과 저주를 우리 앞에 두시고 선택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넘치도록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저주하십니다.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를 책임지시는 하나님)

 

29,3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은 온 지면의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인간과 동물에게 식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뿐 아니라 먹는 문제도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한 후에 인간은 땀이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땀흘려 열심히 일하면 먹을 수 있다고 하셨지, 굶는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땀 흘려 부지런히 일하기만 하면 먹는 문제를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공중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십니다. 하나님은 이들보다 휠씬 귀한 우리 인간을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을 믿고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먹을 것을 채워주십니다.

 

(절대 가치를 가진 인간)

 

3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만물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과 인간을 사랑하셔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자랑이요. 소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인간에 대해서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가치를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보석을 감정할 때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그렇게 많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석을 볼 줄 아는 감정사의 말이 중요합니다. 음악가가 음악을 연주할 때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음악을 작곡한 작곡가의 말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가치는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소유를 보고 학벌을 보고 능력을 보고 사람을 평가합니다. 어떤 사람은 눈이 작은 것으로, 어떤 사람은 얼굴이 네모진 것으로 열등감이 있습니다. 키가 작은 것으로 살이 찐 것으로 열등감을 갖습니다. 요즘은 키작은 사람을 루저(실패자)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숱이 적은 것으로 사회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도덕성이나 업적을 갖고 평가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평가는 상대적으로 변합니다. 이것은 인간을 잘 모르고 평가하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여자의 미의 기준도 동양과 서양 그리고 고대와 현대가 다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평가에 영향을 너무 많이 받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성적이 떨어졌다고 직장을 잃었다고 불구가 되었다고 사람들의 평가가 냉담해집니다. 사람들은 이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평가를 너무 절대시하지 말아야합니다. 너무 무시하지도 말고 참고만 해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가를 절대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백원짜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짜리요 예수님짜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있으면 심히 기쁜 존재가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을 때는 우리가 심히 기쁜 존재이지만 우리 안에 예수님을 떠나면 우리는 심히 슬픈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하나님 안에서 심히 기쁜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가치를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심히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절대 가치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마음에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 세례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신 존재로 자신을 인식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심히 기쁜 존재로 자신을 알 때 어떤 환난이나 시련에서도 그를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간)

 

둘째,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이나 민족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민족을 위해서 살다 죽은 이순신이나 유관순과 같은 애국자를 존경합니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고 기념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을 위해서 살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내기 위해서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고기가 물에서 살듯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학과도 가족도 친구도 버릴 수 있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우리의 생각이 긍정적이 되고 거룩하게 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을 보아도, 죽어가는 나사로를 보아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니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심히 기쁜 인간)

 

셋째,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심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있다가 없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기뻐하다보면 우리의 기쁨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인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고 나서 사무엘 때문에 기뻐하지 않고 사무엘을 주신 하나님을 인해서 기뻐했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자신에게 아들을 주신 하나님, 자신의 슬픔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약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인해서 그는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내 주로 인하여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매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서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안에서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학생들은 장학생이 됩니다. 직장인은 돈을 벌기도 합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녀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기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는 기쁨이 변하여 슬픔이 됩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창조주요. 구원주이신 하나님을 인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이 있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고 만족하고 잔이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을 인해서 감사해야합니다.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

 

21-3절을 보십시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인간은 처음 맞이한 날이 안식일입니다. 인간은 안식을 하면서 일주일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 날을 다른 날과 달리 하나님의 날, 주일로 구별했습니다. 우리는 이날 특별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범죄한 후에 수고해야 소산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수고해야 자식을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육체가 있어 피곤을 느낍니다. 죄를 범한 후에는 죄의 짐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안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맡길 때 안식이 있고, 하나님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을 때 안식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첫 번째 날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참 안식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이 날은 인간 뿐 아니라 종과 짐승과 식물과 땅까지도 쉬게 하십니다. 칠년째는 안식년을 주어서 일하지 않고 월급이나 연봉을 받게 하셨습니다. 49년째도 안식하고 오십년 때는 연속하여 희년이 되게 하셨습니다. 모든 종에게 자유를 주시고 빚을 탕감하여 주시고 팔았던 땅을 돌려받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안식일을 통해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오셔서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되엇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수고하는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가서 우리의 짐을 맡기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성령님께 순종하며 예수님을 배우면 우리는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사함을 주시고 질병을 치료하시고 가난을 가져가심으로 안식을 얻게 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 있는 한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 우리는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이 되시는 하나님께 돌아갈 때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참 쉼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제 1장 강해 2부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

126-창세기 23

요절 창세기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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