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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연구자료

네가 낫고자 하느냐

작성자 : john444
작성일 : 2010-07-08 00:00:00
조회수 : 883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1-9

요절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샬롬~ 여러분
우리는 혹시 인생을 살면서 혼자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수렁 속에서 허우적 거릴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소망도 없고 환경도 건조하여 하루하루 의욕 없이 시간만 보내는 마치 앉은뱅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고 있지는 아니하십니까? 혹시 그런 분이 계신다면 이 시간을 통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통해 매일매일 소망과소원이 가득 차 항상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삶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제1장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가져야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선 여러분은 명절 하면 무엇이 가장 떠오르십니까? 아무래도 멀리 흩어져 열심히 살고 있던 형제, 자매, 친척들이 오랜만에 모두 모여 부모님을 찾아뵙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장면이 가장 떠오를 것입니다. 다들 한곳에 모여 덕담을 나누며 서로간의 복을 빌어주고 흥겹고 즐거운 놀이를 합니다. 아이들은 한복을 곱게 입고 부리나케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며 세뱃돈을 받습니다. 유대인에게도 이처럼 명절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의 우리의 명절 모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모여 말씀을 듣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며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야말로 주님을 위한 축제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명절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또한 제자들과 즐거운 명절을 보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은 성전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 있는 베데스다라는 하는 연못으로 가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주위에는 다섯 개의 정자가 있었고 다섯 개의 정자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고자 하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명절에 이곳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사 그들에게 자신을 통해서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가셨던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의 선택지였던 것입니다.

다같이 3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베데스다 연못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즉 마비된 사람 들이 누워 있는 일명 병든 사람들의 집단이었습니다. 그곳은
병든 사회였습니다. 그들은 축복 받아야만 하는 명절에서도 병으로 인해 성전에조차 올라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초라하였습니다. 실패자와 패배자라는 인식으로 소원과 소망마저 희미해진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것보다 여기서 뼈를 묻으며 죽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하는 병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병든 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의 축소판이라고 느낍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류 역사상 과학과 기술 그리고 물질이 최고도로 발달한 그런 사회에 살고 있고 문명의 혜택으로 우리의 삶은 모든 면에서 말할 수 없이 편리해졌고 물질적인 성취도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우리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현재 육체적, 정신적, 또는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고단하고 병든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여 많은 외적인병들이 정복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치유 불가한 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묻지마 살인, 존속 범죄, 아동 성폭행, 사이버 테러 등 지금 이 순간도 무수히 많은 범죄와 사고가 생겨나고 또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눈부신 문명의 혜택으로 인하여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살아야 하는데 허무, 불평, 무의미, 원망, 부정적인 생각 등 영적인 병을 안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좀 가난하기는 했어도, 인정이 넘치고, 예의와 염치를 아는, 평화로운 옛 전 시절이 그리운 이유입니다. 이렇게 현대인들은 각자의 고질병을 안고 씨름하며 살아가는 고단하고 병든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다같이 4절을 보십시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두 번째 베데스다 연못은 이 시대의 경쟁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가끔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나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든 사람에게 해당사항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선착순 한명만이 병을 나을 수 있는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제일 먼저 물에 들어 간 선착순 한명만이 병이 나을 수 있는 혜택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병이 낫기 위해서 가장 빨리 물에 들어가기 위해서 서로서로 끊임없이 경쟁을 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너를 이겨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떻습니까? 돈이 삶의 의미이자 목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의 능력으로 그 사람의 모든 걸 평가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외모, 학력,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남성 키 180 이하면 루저 (loose)취급을 받는 세상입니다. 학력이 낮으면 또한 지방대를 나오면 패배자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입시경쟁, 취직경쟁, 승진경쟁 심지어 외모경쟁까지 삶의 모든 게 경쟁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처음으로 경쟁을 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기 해서 격렬한 몸부림을 치며 결국 엄청난 경쟁률과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경쟁이라는 가시거리에 봉착하게 됩니다. 살아오면서 경쟁의 연속입니다. 학창시절엔 똑같은 머리스탈 똑같은 교복에 모두들 비슷비슷한 겉모습이지만 오로지 평가의 잣대는 학업성적입니다. 일류대학에 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쟁하며 입지 지옥에서 시달려야 합니다. 그렇게 입시지옥에 탈피 하여 대학생이 되었다고 하지만 여기서 경쟁은 멈추지 않습니다. 바늘 구멍만한 좋은 취업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눈을 뜨면 토익, 자격증 등 스펙을 쌓는 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고학년이 될수록 개인의 취미나 관심거리는 사라져 갑니다. 결국 미래의 삶을 편안하게 보내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하여 원하는 직장을 가졌다고 편한 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시작입니다. 보직이나 진급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은 전쟁터와 다름없습니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근무이외에 별도로 더 준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때론 불의가 정의를 지배합니다. 승리하는 자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성공하는 자가 승리자인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데스다 연못은 이 시대는 예측불허의 시대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천사는 병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매일매일 베데스다 연못에 내려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병자들에게 날짜를 알려주고 내려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고 없이 내려왔습니다. 예측불허인 상황에 병자들은 초초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화장실도 가도 가는 게 아니요. 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니요. 식사를 해도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측불허는 이처럼 인간을 초초하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저는 고3을 앞두고 초조 불안감이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현실을 파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방대도 벅차기만 했던 실력을 생각 하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 앞으로 다가 올 결과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측불허였습니다. 현재 세계 경제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를 시작으로 남유럽(PIGS)을 거쳐 전 세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유럽 경제 위기가 글로벌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지원이 늦어지고 있는데다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이 남유럽 국가의 국가신용등급을 본격적으로 하향조정하고 있는 것이 새로운 악재(惡材)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계는 경제공황의 위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같이 5,6절을 보십시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계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병자 중에서 특별히 38년 된 병자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왜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첫째 예수님을 통해 그에게 낫고자 하는 강한 소원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물이 움직일 때 물에 들어가려고 노력 했으나 혼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관계로 항상 남에게 기회를 빼앗기는 안타까운 삶이었습니다. 누구도 그의 인생을 도와주는 자도 물로 인도해 주는 자도 없었습니다. 무려 38년 동안 실패자와 패배자로 살았습니다. 38년이면 강산이 거의 네 번 바뀔 정도로 엄청 오랜 시간입니다.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 축제인 월드컵을 한 번 기다리기도 힘든데 무려 9번 열리고 2년이 더 지난 시간입니다. 이렇게 긴 시간동안 그는 실패자와 패배자로 살았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병이 지속되어 낫고자 하는 소원도 소망도 희미해졌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고통 받고 사는 것 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실패가 거듭 반복되어 결국 자신감이 상실되어 자연스럽게 실패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병자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병자의 입장에서 다가갔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병자에게 강한 소원을 심어주어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했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만이 그의 병의 완치자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38년 병자에게 질문을 던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난입니까? 아님 진심이었습니까? 38년 동안 큰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 병자에게 어느 누가 감히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장난을 치기엔 이 병자의 인생이 얼마나 불쌍하고 초라하였습니까?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병자의 인생에서 가장 큰 관심사인자신의 병의 치유를 가지고 어느 누가 감히 장난을 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이 병자를 고칠 수 있는 분만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만인의 왕이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만이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병자의 문제를 해결 해 주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살다 보면 38년 병자와 같이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앞이 컴컴한 어두운 통로를 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지나면 그 어두운 통로 속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모 광고의 생각대로 T도 아니고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전진을 해야 하는데 다람쥐 채 바퀴 돌듯이 헛걸음질만 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온갖 각종 복잡한 문제로 가득 차 있는 문제의 장소입니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자는 문제, 공부하는 문제, 교통사고 화재사고 가뭄 홍수 등 천재지변 낳고 살고 늙고 병들고 죽는 문제 온통 문제투성이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땐 정말 앞이 캄캄하고 절망스럽습니다. 평생 패배자와 실패자로 살 수 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누가 계십니까? 주변에 누가 보이십니까?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태 8:17)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 오신 분이시지만 우리의 영혼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오신 분이십니다.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내세적으로 해석하시는 분이 아니라, 문제를 직접 해결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 책임자. 문제의 해결자,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만 아뢰지 말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뢰고 그분께 맡겨서 우리의 미래가 꿈과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 언제나 소원과 소망이 가득차야 합니다. 아멘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만인의 왕이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이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베데스다 연못의 물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병자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그는 불평과 원망으로 일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못 속에 먼저 들어 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병이 나을 줄 알았으므로 자신을 부축해서 못 속으로 넣어 줄자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천사가 간혹 내려와 베데스다 호수의 물을 요동치게 함을 기다리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을 그 물 속에 넣어 줄자가 없을 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먼저 물속에 들어 가버린다고 불평을 토해내었습니다. 그 못가에는 다섯 행각이 있었고, 그 행각 안에는 절름발이, 혈기마른 자, 맹인 등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가 정확하게 무슨 질병에 걸렸으며 몇 년 동안 그런 기회가 자신의 것이 되기를 기다려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앞으로도 기회를 상실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낫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못 속에 제일 먼저 넣어 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질문에 뜻밖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낫고 싶으면 YES 아니면 NO 라고 답해야 하는데 그는 답변 대신 오로지 주변 환경과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만 늘어놓았습니다. 자신의 병세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고침 받아도 좋고 그대로 있어도 좋다는 것이었는지 만인의 왕이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이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베데스다 연못의 물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병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약한 존재인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진실로 필요한 예수님들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데스다 연못 같은 다른 곳에서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또한 남의 말만 듣고, 소문만 듣고 또한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경험을 중시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보게 됩니다. 해결책은 바로 우리 앞에 계시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이곳에 있는 여러분들도 위대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 하는 정말 승리한 삶을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제 2장 걸어가야 합니다.

다같이 8,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통해 그 병자의 병이 낫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이 이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관자임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병자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병자는 자신의 처지를 훌훌 털어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신 있게 자리를 박차고 걸어갔습니다. 그 이후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8년 된 병자는 이제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습니다. 실패자와 패배자의 삶으로 살아야만 했던 삶이 예수님 한분으로 180도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엔 힘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이 생깁니다.

(짝짝짝! 대한민국~ 지난 6월은 지구촌 축제인 월드컵에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축구공 하나에 우린 어느새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전국의 거리는 온통 붉은 물결로 가득 찼고 승리의 함성은 늦은 새벽까지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우리는 조 예선을 통과하며 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이라는 엄청난 수확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실력을 낮게 보았던 세계는 우리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큰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우리의 결과는 뻔할 것이라는게 지배적이었지만 우리는 상대에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의 강호들과 당당히 맞서 싸웠습니다. 우리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이 바로 이렇습니다. 실패와 패배에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감으로 도전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설사 실패와 패배가 38년이 된다 하더라도 길어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 도전하는 것이 바로 승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 죄인은 대학교 3학년 가을 이 곳 바이블 아카데미에 오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느꼈던 예상과는 달리 대학생활에서 느껴지는 극도의 허무감과 상실감은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어릴 적부터 늘 이어 온 거라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겉으론 아무 이상 없이 보일지는 모르지만 내적으로는 수년 동안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병에 씨름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몸도 불편하고 정신까지도 무능하게 만드는 가난이 가장 무서운 적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저에겐 해당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가난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아니 가난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실에 소파가 가지런히 놓여있고,
넓고 큰 방이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큰돈을 벌기 위해 중동의 더위와 모래바람과 싸워야만 했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생선 비린내 냄새를 맡아가며 모아둔 꼬깃꼬깃 돈으로 가정을 책임지셨습니다. 그렇지만 전 몸이 불편하지도 정신이 무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한 발짝만 움직이면 마치 낭떠러지에 떨어져 버릴 그런 위태로운 긴장감속에서 살았습니다. 언제부터가 시작된 부모님들의 잦은 다툼은 제게 너무나 큰 고통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툼의 빈도수는 점점 늘어나기만 하였고, 단순히 다툼이라고 단정하기엔 제 상처는 너무나 컸습니다. 욕을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 어머니 약 돋구는 아버지, 전 누구의 편을 들지도, 말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는 한쪽 팔에 미세한 핏자국이 묻어 있는 붕대를 동여매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심하게 부은 자기 모습을 거울로 바라보며 심하게 울고 계셨습니다. 차라리 누군가 한명이 죽는 것이 서로에게 더 낫은 상황이라면, 그렇게 됐음 하는 바램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매번 어머니의 쓸쓸한 빈자리를 느껴야만 했습니다. 들쑥날쑥한 퇴근시간으로 아버지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집안일은 당연히 저와 동생 몫이었고, 어린나이에 빨래, 설거지, 청소 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저는 너무나 조용해져 있었습니다. 마치 벙어리처럼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성적은 더 이상 곤두박질 칠 때도 없었고, 그로 인해 심한 좌절감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미움은 여자들에 대한 미움으로 나타났으며, 여동생에 대한 미움으로 나타났습니다. 오히려 서로 의지해야 할 여동생을 괴롭히며, 심지어 때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못난 오빠였습니다. 그렇게 고통은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어 도저히 빠져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저에게 나타 나사 이 죄인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무엇이든지 전 그 상황에서 빨리 치유 받고 싶었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시작한 신앙생활은 저에게 유일한 낙이였습니다. 비록 이성친구의 외모에 반해 시작된 신앙생활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38년 병자와 같이 학창시절 인생의 큰 좌절감으로 패배감에 젖어 있던 이 죄인에게도 다가와 희망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부족한 믿음이었지만, 믿음 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큰 행복이었습니다. 빌립보서4장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니라.>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라면 제 인생은 실패자가 아닌 성공자의 삶임을 깨닫고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고자 노력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님을 소유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 다시 큰 상처에 빠져야만 했습니다. 입시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패배자라는 생각에 예수님을 정죄하고 불신하며 다니던 교회를 뛰쳐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패배자로 인식 속에 겨우 들어간 대학이었지만 대학생활은 허무함이었습니다.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성적은 잘 나온 것도 아니고 술과 담배와 이성 친구에 찌들며 허무감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삶속에서 제 마음을 낫고자 하는 소망을 두신 예수님께서 제 곁에 다가오셨습니다. 어느 때와 달리 맛없는 식당 밥을 먹으며 강의실로 가는 길에 선뜻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다름 아닌 앙케이트 조사였습니다.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응했는데 응하다 보니 기독교였습니다. 얼굴이 좀 일그러지며 핸드폰 번호 적는 란에 좀 더 심사숙고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죄인을 인도한 이삭 목자님은 화요일마다 도시락모임이 있다는 말에 저를 달콤하게 유혹의 손길을 보냈습니다. 어머님 없는 전 무엇보다 정성스런 식사가 너무나 그리웠고 그런 제 마음을 예수님은 살며시 다가오셨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이 곳 생활을 하면서 마치 예수님처럼 서로 존칭을 사용하며 자신들을 낮추는 목자님의 모습과 기쁨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감동 받았습니다. 또한 같은 또래의 학생들과 어울리며 학생회 시간에는 소감을 발표하며 서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통해서 쉽지는 않았지만 라이프 소감을 발표하며 목동선서를 하였습니다. 지난 날 학생회를 보면 아직도 가슴이 설레고 벅찹니다. 학생회는 많이 연약 했지만 그 인원들에 대해 항상 감사했고 행복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인원들이 지금은 다 떠나 보이지 않고 황량한 들판 같은 지금 학생회를 보면 눈물이 나기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준용, 재훈 형제들을 굳건히 세워 주시고 그들의 성장을 보면서 마치 제 일인 마냥 너무 기분이 좋고 행복했습니다. 반면에 캠퍼스에 방황하는 어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낍니다. 정말 복음에 대한 열정은 너무나 강하지만 복음을 전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고 실패와 패배를 두려워하는 제 모습을 봤을 때 눈물의 기도가 절실 했었습니다. 실패와 패배를 생각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무조건 예수님께 맡기고 자신감을 갖고 한 달에 한 번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씀을 통해 더욱더 자신감을 얻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의 말씀입니다. 우리 모임이 이 말씀으로 캠퍼스에 올라가 방황하는 어린 영혼들에게 말씀을 증거 하는 삶을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또한 이 죄인이 한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고질병을 갖고 살아야만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위적으로 해결 할 때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문제를 생각하고 우리를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갖고 계신 예수님을 통해서 해결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지금 이 순간에도 “네가 낫고자 하느냐? 말씀하시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잘 듣는 가운데 우리의 고질병이 치료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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