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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데살로니가전서 4장 강해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이라

작성자 : 천안UBF
작성일 : 2021-07-09 10:51:34
조회수 : 546
데살로니가전서 4장 강해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이라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4장1-데살로니가전서 4장 18
요절 / 데살로니가전서 4장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가 거룩함이라." 

우리는 지난 주에 사도 바울이 사랑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저는 한 자매가 바울이 한 이 사랑의 고백을 자신의 룸메이트에게 하는 것을 보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사랑의 고백을 통해서 둘의 관계 좋아졌습니다. 또 어떤 양이 저에게 이 사랑의 고백을 넣어서 편지를 쓴 것을 보고 저도 한참 웃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고백은 우리를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부 사이에 목자와 양 사이에 룸메이트 사이에 이런 사랑의 고백을 힘써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가르쳐 주십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순종치 아니하면 우리는 고통의 연속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붙잡힘을 받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래 송아지는 풀어놓아 키웁니다. 송아지 때는 자유롭게 뛰어 다닙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라서 이제 일을 할 때가 되면 길을 들여야 합니다. 길을 들일 때가 되면 소의 코를 빨갛게 달구어진 쇠붙이로 뚫습니다. 그리고 굽은 나무로 둥그렇게 그곳에 넣고 이마쪽으로 치켜 올립니다. 이것을 코뚜레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곳에 밧줄을 달아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를 몰고 갑니다. 지금까지 마음대로 뛰어 다니던 소를 붙잡아놓으면 자란 소는 이것이 엄청나게 답답합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날뛰지만 그렇게 날뛰면 주인은 코 뚜레에 달린 밧줄을 잡아다녀 고통스럽게 합니다. 움직일수록 꼬뚜레를 잡아다니기 때문에 더욱 고통을 당합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주인은 절대로 자신의 뜻을 송아지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이것을 알고 나서 소는 이제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행복이고 기쁨이라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한 번 부르신 후에 처음 초신자 때는 마음대로 살도록 자유롭게 둡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이 성장하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길들이기 시작하십니다. 소는 주인이 농사짓는데 부려먹으려고 길을 들였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합당한자가 되도록 길을 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신앙생활이 고통의 연속인 사람은 대부분 하나님의 뜻을 순종치 않고 자꾸 곁길로 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가운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욱 많이 힘쓰라)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사도 바울은 주 예수 안에서 권면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권면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명령이라는 말씀입니다. 끝으로 권면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가르치는 명령입니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명령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가르친 것이요.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현재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명령을 다시 하는 것은 그들이 더욱 힘써서 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화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단 한번에 이집트에서 탈출을 했지만 그들의 내면에 있는 노예근성을 제거하는 데는 사십년이 걸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단번에 죄사함을 받았지만 우리의 내면이 예수님의 성품을 덧입고 변화되는 데는 평생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더욱 힘써하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의 첫번째는 거룩한 생활입니다. 거룩함이란 죄에서 하나님 쪽으로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검은 옷을 길게 입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사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웃어야 할 때 딱딱한 얼굴을 하고 웃지도 않는 것이 아닙니다. 괜히 애어른이 되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이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거룩함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법괘를 옮길 때 춤을 속살이 보이도록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마음껏 뛰어노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음란을 버리라)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음란을 버려야 합니다. 음란함과 성령은 함께 하지 못하는 상극입니다. 마치 불과 물이 함께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뜨겁게 태양이 비취면 물이 증발되어 하늘에 올라갑니다. 물을 뿌리면 불이 꺼집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음란이 사라집니다. 음란이 있는 곳에는 성령께서 소멸됩니다. 음란이란 무질서한 성생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은 성생활입니다. 처녀 총각이 결혼하기 전에 성관계를 갖거나 그런 것을 유발시키는 행동을 하는 것도 음란입니다. 결혼한 유부남이나 유부녀가 바람을 피우는 것도 음란한 것입니다. 요즘은 음란을 유발하는 것이 많습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할수록 이런 면에서 자극하는 것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책이나 사진 정도였습니다. 요즘은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를 이용하고 스마트폰의 동영상을 이용하여 자극합니다. 이는 하나님 없는 문화입니다. 서구도 하나님을 떠나면서 급속히 음란 문화가 퍼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만나보지도 않고 결혼했습니다. 다음은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도 하고 맞선도 보고 결혼했습니다. 요즘에는 서로 사랑하고 육적인 관계를 맺어보고 나서 결혼합니다. 미국이나 구라파에서는 동거를 하고 애기를 낳고 살아보다 결혼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이혼율이 세계 삼위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서구에서는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아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세상은 더욱 음란해지고 있습니다. 캠퍼스는 음란의 소굴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음란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음란을 버릴 수 있습니까? 이런 음란이 고통인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란은 잠언 말씀에 있는 것과 같이 날카로운 칼에 꿀을 바른 것과 같습니다. 먹을 때는 달콤하지만 끝에는 혀를 베고 생명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것은 육체에 고난이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기쁨과 평강이 있습니다. 이는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음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개가 토했던 것을 먹는 것이나 아니면 돼지가 똥이 가득한 돼지우리에서 뒹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혼나기 전에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음란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음란을 버려야합니다. 우리가 음란을 버리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아내로 만족하라)

4-6절을 보십시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각각 존경하는 마음으로 거룩하게 자기 아내의 몸을 대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처럼 욕정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이런 일에 있어서 형제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그를 속이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전에 엄숙하게 지시하고 경고한 바와 같이 주님께서는 이런 모든 범죄에 대해서 가차없이 처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음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믿음의 결혼을 해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결혼을 하고 성(性)은 집 안에서 관리해야합니다. 성은 집 안에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창조적인 일에 성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도바울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온몸을 불태우므로 성에너지를 발산하였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음란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아갑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결혼은 우리를 고독과 음란과 방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음행하는 자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남의 아내를 범하는 죄를 무서워해야합니다. 

(우리를 거룩함으로 부르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가 결혼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결혼은 거룩한 결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과 사명과 인격이 연합되는 결혼입니다. 이렇게 결혼을 했으면 부부간에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할 때 성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부간에 사랑이 없는 가정이 바람을 피우게 됩니다. 남편이 사랑이 없으면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아내의 사랑의 없으면 남편이 바람을 피웁니다. 믿음의 가정은 서로를 존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사랑과 존경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음란을 심판하십니다)

6절에 하나님이 신원한다는 말은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지 않고 음란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음란을 즐길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하십니다. 그때 예수님이 고통한 만큼 우리에게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성병을 통해서 가정의 파탄을 통해서 양심의 가책을 통해서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마지막 날에 불과 유황으로 들어갑니다. 특히 음란의 죄가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음란은 성령을 져버리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져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우리가 음란을 좇는 것이 심각한 죄인 이유는 음란을 좇는 것은 성령을 져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져버린다는 것은 내팽개쳐 내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버림 받아본 경험이 있지요? 버림 받는 것은 무시 받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 받으면 마음에 슬픔이 생기고 우울증까지 생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큼 상처가 큽니다. 하나님이 이런 아픔을 당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내버린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을 내어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죄를 짓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음란의 큰 악을 행치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진노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형제를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서 사랑할 뿐 아니라 주위 마게도냐의 모든 형제들에 대해서 사랑했습니다. 이들을 물질적으로 섬기고 도와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더 많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더욱 많이 행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냥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고 형제 사랑을 하라고 말합니다. 형제들은 부모의 피로 맺어진 사람들입니다. 뗄래야 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절대적인 형제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서까지도 함께 살아야 할 형제들입니다. 형제들은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들끼리는 가인이 아벨을 경쟁하고 시기하듯이 시기의 대상으로 보기 쉽습니다. 이맇게 시기하고 경쟁하면 사랑의 공동체가 깨어집니다. 사단이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는 형제가 잘 되면 시기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잘되면 오히려 자랑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들은 서로가 나보다 나은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를 보고 사랑하지 말고 아버지를 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 자매는 서로 연애하지 않습니다. 남매가 연애 감정에 빠지는 것은 짐승이나 하는 짓입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로서 일절 깨끗함으로 서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수고와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1,12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조용히 자기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자랑합니다. 아니면 누가 자기를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조용히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고 기쁨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자기 일을 해서 자기가 먹고 사는 것을 자기가 벌어야 합니다. 신앙을 빙자해서 게으르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입으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물질이 넉넉하여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집에 냉장고에는 항상 먹을 것이 풍성하게 해서 손님을 대접하고 양들을 항상 섬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이나 양들이 목자가 궁핍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너무 가난하게 살면 불신자들에게 덕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일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궁핍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아브라함의 가정처럼 손님들 섬기기에 넉넉하도록 풍성하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적 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선교회 가정을 축복하여 주사 사랑을 더욱 많이 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함께 올 것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사람들은 죽음으로 인해서 슬퍼합니다. 죽음은 슈퍼맨과 같은 사람이라도 슬퍼맨이 되게 합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우울증을 가져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믿다가 순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신자의 죽음을 잠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우리 신자에게 죽음은 잠입니다. 우리는 잠자기 전에 슬퍼하지 않습니다. 잠은 우리에게 휴식을 줍니다. 우리는 피곤하면 잠자는 것을 소망합니다. 저는 잠이 항상 부족하기 때문에 눕기만 하면 잠을 잡니다. 진정한 신자라면 잠자는 것처럼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잠자다가 다시 깨어 하늘나라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의 기독교 국가에서는 죽은 자의 예식을 장례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천국 환송예배라고 합니다. 우리가 선교사님들을 외국에 보낼 때 공항에서 환송하듯이 죽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환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살아있다면 우리의 가족과 형제자매를 만날 수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우리는 신자는 죽어도 기쁘고 살아도 기쁜 것입니다. 반면에 불신자들은 살자니 고생이요. 죽자니 무서운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안에서 잠자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주안에서 잠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부활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 날에 우리 안에 계시는 부활의 영이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하지만 주밖에서 잠자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죽음이 저주요.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의 날입니다. 예수님은 주안에서 잠자는 자들을 휴거하게 하시고 칠년 대환난이 지난 후에 지상재림할 때 같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주안에서 잠을 자야 합니다. 

(휴거를 합니다.) 

15-1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부활할 때를 말합니다. 그날에 예수님은 친히 호령을 하시고 천사장이 예수님을 호위하며 오십니다. 승리를 알리는 하나님의 나팔이 울리며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친히 강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강림하셔서 죽은 자들을 먼저 일으키십니다. 우리 산자들도 변화되어 구름 속으로 들림 받아 그곳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이것을 휴거라고 합니다. 부활의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불완전합니다. 자매들은 이십사 세부터 늙고 형제들은 이십육 세부터 늙는다고 합니다. 자동차를 사고 삼년이 지나면 이것저것 교체해야하듯이 우리 몸도 삼십이 넘으면 하나씩 하나씩 늙어가기 시작합니다. 팔이나 다리나 하나씩 고장 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자동차를 폐차시키듯이 우리의 몸도 엔진인 심장이 멈추면 땅에 묻거나 불에 태워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강림하시는 그날이 오면 우리의 몸이 변화됩니다. 우리의 몸이 영광스럽고 강하고 튼튼하고 썩지 않는 몸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영원한 새 차와 같이 변화됩니다. 그날이 우리 신자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승리의 날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무디는 죽을 때 "나는 오늘을 기다려 왔다. 오늘이 면류관을 받는 날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부활신앙이 고난의 위로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현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많은 환난과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들을 사람들이 위로 해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위로가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며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재림의 소망을 심으며 서로 위로해야합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을 믿고 살면서 슬픈 일을 당하고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때 사람의 위로를 받고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재림의 날에 예수님의 위로를 구해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의 뜻)

이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이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리고 재림을 소망하며 슬퍼하지 않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소가 주인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듯이 우리도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데살로니가전서 4장 강해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이라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4장1-데살로니가전서 4장 18
요절 / 데살로니가전서 4장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가 거룩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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