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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느헤미야 10장 강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하는 개혁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4-11-15 00:00:00
조회수 : 4,251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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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0장 강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하는 개혁

느헤미야 101-느헤미야 1039

요절 느헤미야 1029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1. 그 인봉한 자는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하가랴의 아들 방백 느헤미야는 총독 느헤미야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총독 느헤미야가 언약서에 인친 자의 명단 초두에 나오는 것은, 그가 금번과 같은 신앙 운동의 주도자였음을 시사합니다. 방백은 89에서는 총독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사이에는 접속사 와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와 2절 초두의 스라야 사이 부터에는 접속사가 사용되지 않습니다. 결국 이는 본절의 두 사람, 즉 느헤미야와 시드기야가 2-8절의 인물들과 구별된 자들이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 2-8절의 인물들이 제사장 곧 종교 지도자들이었던데 반하여 본절의 두 사람은 정치적 권세를 가졌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여기의 시드기야는 총독 느헤미야의 서기관이었던 사독(13:13)과 동일 인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이름이 모두 의롭다를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됐다는 점도 뒷받침합니다.

여기서부터 8절까지에 나열된 21명의 제사장 명단 중 적어도 열 다섯은 개인 이름이 아닌 가계명(家系名)입니다. 12장에 기록된 1차 귀환자들의 명단에 또다시 여기 기록된 이름들이 나온다는 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줍니다. 그 예로 스라야, 예레미야, 아나랴 등을 들 수 있습니다(12:1-7). 이 같은 점에서 볼 때 당시 종교계의 으뜸가는 지도자였던(8:1,13) 에스라의 이름이 본 명단에서 누락된 사실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그가 속했던 가문의 우두머리가 인을 침으로써 개인적으로 인을 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사장 가문)

 

“2. 스라야, 아사랴, 예레미야,3. 바스훌, 아마랴, 말기야,4. 핫두스, 스바냐, 말룩,5. 하림, 므레못, 오바댜,6. 다니엘, 긴느돈, 바룩,7. 므술람, 아비야, 미야민,8. 마아시야, 빌개, 스마야이니 이는 제사장들이요9. 또 레위 사람 곧 아사냐의 아들 예수아, 헤나닷의 자손 중 빈누이, 갓미엘과10. 그의 형제 스바냐, 호디야, 그리다, 블라야, 하난,11. 미가, 르홉, 하사뱌,12. 삭굴, 세레뱌, 스바냐,13. 호디야, 바니, 브니누요,”

 

스라야는 에스라 22의 스라야입니다(7:712:12:2). 따라서 이것은 느헤미야 당시의 제사장 개인 이름이 아니라 한 가문의 이름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에스라는 바로 이 가문에 속했었습니다(7:1). 아사랴도 제사장 개인 이름이 아닌 가문명으로 봄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도우셨다 입니다. 예레미야는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일어나실 것이다입니다. 바스홀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가계명(家系名)입니다(2:38). 아마랴는 스룹바벨과 같이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이름으로서(12:2),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의 뜻입니다. 말기야는 여호와는 왕이란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핫두스는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제사장 가문으로서(12:2), 대적자 의 의미입니다.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숨기셨다의 의미입니다. 이것 역시 제사장 가문의 가계명입니다(12:14). 말룩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제사장 가문으로서(12:2), 통치하는의 의미입니다. 하림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가계명입니다(2:39). 므레못은 제사장 가문의 가계명인 듯합니다(12:15). 높은 곳들의 뜻입니다. 오바댜는 여호와를 섬김의 의미입니다(12:4). 다니엘은 문맥이 제사장 직분의 가문명을 나열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에스라와 함께 귀환했던 이다말 자손의 제사장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8:2). 하나님의 재판관의 의미입니다. 긴느돈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긴느도이와 동일한 가문인 듯합니다(12:4). 정원사의 뜻입니다. 바룩은 복된이란 뜻입니다. 므술람은 동맹한의 뜻입니다. 아비야는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제사장 가문입니다(12:17). 아버지는 여호와의 뜻입니다. 미야민은 최초로 귀환한 제사장 가족의 하나로서(12:5), 운이 좋은의 의미입니다. 마아시야는 여호와는 피난처이시다 의 뜻입니다. 이것은 12:5의 마아댜의 오기인 듯합니다. 빌개는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이름 빌가(12:5,18)와 동일합니다. 그침의 뜻입니다. 스마야는 제사장 가문의 가문명입니다(12:18). 여호와께서 들으셨다의 뜻입니다.

 

(레위 가문)

 

9절부터 13절까지는 레위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경우와는 달리 가계명(家系名)이 아닌 개인명(個人名)입니다. 이와같이 봐야 할 까닭은, 여기에 나열되는 이름들이 8장과 9장에서 대부분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사냐의 아들 예수아는 9:4의 예수아인 뜻합니다. 헤나닷의 자손 중 빈누이는 9:4의 바니입니다(3:189:4). 헤나닷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레위 사람들의 조상입니다(3:9). 스바냐는 9:4,5에서도 여기처럼 갓미엘과 나란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다는 에스라를 도와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해석하여 깨닫게 해준 사람입니다(8:710:23). 불구가 됨의 의미입니다. 블라야는 에스라를 도와 백성들에게 율법을 깨우쳐 준 사람(8:7)입니다. 여호와께서 구별하셨다의 뜻입니다. 하난 이 사람도 백성들에게 율법을 해석해 주는 이로써 에스라를 도왔습니다(8:7). 은총이란 뜻입니다. 미가는 여기서만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의 뜻입니다. 르홉은 넓이의 뜻입니다. 하사뱌 -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인물입니다(8:19). 여호와께서 생각하셨다의 뜻입니다. 삭굴은 염두에 두는의 의미입니다. 세레뱌는 에스라와 함께 귀환하였고, 그를 도와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깨우쳐 준 인물입니다(8:78:18).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숨기셨다의 뜻입니다. 호디야는- 9:5의 호디야나 에스라를 도와서 율법을 깨닫게 한 사람(8:7)중 하나일 것입니다. 바니는 에스라를 도와서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친 사람들과도 동일인일 것입니다(8:7) 브니누는 오직 여기서만 나오는 이름으로서 우리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일반백성들의 가문)

 

“14. 또 백성의 우두머리들 곧 바로스, 바핫모압, 엘람, 삿두, 바니,15. 분니, 아스갓, 베배,16. 아도니야, 비그왜, 아딘,17. 아델, 히스기야, 앗술, 18. 호디야, 하숨, 베새,19. 하립, 아나돗, 노배,”

 

여기서부터 27절까지에서는 일반 백성들의 가문명(家門名)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14-19절의 이름들이 대부분 에스라 2장의 귀환 가족의 이름과 중복된다는 점은 그 사실을 능히 증명할만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니는 포로에서 돌아온 후 새로 생긴 가문일 것입니다. 베배는 에스라 2:11의 브배와 동일합니다. 아도니야는 새로 생긴 가문으로 짐작됩니다. 여호와는 주님이시다의 뜻입니다. 히스기야 아델 자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새로운 가문인 듯합니다(7:21). 여호와로 인해 강해짐의 뜻입니다. 앗술은 새로운 형성된 가문일 것입니다. 도움이 되는의 의미입니다. 히스기야는 아델 자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새로운 가문인 듯합니다(7:21). 여호와로 인해 강해짐의 뜻입니다. 앗술은 새로운 형성된 가문일 것입니다. 도움이 되는의 의미입니다. 호디야 - 새로 생긴 가문인 듯합니다. 하립은 새로 생긴 가문입니다. 아나돗 자손은 자신들의 보계를 입증치 못하여 그 조상이 살던 지방을 확인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정되었습니다(2:23). 아마 그들은 그 지명을 자신들의 가문명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노배는은 느보를 가리킬 것입니다(2:29). 그렇다면 이것도 지명이 가계명으로 된 경우 중의 하나입니다.

 

(새로운 가문들)

 

“20. 막비아스, 므술람, 헤실,21. 므세사벨, 사독, 얏두아,22. 블라댜, 하난, 아나야,23. 호세아, 하나냐, 핫숩,24. 할르헤스, 빌하, 소벡,25. 르훔, 하삽나, 마아세야,26. 아히야, 하난, 아난,27. 말룩, 하림, 바아나이니라14. 또 백성의 우두머리들 곧 바로스, 바핫모압, 엘람, 삿두, 바니,”

 

20-27절의 가계명(家系名)은 느헤미야 3장의 성벽 재건자들의 명단에 일부가 언급될 뿐 최초 귀환 가족의 명단 중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 낯선 이름들을 세월이 흐르면서 백성들의 인구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인구가 많은 가문이 나뉘어져 여러 개의 가문으로 되었습니다. 또한 지명으로 자신의 가계를 표시했던 무리들이 인명으로 그것을 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당시는 첫 번째 포로 귀환이 있은 후 약 100년이 경과되었던 때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막비아스는 새로 형성된 가문임이 분명합니다. 멸종자의 뜻입니다. 므술람은 동맹한의 뜻입니다. 헤실은 보호된의 뜻입니다. 므세사벨은 하나님께 구출된의 뜻입니다. 사독은 의로움의 뜻입니다. 앗두아는 알고 있는의 뜻입니다. 블라댜는 여호와께서 원하셨다의 뜻입니다. 하난은 은총의 뜻입니다. 아나야는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의 뜻입니다. 호세아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셨다의 뜻입니다.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은총을 베푸셨다의 뜻입니다. 핫숩은 명철한의 뜻입니다. 할르헤스는 복술자의 뜻입니다. 빌하는 겁이 많은의 뜻입니다. 소벡은 떠남의 의미입니다. 르훔은 인정 많은의 뜻입니다. 하삽나는 여호와께서 나를 생각하셨다의 뜻입니다. 마아세나는 여호와의 일의 의미입니다. 아히야는 여호와의 형제의 뜻입니다. 하난은 은총의 뜻입니다. 아난은 구름의 뜻입니다. 말룩은 통치하는의 뜻입니다. 하림은 5절의 하림과는 동명 이인임이 분명합니다. 바아나는 고통 가운데의라는 뜻입니다.

 

(서명하지 않은 사람들)

 

“28.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 29.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이 밖에 나머지 백성, 곧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성전 문지기와 노래하는 사람과 성전 막일꾼과 주의 율법을 따르려고 그 땅의 여러 백성과 인연을 끊은 모든 이들과 그 아내들과 그들의 아들딸들과 알아들을 만한 지식이 있는 이들 모두가 맹세하였습니다.

28절 이하에서는 언약 문서에 인친 백성들이 맹세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그 언약에 대한 철저한 준수를 다짐하는 내용이 전개됩니다. 그 남은 백성은 직접 서명을 하지 않은 서민들을 가리킵니다. 직접 서명을 한 사람은 한 가문의 대표적 지도자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자신들이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대표가 서명했기 때문에 마치 본인이 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본장의 1-17절에서 인을 친 것은 각 가문의 대표였다는 점에 근거하여, 여기의 그 남은이라는 말은 다음의 제사장 등을 모두 수식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도 레위 지파 사람들로 크게는 레위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협의적으로 이들은 성전 제사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사역을 수행했던 레위 사람과는 구별됐었습니다(2:40-42). 어떻든 레위 사람이 이들을 대표하여(9-13) 언약서에 서명을 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느디님 사람들은 혈통적으로 볼 때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었으나 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2:43), 레위 사람을 도와 성전 봉사의 직무를 수행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레위 사람들이 이들을 대표하여 언약서에 인을 쳤을 것입니다.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는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를 구성하던 또 다른 계층이었습니다. 이들은 원래는 이방인이었으나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에 가입한(6:21) 무리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본처(本處)를 떠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로 이주(移住)한 후, 할례를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원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17:12,13). 무릇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는 8:2,3의 표현을 빌면 알아들을 만한 회중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언약 및 언약서에 인을 치는 것이 무엇인지릍 이해하는 정상적인 지각을 지닌 사람을 말한 것이지 특별한 지식의 소유자들을 말함이 아닙니다. 그들은 귀족 형제들과 함께, 하나님의 종 모세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로 하고, 우리 주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에 복종하기로 하였으며, 그것을 어기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습니다.

그 형제 귀인들은 언약 문서에 인을 친 족장 및 그 밖의 지도자들을 뜻합니다. 따라는 원래 견고하게 하다 혹은 붙잡다(41:13)의 뜻이지만, 여기서처럼 사역형으로 사용될 경우 마치 남자가 여성을 강간하려고 달려들듯이 굳게 붙잡는 행위를 가리킵니다(7:13). 그렇다면 이 단어는 결국 나머지 백성들이 지도자들의 인을 친 행위 혹은 그 근본적인 뜻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것을 의미합니다. 저주로 맹세하기를, 언약이나 조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 지키지 않은 당사자 자신에게 저주가 내려져도 달게 받겠다는 공언(公言)과 함께 이루어지는 언약 방식입니다(5:21).

 

(결혼에 대한 약속)

 

“30.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그들은 우리는 딸을 이 땅의 백성과 결혼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아들을 그들의 딸과 결혼시키지 않는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이방인과의 통혼(通婚)과 관련된 에스라의 개혁 조치(9,10)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그 같은 악습이 완전히 근절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에스라의 개혁으로 통혼의 문제는 얼마 동안 거의 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에스라가 페르시아 궁전으로 소환되어 오랜 기간 그곳에 있었고(8:1), 느헤미야도 에스라가 다시 돌아오기 직전에 온터라, 이방인과의 통혼 악습은 되살아났음이 분명합니다.(13:23).

 

(안식일과 안식년에 대한 다짐)

 

“31.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품이나 온갖 곡물을 가져다가 팔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않겠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이 땅의 백성이 안식일에 물건이나 어떤 곡식을 내다가 팔더라도, 안식일에나 성일에는, 우리가 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본절은 백성들이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킬 것을 다짐하는 내용입니다.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팔려 한다는 사실은 본서 13:16에서 발견됩니다. 당시에 이 같은 일은 비일 비재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여러가지 산출물이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그 부족을 어차피 이방 사람들과의 교역을 통해서 채워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방인 상인들이 예루살렘까지 출입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안식일에까지 상행위를 하였습니다. 안식일이나 성일은 차라리 안식일 곧 성일로 봄이 적절합니다. , 본문은 동일한 뜻의 말을 반복함으로써 안식일의 귀중한 의의와 안식일 준수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20:8-115:12-15).

일곱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육 년이 지난 빚은 모두 탕감하여 준다고 하였습니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땅을 경작치 말고 놀려야만 한다는 율법 규정과 관련이 있습니다(23:10,1125:2-7). 이러한 안식년 규례는 안식일 규례보다 더욱 안 지켜졌던 것 같습니다. 안식년에는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독촉치 말고 1년 연기해 주어야 한다는 율법 규정과 관련됩니다(15:1-3). 그러나 본 문구는 1년 연기가 아닌 완전한 면제를 뜻합니다. 이처럼 백성들이 율법에서 요구하는 그 이상의 선행을 결심한 까닭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가난한 자들의 부채 문제로 인하여 심각한 홍역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5:1-13).

사실 그 문제는 진작 해결되어져야만 했었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에스라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대각성 운동으로 백성들이 새로워지기를 원하면서 골치거리로 남아있던 그 문제의 해결을 자원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이러한 자발적 결단은 일회적인 것으로 이해됨이 무난하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매 안식년마다 빚이 완전히 탕감되어 진다면, 백성들은 빚을 주지도 않을 것이고, 반드시 꾸어쓸 필요가 있는 사람은 그로 인하여 심각한 어려움을 받을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전세에 대한 결단)

 

“32.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33. 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규례도 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비용으로 쓰도록, 우리는 해마다 삼분의 일 세겔씩 바친다고 하였습니다. 본절과 같은 결정은 그 당시의 독특한 상황에 따른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독립 국가로 있을 때는 막대한 왕의 수입(收入)중 일부가 성전 재정을 위해 보태졌었으나, 페르시아의 피정복 상태 하에 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재정난으로 성전의 효과적 운영이 심히 어려웠습니다.

30:11-16에는 이십 세 이상된 모든 백성들이 생명의 속전으로서 반 세겔씩 바쳤고 이 돈은 성막 건물을 제작하는 비용으로 쓰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구 조사가 있었을 때에 특별한 목적으로 드려지는 것이어서 정기적인 성전세의 개념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아마 후대에 가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성전세 명목으로 일정한 액수가 납세되었던 것 같으며, 예수님 당시의 성전세는 매년 반 세겔이었습니다(17:24). 고레스, 다리오 및 아닥사스다등의 조서에는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위해 공적 기금이 사용되도록 허락되었지만(6:8-10), 그러한 기금은 언제 중단될지 몰랐고 더욱이 성전운영이 이방의 재원(財源)에 의존된다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비록 백성들의 생활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성전세를 삼분 일 세겔씩 납부키로 자원하여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삼분의 일 세겔은, 늘 차려 놓는 빵과 규칙적으로 드리는 곡식제물과 규칙적으로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이나 초하루나 그 밖에 절기 때에 드리는 제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는 속죄물과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는 모든 일에 쓸 것입니다.

본절은 성전세가 거두어져서 구체적으로 어디에 쓰여질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개인이 자신의 제물을 가져와서 드리는 제사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는 성전 자체에서 제물을 조달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진설병은 성소의 떡상 위에 두 줄로 여섯 개씩 그래서 모두 열 두개가 놓여졌던 떡이었습니다(24:6). 안식일마다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야 했고(24:8). 물려낸 것은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24:9). 이것은 크기가 작아 만드는 비용이 얼마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이라는 그 중요성 때문에, 성전세 용도(用途)의 첫부분에 나옵니다.

항상 드리는 소제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함께 성전에서 매일 드렸던 제사입니다. 2.2의 밀가루에 약 0.9의 기름을 섞어서 만든 떡이 그 제물이었습니다(28:3).

항상 드리는 번제는 아침과 저녁 하루 2회씩 드려졌던 희생 제사입니다. 흠없는 어린 수양이 그 제물이었습니다(28:3). 안식일에는 평일에 드려지던 상번제와는 달리 일 년된 어린 수양 두 마리가 소제와 함께 제물로 드려졌었습니다(28:9).

그리고 초하루, 즉 월삭(28:11)에는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수양 한마리 그리고 어린 수양 일곱 마리가 소제와 함께 제물로 드려졌었습니다(28:11-14). 여기에 포도주를 제물로 한 전제(奠祭)도 드려져야 했습니다(28:14). 정한 절기는 3대 절기인 유월절(28:16-25), 맥추절(28:26-31), 초막절(29:7-11)등을 가리킵니다. 이때는 엄청난 양의 제물이 바쳐져야 했었습니다. 성물은 속건제의 제물을 의미하는 듯합니다(6:17).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는 개인적 죄의 용서를 위한 속죄제(4:27-31)가 아닌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입니다(4:13-21).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은 성전의 유지를 위한 수선(修繕)작업과 성전에서 사용되는 기구 및 비품을 충당.보존하는 일 모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무 조달에 대한 다짐)

 

“34. 또 우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시기에 나무를 우리 하나님의 전에 바쳐 율법에 기록한 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에 사르게 하였고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나 일반 백성을 가리지 않고, 우리가 집안별로 주사위를 던져서, 해마다 정한 때에,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 땔 나무를 바칠 순서를 정합니다. 그것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주 하나님의 제단에서 불사를 때에 쓸 나무입니다. 본절의 새로운 규정은, 희생 제사때에 사용되는 많은 양의 화목(火木)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제정되었습니다. 레위기에도 이와 유사한 규정이 언급되기는 합니다(6:12). 그러나 거기서는 화목의 조달을 위해 각 종족에게 물량을 할당하는 것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세 시대에 들어와서는 황폐해진 연고로 화목(火木)의 확보가 곤란해서 본절과 같은 특별한 규정을 제정하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포로 후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채집한 나무를 성전에 드린 날(13:31)이 압월, 즉 종교력으로는 5, 민간력으로는 11, 양력으로는 7-8월의 14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들에게 거의 축제일처럼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율법에 기록한대로...단에 사르게 한다는 율법은 상번제를 드리기 위한 제단의 불을 항상 피워야 한다는 레 6:12의 내용입니다. 이 단은 사방 6m의 넓이였으니 여기에 불이 계속 타도록 하는데 소용되는 나무의 양은 실로 엄청났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 단에 항상 불이 타오르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향한 백성들의 헌신과 충성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3:13,14).

 

(첫열매에 대한 다짐)

 

“35.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36. 또 우리의 맏아들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주고

 

해마다 이스라엘 사람들 밭에서 나는 맏물과 온갖 과일나무의 첫 열매를 주의 성전에 바칩니다. 본절과 같은 명령은 모세 율법에 명시된 것입니다(34:2619:2426:2).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특별히 강조되어야 했던 이유는, 별다른 기업없이 다만 성전에서 나오는 것으로만 살아야 했던 레위 사람들의 생활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산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정신을 갖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음도 분명합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맏아들과 가축의 첫 새끼, 곧 처음 난 송아지와 새끼 양을 우리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지고 가서, 그 성전에서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바칩니다. 생축(牲畜)의 처음 난 것...하나님의 전으로 가져간 것은 백성들의 맏아들이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던 것과 동일합니다(34:19).

이같이 사람을 포함한 모든 초태생(初胎生)이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던 것은 만물의 창조주가 하나님이심을 기억케 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장자를 대속하게 했던 것은 백성 전체가 몸과 마음을 거룩히 하여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며 헌신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이렇듯 장자를 하나님께 돌리게 된 기원은 출애굽 직전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초태생은 죽이지 않으셨던 데서 유래합니다(13:13-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는 속전(贖錢)을 대신 지불함으로써 그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는 셈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짐승의 초태생은 대속이 안 되었고, 이에 따라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만 했습니다(13:15).

 

(십일조에 대한 다짐)

 

“37.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38.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두되39.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또 이스라엘 사람들은 들어 바칠 예물인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온갖 과일나무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제사장의 몫으로 우리 하나님의 성전 창고에 넣기로 하고, 또 밭에서 나는 소출 가운데서 열의 하나는 레위 사람들의 몫으로 가져 오기로 하였습니다. 농사를 짓는 성읍으로 돌아다니면서 열의 하나를 거두어들일 사람은 바로 레위 사람입니다.

6절까지가 성전에서의 희생 제사를 위하여 바쳐진 것들인 반면, 본절의 것은 제사장의 생활을 위하여 바쳐진 예물들이었습니다. 처음 익은 밀의 가루의 처음은 순서상의 처음 혹은 질적으로서의 으뜸 등의 뜻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가장 좋은 가루 떡으로 이해했습니다(15:18-21). 거제물(擧祭物)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제물 중 제사장 몫을 의미하는 듯합니다(39절 레 7:32).

하나님의 전 골방은 성전 건물 안에 있던 부속실(附屬室)이었습니다(13:4,5). 물산의 십일조는 다른 지파들처럼 자신들의 기업을 갖고 있지 않았던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지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18:21).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의 몫으로 주어야 했습니다(18:26).

여기서 이처럼 십일조가 강조되고 있는 것은, 당시 별다른 기업이 없어서 오직 십일조만으로 생활을 해야 했던 레위 사람의 많은 수가 십일조가 걷히지 않음으로써 큰 어려움에 봉착한 나머지 성전을 떠나버렸던 그 당시 상황 때문이었습니다(3913:10). 말라기에서도 바로 이같은 강조가 나타나고 있는데(3:6-15). 이러한 사태는 거의 동시대 사람인 느헤미야와 말라기 모두에게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 사람이 열의 하나를 거두어들일 때에는,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 한 사람이 같이 다니기로 하였습니다. 제사장이 함께 다닌 것은 세금 징수자에게 감독자를 붙였던 페르시아의 방식과 유사합니다. 느헤미야는 이같이 함으로써 그 십일조 중의 제사장 몫이 확실히 파악될 수 있도록 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제사장과 레위 사람간의 십일조 분배 문제로 인한 오해 및 갈등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같은 느헤미야의 조치는 레위 사람을 의심한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레위 사람은 거두어들인 열의 하나에서 다시 열의 하나를 떼어서, 우리 하나님의 성전 창고의 여러 방에 두기로 하였습니다. 십일조의 십분 일은 제사자의 몫입니다(18:26).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은 들어 바칠 예물인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그 여러 방에 가져다 놓기로 하였습니다. 그런 방은 성전 기구를 두기도 하고, 당번 제사장들과 성전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이 쓰기도 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아무렇게나 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언급되는 물품(物品)들은 37,38절의 것들입니다. 레위인들은 그들에게 할당된 성읍에서 십일조를 거둠으로써 자신의 수입을 확보하였으나, 제사장들은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가져오는 것을 직접 받았습니다. 따라서 제사장들은 성전 봉사에만 더욱 정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는 문자적으로는 우리가...하나님의 전을 거절하지 아니하리라의 뜻입니다. 아무튼 본 문구는 그 당시 레위 사람들의 성전 봉사로부터의 이탈 현상이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37절 주석 참조).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회개 기도를 인도했고(9:5-38). 또한 언약서에 인치는 일을 주도했던(9:4,5)을 가리킵니다.

느헤미야 10장 강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하는 개혁

느헤미야 101-39

요절 느헤미야 1029.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느헤미야 10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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