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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연구자료

09 막2장 문제풀이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06-10 00:00:00
조회수 : 736
279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 2:1-17
요절 17절

1.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실 때 모여든 사람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1-2)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갈 때 어떤 장애물이 있었으며 그들은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하였습니까?(3,4)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무엇을 보셨습니까?(5a) 예수님이 보신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자 그들을 피하여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병을 고치기보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심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내었으므로 문 앞에도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주로 병자들이요. 현실적인 필요로 왔을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근본문제인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막16:20)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중풍병자는 스스로 나올 수 없습니다. 중풍병자는 뇌일혈로 생기는 반신 전신 마비입니다. 사람들은 네 사람을 통하여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마18 :19,20) 그들은 무리 때문에 예수님께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자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서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막힌 구멍을 뚫었습니다. 믿음이란 막힌 구멍을 뚫는 것입니다. 창의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나무에 흙을 얹어서 지붕을 만듭니다. 지붕을 뚫을 때 흙이 떨어져 내립니다. 그들은 막힌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6:39) 하나님의 뜻은 한 생명을 어찌하든지 살리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닙니다.(히브리서11장) 믿음이란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장애물을 극복하고자 하면 길이 열립니다. 믿음이란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것입니다. 수평적 사고를 수직적인 사고로 바꾸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독불장군의 역사가 아닌 동역하고 합심하는 역사입니다. 합심이 안되면 더 다칠 수 있습니다. 모든 병자가 나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치료해주실 것을 믿고 중풍병자에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집을 부슨 것을 보았습니다. 기물을 파손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말씀 공부를 방해하고 새치기 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비도덕적인 것을 보았을 수 있습니다. 서기관은 말씀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돈을 얼마나 드렸느냐 소유는 얼마나 되느냐, 무슨 일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율법적인 것을 봅니다. 잘생겼느냐 도덕이냐를 봅니다. 예수님은 지금 병자를 고치는 것을 피하여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병자를 고치기 위해서 말씀 전하는 것을 훼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에 믿음을 보셨습니다.(대하16:9) 하나님은 우리의 겉을 보기보다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이란 소원입니다. 어찌하든지 장애물을 뚫고 나가고자 하는 소원입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보시고 작은 자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보셨습니다. 믿음으로 나오면 사랑하는 자녀로 영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실 것을 믿습니다. 영접하실 것이라는 사랑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중심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느냐를 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9절, 11장1절) 언어가 부족해도 믿음으로 나가면 하십니다. 역대하 16장 9절 전심으로 나갑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것보다 믿음을 배우고자 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칠 것을 믿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런 방법으로 나가도 영접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에서 강한 소원도 생기고 창의성도 생깁니다. 믿음은 강한 소원입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전통이나 관습에 매이지 않고 창조적인 것입니다. 다윗이 똑 같은 상황에서 불레셋과 싸울 때 하나님은 항상 새로운 방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한 방법을 배우려기보다 따마다 성령의 역사에 민감해야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관습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2.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어떤 자로 부르시고 무엇을 선포하셨습니까?(5b) 왜 죄가 중풍병보다 더 심각한 문제일까요? 죄란 무엇이며 어떻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율법 선생들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것을 왜 화를 냈습니까?(6,7) 예수님은 어떻게 죄사함의 권세를 나타내셨으며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8-12)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오는 자들을 사랑스런 아들이라고 영접하여주십니다. 탕자를 영접하는 아버지처럼 영접하십니다. 사람들은 병고침을 기대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을 고치기보다 먼저 죄사함을 선언하였습니다. 죄를 사하셨다는 것은 죄를 제거하였다는 말입니다. 죄는 빚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빚을 탕감하듯이 죄를 제거하십니다. 빚진 자에게 빚의 탕감은 큰 기쁨의 소식이듯이 죄사함을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이는 해방과 자유의 기쁜 소식입니다.

죄가 사람을 진정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중풍병이 나은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중풍병이 걸렸을지라도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고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근본 문제는 죄문제이지 병이 아닙니다. 부자가 되어서 더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학점이 취업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커플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중풍병자도 죄문제 해결되면 행복합니다. 죄를 해결해야 심판을 피하고 천국에 가실 수 있습니다. 속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관계성이 단절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성이 단절될 때 우리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패배적이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정복하고 다스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개척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중풍병이 걸렸을 지라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송명희 시인과 같이 중풍병 속에서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한다면 그 복음은 건강한 사람이 전하는 것보다 더 감동적이 될 수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요. 불순종이요. 교만입니다. 창조주를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입니다. 무기력하게 살고 원망하는 것도 죄입니다. 술먹고 혈기 부리는 사람들이 걸립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그분을 위해서 그분의 뜻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발견하고 회개해야합니다. 자신의 죄를 드러내야 합니다. 죄를 죄로 여깁니다. 도덕적 법적인 것입니다.(시편 32:1-5)

성전에서 대제사장이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이 죄사함을 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죄사함을 줄 수 있는데 예수님이 죄사함을 주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고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사면복권을 자주 사용하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의 대가를 충분히 치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은사 중에 지식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사함의 권세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라 더 어렵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어려운 중풍병자의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죄사함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가지고 계시는 권세입니다. 우리는 이 권세를 양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물질의 축복이나 인생의 성공보다 먼저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네 자리를 들고 걷게 하심으로 죄사함의 권세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것은 누워 있었던 지금까지의 과거를 청산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죄사함을 좀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들 모두가 생생하게 보는 가운데 하나님은 죄사함의 역사를 보여주십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모든 중풍병자가 걷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삶의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죄사함의 역사는 결코 심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죄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죄는 실제적인 구속에서 해방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사함을 받았다는 증거를 보였습니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변화됩니다. 공부도 잘 하고 건강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죄를 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구약에서는 없었던 일입니다. 구약에서는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제사를 드려야했습니다. 그것도 일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면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들으시고 땅에서 전 지구에서 다만 믿음과 말씀으로 죄사함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3. 예수님은 무리를 가르치신 후 지나가시다가 누구를 주목하셨습니까?(13,14a) 레위는 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세관에 앉아 있을까요? 세리는 어떤 점에서 현대인과 유사할까요?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부르셨으며 그의 반응은 어떠합니까?(14b)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어떤 점에서 레위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신 후에 레위가 세관에 혼자 앉은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무리가 나왔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의 제자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는 혼자 있었습니다. 그는 돈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돈을 위해서 동족도 배반하고 하나님도 잊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유익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세금을 내지 말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의 가치관은 자신과 물질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치관이 잘못되었을 때 그는 동족도 잃고 하나님도 잃고 고독과 죽음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고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매에 많은 돈을 걸 때 세리장이 됩니다. 세리장은 세리를 고용합니다. 그들은 동족의 혈세를 거두어서 로마에게 바치고 자신이 착복합니다. 그들은 이기적인 자였습니다. 그들은 사회악이요. 매국노였습니다.

요즘에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입니다. 자본주의 개인주의 시대입니다. 민족이나 사회나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가족까지도 버리는 시대입니다. 이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딤후3장 2절) 이기심에서 고독하고 소외됩니다. 우울증입니다. 독신주의 아기를 낳지 않습니다. 독거 노인도 많습니다. 맞벌이 부부에서 고독할 수 있습니다. 조수미 같은 사람도 고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레위를 예수님의 제자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에게 평생의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네 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즉시 일어나서 따랐습니다 .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절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기적인 삶을 살 때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배웁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또 다른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현실에 없으니 꿈을 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의 소원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레위의 겉을 보시고 판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그의 내면이 곤고해진 것을 보셨습니다. 그의 내면이 절망적인 것을 보셨습니다. 그가 방향을 잘못잡어서 그렇게 된 것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이해하시고 방향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사함을 확신하였습니다. 죄사함은 부정적인 과거와 단절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 12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마태복음의 저자가 될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부르실 때 소망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4. 레위는 새로운 삶을 축하하는 파티를 어떻게 열었으며 이는 이전의 삶과 어떻게 다릅니까?(15)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였습니까?(16)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17)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안에서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는 죄인과 세리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고기를 대접하였습니다. 돈을 버는 데서 쓰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킹제임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서 살다가 이제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고독한 인생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회적인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신만 변화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로 그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변화하게 됩니다. 세관에 앉은 삶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삶이요 고독한 삶이요. 단절된 삶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첫째 이웃이 둘째 내가 셋째가 된 정말 기쁜 인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이 선교회와 같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하는가 포도주를 마시는가 비판했습니다. 세리나 죄인 이방인과는 식사할 수 없었습니다. 나도 죄인이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겉모습만 보았지 회개한 모습은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경계하시지만 회개한 자는 용서하시고 영접하십니다. 회개한 자는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사울의 절뚝발이 아들 므비보셋과 식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하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들과 식사했다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동등하게 대접해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식사하는 날이 옵니다.

의사가 병자를 찾아가듯이 예수님을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오셨습니다. 죄인을 부른다는 것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제자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선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죄인임을 발견해야합니다. 자신의 의에 사로 집한 지들은 죄인을 판단하고 정죄하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회개하여 새 사람되게 하십니다. 성실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검사라면 예수님은 의사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병과 동일하게 보십니다. 병자를 병을 고치면 온전해 지듯이 죄인도 죄사함을 받으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사람의 과거를 보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소망을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이지만 스스로 의인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죄인이라는 것을 회개해야합니다.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고 회개할 때 변화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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