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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연구자료

주제 사강 주는 그리스도 문제 풀이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2-07-03 00:00:00
조회수 : 792
321
여름수양회 주제 4강 문제
주는 그리스도
말씀 마가복음 8:27-38
요절 8:29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이태리 밀라노에 살던 루도빙코 공작에게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3년 간의 작업 끝에 그는 그림의 초본을 완성하고 그것을 친구에게 주면서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때 다빈치의 친구는 오른손에 들려 있는 잔을 가르키면서 그 잔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사실적이어서 진짜 컵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빈치는 갑자기 붓을 들어서 컵을 지워 버렸습니다. 친구가 당황하면서 왜 그러느냐고 묻자 다빈치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 것도 이 그림에서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네"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거나 생활하거나 그곳의 중심에도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도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1.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이샤라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 때 제자들에게 무엇을 질문하였으며 제자들의 대답은 무엇입니까?(27,28)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27절을 보십시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이샤라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셨습니다. 이곳은 헬몬산 밑에 있는 마을로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입니다. 그곳에 갈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은 주로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떡을 주시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통하여 떡을 얻고 예수님이 왕이 되었을 때 한 자리 하고자 하는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는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아는 데 관심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무리나 제자들이나 바리세인들의 관심은 공통점이 현실적인 유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에 대해서, 장학금이나 취업과 직결되는 성적에 대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 학사나 사모님들은 직장에서 받는 월급에 대해서 자녀들의 건강과 성적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 목자들은 양들의 성장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런 무엇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아는 데 관심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요즘 학생들도 연예인 생일 날짜는 관심을 갖고 알고자 하고 영어 단어 하나는 더 외고자 해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자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취업정보에 관심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는 소닭 보듯이 외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한 복음 17장 3절에 보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에 보면 예수님이 누구신줄 알고 구하면 그분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 때 영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만족이 있습니다. 영원한 기쁨이 있고 영원한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는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3절에서 예수님 안에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들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8장 17절에서 예수님께는 우리의 병을 짊어지셔서 우리를 건강하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신명기 28장 12,13절에는 꾸어주고 머리가 되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 이를 알 때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자 힘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6장 3절에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임하심을 새벽빛과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빛이 비취고 어둠이 물러납니다. 비가 내려서 생명이 자라나듯 생명이 자라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면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복덩어리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복이 임하게 됩니다. 건강과 부와 물질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되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하자 예수님의 소문이 무리들 가운데 퍼졌습니다. 무리들 가운데 더러는 세례요한이라고 하고 더러는 엘라야라고 하고 더러는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며 전국민의 인기를 얻었던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헤롯왕은 자신이 죽인 헤롯이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떡 조금으로 사르밧과부를 먹이고 죽은 자를 살리고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한 능력있는 엘리야와 예수님이 흡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왕상 17:8) 예수님은 말씀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수 많은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첫 번째 표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계명을 전해주고 말씀을 가르친 모세와 같은 선지자와 예수님이 흡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출) 모세가 애굽의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하며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이뤘듯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시대에는 예수님을 독립운동가로 생각했고 해방직후에는 독재정치에서 해방시켜줄 민중의 지도자로 보았습니다. 요즘에는 정신적인 질병의 치료자, 경제문제를 해결해줄 최고경영자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번영 성공 축복에 관심을 갖습니다. 예수님을 슈퍼스타로 보는 사람도 있고 외계인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들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고 본질을 보지 못하고 현상만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절대적인 분으로 보지 않고 상대적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고 훌륭한 인간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복주시는 분으로 오십니다 병고치는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호박 넝쿨을 잡아다니면 호박은 따라입니다. 우리 낚시하는 법을 배우면 고기는 잡힙니다. 뿌리와 나무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물어보셨으며 제자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습니까?(29) 주는 그리스도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예수님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하느냐" 마라도 태권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는 인격적이고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주관적인 질문입니다. 이는 백과 사전을 찾아보거나 인터넷에 검색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사귄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이는 누구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기초로 해서 주관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결혼하고 싶으면 결혼 상대자로 생각한다고 분명히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단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결혼한다고 대답해 놓고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다." 이는 짧은 대답이지만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대답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시고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일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로다" 사마리아 여자도 자신을 알자 선지자로 압니다. 그러나 예배를 가르쳐주자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당시에 로마황제를 그리스도로 생각하였습니다. 소경도 눈을 뜨고 나서 선지자로 예수님을 압니다. 그러나 핍박을 받은 후에 예수님을 인자 곧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과 광풍을 잔잔케 하신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니님의 아들로서 예수님만이 절대적인 구원자이십니다.(요한복음14:6) 사람들은 기독교가 독선적이라고 말합니다. 불교나 유교나 이슬람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포용적인데 기독교만이 배타적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종교의 추구하는 목적은 다 똑 같이 인간의 행복이고 다만 가는 길만 다르다고 말합니다. 아무 종교나 하나 선택해서 믿으면 된다고 말을 합니다. 이런 것은 다원주의나 상대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요즘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세계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1905년 상대성이론, 1927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이론을 각 분야에 전파했습니다. 사회이론에서도 다원주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노장사상도 핵심도 이런 다원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존획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졌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물론 우리가 여러모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구원과 진리에 대해서까지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불교의 석가나 유교의 공자나 이슬람교의 마호멧은 모두가 인간입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모두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도 인간이 만든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어느 종교나 선택적으로 믿어도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종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러 주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 외에 어떤 다른 신도 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요16:6절) 베드로는 천하에 예수님 외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대에도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돈도 과학도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가 되지 못합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목자도 양도 우리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핑클이나 god와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같은 인기 연예인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유일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힘을 바쳐서 사랑할 유일한 대상입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신앙을 가진 무리 신앙입니다. 이들은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지 믿음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석학 임어당은 중국의 많은 사상을 섭렵하고 ,생활의 발견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노년에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양은 떴다. 촛불을 꺼라." 우리는 태양처럼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모든 촛불을 꺼야 합니다. 인간적인 지혜의 촛불을 꺼야합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지금 살아계신 왕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왕보다 크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보면 그리스도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그리스도는 실제적인 권세자입니다. 그리스도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중풍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세자입니다. 생사화목과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친히 살아서 세계선교의 역사를 진두지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공회의 제사장이나 헤롯왕이나 로마 총독이나 로마 황제보다 더욱 크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그들의 살아 있는 임금으로 믿고 이들 세상 권세자들 앞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사도들에게 그리스도는 쇠사슬을 벗겨 주시고 옥문을 열어주시는 지극히 크시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헤롯이나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보다도 더 높고 크신 임금으로 믿었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비록 자신이 쇠사슬에 매여 있었을지라도 세상 권세자 앞에서 당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을 이렇게 현재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백은 책임을 져야합니다. 고백을 하면서 우리의 인격이 성숙합니다.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우선시하며 순종하며 제자로서 살아야합니다.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에도 거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셔서 우리의 생사화복, 직장, 가정, 학과, 친구, 건강 등 모든 문제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전생애를 책임지시고 인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문제 많은 우리에게 놀라운 상담자요. 무능한 우리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의지할 것 없는 우리에게 영원히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시오.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경배의 대상이시요.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돈이나 연인이나 직장 상관을 그리스도로 모시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두려워 떨면서도 예수님을 인하여 떨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데서 만족을 얻고자 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항상 세상적인 것에 우선적 가치를 두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맨나중에 시간과 물질을 드립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는다면 예수님께 최우선적 가치를 두고 예수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구원을 얻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0장 9,10절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순간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고백하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친히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살아계심을 여러 표적으로 드러내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 천국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천국에 가기까지 친히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죄많은 시대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높여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그리스도로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임을 밝힐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천하 만민에게 증거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의 할 일을 증거하십니다. 신명기 28장 12,13절입니다.




3. 예수님은 인류의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31) 예수님은 십자가를 듣고 항변하는 베드로를 어떻게 책망하셨습니까?(32) 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완성되십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음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은 영웅적인 업적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전통과 관습에 매여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는 말씀하십니다. 다니엘은 인자는 그리스도로 말합니다. 영원한 권세를 가지고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된 메시야로 주권적인 메시야로 오십니다. 그리스도로서 하실 일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십니다. 우리는 누구든 잘못을 범하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는 인간의 죄값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죄는 생명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으로 인간의 죄값을 대신하여 값을 치러 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희생적으로 사랑하셨고 죽기까지 섬겨 주셨습니다. 구약에는 죄에 대한 제물을 드렸습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불완전하고 일시적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드렸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망은 도처에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사망은 우리에게 좌절과 절망과 허무와 실패의식을 심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사망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진정한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것을 영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님이 드러내 놓고 십자가를 가르치자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책망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민족적이고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야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하여 독립국가로 만드는 메시야 였습니다. 인류의 그리스도가 아닌 유대인의 그리스도로 생각하였습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의 메시야였습니다. 그는 다윗과 같은 지상 메시야 왕국을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모세와 같은 독립국가를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 나라에서 한 자리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단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단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만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란 십자가 없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메시야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단의 역사는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신앙생활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신앙생활은 부패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신앙생활은 인본주의가 됩니다. 유사이래 사단은 끊임없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유혹해 왔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무렵에도 자신에게 절만하면 십자가 없이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십자가에 마지막 돌아가실 때도 사단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했습니다. 이는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선진국에서 새벽기도의 십자가를 없앴습니다. 우리나라도 많은 교회가 새벽기도의 십자가를 없애고 있습니다. 전에는 삼일예배, 주일 저녁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주일날 하루 예배드리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도 집에서 TV를 통해서 드리는 것으로 대체하고자합니다. 이것도 번거롭다고 그만 듭니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세 번 교회에 간다고 합니다. 태어나서, 결혼해서, 그리고 죽을 때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우리 UBF는 말구유 역사를 본받고자 시작되었습니다. 말구유역사는 하나님께서 말구유에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말구유역사는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과 겸손이 담겨진 것입니다. 우리는 말구유역사를 배우고자 주님께 없는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쪼개어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희생을 받으셔서 캠퍼스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십자가를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가르치셨습니다. 명령하고 지시하고 벌주는 그리스도가입니다. 축복과 영광만 생각하는 기독교입니다.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4,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고백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까?(34) 자기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음란하고 죄많은 시대에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35-38)

34절을 보십시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난 없는 영광의 메시야관을 자졌습니다. 이런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대인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나 맞아?" 엄마가 대답했습니다. "그래 너 맞지" 그러자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왜 나에게 나라고 하지 않고 너라고 하는 거야" 이는 현대인이 얼마나 자기에 집착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기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자존심, 내 계획, 내 감정보다 예수님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받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다가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서 타협하지 않으면 핍박을 받습니다. 거짓된 세상에서 진실되게 살려고 뇌물을 받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할 수 있습니다. 직장 생활에서 술을 먹지 않다보면 사람들에게 외면 당할 수 있습니다. 양떼들을 감당하다 보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신자라고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책망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십자가입니다. 어느 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목숨이 위태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십자가는 예수님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형제도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절대적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양다리 걸치며 신앙생활하기 쉽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적당히 따르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세상적인 즐거움을 적당히 즐기며 따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의 전생애를 주님께 드리겠다는 각오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하면 억지로 져야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갖은 인상을 쓰면서 가야 하는 길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이 그렇게 괴롭고 슬픈 것만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십자가를 지는 사도들이 기쁨과 감사로 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들은 공회에서 매를 맞았을 때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를 개척할 때에 발가벗겨서 매를 맞고 차꼬에 채워져서 감옥에 갇혀져 있을 때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매맞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의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움심을 받을 때 기쁨으로 십자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성령으로 육의 소원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육적인 소원, 인간적인 소원과 영적인 소원이 항상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육의 소원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육의 행실을 죽여야 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는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최소한 우리가 감당할 십자가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없이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면 자신은 아무것도 없이 다 없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산제사로 드려야합니다. 회개의 제사, 순종의 제사, 감사의 제사, 사랑의 제사를 드러야합니다. 매일 나의 이기심 교만 불평 탐심을 죽여야합니다. 손해보고 희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35-3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자기 부인과 십자가 없이 자신이 살고자 하면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신을 부인하면 우리는 목숨을 구원받게 됩니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가장 귀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십자가를 지면 예수님은 많은 생명의 열매를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신 것처럼 십자가를 지면 우리에게 영광을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은 무엇을 죽을까 고민해야합니다. 무엇을 희생할 까 섬길까?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 세상은 물질적이고 육신적이고 인본적인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기 쉽습니다. 당시에 유대인은 표적을 자랑하였습니다. 로마인은 군사력과 부력을 자랑하고 그리스인은 지헤를 자랑하였습니다. 요즘도 물질주의 시대이요. 인본주의 시대입니다. 부자를 자랑하고 학벌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부활과 재림을 생각하면서 따라야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십자가외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 죄악된 시대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생각하면 십자가를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율법주의는 행위 중심입니다. 십자가는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무엇을 잃을까 무엇을 죽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신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서 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주셨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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