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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고린도후서 1장 강해 1부 위로의 하나님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2 00:00:00
조회수 : 4,862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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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장 강해 1부 위로의 하나님

말씀 고린도후서 11-고린도후서 111

요절 고린도후서 13

 

우리는 살면서 때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큰 환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환난의 때에 어떤 사람은 위로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담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욥의 친구가 처음에 했던 것과 같이 찾아가서 가만히 있어주는 것입니다.

요즘 부부간에 살면서도 위로 받지 못하고 자녀를 통해서 위로 받지 못합니다. 많은 친구가 있으나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현대인은 위로해주지도 못하고 위로 받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위로를 얻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권력으로 위로 받고자 하나 더 불안합니다. 명예만 얻으면 위로 받을 줄 알았는데 명예에 취하게 만듭니다. 또한 넉넉한 소유를 얻으면 위로를 얻을 줄 알았는데 돈이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방이나 춤을 통해서 위로 받고자 하지만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나의 경험만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경험은 다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과 디모데가 편지를 씁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형제라고 동등하게 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라고 합니다.

바울은 사람의 뜻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고린도성도들 가운데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고린도 교회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아가야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바울처럼 마음에 은혜와 평강이 찾아옵니다.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사)

 

3.4a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씀으로 책망하고 고린도 후서에서 위로를 합니다. 1장에 환난이라는 단어가 8, 위로라는 단어가 10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은 환난 가운데 있는 사도들을 위로해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환난과 고난 중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환난은 정신적인 환난이 아니라 육체적인 환난입니다. 8,9a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지나도록 고난을 받아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자신의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이고디온과 안디옥으로부터 와서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뿐 아닙니다. 세 번이나 파선하는 배에 일주야를 지내서 소망이 끊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바울을 죽이지 않고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사람들이 40명이 있어 바울의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런 극심한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 강훈련을 시키십니다. 우리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견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딤후3:12). 또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4:22)

우리에게 예수님과 동일한 고난이 있는 것이 너무나 정상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핍박과 고난이 없는 것이 비정상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고난 외에 적극 자원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패와 질병을 통하여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받을 뿐 아니라 매주 소감을 쓰는 고난, 하나님의 역사를 세상의 어떤 일보다 앞세우는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우리가 이런 절대 신앙으로 살 때 가족들과 친지, 그리고 학교 교수님, 선후배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고난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자비와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함이라고 합니다. 어원은 레헴에서 나왔습니다. 레헴은 여자의 자궁을 말합니다. 그곳에 진정한 자비가 있습니다. 아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사랑과 위로로 감쌉니다. 체온과 양식과 감성을 공급합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여인의 자궁이 생명을 보호하듯이 어린 아이를 보호합니다.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위로는 파라칼레오입니다. 곁으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자기 곁으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가 울고 있으면 끌어안아줍니다. 그것이 위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대산 받으시고 우리에게 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곁으로 불러서 같은 신분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encourgement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힘을 붇돋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로하십니다.

사람들이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위로가 조소가 될 때가 있습니다. 집은 불이 났는데 8명의 식구는 살았습니다. 토지는 남았습니다. 그래도 사람은 살고 땅은 남았다고 해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이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만이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신병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 사람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의미를 깨우쳐줍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다는 것을 알 때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자녀를 책망할 때도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주어야합니다. 미워해서 책망한다고 생각하면 책망이 효과가 없습니다. 환난이 높은 단계의 사랑의 표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하고 나면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순교자가 위로를 받는 것은 마지막 영생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환난이 은혜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로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

 

4b를 보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로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위로 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도우시기 위해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아무 잘못없이 쫓기는 환난을 당하므로 환난당하고 원통한 자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은 죄악으로 상처투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싸며 싸매며 치료받지 못했습니다.(1:6) 그들의 땅은 황무하고, 성읍은 불에 타고, 토지는 이방인에게 삼키웠고,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습니다. 쓸만한 사람은 포로로 잡혀가고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왕은 아들이 죽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고 두 눈이 빠졌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그들은 위로해 주셨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 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나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40:1,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로의 나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사 위로해 주십니다. 한나는 슬픈 여자였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해서 그 대적 브닌나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의 슬픔은 남편 엘가나가 브닌나보다 갑절을 주며 사랑했을지라도 위로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나가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한나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두왕 사울과 다윗의 영적 아버지인 사무엘을 낳게 하셨습니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는 32녀를 주어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한나는 자식이 없는 여자들을 위로해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5:4) "화 있을 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여 울리로다"(6:25)우리가 자신의 죄와 양들의 조로 인하여 울며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캠퍼스의 목자 없는 양들을 위해, 후계자 한사람 없는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과부가 청년인 아들을 잃고 예수님 앞에 울며 기도했습니다. 에수님은 "울지마라" 위로하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11:13)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않고 울며 기도했을 때 부활의 예수님은 마리아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들의 죄가 있어도 "헤헤"하며 웃고 지낼 때 하나님의 화가 있습니다. 양들의 죄를 보고도 책망치 않고 적당히 지날 때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고난을 넘치도록 받는 자에게 임합니다. 이런 자가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5-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고난이 넘쳤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예수님 때문에 매를 맞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로를 주십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위로해 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사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찔리시고 상하심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와 질병을 치료해 주심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선포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은 허무와 슬픔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재림을 통하여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위로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우리가 고난이 넘치면 위로도 넘칩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당한 사람이 함께 위로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환난을 당한 것은 고린도 성도들의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도 고난을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위로가 고난을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견딘다는 것은 단순히 수용하고 참는다는 뜻이 아니라 승리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위로로서 고난을 승리하게 합니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고난 중에서 위로가 됩니다. 고난 중에 환난 중에 위로가 됩니다. 가장 어려울 때 아내가 위로가 됩니다. 병원에 가면 자신을 위로해주는 아내가 소중합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예뿔 수가 없습니다. 고난 중에 위로 받고 위로합니다. 위로자가 누구입니까? 고난을 많이 당한 자만 위로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10년을 앓고 10번의 수술을 받다가 죽었습니다. 죽어서 시체 냉장고까지 갔다 왔습니다. 그분이 다른 사람을 위로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병원에 가서 원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받아서 극복하면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고난 중에 위로 받았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도 우리를 위로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분이 사업에 실패하고 자살하고자 하였습니다. 마지막 아내를 보고 죽으려고 하다가 자살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사업에 성공합니다. 그 분이 다른 사람을 위로 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는 메시야를 만나지 못하면 죽을 수 없다는 절박함 가운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위로하사 예수님을 만나게 도우셨습니다.(2:25-27)

안나는 출가한 후 7년 동안 남편과 살다가 과부가 되어 84년을 살았습니다. 그녀도 메시야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 가운데 금식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메시야를 만나게 하심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위로도 받는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의 고난을 생각하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고난에 참여한 것같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소망도 견고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는 반드시 위로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고난을 받을 때 스데반을 생각합니다. 매를 맞으며 고난을 받은 스데반을 생각하면 위로가 됩니다. 우리 신자들이 고난을 받는 것도 위로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롱펠로가 고난을 당하여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많은 시를 썼습니다.

 

(바울의 고난을 알기를 원함)

 

8.9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성도들이 자신이 환난 당한 것을 알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맹수들에게 환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옥에 갇혔습니다.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파선하는 배를 타기도 하였습니다. 강도와 유대인의 위험도 받았습니다. 잠도 자지 못하고 춥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난을 알기 바란다고 합니다. 바울의 고난을 알면 고린도 성도들의 고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힘에 지나도록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습니다. 이제는 순교를 당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기철 목사는 사년 반동안 고생합니다. 코에 물을 집어넣고 인두로 지집니다. 하나님 빨리 내 영혼을 취해주십시오. 이대로 오래가면 순교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힘이 자난 고난입니다. 살 소망까지 끝어졌다고 말합니다. 의지의 한계에 도달하였습니다.

순교사를 보면 순교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었습니다. 이를 읽으면 많은 은혜가 됩니다. 굶주린 사자가 달려드는데 아이를 안고 들어간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이는 사자가 무서우니까 웁니다. 얘야 잠깐만 기다려라 곧 밝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폴리캅은 80이 넘어 덕망이 높은 분입니다. 거짓말로 한마디만 믿지 않는다고 하라고 합니다. 폴리캅은 예수님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짓말하느냐고 합니다. 우리가 순교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믿음이 새로워집니다.

바울이 이런 고난을 알기를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통하여 부활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알 때 고린도 교회가 안일함을 회개하게 됩니다. 바울은 고난당하는데 서로 싸울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복잡한 문제가 그들이 바로 고난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고난은 면류관과 같은 것입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7년 감옥 생활을 하다가 나오신 분이 있습니다. 무명 흰두루마기를 입고 요한 계시록을 강의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들이 높이 존경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한 목사는 부끄러워 숨었습니다. 그리스도 사람으로서 고난을 받은 것은 훈장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영적인 존경을 받습니다. 바울이 받은 고난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증합니다. 이 모든 환난이 유익이 있습니다. 환난을 긍정적으로 대합니다. 유익함을 알고 환난당하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환난을 통하여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에 무엇을 믿고 사는 것이 무엇이냐고 바뀌었습니다.

외국까지 가서 땅을 샀습니다. 땅 없는 설움에 있다가 땅을 산 후에 고생합니다. 모든 사건을 통해서 가치관을 배웁니다. 육체도 물질도 건강도 지식도 지혜도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이런 것을 버려야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책을 보고 남의 경험을 보고 얻습니다. 체험적으로 깨닫습니다. 병과 환난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게 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환난입니다.

선교가 가장 잘 되는 곳은 가난과 질병이 있는 곳입니다. 가난과 질병이 없고는 복음이 전해지는 일이 없습니다. 일본선교사 힘든 이유는 일본 사람들이 잘 살기 때문입니다. 북한과 같은 곳은 옥토입니다.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물질로 잘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생명을 부활시키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간구함으로 우리를 도우라)

 

10.11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그 하나님이 과거도 건지고 지금도 건지고 앞으로도 건지실 것입니다. 바울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의 기도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환난이 은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도로 얻은 은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 성도들의 기도로 얻은 은사가 있습니다. 그는 이 모든 환난을 하나님의 은사 선물로 바라봅니다. 이 모든 환난이 은사입니다.

사망선고가 있었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요청합니다. 기도는 방패와 같습니다. 중보기도는 방패와 같은 힘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은사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로 선교사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선교하는 바울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는 성도들의 기도 덕분에 많은 환난을 겪으면서 선교가 가능해졌습니다. 바울을 위해서 기도한 사람은 바울의 선교를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선교일선에 나간 사람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합니다. 기도한 사람은 응답을 받을 때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우리도 중보기도를 해야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강해 1부 위로의 하나님

말씀 고린도후서 11-고린도후서 111

요절 고린도후서 13

고린도후서 1장 강해 1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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