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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요한 3서 강해 영혼이 잘 됨같이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6-03-07 00:00:00
조회수 : 4,372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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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삼서 강해 영혼이 잘 됨 같이

요한삼서 11-요한삼서 115

요절 요한 3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의 요절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순복음 교회는 이 말씀을 통하여 복음을 순수하게 발견했다고 하여 순복음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해하면 순수하지 못한 복음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여 바른 복음을 알고 진정한 하나님의 복을 받고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1절을 보시겠습니다.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합니다. 요한은 신앙의 선배요 연장자로서 노년에 편지합니다. 요한이 사랑하는 자신의 동역자 가이오에게 편지로 자신의 따뜻한 사랑을 전합니다. 요한은 가이오를 사랑하는 가이오”,”나의 참으로 사랑하는자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가이오를 주안에서 높이 신뢰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진리 안에서 서로 깊이 사랑했고 진리를 행하는 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서로가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2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은 다시 한번 사랑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고 세 번이나 소개하였습니다.(20:2,21:7,21:20) 그는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로 발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요한만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똑같이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요한보다 베드로를 더 사랑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만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일들을 자신을 사랑하여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들이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하여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처음 신앙을 출발할 때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평생한 것은 그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사랑받은 자로 발견해야 합니다. 나는 사랑을 많이 받은 자라고 깨달아야합니다. 내 주위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하시는 일이라고 받아들여야합니다. 내가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낮은 자존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사랑하는 자로 인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로 인식할 때 그 사람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둘째 먼저 영혼이 잘되어야합니다.

 

(영혼이 잘 됨같이)

 

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예수님 안에서는 우리는 3가지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축복이지만 일 더하기 이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일의 축복이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이 이의 축복입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은 물을 주는 것이라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은 곡식이 잘 자라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사람에게 왜 저주가 왔는지를 이해해야합니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행복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육체는 건강하였습니다. 환경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서 세 가지 저주가 왔습니다. 첫째로 그 영혼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혼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 영혼에 자의식과 허무와 두려움이 왔습니다. 이렇게 영혼의 뿌리가 병이 들자 범사와 건강의 나무도 병이 들었습니다. 영혼이 저주를 받자 범사도 저주를 받고 육체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환경 중에는 땅이 저주받아 가시덤불이 나고 동물들은 약육강식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육체에는 질병과 노화와 죽음이 왔습니다. 우리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모든 저주는 영혼이 잘 못되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영혼이 잘 못되자 범사가 잘못되고 질병과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세 가지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먼저 우리의 영혼이 잘되었고 영혼이 잘 되자 범사의 환경이 잘되고 육체는 건강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환경을 축복하여주셨습니다.

 

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첫번째 축복은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뿌리가 되는 축복입니다. 영혼이란 무엇일까요? 창세기 27절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영혼이란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적인 생명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성스럽고 거룩한 영을 우리 마음속에 소유한 그 생명력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영혼의 잘됨이란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마음 중심에 소유하고 성령님의 뜻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축복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처럼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때때로 교만함으로 내가 신이 되고자 하나님을 떠나 죄악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이 때 하나님과 생명의 끈이 끊어지고 사랑의 관계성 또한 끊어져 버립니다. 이는 하나님과 분리된 영적은 죽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져 영적인 생명을 잃는다면 어떤 삶을 살까요? 영혼은 메말라 생명력을 잃고 어두운 세상 사망권세 아래서 죄악 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참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죄악의 그늘 아래 두려움, 절망, 아픔, 허무등 고통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혼이 잘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피 통해서 죄사함 받고 죄악과 어둠에서 벗어나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남을 통해서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로마서 323~25절은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 영혼이 죽고 또한 하나님과 관계성이 끊어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죄사함 받고 오직 은혜로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습니다. 모든 죄를 예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과거의 죄악 벗어나 새 생명을 얻었을 때 자유를 누리고 성령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누립니다.

 

(범사에 잘되고)

 

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두 번째 축복은 범사에 잘되는 것입니다. 범사가 잘됨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범사가 잘 된다는 것은 모든 환경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환경도 변화시켜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그 일에 함께 하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서로 간에 불화 없이 항상 화목하고 학교에 가면 학교에서, 직장에 가면 직장에서, 모든 일들이 잘 되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 바로 이것이 범사의 잘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는 축복의 언약을 내려 주실 정도로 그의 인생은 복 그 자체였습니다. 이쁘고 현명한 동역자 사라를 아내로 얻었습니다. 애굽 땅에서 자신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연약함 보였으니 애굽왕을 경멸한 죄로 죽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복이 되어 애굽왕으로부터 많은 물질과 노예를 받았습니다. 그의 아내를 빼앗은 바로왕은 재앙을 받습니다. 100세나 된 늙은 할아버지가 되어서 그토록 원하던 자식 이삭을 얻었습니다. 또한 그의 말년에는 그의 이름이 만방에 널리 알려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아브라함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고 나약한 죄인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범사에 잘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소유하고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만복의 주관자가 예수님임을 알고 예수님을 통해서 복 받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갈라디아서 313~14절은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저주의 속죄제물이 되심으로 모든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즉 스스로 속죄제물이 되심으로 저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순종할 때 저주가 복으로 바뀌고 성령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같이 복의 근원으로서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뜻에 따르고 순종함으로 요셉처럼 영광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난의 저주가 물러가고 부의 복이 찾아옵니다. 우리 주위에 악한 사람들이 사라지고 복된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남한과 북한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남북이 분단될 때 북한의 경제수준이 높았습니다. 지하자원이나 환경도 더 좋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교회를 불지르고 예수 믿는 자를 죽였습니다. 믿음이 훌륭한 사람들이 다 북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러자 이상하게 북한에는 가뭄과 홍수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남한은 풍년이 계속하여 들어 쌀을 처치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셋째 축복은 강건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강건함이란 무엇일까요? 강건함이란 세상을 살아가면서 육체적 정신적 모든 질병에서 자유로운 건강함을 뜻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건강해집니다. 재림의 때에 우리의 육체로 살아나게 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육체적 편안함과 편리함을 추구하고, 앎에 대한 욕구를 발산함으로 세계문명을 발달시켜 왔습니다. 현대사회는 문명의 정점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보통신 발달, 도시화가 진행 되면서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정보를 얻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화라는 모토 아래 문화, 경제를 중심으로 하나의 단체나 기구로 통합되어 많은 정보공유와 거래를 통해서 예전보다 나은 질의 삶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계화를 통하여 순기능이 있는 이면에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너무 편안함을 추구하다 보니 비만과 성인병의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현대화로 인해서 발생되는 에이즈, 조류독감등 신종 질병들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매스미디어와 컴퓨터와의 발달로 사이버 공간에서 만남을 갔고 대화를 하기 때문에 서로 간에 인간적인 유대감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또한 핵가족화로 이웃과 친지들과의 관계성도 단절되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사람과 사람과의 인격적 유대감 단절은 우울증, 성격장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몇 년 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고 틀어 박혀 사는 은둔형 외톨이가 아주 대표적인 예입니다. 요새 이런 사회문제들이 대두되면서 각종 스트레스와 정신병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육체적, 정신적 어둡고 침울한 세대에서 우리가 어떻게 강건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각종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강건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534, 5절은 말씀하십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 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고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사랑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허물로 인해서 십자가에서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모진 고초로 몸이 상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어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스스로 슬픔을 당하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치료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사랑으로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무시하고 소외시켰습니다. 우리가 강건함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을 중심에 소유하고 높여드려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야 만이 마음이 깨끗해지고 평화가 옵니다. 또한 영적인, 육적인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입는 치유능력의 역사가 있습니다. 지금 질병으로 고통 받는 모든 분들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음을 입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고 강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최장수 직군인 종교인의 1980년대 평균수명 80세와 작가의 1980년대 평균수명 61세를 비교하면 수명 최대 편차가 19세에 달했습니다. 48년간의 평균수명을 조사한 것에 의하면 평균수명 1위인 종교인과 꼴찌 직업군인 언론인 간의 수명 차이는 13년이나 차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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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범사와 건강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할 것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도 영혼이 잘되지 못하면 자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사랑하는 자녀에게 범사에 못되게 하시고 질병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범사에 못되고 질병을 주심으로 먼저 영혼이 잘되게 하십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되지 않았는데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은 저주입니다.

진나라 진시황은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천하를 평정해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일 국가를 세운 절대 권력자입니다. 그의 말 한마디로 온 천하가 움직였습니다. 그는 아방궁을 지어 이쁜 궁녀들과 초호화 생활을 하면서 세상적 모든 기쁨을 누렸습니다. 몸에 좋은 보약과, 천하의 진수성찬은 모두 그에게 진상되어 건강함을 누렸습니다. 이처럼 여자면 여자, 돈이면 돈, 명예면 명예, 권력이면 권력 모든 것을 가진 사내였지만 죽음 앞에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자신을 비판하는 많은 유생을 땅에 묻어죽이고 그 글을 불에 태워죽였습니다. 이처럼 이생에서 영원한 불로장생을 꿈꿨지만 전국을 순행하다가 환관의 우두머리 조고와 승상 이사에 의해서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시신도 온 세상에 끌려나니게 됩니다. 범사에 복을 받았고 강건함을 누렸던 그가 왜 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요? 결론은 단 한 가지 진시황에게는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영혼의 잘됨도 없었습니다. 그는 영생보다는 오직 육신의 행복과 기쁨만을 추구하고 누렸습니다. 하나님 없던 그이기에 참된 평안과 기쁨이 마음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없었기에 고통과 불안함에 시달리고 썩어 없어질 육신에 대한 애착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이 잘되지 못할 때는 범사에 잘되지 않고 질병이 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래야 영혼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결국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저자 이어령씨의 딸 이민아씨가 1년 전 위암투병 끝에 소천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너무 잘되었습니다. 김한길씨와 결혼하고 미국에서 잘나가는 변호사가 되고 검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민아 목사는 참으로 시련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미국에서 검사, 변호사를 지냈으나 매일 매일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김한길 국회의원과의 사이에서 첫째 아들 유진을 낳았지만 결혼 5년 만에 이혼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김한길 전 의원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유진이 2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삶의 의미마저 잃었습니다. 건강하던 아들이 원인도 모르는 병에 걸려 의식을 잃은 뒤 19일 만에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본 이민아 목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재혼 후 두 명의 아들과 딸을 낳았지만 둘째 아들이 자폐 진단을 받으면서 가슴 아픈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갑상선 암을 세 번이나 수술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민났고 자폐증을 앓던 아들이 치료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이민아씨는 그런 상황에서 고도근시로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이어령씨는 딸이 실명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눈이 나았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어령씨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감상선 암도 나았습니다. 그러다가 위암이 다시 걸려서 투병하다가 소천하였습니다. 그의 사명이 끝나고 하나님이 데려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 그런 고난을 받은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세 번의 갑상선 암을 수술하고 위암과 싸우다 끝내 돌아가셨지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영혼이 잘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갔습니다. 그만 천국에 갈뿐 아니라 아버지 이어령씨를 변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하고 그를 통하여 수많은 지성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범사에 잘되고 건강한 것보다 중요한 것이 영혼이 잘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혼은 잘 되었는데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에 대해서는 무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병이 들어도 감사하고 가난해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쓸데없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신앙이 매우 좋은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에버랜드에 가서 자유이용권을 한 후에 자유이용권을 하나도 이용하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가 자유이용권을 샀으면 그 자유이용권을 마음껏 누릴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영혼이 잘 되었으면 모든 것이 잘되고 건강한 복을 누릴 수 있어야합니다. 기독교사를 공부하면 탁발수도회가 나옵니다. 무소유 청빈 생활 실천, 노동 통한 생계 유지를 목표로 한 모임입니다. 13세기 초 기독교가 너무 부요해지지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영혼이 잘 되는 것은 경시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만을 추구하였습니다. 기독교가 세속적이고 기복적으로 흘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세상의 부와 명예를 버리고 영혼의 잘 됨만을 추구한 사람들입니다. 프란치스코회, 도미니크회, 카르멜회, 아우구스티노회 등이 이에 속합니다. 이들 수도회는 중세 초기 이후에 유력신자의 기부를 받아서 부유화하며 세속화한 것에 대한 반발로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개인공동체와 함께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청빈 정신을 중시했습니다. 청빈(淸貧)하게 살고자하는 서원(誓願)을 하고 교회 재산 없이 오직 노동과 자선금으로만 생활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탁발(걸식)이라는 이름은 이같은 무소유 정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온누리를 수도원으로 생각하고 세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들은 내면적인 성찰뿐만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일 등 사도직 활동을 중요시했습니다. 이들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이들은 스님들과 같은 생활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은 체쳐두고 지나치게 영혼이 잘되는 것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영혼이 잘되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집니다. 우리나라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나라가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영혼이 잘 되는 것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풍요와 편리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지자 영혼이 잘 되는 것에 무관심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주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요를 누릴 때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먼저 영혼이 잘 되는 것을 추구해야합니다. 영혼이 잘 되는 한 뿌리에서 범사가 잘 되고 건강하게 되는 두 가지 축복의 나뭇가지사 나온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회사가 망하고 병이 나도 먼저 영혼이 잘 되어야합니다. 이들이 잘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에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영혼이 잘 되었으면 우리의 환경이 복을 받고 건강이 복을 받아야합니다. 오은혜 목자가 간 학교는 홍성에서 가장 안 좋은 학교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나 오은헤 목자가 가고 믿음이 좋은 교장 선생님이 부임하였습니다. 교장 선생님과 오은헤 목자는 학교를 위해서 매일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학교를 복을 주셔서 홍성에서 학생들의 태도가 좋은 학교로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우리가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진리 안에서 행하니 기쁘다)

 

3~4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당시는 영지주의가 판을 쳤습니다. 그들은 행함이 없이 지식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거짓 복음이 난무하고 그 증거자들이 세를 얻어 진리를 왜곡할 때 참 진리를 증거하고 행함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노시스 학파는 그리스 철학과 여러 종교 관념들을 혼합하여 이원론 이론을 만들고 합리론을 근거로 설파하여 진리를 왜곡하고 참 신앙인들을 현혹했습니다. 영과 물질을 이원론적으로 분리 시켜 놓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영만 예수님 믿으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죄와 쾌락을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러나 가이오가 그들의 위협과 왜곡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의연하게 복음의 진리를 행함은 심히 기뻐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인 복음을 고수하며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을 행하였을 때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여 서로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 안에서 행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나그네를 영접하라)

 

“5-8절은 말씀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저희가 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진리 안에서 행함이란 진리 안에서 수고하는 자들을 사랑으로 접대하고 동역자들 서로 간에 사랑으로 진리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주의 종, 형제들 그리고 나그네들을 진심으로 환대하고 최선을 다해 대접하는 것입니다. 여행하는 형제들 곧 나그네들은 평범하게 여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선교 사역을 행하는 선교사들입니다. 여러 곳을 여행하며 설교나 전도를 하던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수 많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어떤 이방인들에게 지원을 받지 않고 오로지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같은 자들을 위하여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통해서 진리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러한 행함은 하나님 뜻에 합당한 일이며 사랑의 증거가 됩니다. 우리 센터에서도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중국, 미국등 많은 곳으로 선교사님들을 파송했습니다. 어학문제, 경제문제, 문화적 차이등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와중에도 우리 천안센터를 잊지 않고 사랑이 담긴 편지나 선물을 보내곤 합니다. 이는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세상적이 이해관계가 아니라 오직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두운 영혼에게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힘 쓰는 그들이 바로 진리 안에서 행하는 아름다운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위해서 선물이나 편지로 따뜻한 사랑을 전함으로 때로는 물질적 지원을 통해서, 세계선교 역사에 동참 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나그네를 접대하지 않는 자)

 

모두 9-1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두어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믿음 안에서 보면 진심으로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며 진리를 행하는 가이오와 데메드리오 같은 신실한 종이 있는 반면에 진리보다는 자기 영광을 드러내가 좋아하고 악한 일을 일삼는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행위의 동기가 진리에서 벗어나 사회적 명성과 자기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영광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사도들을 악한 말로 왜곡하고 깎아내려서 교회 내 분쟁을 일삼아 정치적인 다툼을 야기시켰습니다. 또한 선교사들을 접대하고자 하면 그 접대자들을 교회에서 내어 쫒는 악한 행동까지 서슴치 않고 일삼았습니다. 이는 혹시라도 자신의 아성이 무너질까하여 선교사들 냉대하여 거절했고, 마침내는 그들을 환대하는 접대자들까지 징계조치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에 분명하게 악한 것을 본받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디오드레베의 악행을 본 받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는 사랑 없이 오로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명성을 위해서 행동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도요한은 그 행위를 잊지 않고 벌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선한 것을 본받으라)

 

11-12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악한 것을 본 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본은 예수님 안에서 생명력 있는 진리,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옳은 행실을 말합니다. 가이오는 사랑의 본을 보임으로 하나님의 속한 하나님의 선한 백성으로 주의 신실한 종으로 인정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유지하므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께 백성이요 축복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관계성이 끊어지고 심판과 징계를 받습니다. 데메드리오가 행한 선한 행위는 뭇 사람들이 인정하였으며 진리 곧 복음에 합당하였고 요한 자신도 그를 칭찬 했습니다. 이렇듯 모든 사람과 진리 그리고 자신이 인정할만한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복음의 증거가 되고 믿음의 본이 됩니다. 그러나 디오드레베는 악한 일의 본이 되었습니다.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13~15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면대하여 말하리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각 친구 명하에 문안하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메일이나 전화보다는 직접 만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직접 만나 차 한 잔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쉽게 다가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소를 정해 놓고 만나도 좋고 여행을 같이 가도 좋습니다. 이런 만남들을 통해서 친근해집니다. 잦은 만남 속에서 신뢰하는 마음이 생기고 마음을 툭 터 놓고 이야기 할 정도로 깊은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집니다. 그 이유는 만남을 통해 그 사람의 표정, 말투, 행동을 봄으로 직접 그 사람의 성격과 특성 그리고 현재 상황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0번의 전화보다 한 번의 만남이 마음 속 깊은 여운을 남기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괸계성도 똑같습니다. 매일 마음으로 높여드리고 방 안에서 누워서 사랑합니다사랑고백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정결한 마음과 자세로 교회에 나아가 직접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말씀으로 만나고 기도로 하나님과 이야기 할 때 한층 더 하나님과 가까워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성도 한 층 견고해지고 끈끈해 집니다.. 진심으로 두 손 모아 기도 할 때 우리의 진심이 하나님께 전해질것입니다. 첫사랑의 애틋함을 기억하듯 설레임으로 하나님과 나아가 사랑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 또한 내려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과 자주 만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 모임이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임,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모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지 않고 우리의 육체도 환경도 구원하여주십니다. 그러나 육체나 환경의 구원보다 영혼의 구원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란다고 한 것입니다. 아멘!

요한삼서 강해 영혼이 잘 됨 같이

요한삼서 11-요한삼서 115

요절 요한 3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 3서 강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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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1 [요한삼서] 요한 3서 강해 영혼이 잘 됨같이 오요한 200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