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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전도서 1장 강해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도다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05-21 00:00:00
조회수 : 3,088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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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장 강해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1-전도서 118

요절 전도서 1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코메디언 이주일 씨는 인생은 코메디가 아니라는 말을 썼습니다. 남을 흉내 냈을 때 사람들은 웃지 않았고, 자신의 모습으로 웃겼을 때 사람들이 웃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코메디언의 인생도 쉽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십분을 웃기기 위해서 이십년 동안 밤을 세우며 노력하였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냐? 하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인생의 한 부분을 아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시태크나 재태크 잘하는 것을 연구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가르치는 전문가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고 믿었습니다. 잠언과 전도서가 그것을 가르칩니다. 잠언은 젊은이들에게 주는 말씀이 많지만 전도서는 인생을 전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인생을 바로 사는 것을 가르칩니다. 전도서의 별명은 지혜로운 생태크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해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에게서 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솔모몬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지 못하지만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게 살 수는 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찬란했던 때는 죽을 때였습니다. 그는 인생의 처절한 실패를 맛보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전도서를 썼습니다. 우리가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살면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마지막 말씀을 나의 지혜로 살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우리의 인생은 복되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는 하나님이 없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 솔로몬)

 

1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솔로몬이 쓴 글입니다. 그는 자신을 전도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솔로몬의 이름을 뺐습니다. 그는 이름값을 못한 사람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평화라는 이름입니다. 그는 말년이 되어서야 이름처럼 하나님과 사람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주고자 합니다. 당시에 재왕은 다른 나라와 혼인관계를 맺는 정략결혼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는 처가 700명이요 첩이 300명이었습니다. 고려 왕건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쟁을 막는 길입니다. 그때 다른 나라의 왕족이나 귀족의 여인을 데려옵니다. 그들은 애국심이 있고 신에 대한 충성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신도 좋고 외모도 빼어나고 자신의 종교에 충실합니다. 그들은 갈수록 문제가 많습니다. 밤에는 신하들이 다 집에 가자 궁중에 남은 여인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내게 돌리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들이 십년 이십년 삼십년 기도합니다. 어둠의 영이 궁궐에 덮힙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솔로몬은 믿음과 지혜가 식어집니다. 그래서 여인들에게 그들의 신을 궁중에 섬기도록 허락하고 자신도 분향합니다. 죄의 유혹에 빠져 방탕해집니다. 국가 권력은 쇠퇴하고 나라가 분열됩니다. 솔로몬은 늙어갑니다. 권력도 다 사라집니다. 그는 후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뺍니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는 세 이름을 선택합니다.

첫째, 그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는 세월이 지나니 아버지 다윗보다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준 땅도 유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다윗의 부끄러운 아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둘째,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이나 이제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합니다. 조공을 바치던 나라들이 떨어져나갑니다. 그의 통치 범위가 축소되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남유다만 남았습니다.

셋째 그는 전도자라고 합니다. 전도자는 설교하는 사람이 지혜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세계 제일의 부자였습니다. 금이 많아 돌덩이 같았습니다. 그는 최고의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토목공사만 이십년을 하였습니다. 그의 사적인 상선배가 있습니다. 최고의 향락과 사치를 누렸습니다. 좋은 음식은 다 먹고 호사를 누렸습니다. 그는 학자요. 저술가였습니다. 그는 연구하고 책을 쓰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풍성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인생의 모든 면을 다 경험합니다. 그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타락한 후에 어떤 말년을 지냈는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전도서입니다. 그의 명예와 호사가 헛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이 안타깝습니다. 그는 가장 지혜롭지만 어리석게 살았습니다. 그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누구도 나와 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남깁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하여 인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는 지혜와 경험을 동원하여 인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의 뼈아픈 인생 경험을 간증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도록 전도의 목적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2절을 보십시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자는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전도서의 주제를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반복하면 최상급입니다. 그는 하나하나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헛되다는 형용사를 다섯 번 써서 강조합니다. 인생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아주 헛되다는 말입니다. 현대어로는 무의미 허무 공허하다는 말입니다. 출세한 사람도 허무합니다. 돈벌어도 허무합니다. 내가 뭐하다가 이 나이 먹었지 하는 말입니다. 뭔가 허전하다는 말입니다. 인생무상을 외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온실효과라고 합니다. 비닐하우스 안은 따뜻합니다. 처음에는 좋습니다. 꽃과 나무가 자랍니다. 그러나 오래 있으면 답답합니다. 신선한 태양과 공기가 없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온실 밖의 대기를 호흡해야합니다.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은 온실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답답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무엇인가 답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짜릿한 자극을 추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반대로 모든 것을 버리는 무욕과 무소유를 지향하는 고행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답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공허가 일어납니다.

이 허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공허는 긍정입니다. 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는 자극제입니다. 이것이 있어서 온실 밖을 봅니다. 그곳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자연광이 비취고 있습니다. 보람과 의미를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공허는 하나님께로 가는 시작이며 선물입니다. 순간순간 공허함이 밀려오면 이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로 가는 싸인이라고 합니다.

한 교수님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고 합니다. 이제 정년 퇴직을 합니다. 이제 헛된 것을 느낍니다. 제자도, 학문도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울었습니다. 가치 있는 것을 하자 사람을 키우자 나누어주자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없음을 진실로 깨달을 때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일본은 없다.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 하나코는 없다. 인간은 별에 갈 수 없다. 어디에도 설 땅은 없다. 사랑은 없다 라는 책이 잘 팔렸습니다. 없다는 말이 사람들에게 와 닿습니다. 없다는 말이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줍니다. 첫째는 나는 있다고 믿었었는데 나이를 먹고 시간이 흐르니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허구의 껍질을 깨뜨리는 쾌감을 주고 진실 앞에 서게 합니다. 셋째는 진정한 가치를 찾게 합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다는 말은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에서 실망감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없다는 말 앞에서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있는 것을 향하여 도전합니다. 솔로몬을 통해서 인생의 정확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폭넓게 경험하고 인생은 헛되다고 합니다. 해아래 살기 때문에 헛됩니다. 수직성이 없는 수평성 속에는 의미와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삶 속에는 허무합니다. 솔로몬은 이런 경험을 내리기 전에 인생을 탐구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왜 인생이 헛된가를 말합니다.

 

(해 아래 무엇이 유익한가)

 

3절을 보십시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이유를 말합니다. 해 아래서는 하나님 없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아무리 수고해도 텅빈 것입니다. 나름대로 가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긍극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전도서는 해아래서 삶을 보여주면서 허무함을 가르쳐줍니다. 해아래서 우리가 아무리 수고해도 그것은 죽음과 함께 사라집니다. 우리는 공부하고 돈을 법니다. 세상의 권력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고가 죽음 앞에서 아무 유익이 없고 헛될 뿐입니다. 명예도 허무합니다. 모든 것은 우연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돌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솔로몬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말하여 기존가치를 부정합니다. 염세주의자나 금욕주의자나 쾌락주의자가 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고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욕망이 부질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은 헛될뿐 아니라 죄를 낳고 사망을 낳습니다. 많은 고통을 안겨줍니다. 솔로몬은 평화의 나라, 부국강병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을 때 많은 처첩을 얻었고 결국은 파멸의 길을 걸었습니다. 나도 과거 욕심이 있었을 때 쓰디쓴 사망을 맛보았습니다. 우리의 오욕칠정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욕심은 거머리와 같아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을 알고 손에서 놓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욕심을 버릴 때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을 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도 욕심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순수하게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심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된 것을 깨닫고 해 위의 세계를 보아야합니다. 새로운 가치를 새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성을 깨닫고 의미를 부여 받아야합니다. 이것이 해 위에서의 삶입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하나하나 섭리합니다. 우리는 해 위의 하나님으로부터 의미와 목적과 소망을 갖고 살아가면 의미가 있습니다. 그 위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구름이 끼고 비가 억수같이 오는데 비행기가 하늘에 뜹니다. 구름 위를 올라가니 찬란한 태양이 빛납니다. 그는 땅위의 사람들은 이것을 아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는 땅에 와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여기는 비가 오는데 하늘에는 태양이 빛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올라가지 않은 사람은 그 말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해 위의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이것을 모릅니다. 솔로몬은 해 위의 삶을 인생의 말년에 알았습니다. 젊고 힘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다 잃고 노년에 깨달았습니다. 힘 있을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비껴 있었습니다. 다 잃고 빼앗긴 다음에 깨달으므로 찌꺼기 외에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탄식합니다. 그는 이런 시행착오와 같은 삶을 살지 말라고 전도서를 썼습니다.

요즘도 해 아래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다 잃고 탄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생의 끝에 가슴을 치지만 때는 늦은 것입니다. 양다니엘 다니엘라 선교사님은 해 아래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7년이 지났지만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언어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체류문제 자립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다니엘라 선교사님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지만 외국인이라 써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외국인 채용법이 바뀌었습니다.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니 그것은 유럽 국적이 있는 외국인만 채용하는 법이었습니다. 다나엘 다니엘라 선교사님은 절망하였습니다. 다니엘 선교사님 가정은 선교사로 살고자 하는 소망도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선교사로 살지만 선진국에서 살고자하는 욕심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선교사도 선진국으로 가기를 원하지 후진국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해 아래의 삶을 통해서 이런 욕망을 다 제거하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뜻밖에도 다니엘 선교사님이 대사관에 운전기사로 채용하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삼 개월의 수습기간을 거쳐서 정식직원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해 위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해 위에서 새로운 섭리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들에게 찬란한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모두가 제 자리로 돌아간다)

 

4-7절을 보십시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오직 땅은 영원히 그대로 있습니다. 하루마다 해는 뜨고 지는 것을 반복합니다. 해는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갑니다. 지구는 수천년 동안 반복하여 자전을 하고 공전을 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다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북으로 돌아갑니다. 바람은 이리 돌며 저리 돌아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지만 바다를 채우지 못합니다. 강물은 어디로 흐르든지 결국은 다 채우지도 못하는 바다를 향하여 흐릅니다. 바닷물은 다시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일을 반복합니다.

솔로몬은 모든 것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잘못된 나라 잘못된 풍습을 바꾸고자 합니다. 그는 새롭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바꾸기는 커녕 자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어느새 자신은 늙었습니다. 그는 탄식합니다. 제임스 디멜로이는 나는 젊을 때 세상을 바꾸기 원했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알았다. 중년에 가족을 바꾸고자 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나를 바꾸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가족을, 나라를 바꿀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바꾼 만큼만 바뀝니다. 내가 계혁 대상 일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바뀔 수 있습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

 

8절을 보십시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똑같은 일, 무의미한 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모든 만물은 반복적인 일을 거듭하므로 다 피곤합니다. 우리는 말로 만물이 열심히 노동하는 것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만사가 귀찮습니다. 만물이 피곤한 것이 아니라 만물을 보는 사람이 피곤한 것입니다. 진실한 문제를 갖고 고민해도 해답이 없자 피곤해졌습니다. 반복적인 일을 하니 피곤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무의미한 일을 하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왜 우리 속에 만물의 피곤함이 있을까요? 사람이 왜 허무해집니까? 사람이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실수도 하고 죄도 많이 짓지만 사람들을 가치있게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가치 있는 존재이므로 무가치한 것에 삶을 던지면 허무해집니다.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허무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우리는 의미를 알 때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성당을 지어도 돈을 벌기 위해서 집을 짓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집을 진다는 생각에 집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화장실 청소를 하여도 내가 왜 이짓을 하나 할 수도 있고 주의 전의 화장실 청소에 쓰임받는다는 감격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를 들어도 귀에 차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족을 못하는 내면에는 하나님이 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은 해 아래 있는 것들로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내면을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십니다.

솔로몬은 최고의 부와 명예와 사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가 해 위에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진정한 만족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다섯 남자로 만족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으로 만족하였습니다. 우리는 적덩하게 세상 것으로 만족하며 살 것이냐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살 것이냐를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안에서 참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전도서는 인생의 예습서입니다. 이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여기서 시작해야합니다. 없다는 것을 알고 탐욕을 버리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영원한 것에 투자해야합니다. 많은 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새것은 없습니다. 내 이름을 영원히 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변한 만큼만 변하고 새로워질 것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9,10절 보십시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가리켜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말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으나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솔로몬이 입은 옷은 유명합니다.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이미 있었던 것이 후에도 반복하여 있습니다. 물론 자동차 스마트폰 비행기 새로운 옷등이 계속하여 나옵니다. 그러나 그 본질적인 것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하게 됩니다. 역사를 보면 수많은 흥망성쇠가 반복됩니다. 우리가 새겻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게도 이미 있었습니다.

새로운 것이 무엇입니까? 유행을 따라가고 최첨단을 따라갔습니다. 유행은 별 것아닙니다. 옷이 넓어졌다가 가늘어졌다 합니다. 스커트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합니다. 화장이 진했다 엷어졌다가 합니다.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사람이 다 생각한 것입니다. 화이트해드는 현대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고민을 하는데 옛날에 했던 고민입니다. 요즘 애들 버릇이 없다고 하지만 오천년 전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헬라사람들은 새것은 없고 모방만 있다가 고하였습니다. 나의 고민은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고민했던 것입니다. 이것만 인정해도 편합니다.

기독교 교리사에 보면 요즘의 이단들이 이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였으나 새것이 없습니다. 사람을 바꾸어도 새겻은 없습니다. 환경을 바꾸어는 것도 새롭지 않습니다. 새로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피조물이 됩니다.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인도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복음과 중생과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입니다. 찰스다윈은 진화론자입니다. 그는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을 발표합니다. 많은 사람은 그 학설에 집중합니다. 그는 원숭이와 사람 사이에 연결고리를 찾습니다. 그래서 원시섬들을 찾아다닙니다. 남양 군도에서 원주민을 보니까 짐승과 다름없습니다. 이들이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고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에 그 섬을 발견하니 그 사람들이 교회를 짓고 문명화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고백하였습니다. 존배이턴이 생명을 다해 복음을 전해서 그렇게 변화되었습니다. 다윈은 충격을 받고 런던 선교협회에 재산을 다 기탁합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새로워집니다. 사람들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

 

11절을 보십시오.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영원히 남는 것은 무엇입니다. 이름을 남기고 비석을 세웁니다. 책을 씁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억할 것을 하고 싶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늙어서보니 아무도 진심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칭송할 것 같은 사람도 욕합니다. 인간도 사라집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사람들은 이전 세대들의 일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이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 자신이 결국은 다 잊혀지게 될 것입니다. 이땅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하는 일이 헛됩니다. 영원한 것을 찾아 투자해야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는 영원한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과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영원합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말씀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을 복음이 전하는 곳마다 영원히 기념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만세에 나는 복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까지 그 이름이 영원히 있습니다.

 

(해 아래 지혜도 헛것이다)

 

12-13절을 보십시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솔로몬이 연구한 결과는 그는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셔서 수고하게 하신 것이 다 괴로운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로병사가 다 괴로운 것입니다. 인간은 백팔번뇌를 갖고 살아갑니다. 폐르사의 미제르 왕은 지혜로웠습니다. 그는 세상의 지식을 다 알고 싶었습니다. 그는 신하들에게 인생에 대해서 정리한 6000권의 책을 가져왔습니다. 왕은 이 책의 양을 줄여보라고 하였습니다. 500권으로 압축하였습니다. 왕은 이번에도 호통을 쳤습니다. 다시 숫자를 줄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권으로 책을 요약하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병들고 늙어서 읽을 수 없었습니다. 왕은 한 마디로 말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신하들은 인생들은 자기가 만들지 않은 세상에서 태어나서 수고하다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왕도 그 말대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인생의 지식이 수없이 많아도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나는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무엇이 이 땅에서 새로운 것인가?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 찾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내가 변하는 만큼 변하고 새롭고 영원한 것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는 지식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솔로몬은 진리를 추구하기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지혜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하여 살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폈습니다. 그는 최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끝까지 탐구하였습니다. 한 가지 입장만 알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수평적인 넓이를 갖고 연구하였습니다. 그 후에 많은 지혜자를 만났습니다. 그의 지혜로 내린 결론은 인생은 괴롭다는 것입니다.

 

(해 아래 일은 바람을 잡는 것이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솔로몬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바람을 집으려는 것과 같이 잡으면 사라지는 헛된 것입니다. 바람을 잡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데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진리와 법칙이 있는데 내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결론은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죽도록 공부한 것이 왜 허무할까요?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므로 논리 구조를 필요로 합니다. 연관관계를 살핍니다. 모든 것을 연구하다보면 왜? 누구?라는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학문이 답을 내지 못합니다.

개미를 연구하면 많은 사회성이 있습니다. 그 현상을 설명합니다. 이런 법칙이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러나 더 나가서 왜 존재하는가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것이 있게 했는가? 물으면 답이 없습니다. 천문학이 많이 발달하였습니다. 이미 밝혀진 내용이 많습니다. 그 내용을 가지고 현상을 설명합니다. 아주 작은 점이 대폭발하면서 우주는 팽창했다고 합니다. 150억년이 자나면서 현재의 우주가 되었고 아직도 우주는 팽창했다고 설명합니다. 왜 우주는 한 점이었는가 왜 폭발했는가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가 대답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연결하려면 하나의 끈이 필요합니다. 보편자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니 사람들은 논리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개별자가 됩니다. 끈이 없어서 각각은 흩어집니다. 그 끈을 연결시킬 보편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피카소는 사람 얼굴을 많이 그렸습니다. 피카소가 사람의 얼굴을 그린 것은 보편자의 얼굴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보편자를 그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예배 드리고 있습니다. 왜 내가 여기 앉아 있습니까? 내가 여기에 온 목적과 원인이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것을 확인할 때 의미가 있고 공허해지지 않습니다. 내 삶에 연관성을 부여하는 보편자 하나님이 계심으로 모든 것이 선명해줍니다. 사물과 사건의 토막토막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은 우연입니다. 우연의 문제는 목적과 의미가 없습니다. 학문을 설명하는 하는 사람은 논리의 단절과 비약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학문은 결정적인 답이 없는 허무한 것이 없습니다.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없으므로 부조리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부조리하게 사는 것은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공식과 법칙이 있고 길이 명료해야 하는데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버리는 순간 자신이 우주의 왕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가 누구인가 왜 존재인지 잃어버린 우주의 미아가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공부하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할수록 나의 지식의 한계를 처절히 느낍니다. 그러므로 많이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인간의 지식이 한계가 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인간은 한계적인 존재입니다. 인간 학문의 한계입니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습니다. 모자란 것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인간의 구부러진 마음과 도덕성을 바꿀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세상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어느 사람보다 더 많이 얻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고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 헛된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명백한 한계가 있습니다. 지식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을 다 부정하는 것은 지식이 월권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연구하면 과학적이 됩니다. 내가 보편자가 되어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개미가 큰 공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여섯 개의 문짝으로 여덟 개의 문짝을 맞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지성인이라면 우리의 지성으로 이 세상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의 무식함을 알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무식하다는 것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 자세가 없어서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학문과 예술에는 궁극적인 것을 알 수 없는 공허감이 있습니다. 콘택트랜즈를 낀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랜즈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습니다. 그는 울면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찾았습니다. 아이는 왜 못 찾았을까요? 랜즈를 끼지 않아서입니다.

우리의 시각이 절대적이 아닙니다. 이성적 판단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입니다. 이 세상 지식을 다 모아도 나를 알 수 없고 세상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안에서 합리적인 이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안에 지식이 있을 때 지식이 의미가 있습니다. 보람이 가치있게 지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이 거듭나야합니다. 내가 아는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의 일부입니다. 전체를 안다는 것을 오만을 버려야합니다. 지식의 절대주의를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상의 통일과 현상과 물질을 설명합니다. 우리의 지성과 하나님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학문의 가치는 이성의 한계를 알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지성인이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소중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작은 지식으로 교만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성으로 살아야 합나다. 올바른 지성인이 되도록 살아야합니다.

 

(지혜도 많으면 번뇌도 많다)

 

17,18절을 보십시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솔로몬은 지혜를 얻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마음을 썼습니다. 그러나 지혜를 얻은 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남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지혜가 좋은 것 같지만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아집니다. 아는 것이 병이고 모르는 것이 속편할 때도 있습니다.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이 더합니다. 예전에는 모르던 암을 알게 되니 조금만 아프면 암이 아닌가 의심합니다. 농사짓고 음식 만드는 것을 알게 되면 먹을 만한 식욕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공산주의는 엄청난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진화론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동물의 가치로 전락시켰습니다. 결국은 지식도 헛것입니다. 공부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은 하나님이 만든 지식과 시스템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자연만물과 역사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객관적인 지식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우리의 삶이 편리하고 건강해집니다. 우리는 만물을 보면서 이것을 만들고 다스리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만물이 거져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모든 만물을 만드신 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므로 하나님과 나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세상은 헛되고 권태롭다)

 

세상이 헛되고 무의미하고 권태롭다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천재의 문학가라고 하는 이상도 권태라는 수필을 통하여 세상의 권태로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운몽에서 주인공인 성진도 모든 것이 헛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불교의 진리도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대한 탐욕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욕심에서 자유를 얻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은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반복되지만 성령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새로운 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저도 과거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인식하였습니다.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인생의 허무와 무의미에 시달렸습니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헛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믿을 때 허무함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 하나 의미가 생겨났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해 위의 세계를 보아야합니다. 그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전도서 1장 강해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1-전도서 118

요절 전도서 1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장 강해 끝.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2 [전도서] 전도서 2장 강해 하나님 안에서 그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 오요한 2009-05-23
1 [전도서] 전도서 1장 강해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오요한 200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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