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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연구자료

십자가 사랑

작성자 : waysay
작성일 : 2015-07-21 00:00:00
조회수 : 599
십자가의 사랑
마태복음 27:1 ~ 27:66
요절: 마태복음 27:46 “제 구시 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라고 합니다. 기독교를 말함에 있어 십자가를 빼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렇게까지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새벽의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의논을 나누고자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죽은자를 살리시고 못보는자를 보게 하시며 걷지 못하는 자를 걷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날로 더해지고 자신들의 인기는 떨어지자, 시기심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발할 때 종교적인 문제로 고발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로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유대법이 아닌 로마법에 종교적인 문제는 우리의 민사 사건과 같아 판단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에 대한 반역자로 정치적인 고소를 하였습니다.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고 고소를 하였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11절을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은 빌라도는 로마에 대한 반역자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옳도다” 시인하십니다. 예수님은 반역자가 아닌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대답하면 죽을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기로 결정하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인류의 죄를 위해서 죽고자 결심 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님을 고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로마 정부에 납세를 거부했다든지 사회를 혼란하게 했다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도 대답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하심으로 당시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도록 가르치심으로 세상의 것도 하나님 안에서 지켜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말은 일절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말없이 순종하셨습니다.

유월절 명절이 되면 특사로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바라바라는 유명한 죄수도 예수님과 함께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유월절 특사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높은 인기를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상대적으로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는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이 시기하여 무죄한 예수님을 넘겨주고자 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하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을 옳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예수님의 선하심과 무죄함을 알았습니다. 또한 전날 꿈속에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으니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여러 정황을 보았을 때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결단하고 사람들에게 바라바와 그리스도 예수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바라바가 당시 유명한 죄수였기에 당연히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놓아달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무리에게 둘 중에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무리들은 말합니다. “바라바를 놓아주소서” 바라바라고 하자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어떻게 하랴고 물었습니다. 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말합니다. 무리들은 종교지도자들이 시키는 대로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이해할 수 없어서 예수님이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고 무리들에게 물어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놓아두면 민란이라도 일어날 태세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무죄한 자를 정죄하도록 압박을 받았습니다. 빌라도는 무리 앞에 손을 씻으며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책임을 지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민란을 막기 위해서 예수님을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님은 채찍질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는 민란을 막기 위해서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어 총독자리를 오래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진리보다 자신의 이익을 챙길 때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못박혔다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는 이 비극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5년 후에 유배지에서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는 양심을 속이고 참 진리를 버린 결과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그는 정죄를 당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27절부터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가 자세히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떤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첫째로,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밤새도록 심문을 받으시고 이제 로마 군병들에게 넘겨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무수한 채찍에 맞으신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채찍에 맞아 피부가 찢어지고, 혈관이 터졌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범벅이 되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세계에서 가장 무자비하기로 유명합니다. 특히 유대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병들은 더 독이 올라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배치된데다 유대인들이 말을 잘 안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더 무지막지하게 내리쳤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여기저기 찢기고 터져서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그 육체적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군병들은 이제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옷을 벗긴다는 것은 수치심을 주는 것입니다. 옷은 그 사람의 인격인데 옷을 벗긴다는 것은 그 사람을 너무나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발가벗겨진 예수님은 더 이상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군병들의 놀이개감이요, 희롱거리에 불과합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희롱하기 시작합니다. 빨간 천을 가져다 두르게 하고 임금 놀이를 합니다. 머리에는 왕관대신 가시관을 씌웁니다.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예수님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 내립니다. 오른 손에는 왕이 드는 홀 대신 갈대를 들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합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자, 예수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갈대를 빼앗아서 머리를 칩니다.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예수님의 옷을 입혀서 이제 십자가를 지워서 끌고 갑니다. 예수님은 “슬픔의 길”이라는 의미를 가진 비아 돌로로사를 따라 골고다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은 시장 통으로 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좁은 길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마침내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산 사람을 십자가 형틀에 못을 박아서 걸어 두는 것입니다. 목을 자르는 참수형은 고통이 빨리 끝나기라도 합니다. 교수형은 차리라 신사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형은 산 사람을 대못에 박아서 나무 위에 매달아 두는 것입니다.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면 몸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집니다. 온 몸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내립니다. 온 몸이 탈수 현상이 일어나서 혓바닥이 쩍쩍 갈라집니다. 사람을 한 순간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죽입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맛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빨리 죽이면 싱거우니까?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형은 인류가 개발해낸 사형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아무리 흉악범이라 할지라도 사형을 잘 안 시킵니다. 범인도 인권이 있다고 해서 얼굴도 언론에 공개를 안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님에게는 인권이 없습니다. 최소한의 인격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극한 육체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보통 십자가형에 있어서 군병들은 두 번 제비를 뽑았습니다.
첫 제비뽑기는 겉옷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를 누가 가지느냐의 제비뽑기였습니다. 그리고 겉옷을 제일 비싼 옷이기에 그것을 누가 차지하느냐의 가장 중요한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죽어가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옷을 욕심스럽게 제비뽑아 나누는 로마 병정들로 예수님은 더욱 비참하게 하였습니다.

일찍이 시편기자는 22:6절에서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사람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존재, 벌레와 같은 존재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천군천사와 온 세상 만물로부터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받으셔야 할 하나님의 아들이 짐승 취급, 벌레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사랑을 베푸신 그 백성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 그 두 번째는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39,4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달아 놓고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네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한번 내려와 봐라”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많이 구원한 사람이 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느냐” “네가 그렇게 신뢰하는 아버지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는 모습을 보여 봐라” 위로는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아래로는 십자가의 강도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향해 조롱하고 희롱하고 모욕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함 받으면 좋아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당신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별의 별 소리로 다 찬양하고 감사해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예수님을 향해 온갖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쏟아 놓습니다.

본문의 이 무리들도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목소리 높여서 외쳤습니다. 겉옷을 펴서 예수님 가시는 길에 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치고 열렬하게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환호소리가 어떻게 일주일 만에 조롱소리, 희롱소리, 저주소리로 바뀌었습니까?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헤롯궁으로 들어가서 정권을 장악하고 창고 문을 열어서 곡식을 나눠주고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었으면 계속해서 그들은 환호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오히려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뒤집어 엎고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내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도다. 이 외식하는 자들아. 속을 깨끗이 하고 죄를 회개하라”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그러자 그들은 화가 났습니다. 자신들의 현실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고 죄 문제만 터치하고 책망하자 기대가 불만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대심리가 분노와 미움으로 표출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롱하고 미워하고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을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죄로 생각하고 회개할려고 하기보다 문제의 원인을 다른데서 찾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자 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모릅니다. 그런 우리 인생들의 죄성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비난과 저주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 모진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조롱과 희롱을 당하시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을 다 참으시고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침묵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께서 견딜 수 없는 마지막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세 번째 고통,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 받는 영적인 고통이었습니다. 4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제 구시 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은 지금까지 아무 대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말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도 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자신을 채찍질하고 침을 뱉고 주먹으로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한마디도 원망하거나 대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한마디 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왜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랬습니까? 예수님이 미워서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리신 이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버림받으신 이유.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죄로 하나님께 갈 수 없으니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님으로 우리 마음가운데 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3:16절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이처럼’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도대체 어떻게 사랑하셨길래 ‘이처럼’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 버리는 사랑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선했습니까? 우리가 훌륭한 점, 잘난 점, 이쁜 구석이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죄만 지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철저하게 버리고 계십니다. 이것을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논리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이해할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것은 쓸모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도록 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참으로 차원 높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기를 죽여서 남을 살리는 사랑. 이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무한하게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우리가 부족함이 없는지 걱정하시고 항상 그 부족함을 챙겨주고자 하십니다. 없는 중에도 최선의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부모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포기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부모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는 원수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내어 버리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죽어가지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며 죽어가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버리고 십자가에 밑에서 온갖 불평과 원망과 저주 섞인 말을 쏟아내고 있는 그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도 놀랍지만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더더욱 놀랍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씻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처럼 고난을 받으셨고,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마침내는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 예수님도 예수님이지만 이 예수님을 희생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더욱더 놀라운 것입니다.

5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지르시며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애는 이처럼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시고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51절을 보십시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의 사이를 막고 있는 장벽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한 이래로 인간은 감히 누구도 하나님께 바로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들도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많은 짐승을 죽여 죄를 속죄하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우리인간의 죄가 너무나 지독하여서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장벽이 와르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찢어졌습니다. 이로서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요, 가장 위대한 업적입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된 표적이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부림치고 있을 때에 사람들이 밑에서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봐 내려오면 그리스도로 믿을께” 예수님께서 겨우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된 진정한 증거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으심으로, 그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입니다. 54절을 보십시오. 이를 보고 있던 로마의 백부장은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이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알아 차리게 되었습니다.

보통사람이 못하는 기적을 좀 행했다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 몹쓸 죄인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말없이 내어 주시는 분, 그 한량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분, 자신은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시면서도 기꺼이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기를 기뻐하셨던 그 분, 그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원자요, 메시야가 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원자로 영접한 순간 나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하나님과 나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찢어지고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임하게 됩니다. 나의 붉은 죄가 다 사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감격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성실과 교만이 마음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구원받을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3 아버지를 데리고 가심으로 저의 심령이 가난하게 하셨습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 조이 사모님을 통하여 천안 UBF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말씀도 은혜가 있었으며 그 때 많은 사모님들이 동아리 점심 모임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던 저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여 주셔서 그 아들도 내어주심으로 하나님의 나의 참 아버지이심을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님으로 인하여 거듭나게 되었고 큰 기쁨이 마음에 임했습니다. 늘 방학중에 성경특강을 듣고 형제님들과 함께 운동으로 교재를 나누며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4학년을 마친 후 군대를 다녀오고 1년간 교회인턴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턴을 하는 도중에 차량사고와 치과 치료를 하며 물질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턴비용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돈에 직장다니는 여동생에게 돈을 빌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인 인턴생활로는 100만원이라는 돈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인턴비용의 절반은 양들을 밥을 사주고 그 반인 15 ~ 20만원은 생활비로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 중에 물건을 조금더 싸게 사겠다고 중고나라에서 물품을 샀다가 사기를 당하고 단돈 만원이 없어 마음이 괴로움이 왔습니다. 인턴은 1년만에 내려놓고 저는 차량 수리비용이랑 동생에게 빌린 돈을 먼저 갚기 위하여 롯데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달간 하였으며 시급이 크지 않고 적성에 안맞아 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했던 학원 강사로 전향하였습니다. 첫 전임으로 강사하였기에 4대보험을 제외하고 110만원으로 십일조를 하면 99만원의 큰 월급은 아니었지만 이를 받으며 3개월간 차도 수리하고 동생에게 빌린돈도 갚고 3개월 차에는 어머니께 용돈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어머니께서 군대 나오기 반년전에 몸이 아프셔서 장사를 그만 두셨었기 때문에 저는 천안에 연고지를 두기로 방향을 잡고 직장일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학원 생활은 적성에도 맞고 재미있었지만 주6일에 저녁 12시나 새벽에 들어오고 시험기간에 주말도 없이 수업을 하였습니다. 저는 직장생활을 하며 직장생활에 익숙해져 갔지만 하나님과는 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도 주시는 것은 맞지만 자기 열심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하나님의 주권신앙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저는 어릴 때 아버지의 병고로 안정적인 가정을 꿈꾸었습니다. 선배님들이 졸업을 하고 보통 바로 결혼을 하셨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하면 결혼할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직장생활 3년이 지나도록 제 믿음이 부족해서 결혼을 안하게 되며 결혼에 대하여 불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저는 불신의 죄에 빠졌습니다. 그후 2년간 저는 교회에 와서도 저는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불평과 목자님에 대한 불평이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직장생활에 의한 피곤함과 불신으로 기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주기도문 말씀을 통해 마음에 말씀을 주시고 치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참 아버지이심을 알게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아끼지 않으시고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기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외롭고 지친 나의 영혼에 성령님으로 오셔서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마음속에 함께 하시니 나의 슬픔이 사라졌습니다. 내려놓았던 기도의 십자가를 다시 회복시켜주셨고 그 가운데 기쁨을 주셨습니다. 불신으로 불평 불만이 많았던 마음이 주님의 사랑으로 녹았습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서 죄문제를 찾고 회개하였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셔서 온세상에 기쁨을 주셨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본받아 십자가를 질 때 힘들 수 있지만 나도 기쁘고 내가 있는 곳에 기쁨을 줄 수 있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인도하심으로 행복한 가정을 주셨습니다. 저는 집에서 밥도 설거지도 어머니께서 해주셨습니다. 자취할 때는 밖에서 사먹기가 일 수 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잘하지 못하는 요리의 십자가를 지고 설거지의 십자가를 집니다. 새벽기도할 때도 일어나는 것은 힘들었지만 하루에 힘을 주듯 설거지나 요리가 할 때는 조금 힘든 것 같지만 누군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더 큰 기쁨을 마음에 허락하심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 위해 나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불신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헛된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슬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함으로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쁨으로 살 때 예수님은 결코 십자가 지신 것을 후회함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은 기뻐하십니다. 내가 부족한 죄인이지만 예수님께 나아갈 때 그 믿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기쁨으로 감당할 때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시며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학생으로 공부의 십자가, 직장에서의 일에 대한 십자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십자가를 질 때 나도 행복해지고 가정도 행복해지고 교회도 행복해지고 기쁨 안에 있는 우리를 보시며 예수님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마음속에 고통스러운 문제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이 문제를 내려놓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행복한 모임이 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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