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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요한이서 강해 진리 안에서 행함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6-03-07 00:00:00
조회수 : 3,498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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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요한이서 강해 진리 안에서 행함

요한이서 11-요한이서 13

요절/요한이서 1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지식을 배우고 알게 됩니다. 우리의 문화 등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워오고 대중매체를 통하여 많은 정보를 습득합니다. 이 모든 정보가 있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행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 배운 것 가운데 현재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만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삶에서 여러분은 어떠한 것에 가장 가치를 두고 이를 행하십니까? 그 가치가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물질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꿈과 이상입니까? 이러한 것들은 없어질 것이고 영원한 가치를 가지지 아니합니다. 이런 것은 영원히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패도 아니며, 곧 사라질 것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영원히 나와 함께 하지는 못합니다. 돈도 싸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꿈과 이상이 실현되었다 해도 사람의 소욕은 이를 통하여 참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그 뜻 안에서 더하시고 우리 가운데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무엇보다 예수님에게 우리의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러한 최고의 가치요 참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나오십니다. 우리 모임이 이러한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를 두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진리를 아는 자가 사랑하는 자)

 

1절을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저자 요한은 자신을 사도라고 하지 않고 장로라 합니다. 장로라 함은 연장자, 혹은 다른 사람의 본이 되는 자를 말합니다. 요한은 겸손히 자신을 장로라고 합니다. 장로 요한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 자녀에게 편지 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들입니다. 이들은 사도요한이 참으로 사랑하는 자입니다. 요한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이들이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장로 요한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도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진리로 말미암아 사랑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요한은 지금 성도들 안에 계시는 진리 때문에 그들을 사랑합니다. 또 영원히 그들과 함께 있을 진리 때문에 그들을 사랑합니다.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진리의 영은 성령님이십니다. 진리되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우리는 그 보혈로써 그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현재 우리에게 진리의 영 곧 성령으로 오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 진리의 성령님은 우리에게 참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14:26)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러한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영원히 함께 하시기에 진리 안에서의 그 사랑은 영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성령님이 거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은혜가 있습니다)

 

3절을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진리의 성령이 우리에게 거하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내려주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사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리가 영원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영원하고 하나님의 사랑도 영원하고 하나님의 평화도 영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참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기초로 한 사랑이 아닌, 자신의 육신과 감정에 기초한 사랑을 할 때, 그 사랑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서에서 암논은 다말을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리에 기초를 두지 않았을 때, 자신의 육체의 정욕에 기초하여 다말과 동침하고자 하였습니다. 다말이 원하지 않자 그는 다말을 강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욕을 채운 후에 다말이 미워져 내어 쫓아버렸습니다. 이러하듯이 자신의 육신에 소욕에 의한 사랑은 언젠가 변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이며, 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은 육적이 소욕에 의해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금방 뜨거워 졌다가 식는 냄비와 같습니다. 연애 감정으로 사귀고 결혼을 하였을 때, 신혼 생활 초기에는 나 얼마마큼 사랑해라 하면 하늘만큼 땅만큼하며, 그를 영원히 사랑할 듯 하지만 어느 순간 점점 식어버려 나중에는 사랑인가 아닌가 긴가민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과 같은 질문에 그냥 정으로 사는거지 뭐하며 어느 순간 그 사랑도 식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 사랑이라는 것을 자신의 육적 소원으로 얻으면 그 열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참만족을 주지 못하기에 점점 식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사람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게 합니다. 배타적이 되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진리의 성령 안에서 참사랑을 하여야 합니다. 진리에 기초한 사랑이 우리에게 참 만족을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통한 그 사랑은 식지 아니하며 예수님을 알면 알아갈수록 더 뜨겁고 풍성하게 사랑합니다.

그럼 현재 우리는 예수님의 진리로 인하여 사랑이 더욱 풍성합니까? 아니면 매일 일상에서 일에 의해 지쳐 사랑이 식었습니까? 만약 이 사랑이 식었다면 지금부터 예수님을 통하여 진리 안에서 사랑을 풍성히 하십시오. 이를 통해 우리의 사랑을 회복하고 그 풍성한 사랑이 넘치는 모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생명이 살아나고 기쁨이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진리대로 행하는 자를 보니 심히 기쁘도다)

 

4절을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사도요한은 성도들의 자녀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계명을 아는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명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요한은 이들을 보고 매우 기뻤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계명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성령은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서로 사랑하게 도우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고 행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많은 지식은 알아도 참 진리를 알지 못하거나 참 진리를 안다하여도 이를 살아있는 믿음이 없어, 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2:17) 우리는 말로도 믿어야 하지만 믿음 가운데에서 행해야 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7:21) 오직 예수님을 반석 삼아 말씀가운데 이를 믿고 행할 때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7:24)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함을 통하여 우리의 진실된 믿음을 보십니다.(2:18) 사도 요한은 우리가 행해야할 것을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자)

 

5-6절을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사도요한이 지금 귀부인께 청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요한이 지금 써 보내는 것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받은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바로 서로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실로 행하시고 본을 보이시어 새 계명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할 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하나님을 사랑해야할까요? 누가복음 1027에서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먼저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에 대하여 비할 가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며, 그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큰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최고의 가치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 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로 그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내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순종의 본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멸시하고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한 악한 자들일 지라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알기에 미움과 시기와 질투로 참사랑을 알지 못하고 고통 받아야 할 자들은 참사랑을 통한 참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나만이 그 기쁨에 거하는 것이 아니요, 동역자들과 서로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그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이를 통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가정 가운데 그 사랑으로 가정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앞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많은 양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서로 사랑이 넘치고 기쁨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함같이 동역자들을 사랑함으로 교회에서 컵을 닦는 것이라든지 눈이 올 때 눈을 쓴다든지 찬양 시간에 서로 방긋 웃어주며, 찬양하는 것도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주일에 조금 일찍 나와서 찬양에 동참하여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적극적인 웃음과 기쁨으로 찬양하는 작은 사랑의 실천도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사랑의 기초를 이루는데 큰 힘이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많이 모르는 양들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러하므로 우리 모임이 오직 예수님의 진리를 믿는 가운데 행함을 통한 사랑과 그 능력이 역사하는 모임이 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

 

7-8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미혹하는 자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육체를 따로 생각하여 육체로 순종하는 삶을 행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노시스 학파의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육을 부인하고 육신인 삶을 경시합니다.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고 회개하면 영적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거룩하고 세상에서는 죄악됩니다. 하지만 그 영혼은 그 죄 가운데 더럽혀지고 주의 생명을 잃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들에게 미혹되어 말로만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사랑을 행하여 온전한 상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라)

 

9절을 보십시오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이 내 안에 살게 해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교훈이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셔서 완전한 육신으로 행하셨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실로 사람들을 이해하셨고, 발을 닦아주시고 식사를 섬겨주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공동생활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훈을 믿을 때 성령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정말 연약한 존재이기에 사랑을 행하는 것이 무척 힘듭니다. 하나님 앞에 행하기보다 자신의 육신이 편한 대로 하나님의 뜻을 맞춰보려 하며 합리화를 시키려 합니다. “난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존재니까 뭐! 행치 못할 때도 있는거지!!”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할 때, 이를 합리화 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러할 때,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을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그 육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히브리서 57-9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셨기에 육신에서 자유하실 수 없었습니다. 육신으로 인하여 육신의 소욕이 물밀듯이 들어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육체에 계실 때, 육신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느끼심으로 사람의 모든 고통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이 되어 이 가운데 육신과 투쟁하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육신의 고통이 올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여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육신으로 인한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육신으로 오셔서 행하신 예수님의 교훈을 믿고 그 행함과 같이 우리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훈을 알지 못하고 믿어드리지 못하는 자들은 어떻게 대하여야 한다고 합니까?

 

(복음을 떠난 자는 인사도 말라)

 

10-11절을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성육신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미혹의 영 가운데에서 거하지 말고 그들과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작은 누룩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여도 그 번식력이나 생명력이 강합니다. 큰 덩이의 떡에 적은 누룩이라도 있으면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게 됩니다.(5:9)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을 통하여 오직 믿음으로 미혹되지 말아야 하고 그들의 악한 일을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만나는 것입니다.)

 

12-13절을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여기서 요한은 예수님을 믿는 교회에 이 편지를 쓰며 많은 말을 하기보다 그는 직접 가서 그들을 만나고자 합니다. 그리고 직접 그들과 만나서 사랑의 교재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는 동역자와 만남을 통한 사랑의 교재를 할 때에 주님의 사랑으로 기쁨이 충만케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랑한다면 만나 사랑이 교재를 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만나지 아니한다면 직접적으로 그를 알 수도 없고 교감도 느끼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지 않다가 어쩌다 한 번 만나면 많은 어색함도 있을 것입니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매일 만나기는 힘들어도 자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사회는 통신이 많이 발달되었습니다. 몇 녗전까지만 해도 유선전화가 전부였는데 삐삐가 나오고 이어서 휴대폰이 나왔으며 이제는 스마트폰이 나왔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실시간 채팅을 통해서 대화도 나눌 수 있고, 화상으로 얼굴도 볼 수 있으며, E-mail이나 카톡을 통하여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만나지 않고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대화와 소식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는 너무나 편리하고 좋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화로는 인격적인 대화가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소식이나 이야기 등을 나눌 수는 있지만 서로에게 인격적인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전화 몇 통화하는 것보다도 집에 한 번 와서 보고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고 하십니다. 전화도 물론 사랑으로 할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 와 닿기가 힘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있으면 아무리 전화를 한다하여도 그리우며, 만났다 헤어질 때, 아쉽게 느낍니다. 그렇기에 사랑한다면 만나서 사랑을 직접 전하고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와 만나기를 기뻐하고 먼저 나아가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든지 마음 속에 성령님을 생각하고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 회개여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만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지고 믿음이 굳건해져 행함도 할 수 있습니다. 동역자를 사랑한다면 서로 사랑함으로 기도 모임에서 만나 말씀을 듣고 교재 나누어야 합니다. 또한 주일 날 먼곳에 있든지 아니든지 교회에서 만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양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위해 1:1로 만나 그들에게 예수님을 사랑을 적극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만남을 통해 사랑의 더한 삶을 살 때에 우리는 사랑의 관계성으로 맺어진 모임이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모임이 만나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예수님의 큰 사랑이 넘치는 모임이 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그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사랑을 행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그 진리를 알고 믿어드릴 때, 우리는 순종함의 믿음이 생기고 이를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에 있어서는 예수님 한 분이 내 안에 계실 때, 참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진리의 믿음으로 이 참사랑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되고 이 사랑으로 예수님을 믿어드려 예수님을 순종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말씀/요한이서 강해 진리 안에서 행함

요한이서 11-요한이서 13

요절/요한이서 1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요한이서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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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이서] 요한이서 강해 진리 안에서 행함 오요한 200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