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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에베소서2장 강해 2부1(2:11-22) 화평이신 예수님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2 00:00:00
조회수 : 4,812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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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이장 강해 이부 화평이신 예수님.

에베소서 211-에베소서 222

요절에베소서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뿌리 깊은 민족적인 적개심을 비롯하여, 인종간의 적개심, 계층간의 적개심, 부족간의 적개심, 신분간의 적개심, 지역간의 적개심, 개인간의 적개심 등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마음에 분노와 적개심을 품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적개심을 어떻게 물리치고 평화를 이룩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인류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적개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개인의 구원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나 혼자만이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른 형제들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우리는 다른 형제들과 연합하여 집을 지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회, 새 질서, 하나님 나라, 교회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끼리 모여서 천국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아름다운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분노와 적개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개인의 구원을 말한 후에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 화평을 이루는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기 전을 잊지 말 것)

 

11a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생각하라"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씀은 기억하라, 회상하라, 과거를 돌이켜 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잊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긋지긋한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개구리가 올챙이 적 잊어버린다고 우리는 과거의 구원받기 전의 모습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왜 과거를 기억하라고 할까요? 우리는 6월이 되면 북한에 대한 경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6.25를 기억하라"는 구호를 듣습니다. 또 일본이 어떤 나라인가를 상기시키기 위해 "일제 36년의 통치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태평양 전쟁 때 미국 정부가 국민의 항전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슬로건은 "진주만을 기억하라"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과거를 기억해야 현재를 똑바로 살 수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의 과거를 잊어버리면 구원의 은혜도 잊어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것은 자신이 구원받기 전에 얼마나 죄인이었는가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것은 자신이 과거 양똥치던 목동이었던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모습을 잊지 않을 때 아무리 충성해도 자기 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겸손할 수 있습니다.

 

(육체로 하나님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구원받기 전의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첫째, 에베소 교인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란 개나 돼지와 같은 존재란 뜻입니다. 개와 같이 더러운 것을 먹고, 더러운 짓을 하던 자입니다.

둘째, 무할례당이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가 되라고 말씀하시고 할례를 행하셨습니다. 할례받은 자는 사명을 갖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나 할례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니요, 아기 자기와 함께 소시민적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우리는 과거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전부인 소시민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사명이 없는 자였습니다.

셋째,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빛이므로 그들은 어두움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므로 우리는 죽음과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죄 문제도 죽음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던 자들입니다. 사망권세에 눌려 살던 자입니다.

넷째,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라는 시민권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22:28).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많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천국의 시민권이 없던 자입니다.

다섯째,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습니다. 약속의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우리는 영적으로 굶주림, 기근에 시달려 빼빼 말라 가고 있었습니다. 약속의 언약은 피의 언약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여섯째,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없던 자입니다. 세상에 있는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죽은 소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권태로웠습니다.

일곱째,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절대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우리는 무가치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때 우리는 미래가 없고, 방향과 목적이 없고, 되는 대로 살다가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영원히 지옥 불에 들어갈 자들입니다.

 

(피로 가까워짐)

 

13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과거에 비참하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해 주셨습니까?

첫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자들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집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허심)

 

14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문에 보면 화평이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만이 홀로 우리의 화평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이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 어디서도 참된 화평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의 첫번째 표적은 평화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죽는다 해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폭풍우가 불어와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평화가 생기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화해가 생깁니다. 적대감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둘로 하나를 만듭니다. 예수님의 피로 둘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허신 담은 무엇입니까? 우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성전을 쳐다볼 수 있었지만 성전에 접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성전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는 1.5m가량의 돌로 쌓은 장벽이 있고, 곳곳에 경고문이 있었습니다. "어떤 외국인도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 너머로 들어올 수 없다. 그같이 하다가 잡힌 사람은 누구든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그 자신에게 있다." 당시에 유대인은 이방인과 식사도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사업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났을 때 유대교에서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의 비난을 받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식사하다 이방인이 오니까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이 담이 헐어졌습니다.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님 안에서 가까워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평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담을 허심)

 

다음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이 헐어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번 염소나 송아지의 피를 흘려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에는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이 커튼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아빠 ,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피의 의미)

 

오늘날의 시대에도 많은 담들이 있습니다. 이전에 이데올르기의 담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는 높은 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련이나 중국은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담은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많이 무너졌습니다. 서독과 동독 사이에 있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남북한 사이에 휴전선의 철조망이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이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장막도 언젠가는 완전히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에는 동서의 장벽이 있습니다. 동쪽은 한나라당, 서쪽은 민주당이 나누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대간의 장벽이 있습니다. 기성세대는 신세대를 버릇이 없다고 합니다. 신세대는 기성세대를 고리타분하다고 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장벽도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를 착취계급이라고 하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게으름뱅이라고 합니다.

신분의 장벽도 있습니다. 신분이 없어진 지금도 알게 모르게 계급의식의 장벽이 있습니다.

노사간의 장벽, 교수와 학생간의 장벽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 사이에도 알게 모르게 장벽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인한 담이 있습니다. 이런 담을 헐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어떤 철학도 어떤 이론도 어떤 애국심도 이를 헐 수 없습니다. 예수의 피는 하늘과 땅 사이의 담을 헐 뿐 아니라 인간사이의 담을 허십니다.

이 담은 근본 원인이 외적인데 있지 않습니다. 내적인데 있습니다. 담의 원인은 내면의 죄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죄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런 죄를 용서 하사 하나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화해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주인이 되어 살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할 때 누구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에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으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원수라도 하나가 됩니다. 잠언 16:7에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싸움의 원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과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 자기중심적 사고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화목케 하신 것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케 하십니다.

 

(율법으로 인해 생긴 적개심)

 

15절을 보십시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원수된 것은 적개심을 뜻합니다. 이는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이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율법 자체를 부인하거나 율법을 폐기 처분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 때문에 생긴 장애물을 제거한 것입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좋은 것입니다. 율법은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기준과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라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율법적으로 요구합니다. 왜 공부를 안하냐? 왜 늦게 일어나냐? 왜 소감을 못쓰냐? 왜 방이 이렇게 지저분하냐? 왜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느냐? 이런 율법은 서로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서로 간에 원수가 되게 합니다. 남에게 요구하며 자신도 하지 못하니 자학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을 다 이룬 것으로 인정해주십니다. 우리는 이제 감사하여 은혜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피는 우리에게 이해와 용서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피는 사랑을 줍니다. 예수님의 피는 성령의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불쌍히 여깁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며 사랑으로 격려하여 율법을 지키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의 피는 율법으로 원수된 자들을 화해시켜 주십니다.

제가 부끄러운 고백을 하겠습니다. 저와 요한이 사이에는 담이 있었습니다. 저는 요한이가 적어도 반에서 10등 안에는 들어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에서 캠퍼스의 목자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다 온 요한이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1때 각과목의 시험을 보고 틀린 개수 대로 매로 때렸습니다. 그러나 성적은 예상보다 더욱 떨어지고 실망한 나머지 요한이를 심하게 때렸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요한이는 마음에 나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습니다. 나도 요한이를 보면 화가 났습니다. 내가 좋은 성적을 기대한 것은 율법적인 요구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은 서로 간에 적개심만 만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요한이와 대화를 통해서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포기하고 내버려둔 후에 요한이는 성적이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사랑 안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한 새사람을 지으심)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해하여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십니다. (one), (new), 그리고 지어 라는 말은 그 각각에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라는 말에는 그리스도 안에는 불평등이 없다는 말입니다. 한 성령에 의해 한 믿음으로 구속받아 평등한 사람이 됩니다. 여기에는 계급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획일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라는 뜻은 시간적인 의미에서만 새롭다는 뜻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롭다는 뜻입니다. 이는 어떤 다른 인류와도 비교될 수 없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인류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를 볼 때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전혀 차이가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들은 서로 본질적으로 그 목적이 다르고, 방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종착역이 다릅니다.

지어라는 말은 창조하다는 말로 개조나 개선의 뜻이 아니라 전혀 새롭게 창조하신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창조하신 것과 같이,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의해 완전히 새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이 한 새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한 새 사람은 서로 화해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새사람은 과거 분쟁하는 사람이 아닌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화해의 역사)

 

이 화해의 역사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파벌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계급도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화해의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해도 형제와 불화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큰집에 살아도 날마다 싸우면 소용이 없습니다. 잠언에는 고기를 먹고 살면서 싸우는 것보다 채소를 먹으며 초가집에 사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일보다 우선이 화해입니다. 업적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화해입니다.

대부분 일을 앞세우니까 싸웁니다. 더 잘해 볼려고 하다 보니까 싸웁니다. 일을 조금 덜하고 화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일은 조금 못하더라도 싸우지 않는데 초첨을 맞추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해시킬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도 화해시킵니다.

 

(원수된 것을 소멸하심)

 

16절을 보십시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원수된 것은 무엇입니까? 화해되지 않은 것. 분리 반목을 말합니다. 소멸한 것은 완전히 없어졌다(out to death)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된 것을 완전히 없애셨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 반목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대신 심판하심으로 이 분노의 불길을 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히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배피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셔서 하나님께로 나가게 하셨습니다.

 

(세계 평화를 이루심)

 

17절을 보십시오.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먼데 있는 자는 이방인을 말합니다. 가까운데 있는 자는 유대인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가까운데 있는 사람이나 먼데 있는 사람이나 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합니다. 곧 세계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합니다. 그럼 우리를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심)

 

18,19절을 보십시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 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 권속 곧 가족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 되어 한분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화평하게 하신 목적입니다. 온 인류가 한 가족처럼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민족, 성별, 빈부, 계층을 초월하여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한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가족입니다. 뗄레야 뗄 수 없는 가족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을 이루는 것이 인류의 번영과 화해를 위한 길입니다.

평화는 아셈, 아패크, E.U, UN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인한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보다 넒은 마음.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온 세계를 한 가족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온 세계의 가족화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마음이 좁습니다. 내 교회, 내 모임, 내 교파 중심이 됩니다. 내 지역 내 혈육, 내 민족만 생각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한 성전이 되게 하심)

 

20-2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모임을 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집의 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입니다. 이분들이 예수님을 전하여 터를 닦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모퉁이 돌은 중심을 잡는 돌이며 기초가 되는 돌입니다. 성도들은 이 터와 기초 위에 하나의 벽돌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라는 건물을 건축해 나가는 것입니다.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어 나갑니다. 이제 성도들은 혼자 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과 함께 연결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성전은 지어가는 것임)

 

사도 바울은 성전이 되어 간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되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되어 간다는 말은 becoming, growing 의 뜻이 있습니다.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되어져 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건물을 짓는 것을 보면 흉하고, 먼지가 나고, 냄새가 나고 복잡합니다. 그것이 현재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깨끗이 마감을 하고, 거기에 가구를 들여 놓고, 인테리어를 끝내면 아름다운 방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현재 교회는 때로 분쟁도 있고, 갈등도 있습니다. 현재 완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온전한 교회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부족함을 갖고 너무 자책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 절망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계속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서, 온전한 건물을 향해서 계속 지어져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부족한 것처럼 남의 부족에 대해서도 너무 책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 지어져 가면 됩니다.

문제는 집을 짓다가 그만 두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짓다만 건물을 본적이 있습니까? 상대 밑 동네에 짓다만 집이 있었습니다. 짓다 만 집은 제일 흉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장이 없이 현재의 모습 그대로 멈춰버린 교회가 가장 꼴불견입니다. 믿음의 성장이 없는 교회, 내면의 변화가 없는 교회는 추한 교회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차피 추합니다. 그러나 추한 모습이 계속 성장하면 아름답습니다.

 

(상호협력적인 관계)

 

또한 건물의 벽돌들은 상호의존관계에 있습니다. 서로 간에 협력해야합니다. 벽돌 몇 개가 빠져나가면 집이 흉하게 되고, 벽돌이 많이 빠져나가며 집이 무너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건물을 짓는 벽돌들로서 서로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처럼 다른 성도가 필요하고, 다른 성도도 중요합니다. 한 건물의 부분들이라는 벽돌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지어진 교회에는 누가 거합니까?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

 

22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 교회에는 성령님.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우리가 한 건물로 만드는 목적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이 건물에서 마음껏, 편히 사시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과 찬양과 존귀함을 받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피로 사셔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한 가족, 한 건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가족의 아버지는 하나님이고, 건물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 가족처럼 서로 사랑하며, 건물처럼 점점 온전한 집으로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Amen!!!

에베소서 2장 강해 이부 화평이신 예수님.

에베소서 211-에베소서 222

요절에베소서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에베소서 2장 이부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5 [에베소서] 에베소서2장 강해 2부1(2:11-22) 화평이신 예수님 오요한 2005-03-12
4 [에베소서] 에베소서2장 강해1 1부(2:1-10) 1은혜와 믿음으로 인한 구원 오요한 2005-03-12
3 [에베소서] 에베소서1장 강해1 사부(1:15-23)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오요한 2005-03-12
2 [에베소서] 에베소서1장 강해1 2,3부1(1:7-14) 신령한 복 II 오요한 2005-03-12
1 [에베소서] 에베소서1장 강해 1부(1:1-6) 신령한복I 오요한 200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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