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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연구자료

중부유럽 봄 수양회 특강 어떻게 성경 공부할 것인가

작성자 : john444
작성일 : 2009-04-28 00:00:00
조회수 : 939
어떻게 성경 공부를 할 것인가?

부족한 자를 중부 유럽수양회에 불러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천안은 5월 2,3일 주말 수양회가 있습니다. 제가 천안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한제임스 사라, 다니엘 다니엘라 선교사님의 강력한 요청과 중부 유럽에 계시는 여러 선교사님들을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만사 제쳐놓고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늘 전할 말씀은 어떻게 성경 공부를 할 것인가?입니다. 저는 20년을 넘게 평신도 목자로 천안 유비에프 역사를 섬겼습니다. 저는 평신도이므로 서울에 있는 스텝 미팅에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자립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선교지에 홀로 떨어져 있는 선교사님과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저에게 한 가지 은사가 있다면 말씀을 사랑하는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말씀공부시간이 좋습니다. 주의 말씀이 어찌 그리 단지요? 하는 다윗의 고백이 나의 고백입니다. 문제지를 만들고 문제를 풀고 말씀을 준비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지는 이것을 십자가나 짐으로 여겨 본 일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가 어떻게 성경을 공부할 것인가를 강의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중심으로 오늘 강의를 하고자 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선교사님들을 각 지부의 자립적인 성경 선생들로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제일장 성경의 주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알고 공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을 연역적으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을 때 주제를 알고 있으면 쉽게 독해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글은 주제를 중심으로 통일성 있게 쓰여져 있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서도 주제를 중심으로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 경험을 잠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1977년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후에 성경책을 읽었습니다. 일용할 양식도 보고 1984년부터는 주일 메시지를 매주 전하였습니다. 주일메시지를 모아서 몇 개의 강해서를 책으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2003년에 저는 지금까지 내가 썼던 모든 책을 내다 버렸습니다. 주제가 맞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시 말씀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성경 66권 강해서를 쓰고자 하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누가복음 로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고린도전서 요한 일이삼서 창세기 여호수아서 강해서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천안 유비에프 홈피에 성경 66권 강해서라는 콘텐츠를 만들어서 올리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메시지와 문제지 그리고 문제풀이를 함께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평생에 한번 전한 메시지는 다시 전하지 주일메시지로는 전하지 않고자 결심하였습니다. 다만 일대일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전한 말씀을 가르치며, 메시지와 문제풀이를 수정하는 작업은 합니다.

제가 이런 방향 전환을 하게된 데에 계기가 있었습니다. 2000년에 한 인턴 자매 목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키도 크고 예쁘고 섬김이 있는 자매 목자였습니다. 그분은 단대를 졸업한 후에 CIS독립국 연합국 중에 하나인 민스크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러나 진행성 테레토마(기형 암과 같은 것입니다.)로 거의 죽음의 위기에 처하여 귀국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그는 원자력 병원에서 최장시간 수술을 하고 점차 회복되었습니다. 수술 후 일 년은 예배도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일 년 후부터는 예배에 나와서 땅 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년이 지난 후에는 인턴 목자로 세운 것이 아닌데 자신이 스스로 캠퍼스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많은 학생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인턴 목자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자궁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는 점점 나이를 먹고 후배들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믿기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를 그리워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정신 분열증에 걸렸습니다. 자신의 남자친구가 등불을 들고 단대 호수 저편에서 자신의 이름을 밤새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제가 간신히 사정을 해서 정신병원에 면회를 갔습니다. 그는 약을 주사하여 몽롱한 상태에 있었고 손과 발을 침대에 묶어놓았습니다. 인턴 목자가 병에 걸리자 학생들도 시험에 들어서 모임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눈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셨는가? 나의 모든 사역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목자로 사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신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 이런 모든 것이 나의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로 하나님 앞에서 매일 기도하고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스텝수양회에서 천안 역사를 보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장16절) 나는 예수님을 통하여 변화된 크리스찬 학생이 많아지기를 구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보다 양들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나를 시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매 목자도 시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매 목자를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녀가 하나님만 사랑하기를 원했지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녀를 시기하여 정신분열증에 걸리게 한 것입니다. 저는 요한 복음 3장 16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복음을 알게 된 사건입니다. 제가 이를 깨달았을 때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것을 체험한 후에 성경을 다시 보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구약에는 성부 하나님이 중심이었습니다. 다음에 복음서를 보면 성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나옵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보면 성령님깨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중심으로 보아야합니다. 그 중에서도 중심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약속이요.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요. 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22장에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이 자녀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아브람을 복의 근원으로 축복하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물려준 것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고 이삭이 야곱에게 물려준 것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물로서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이유는 포도주를 주시기 위함은 아니지요? 포도주가 아니라 변화의 능력자요.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주시기 위함이지요? 다섯 명의 여인을 두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은 좋은 남편을 소개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성령이 솟아나게 하십니다. 삼십팔 년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은 무엇인가요? 단지 병고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바로 진정한 베데스다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영생을 얻고 고질병에서도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의 무리를 오병이어로 먹이십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은 떡이 아닙니다.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셔서 참된 양식과 음료를 주시는 예수님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일장의 주제가 무엇인가요? 바로 성부하나님의 택하심, 성자 예수님의 구속하심, 그리고 성령하나님의 인치심입니다. 저는 이런 예를 통하여 성부 성자 성령님을 소유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중에서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기 19장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많이 공부하는 말씀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배웁니까? 사람들은 성경책에 나온 그대로 말씀에 순종을 잘해야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말씀에 순종을 하지 못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한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인간은 본성이 악하여 하나님 말씀에 다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의 전철을 밟아서 우리도 말씀에 순종하면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성경을 공부해야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옛날 언약을 사람들이 지키지 못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말씀을 공부할 때는 달라져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믿고 말씀에 순종하면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배워야합니다. 구약에 보면 간음한 자는 돌로 치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공부할 때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자 라고 공부해야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자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죄와 싸우는 삶을 살자고 배워야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경을 볼 때 성경은 좀더 쉽게 이해되고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이장 성경을 가르치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저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성경을 서울 스텝 모임에서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경을 배웠을까요? 제가 많은 주석서를 읽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메시지를 읽은 것도 아닙니다. 제가 복음에 대해서 알기 전에는 다른 분의 메시지를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이분의 메시지에서 좋은 것을 베끼고 저분의 메시지에서 좋은 것을 베꼈습니다. 나는 새로운 메시지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복음을 알고 나서는 다른 분의 메시지나 주석서를 읽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성경을 가르쳐주신 분이 성령님이시었습니다. 요16:13절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는 성경 말씀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말씀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님은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12년째 새벽기도를 절대적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새벽 기도시간에 성경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성경을 반복하여 읽으며 성령께서 말씀을 깨우쳐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여주셨습니다. 그때 달콤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말씀을 전할 때는 로마서를 통째로 암기하였습니다. 그 말씀이 나에게 능력으로 다가왔습니다. 나에게 성경을 가르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성경선생이다. 이것이 잘 이해되십니까? 혹시 이것이 뜬 구름같이 다가올까 봐 저는 성령님에 대해서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성령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순복음 계통에서는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저도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방언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들의 말대로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역사를 힘 있게 섬기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 많은 기도원을 다녔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에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 산속에 있는 기도원에 차를 몰고 간 것도 여러 번입니다. 목이 쉬도록 부르짖어 기도하기도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사역자로 부르지 않으셨는데 나 홀로 목자가 되어서 이 고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말씀을 전하다가 말씀이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로마서 8장 9-11절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에 보면 성령님을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이의 영이라는 다른 말로 나옵니다. 결국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고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 순간에 내 마음 속에 계시는 성령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는 고린도 전서 고전12:13절 말씀을 통해서도 분명히 확증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순간에 과거의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한 몸이 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게 되었을 때 나의 내면에는 성령님께서 영원한 기쁨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내 안에서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번 오스트리아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소 성령님께서는 나에게 기쁨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그 후에 제가 어느 목사님을 만나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은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을 확신시켜주셨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다만 혀를 그분이 주장하도록 맡겨주시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병고치는 은사를 위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한번은 자고 나니 팔이 위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회개하고 안수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즉시 필이 올라가게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몇 명의 사람이 질병을 치료하는 역사도 이루어주셨습니다. 나에게 병고치는 은사가 많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서 주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나는 예배 후에 병의 치료를 위해서 항상 기도합니다. 하여튼 성령님은 내안에서 계시고 내안에서 알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게가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을 의지하여 말씀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그때 다른 목자를 통하여 말씀을 배울 때 얻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다른 분의 주석서도 보아야하고 다른 분의 설교나 메시지도 참고해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이해한 성경 말씀의 객관성을 위한 것이거나 내가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깨달은 성경에 대한 좀더 깊은 통찰을 위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말씀을 배워야합니다.

저는 성경 강해를 나갈 때 한 장을 한 메시지로 전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창세기나 여호수아서를 나갈 때는 이 원칙이 거의 지켜졌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는 빌립보서 요한복음을 나갈 때는 한 장을 세 번이나 다섯 번에 걸쳐서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나가다 보면 창세기나 여호수아는 아무도 전하지 않은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특히 시편이나 이사야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신서에서도 다른 사람은 대략 전한 말씀을 자세히 전해야합니다. 이때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그때 성령을 의지해야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를 공부하면 내가 새로이 배운 것은 유다와 다말입니다. 왜 하나님이 요셉에게서 메시야를 보내지 않고 유다에게서 메시야를 보냈느냐는 것입니다. 야곱이 자녀를 축복하는 부분을 보면 분명이 장자의 복은 요셉에게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요셉을 축복할 때 복이라는 단어가 8번이나 나옵니다. 그를 장자로 여겨서 두몫의 축복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를 통하여 메시야를 보냅니다. 어떤 분은 유다에게서 실로가 오시기까지 하신다는 말씀을 근거로 유다에게서 메시야가 나오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로라는 단어는 분명치 않은 단어고 후대의 학자들이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더구나 유다는 동생 요셉을 애굽에 판자요. 창녀집에 들어갔다가 며느리와 잠을 잔 자입니다. 그가 어떻게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을까요? 먼저는 그가 회개하고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 잔 사건을 회개한 것, 그리고 베냐민이 인질로 잡혔을 때 대속자가 된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분명 야곱은 요셉을 장자로 축복하였지만 그 후손이 그것을 잘 감당하지 못한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조상들이 훌륭해도 그 후손들이 감당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제대로 계승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나의 성령께서 나에게 주신 깨우침입니다.

여호수아서를 공부하면서는 레위지파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레위와 그 후손들은 야곱에게 저주의 저주를 받습니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이것이 야곱이 죽을 때 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레위지파를 통하여 제사장이 나오게 하시고 레위지파를 특별히 구별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는 복을 주십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내려올 때에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섬깁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다 나오라고 합니다. 이때 레위지파만이 하나님께로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조상들이 저주를 받았을 지라도 그것을 영원히 지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주십니다. 레위 지파 중에 제사장 비누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우상을 숭배한 자들을 처단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조상에게 내린 저주도 축복으로 바꾸어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때마다 말씀을 깨닫는 새로운 지혜를 주셨습니다.

제삼장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성경입니다. 예전에 관주 성경이라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석을 실로 꿰어주듯이 서로를 찾아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일학년 때 혼자서 양식을 보아야했습니다. 그때는 성경이 아래로 쓰여졌고 한자로 되었습니다. 그때는 주석도 없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때이기 때문에 참고할 설교도 자료도 없었습니다.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주는 것은 성경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이 이해되지 않으면 그와 유사한 구절을 찾아보고 이해하였습니다. 성경은 성경을 가르쳐줍니다.

성경 공부는 마치 눈덩이와 같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눈덩이가 점점 커지듯이 성경을 아는 것도 더 늘어납니다. 그러므로 조금씩 눈덩이를 굴려서 눈사람을 만들듯이 우리는 성경공부의 눈덩이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눈사람을 만들면 눈사람을 땅에 세울 수 있듯이 성경을 통해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균형 잡힌 신앙을 할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신앙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로교는 예정론을 말하고 하나님의 창조 주권을 강조합니다. 감리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합니다. 이것을 흔히 알미니즘이라고 합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성경을 객관적으로 공부하면 성경에는 예정론이 말하는 부분이 반드시 나옵니다.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는 부분도 나옵니다. 로마서 8장 29절을 예정론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말씀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르쳐줍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로마서 8장에 보면 구원은 이미 예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십일 장에 보면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고 구원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균형을 잡아야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에게는 예정론을 가르쳐야합니다. 그러나 예정론만 믿고 나태한 자에게는 자유의지를 가르쳐주어야합니다. 균형 잡힌 신앙은 성령의 은사와 말씀 사역에서도 나타납니다. 오순절 계통은 성령의 은사를 강조합니다. 이런 은사주의 빈야드 운동이 거세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어느 유비에프는 이런 은사주의에 사로 잡혀서 무슨 새로운 것이나 찾은 것처런 이런 집회에 몰래 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장로교 계통에서는 이런 은사나 방언보다는 말씀의 사역을 중시합니다. 우리 유비에프도 말씀의 사역을 중시하는 교회에 속합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합니까? ㅇ뤼는 이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아는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사도행전의 제자들이 한 일이고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말씀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나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올 때에 예수님을 그들을 떠나서 다른 마을에 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는 누가복음을 공부하면 잘 나타납니다. 또한 마태복음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쳐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에게 은사가 나타나야하고 금하지 말아야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말씀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복을 받고 현실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모임은 지나치게 말씀만 중시합니다. 어떤 모임은 기도를 중시합니다. 또 다른 모임은 찬양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 이 세 가지가 다 중요하고 균형을 이루어야한다고 가르칩니다. 가정과 교회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우리 유비에프는 이전에 가정보다 교회를 중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교회보다 가정을 중시하는 곳도 많습니다. 가정보다 교회를 중시하는 곳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이 누가 내 형제요. 자매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가정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가정 교회에서 교회가 시작된 것을 이야기 합니다. 야곱의 가정에서 이스라엘 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가정을 교회같이 교회를 가정같이라는 말로서 이 둘의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의 문제나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문제도 다 이런 균형 잡힌 신앙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경을 전체적으로 공부하면 성경을 좀더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고 복음을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문둥병자가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왜 깨끗게 해달라고 했을까요? 이는 레위기에 문둥병이 더러운 병으로 취급되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와 단절되었다는 것을 알면 쉽게 이해됩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사람을 더럽게하는 것은 죄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문둥병자를 통해서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 인간의 문제를 다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둥병자는 병을 낫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깨끗함을 받고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하는데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고 나서 문둥병 치료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고 병자를 떠나서 기도하신 것을 통해서 더욱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이해하면 성경은 더욱 성경을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신약성경에 백부장이 자신의 종이 중풍병에 든 것을 보고 다만 말씀만 하사 고쳐달라고 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이 매우 크다고 칭찬하십니다. 그의 믿음이 어떤 점에서 클까요? 이런 말씀은 우리가 신명기 5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십계명을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이와 같은 마음을 품어서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자 하지 않고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하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그에게 성령을 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연관시켜볼 때 백부장의 칭찬 받은 믿음이 바로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경외하는 믿음이요. 주의 종을 경외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성경을 좀더 풍성하게 이해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성경을 좀더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적용할 때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인가? 초대교회에서 하던 일인가? 사도들의 편지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 예스라는 대답이 나올 때 적용하도록 하는 신중함이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 성경공부에서 가장 큰 문제가 성급한 일반화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중풍병자를 공부할 때는 중풍병자가 되고 문둥병자를 공부할 때는 문둥병자가 되고 사도바울을 공부할 때는 사도바울이 되고 모세를 공부할 때는 모세가 됩니다. 이런 우스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그 속에서 복음을 발견하려고 하면 이런 모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욥기를 보면서 온 몸에 오는 짜릿한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욥기에 나오는 말씀 중에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잘못된 말씀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좋아하여 액자에 써서 벽에 붙여 놓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겨자씨의 비유에서나 말구유 역사와도 유사합니다. 이 말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 말씀이 욥의 상황에 맞지 않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욥에게 전혀 힘이 되지 않는 말씀이고 그래서 욥의 친구는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좀더 신중하게 적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기에 모세가 개구리를 올라오게 한 사건을 봅시다. 어떤 분은 이 말씀을 공부하며 우리도 캠퍼스 역사를 이루려면 모세와 같이 개구리를 캠퍼스에 들끓게 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반은 농담으로 했지만 우리가 말씀을 그대로 적용할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에게 표적이 따라온다는 것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개구리와 같은 동물까지 움직이는 표적을 주신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대적자의 숨통을 막히게 한다는 표적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정도까지입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또 다른 예로 고린도 교회에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가 나옵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에 한정하여 하신 말씀이지 다른 서신서에서나 교회에서 나오지도 않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다만 여자는 남자의 권위를 인정해야하고 남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해야한다는 일반론만을 취해야지 모든 여자는 머리에 두건을 써야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의 발을 씻는 문제도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너희도 서로 발을 씻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초대교회에 이를 지속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절대적으로 순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서로 높아지고자 하지말고 겸손히 낮아져서 섬겨야한다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그러나 성만찬이나 세례를 주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셨고 사도들이 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교는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킵니다. 우리는 안식교의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안식일은 토요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의 해답도 의외로 간단합니다. 구약에는 분명히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록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많은 병자를 고쳐서 바리새인과 충돌된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안식일과 안식 후 첫날 곧 주일에 모인 기록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는 안식일의 문제로 싸우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것을 종합할 때 우리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르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날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공부할 것인가? 세 가지로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첫째가 무엇이라고요? 예,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을 중심으로 보되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중심으로 성경을 보아야합니다. 둘째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합니다. 성경이 이해되지 않을 때 억지로 풀려고 하지말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 여쭈어보아야합니다. 셋째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서 성경을 통하여 성경을 이해해야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경을 배워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오신 한 분 한 분을 훌륭한 성경 선생으로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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