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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에베소서1장 강해1 2,3부1(1:7-14) 신령한 복 II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2 00:00:00
조회수 : 2,995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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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장 강해 2부 신령한 복(그리스도 안에서 속량)

말씀 : 에베소서 17-에베소서 112

요절 :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사도 바울은 습기 찬 지하 감옥에서 쇠사슬을 차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주신 복,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생각하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신령한 복 중에서 첫 번째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계속하여 신령한 복중에서 예수님의 구속(속량)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복을 알고 우리 마음에도 바울과 같은 찬송이 넘쳐 나기를 기도합니다.

 

(구속 곧 죄사함)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다윗은 시편 32편에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우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다 허물이 많고, 죄가 많은데 만약 허물이 가리움을 받고,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욱 큰 축복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구속(속량)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구속은 구할 구(), 속할 속()자로서 노예 상태에서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죄의 노예에서 해방됐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유 상태에서는 자유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그러나 노예 상태가 되면 자유가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메데우스라는 영화에 보면 노예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하여 자유를 얻는 모습이 나옵니다. 벤허에 보면 노예 되었던 벤허가 집정관 퀸터스 에리우스의 목숨을 구해주고 그의 양아들이 되어 로마의 귀족 신분이 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언론 , 거주 이전, 직업 선택 등의 자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에 대한 고찰)

 

그러면 죄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하면 간음, 도적질, 살인들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도 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런 모든 죄의 뿌리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내가 하나님이 될 때 파생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교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중풍병자처럼 무기력하고, 세리처럼 이기적이고, 가인처럼 반항적이 되고, 사마리아여인처럼 정욕적이 되고,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처럼 성장이 없게 됩니다.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모든 것을 죄라고 합니다. 이런 모든 죄의 뿌리는 내가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깨뜨리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하나님께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반항적이 될 때 사람들은 죄를 짓습니다. 사람들을 불신하고 사람들에게 불평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런 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망은 우리가 언젠가 맞게 되는 것이지만 현재도 살아 있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사망은 우리에게 질병을 주고, 노쇠함을 줍니다. 사망은 우리 마음에 고통을 줍니다. 좌절과 고독과 슬픔과 두려움을 심습니다. 부정적 생각, 무기력함을 심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고, 죄인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 못에 들어가는 둘째 사망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 죄는 시간이 지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는 살아있는 영원히 존재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홍글씨에 나오는 딤데일즈 목사는 죄를 숨길수록 더욱 고통스러워 결국 죽기 전에 모든 사람들 앞에 죄를 자백합니다.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니코프는 죄를 지은 후 불안, 두려움, 초조를 이기지 못하여 결국은 자수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의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죄는 더욱 또렷해진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가 되면 죄는 더욱 선명하게 깨달아집니다.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이 생전에 남에게 상처 주고, 죄 지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생각납니다.

죄는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인간적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찬송가 343장에 있는 것처럼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합니다. 울어도 죄는 없어지지 않고, 힘쓰고 애써도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란 영혼에 찍힌 낙인과 같아서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꽁꽁 싸매서 숨겨 두어도 죄는 우리를 고발합니다. 우리의 양심을 찌릅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기피하고 싶어도 죄는 다시 살아납니다.

 

(그의 피로 인한 죄사함)

 

우리가 어떻게 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먼저 죄는 하나님 앞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생각하면 죄를 당연시하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면 교만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다음에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922에는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흘려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죄 문제는 다른 것으로 해결되지 않고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야 합니다. 누군가 피를 흘려야 합니다.

윌리엄 바클게이에 의하면 예수님의 구속사건 이전에는 유대인의 죄 때문에 한 명절에 약 14만 마리의 양이 피를 흘렸다고 합니다. 제사장은 죄인 옆에 양을 가져옵니다. 죄인은 꿇어앉아 있습니다. 제사장은 양의 머리에 안수하고 죄인의 죄를 전가합니다. 죄인은 일어나 자신 스스로 양의 목을 따서 피가 콸콸 솟아오릅니다. 나의 죄가 양을 죽게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에 붓습니다. 그 양은 번제단에서 태워드립니다. 이렇게 대가를 치러야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온전히 씻지 못합니다.

아무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온전히 씻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에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군병들에 의해서 구둣발에 채이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대못에 박히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저주 받는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완전히 책임을 지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가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은 바로 나를 위해서 흘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 값을 온전히 치러 주셨습니다. 이천년 전에 이미 죄 값을 치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우리는 구속 곧 죄 사함의 신령한 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사함을 주실 뿐 아니라 성령을 주셔서 죄를 짓지 않게 도와주십니다.

 

(은혜의 풍성함으로 오는 죄사함)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한 구속 곧 죄사함을 경험하셨습니까? 저는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받을 때 너무 기뻐서 한 시간을 펑펑 운 적이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을 때 다 운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나에게 죄가 절실했기에 감격도 그만큼 컸다는 말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 도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특별히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죄 사함은 우리가 대가를 치른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인간이 책임을 져야하는데 창조주가 책임을 진 것입니다. 그 값도 외아들의 생명으로 치룰 수밖에 없는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풍성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큰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큰 만큼 하나님의 용서도 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 큽니다. 우리가 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값을 치르는 길은 오직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 대신 값을 치른 것이 은혜입니다. 값이 비싸기 때문에 그 은혜는 풍성한 것입니다. 내 대신 죽으셨으니 그 은혜가 풍성합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은 크신 선물입니다.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면 죄사함을 받은 결과는 어떠합니까?

 

(지혜와 총명의 영을 주심)

 

8절을 보십시요. "이는 그가 모든 지혜의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하나님은 죄 사함 받은 사람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은 두 가지를 주십니다. 첫째는 지혜요, 둘째는 총명입니다. 지혜는 사물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집니다. 영적 분별력, 영적 가치관이 생깁니다. 지혜가 생겨 공부도 잘 됩니다.

괌에 가면 굴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 병사 하나가 거기에 숨어서 살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27년이 지났는데도 그곳에서 지났습니다. 그의 문제는 알지 못한 것입니다. 알려주어도 믿지 못하고 도망 다녔습니다. 그는 똑똑한 것 같았으나 미련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혜를 주시면 지금까지 알지 못하였던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총명은 이해력이나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죄가 없어지면 정신이 맑아집니다. 머리가 깨끗해집니다. 죄가 많은 사람은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지혜가 없습니다. 통찰력이 없습니다. 미련한 짓을 골라서 합니다. 죽을 짓을 골라서 합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온 세상이 환하게 보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부어 주셔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역사의 비밀을 알게 하심)

 

9절을 보십시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 도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죄사함을 얻으면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고 지혜와 총명이 생깁니다. 지혜와 총명이 생기면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구원역사를 숨기지 않고 알게 하였듯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비밀은 신비롭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사실인데 내가 미처 모르고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비밀을 조금씩 알게 하십니다. 세계 만민을 하나도 잃지 않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비밀은 하나님의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15절부터 구원의 계획을 예정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깊으신 뜻을 따라서 예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를 통해서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된 후에 끝이 옵니다. 그 후에는 대환난이 있고 천년 왕국이 있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지옥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으면 이런 구원의 계획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창세전 에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자녀 삼고자 예정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리고 양들이 어떻게 거듭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가 이해하게 됩니다. 세계선교가, 천안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요회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구속역사의 비밀을 알게 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통일되게 하심)

 

10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시켜 놓습니다. 서로 간에 시기하고 싸우고 죽이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갈등, 소외감을 느끼는 이유도 죄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남북 간의 갈등, 동서 간의 갈등, 부부 간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 의 약사 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 사함을 받으면 이런 모든 갈등이 해결되고 통일됩니다. 예수님은 피로 모든 담을 무너뜨립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통일됩니다. 북한도 예수님을 믿고 남한도 예수님을 믿으면 통일이 쉽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가정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성령의 힘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업을 삼으심)

 

11절을 보십시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하심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구원하고자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원대로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예정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고자 예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믿을 때 우리의 삶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를 믿을 때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정하신 대로 우리를 기업으로 삼으셨습니다. 기업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죄 사함을 받기 전에는 우리는 사단의 소유였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은 후 우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축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43:1-3)

우리는 모두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있지요? 특히 비싼 값을 주고 산 소유는 어떻게 합니까? 귀하게 간직합니다. 어떤 시련이 있어도 그것만은 보호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셔서 기업을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값을 치를 만큼 귀한 존재입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입니다. 너무 너무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나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보호해 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십니다. 어떤 질병이나, I.M.F.의 시련이 와도 넘어지지 않게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신 궁극적 목적이 무엇입니까?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심)

 

12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 도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속역사에 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 삼으시고 보호하시는 사랑을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를 택하신 목적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신 목적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가 우리의 잠재의식까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 사함을 받으면 그것이 우리의 얼굴과 말과 행동에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이런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습기 찬 지하 감옥에서도 쇠사슬에 묶인 두 손을 들어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강해 2부 신령한 복(그리스도 안에서 속량)

말씀 : 에베소서 17-에베소서 112

요절 :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에베소서 1장 강해 삼부 신령한 복(성령의 인치심)

말씀 에베소서 113,14

요절 에베소서 1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사도바울은 로마의 지하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신령한 복을 주셨음을 찬송합니다. 지금까지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수님이 속량하셨음을 찬송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신령한 복의 마지막으로 성령의 인치심을 찬송합니다.

 

(성령의 인치심)

 

13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서 너희로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신 신령한 복으로 택하심과 죄사함을 배웠습니다. 이제 세번째 복으로 성령의 인치심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먼저 구원을 계획하시고 설계하셨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만드시는 장엄한 오케스트라와 같습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그 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믿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치심)

 

첫째, 성령의 인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됩니다. 구원은 인간의 선행이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께서 거져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거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시인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하는 역사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령의 인치심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인치심을 성령 세례라고도 말을 합니다.

이 거룩한 인치심으로 성령 세례를 받을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기 시작할 때 놀랍게도 감격과 찬송과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죄를 짓는데서 멀어집니다. 나쁜 생각에서 멀어집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점점 거룩해집니다. 어떤 놀라운 신비로운 힘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이 거룩한 성령의 인치심을 경험했습니다. 단순히 의지적으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움직였습니다. 이런 성령의 인치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결코 부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도행전 18장 마지막 부분에서 아볼로라는 사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에 대한 도를 잘 압니다. 성경도 잘 압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예수도 가르치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10, 20년을 다녔어도 아무 열매 없이 해골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었어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열매)

 

그러면 우리가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그 싸인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방언을 성령의 열매와 결부시키고 이상한 신비로운 은사와 직접 연결시킵니다.

로마서 8:9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8:16에서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고 하셨습니다. 4:6에서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종합해볼 때 성령의 인치시는 경험은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 되었다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아버지라는 경험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 되었다는 확신입니다. 변하지 않는 확신이요, 지울 수 없는 확신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인생의 목적이 바뀝니다. 내 생애 전체가 예수님께 맞춰지게 됩니다. 공부하는 것이 나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나의 목표가 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비로운 체험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절망하고 실망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령의 인치심이 아직 불분명한 사람입니다. 방언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천지가 무너져도, 천사가 부인할지라도 정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확신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확신이 있으면 어떤 시험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병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이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정체의식이 생깁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정체의식이 있는 자는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불평 불만하는 것은 정체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아들로서 정체의식을 갖는 이것이 성령께서 인치시는 역사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세례입니다. 성령 세례라는 것이 이 확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시니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 됨의 확신이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천사가 와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해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을 만큼 성령의 인치심이 있습니까? 교통사고가 나고 직장을 잃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어떤 환경에도 두렵지 않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가 따라오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22,23절에 있는 것처럼 사랑을 합니다. 이사야 11장에 있는 것처럼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십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고 꼭 방언,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하는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은사는 선물이므로 주시는 이의 뜻에 따라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가 없다고 성령의 인 치심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한경직 목사님은 방언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소망교회의 곽선희 목사도, 높은 뜻 교회의 김동호목사도 방언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ubf의 이사무엘 선교사님도 방언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성령의 인침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인격과 생활의 변화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치심 후에 성화)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고 성화가 금세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고 금세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인은 죄인입니다. 못된 성격은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때로는 갈등할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성령의 인치심을 받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외쳤습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좌절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거룩한 순례의 길을 들어선 것입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깨어지고 부서지며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점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인치심)

 

둘째로 성령의 인치심은 말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구원의 복음입니다. 구원은 진리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깁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마귀는 어떤 일을 할까요? 간단합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졸게 만든다든지 고통스럽게 만든다든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생각나지 않게 빼앗아 갑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다가올 때 결코 나쁜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가장 그럴듯한 방법으로 우리의 신앙을 파괴해 옵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신앙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동기는 좋지만 결과적으로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특히 요즘은 상대적 생각으로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순종이 없으면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우리가 한 말씀이라고 믿고 순종하면 성령의 인치 심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특별히 인쳤다는 것은 무슨 뜻이 있을까요? 인쳤다는 것은 도장을 찍었다는 말입니다. 도장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권위의 인치심)

 

첫째는 권위입니다. 임금의 도장은 권위가 있습니다. 대통령이나 왕이 도장을 문서에 찍으면 국가의 권위가 생깁니다. 성령이 인치셨다는 하나님의 권위로 하나님의 아들 삼으셨다는 것을 보증 서시는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를 주시겠다는 보증입니다.

 

(소유물의 인치심)

 

둘째는 소유물이라는 뜻입니다. 말이나 소의 엉덩이에 불도장을 찍습니다. 우리 재산도 도장을 찍습니다. 성령의 인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증거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안전보장의 인치심)

 

셋째, 안전보장을 의미합니다. 안전한 우편배달을 위해서 봉인하고 도장을 찍습니다. 어떤 경우는 왁스를 발라서 끈을 넣어 가지고 인을 칩니다. 성령은 우리를 도장 찍어 안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그의 영광을 찬미함)

 

14절을 보십시요.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결론적으로 우리는 두 가지 신령한 복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통한 죄사함이고 둘째는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보증하십니다. 보증이라는 말은 확증한다는 말입니다. 미리 맛보았다는 뜻입니다. 음식을 만들 때 먼저 부엌에서 먼저 먹습니다. 먼저 맛보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하늘나라의 기쁨을 조금씩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손을 들어 찬송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수님이 죄사함을 주시고, 성령이 인을 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로 그리고 잠새의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죄사함을 받으셨습니까? 성령의 인치 심을 받으셨습니까? 이 시간 우리를 택하시고 죄사함 주시고 성령으로 인쳐주신 하나님을 온 마음과 몸으로 찬송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찬송합시다. AMEN

에베소서 1장 강해 삼부 신령한 복(성령의 인치심)

말씀 에베소서 113,14

요절 에베소서 1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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