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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고린도후서 1장 강해 2부 바울의 자랑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2 00:00:00
조회수 : 3,548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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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장 강해 2부 바울의 자랑

고린도후서 112-고린도후서 124

요절 고린도후서 112

 

고골리의 작품 중에 외투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아까끼 아까끼 비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인생의 목표는 고급 외투를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를 위해서 말단 관직에 있으며 돈을 저축합니다. 결국 80루블을 사서 외투를 사고 이것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외투를 입고 온 거리를 다녔습니다. 어느 골목에서 강도를 만나서 외투를 빼앗겼습니다. 그는 생명은 지켰으나 행복과 성공과 목표와 의미를 빼앗겼습니다. 그는 시름시름 앓다고 죽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이 유령이 나타나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가 세운 목표는 허무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외투와 같이 하찮은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외투와 같은 것이 우리의 자랑이 아닙니다.

어떤 국회위원이 되어 죽었는데 조객이 두 명뿐이 없었다고 합니다. 국회위원이 되는 것도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사도바울의 자랑이 나옵니다.

 

(바울의 자랑)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교만하지 않은 숨은 긍지입니다. 우리는 양보할 수 없는 자랑이 있어야합니다. 바울은 세 가지 자랑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바울은 세속화되지 않았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건이요. 윤리적으로 순결한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핵심은 거룩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자랑입니다.

둘째는 진실한 것입니다. 성공한 것이 자랑이 아니라 진실한 것입니다. 가난한 것이 죄가 아닙니다. 진실하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공부 못한 것이 죄가 아닙니다. 거짓된 것이 죄입니다. 자녀에게 정직함을 유산으로 줄 수 있어야합니다.

셋째는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은혜로 행한 것이 자랑입니다. 그는 세상의 지혜를 버리고 은혜의 복음만을 전하였습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은혜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해주기를 바란 것은 초라하고 추한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으로 삽니다. 감옥에 가는 것도 풍랑을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중한 자랑입니다.

세상에서는 자랑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고글리 외투에 나오는 아까끼 아까끼비치는 외투 때문에 죽습니다. 헛된 자랑 때문에 자신이 죽습니다. 여러 동물이 연못가에 물을 마시러 왔습니다. 사슴 뿔이 자신이 잘 생겼다고 말하였습니다. 암놈은 뿔이 없고 다른 동물도 뿔이 없습니다. 수사슴이 자랑하는데 호랑이가 나옵니다. 도망가다가 뿔이 나무에 걸려 죽습니다. 잘생긴 사람이 먼저 죽습니다. 머리 좋은 것 자랑하다고 못되는 사람이 있고 도박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랑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자랑하는 것이 자신이 망하는 이유가 됩니다. 돈 지식 건강 명예 지위 권세 어느 것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잘난 체하면 친구가 없습니다. 나중에 허무해집니다. 바울은 자신의 자랑을 양심이 안다고 합니다. 나의 양심이 나의 자랑을 인정해야합니다. 나의 양심이 성원해야합니다. 바울은 거룩함 진실함 은혜로 산 것을 자랑합니다.

 

(서로의 자랑이 되기를 바람)

 

13.14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프린스턴의 대학에서 금요일에만 여자를 초청합니다. 여자들이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고 이름을 달라고 해도 주지 않습니다. 그는 프린스톤 대학생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프린스톤 대학생은 연애할 수 없다는 자랑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돈은 있으나 감옥을 몇 번 갔습니다. 아들을 잘 살게 하려고 돈을 모으려다 감옥에 갔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살 수도 없고 결혼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랑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만의 자랑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 자랑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날에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의 자랑이 되고 고린도 성도들이 자랑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 때문에 예수님 믿었다고 자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나의 양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리스도가 심판하실 때에 자랑할 것을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한 자랑을 가지고 삽니다.

사람들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영생의 욕구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그리스도의 날에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자랑이 진짜 자랑입니다.

윌리엄 케리의 형은 웰리엄 조지입니다. 윌리엄 케리가 선교사가 된다고 할 때 형은 부를 자랑하며 동생을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웰리암 캐리는 백과사전에 한페이지 반이 나옵니다. 형은 단지 웰리엄캐리의 형이라고만 한 줄 나옵니다.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은 서로 자랑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서로 남을 자랑해야합니다. 남을 자랑하면 마음이 불편한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높이고 자랑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이것이 합쳐지면 서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칭찬은 맞대고 하지만 자랑은 제 삼자에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 대해서 비난합니다. 사도권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을 자랑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먼 미래를 생각합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하는 바울)

 

15-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갈 것이라고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알아보고 책벌할 것이라고 말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두 번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고린도 성도들을 지나서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를 거쳐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들르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는 성령을 따라서 세운 계획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새로운 인도함을 따라서 이 계획을 취소하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한참 후에 고린도에 갔다가 나중에 다시 육로로 하여 아시아에 왔다가 배타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바울은 훈련병처럼 하나님께 예 그렇습니다. 예 시정하겠습니다. 하면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곧바로 순종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순종한 것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요즘 신세대는 자기가 강합니다. 톡톡 튀며 까질한 것을 멋으로 합니다. 자기 표현이 강하고 개성이 강합니다. 이들은 다양성이나 자율성의 측면에서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표현한다고 불순종하고 자기 멋대로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다양성과 개성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아래서 허용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성경은 바뀌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오고 예수님 한 사람의 순종으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순종을 배워야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자세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순종할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예하고 순종해야합니다. 우선, 아니요라고 하는 것은 열등감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아니요 해야 내 정체성이 살아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순종하되 모르고 맹목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순종에 훈련이 되어야합니다. 기다렸듯이 순종해야합니다. 특권을 즐기는 마음으로 순종해야합니다. 그럴 때 심부름 시킨 사람이 좋습니다. 여기에 감사와 순종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께 항상 순종하는 것임을 증거합니다. 바울은 바로 순종하는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경솔히 계획하였으리요?)

 

17,18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바울의 계획 변경으로 인하여 고린도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경솔한 사람으로 불신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온다고 하고 안 왔습니다. 바울은 멀리서 보면 큰 소리치고 가까이 가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아끼기 때문에 안 갔습니다. 더 좋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가지 않았습니다. 비겁한 자, 유약한 자라고 하여도 그들을 위해서 가지 않습니다. 어떤 비난을 받아도 정직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려고 하다가 좀더 있다가 가려고 계획할 때에 내가 경홀히 하였겠느냐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깊이 배려합니다.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고린도 교회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이 더욱 좋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배려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지금 만나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기다립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겁쟁이니까 할말이 없으니까 못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바보가 됩니다. 사람들은 바보되는 말을 못참다가가 사고를 냅니다.

바울은 신앙적으로 계획하고 결정합니다. 바울이 육체를 좇아서 계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인간적인 판단을 따라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게 돌아오는 명예나 위신이나 이익을 생각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을 회개시킬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계획할 때에 많이 생각하고 하였습니다. 나는 육체대로 한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을 따라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따라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한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무슨 결정할 때 성경 어느 본문에 의해서 이렇게 결정했다고 합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라고 하고 사람에게 대해서 아니요 라고 하였습니다. 넥타이매고 옷을 입는 것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결정해야합니다.

목사에게 야한 넥타이를 사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선택하고 결정해야합니다. 계속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일본 속담에 먹을까 말까 하면 먹지 말고 갈까 말까하면 가지 말라고 합니다. 죽을까 말까하면 죽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스라고 할 때 예스라고 해야 합니다. 아니요 라고 하면서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결정적인 때는 예스하려면 한편으로 노우할 때가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예스하다보면 사람에게 노라고 해야합니다. 하나님께 예스 하고 보디발처에게 노우라고 하였습니다. 노하고 나서 후속결과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핍박과 오해를 받을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도 노우할 때 노하지 못하여 손해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자기를 부정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자기를 인정받고자 합니다.

우리는 70살 되어 아프면 그렇거니 생각해야합니다. 중고차는 고장나기 마련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가야합니다. 순례자의 길이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께 항상 예하신 예수님)

 

19.20절을 보십시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예수님은 아멘이시오. 참된 증인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는 노우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고자 하면 하나님께 예라고 못합니다. 아멘이라고 해야할 일에 아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아멘 할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순종하여 처녀의 몸에서 났습니다. 순종하여 결혼도 하지 않고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였든지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에 목마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시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목마르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다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앞에 아멘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정의를 가지고 아멘이라고 해야합니다. 기쁨과 감사로 아멘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단해야합니다. 그리고 경영해야합니다. 어떤 일이 있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아멘 해야 합니다. 전적으로 신뢰하고 가야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아멘 해야 합니다.

 

(성령님께 예하는 생활)

 

21.22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사도바울을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튼튼히 서게 하시고, 또 바울에게 사명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도장을 찍으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신 표시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목자로 삼으신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산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해야 합니다.

 

(고린도성도를 아끼려고 가지 않은 바울)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바울은 덕을 가지고 말합니다. 덕은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져서 남는 것이 아닙니다. 약간 바보가 되는 것이 덕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똑똑하다는 말은 하지만 덕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합니다.

대통령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덕이 있습니다. 유비라는 사람은 덕장입니다. 관우나 장비는 용장 맹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덕이 무엇이냐를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들어서 설명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이 있습니다. 책벌할 사람은 책벌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남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후속결과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처만 생기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비판하는 눈이 생깁니다. 교회는 큰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에 안 가니 말이 많습니다. 바울에게 졸장부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 전도인이라고 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도바울에 대해서 정면 도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비방을 들으면서도 고린도교회에 방문하지 않고자합니다. 바울의 덕성이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들을 아끼려한다고 합니다. 신앙을 잃어버릴까봐 비판하는 체질이 될까봐 가지 않습니다. 분쟁하다 보면 단점만 봅니다. 비판적 시각이 점점 발달합니다. 바울은 혹이라도 손해가 되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중간 사람이 문제입니다. 가룟유다같은 사람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중간 사람이 돌아와야 합니다. 좀더 선한 사람이 많아진 후에 방문하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이 죄인들과 어울리는데 사도 바울이 가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책망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아끼려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비판보다 화목을 원합니다. 상대방의 인격 마음을 아껴야합니다. 마구 헐뜯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부덕한 것입니다.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2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바울은 주관자가 아니라 돕는 자가되고자 합니다. 바울은 주관할 수 있습니다. 주관은 강제성을 띱니다. 법적 조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교회에 사랑의 분위기는 다 깨어집니다. 돕는 자로 일하고 싶다고 합니다. 기쁨을 돕는 자가 되고자 한다고 합니다. 주관자가 아니라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쁨에 대해서 협력자가 덕입니다. 스스로 해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화해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그후에 기쁨을 더하여 주고자 합니다. 기쁨은 스스로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기쁨을 잃지 않게 은혜를 돕고자 합니다. 은혜의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기쁨을 배가되게 해야 합니다. 덕이 없는 사람은 기쁨을 반감시킵니다. 덕이 없는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산소같은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기쁨을 가증시키는 날 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기쁨의 관계로 만나고자 합니다. 조이메이커가 되고자 합니다.

상대방으로 인하여 스스로 기쁜 자가 기쁩니다. 나는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나는 당신 얼굴만 보고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미쳤냐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다가 나도 기뻐 나도 너처럼 기쁜 사람이 되게 해 해달라고 합니다. 바울은 너희 때문에 행복하다고합니다. 행복한 내가 너희를 만났다가 기쁨이 사라질까 걱정합니다. .

 

(하나님께 예하는 삶)

 

바울은 하나님께 순종할 때 양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서 예하며 순종하였습니다. 양들이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까지 오래 기다려주었습니다. 바보 소리를 들어도 믿어주고 소망을 가져주었습니다 바울은 양들을 진정 사랑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강해 2부 바울의 자랑

고린도후서 112-고린도후서 124

요절 고린도후서 112

고린도후서 1장 이부강해 이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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