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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에베소서1장 강해 1부(1:1-6) 신령한복I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2 00:00:00
조회수 : 5,604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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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장 강해 일부 신령한 복 I

말씀 : 에베소서 11-에베소서 16

요절 :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에베소서는 바울 서신의 꽃이요, 면류관이요, 서신의 여왕으로 불리웁니다. 존칼빈은 에베소서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구원론, 예정론이 에베소서에 들어있습니다. 그만큼 바울 신앙의 정수가 들어 있다는 뜻이지요.

사도행전의 마지막에 보면, 바울은 죄인의 몸으로 꿈에 그리던 로마에 가서 셋집에 살면서 2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합니다. 바울은 이때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에베소서는 옥중서신입니다. 에베소서는 디모데서와 같이 개인 서신이 아니고 교회 앞으로 보낸 공동서신입니다.

바울은 3차전도 여행 첫 무렵에 3년 동안 에베소 교회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했습니다. 이곳에서 제자 양성을 하여 소아시아 전역에 복음을 전했고,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로마 선교의 비전을 덧입은 곳도 이곳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곳의 제자들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쓰고 있는 에베소서는 영적인 수준이 높은 책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공부하는 말씀에는 바울의 인사와 찬송제목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이 편지를 쓰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유대인들은 발신자를 편지에 먼저 씁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되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원해서 사도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으로 사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시고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다고 예정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나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출발합니다. 내가 주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내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흔들립니까? 바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UBF로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목동, 목자로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남편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아내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목자를 만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의 양을 붙여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한국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확신이 있을 때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고, 매를 맞고, 굶주려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세우셨다는 확신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도된 바울)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보면 지금 60대에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입니다. 푸른 죄수복에, 이름도 사라지고 거기 427! 하는 식으로 물건처럼 불려지는 죄수를 상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게 보이는 사람이 감옥에 갇힌 죄수입니다. 바울은 이 감옥에 갇힌 죄수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신분을 어떻게 증거합니까? 죄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도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란 보냄 받은 자, 전권대사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예수님의 종이요 예수님의 사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종으로서 한없이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서는 사도로서 당당한 권위가 있었습니다.

각 나라에는 대사가 있습니다. 대사의 권위는 그 나라의 국력에 비례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국력이 센 미국 대사가 가장 끝발이 셉니다. 우리는 가장 높으신 그리스도요 왕이신 예수님의 사도입니다. 바울을 사도로 삼으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재판장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입니다. 부활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도로 임명하셨습니다. 이 사도로서 영적 권위를 믿을 때 사단을 싸워 이길 수 있고 불신자를 믿어 순종케 할 수 있습니다.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성도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는 saints로 성자란 말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우리는 성자처럼 구별된 삶을 사는 수준 높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선택된 민족, 구별된 민족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구별된 사람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땅에 있지만, 하늘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명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생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천국 백성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확신이 있을 때 죄악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죄와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정직한 삶, 청렴한 삶,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신실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신실한 사람들은 믿을 만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초대 성도들은 신실하고, 믿을 만하고, 의뢰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보증수표처럼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편지를 신실하게 읽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용산 시장에 가서 물건을 샀는데 그 집주인이 어느 집을 가르키며, "혹시 우리 집 저울이 맞나 안 맞나 의심스러우면 저 집 가서 달아보세요."라고 하더랍니다. "저 집은 예수 믿는 집이니까 그 집 가서 저울을 달아보면 우리 집 저울이 맞나 안 맞나 알거요" 하더랍니다. 그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저울을 달아 봤답니다. 그 집에서 어느 교회에 다니냐고 물어 봤더니 한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예수 믿는 한사람이 용산 시장에서 정직하기로 소문이 났기 때문에 저울이 의심나면 그 집에서 달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정도로 신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집에서, 나를 가리켜 "저 사람에게 물어 보면 확실하다"라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저 사람의 말은 거짓 없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까?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신실한 사람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소수이지만 대 로마제국을 뒤엎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신실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말기 성적으로, 물질적으로 타락했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순결하게 살았습니다.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사위나 며느리로 얻으면 믿을 수 있었습니다. 타락한 이 시대에 예수 믿는 사람은 순결하고 정직하게 살아야합니다. 바울은 신실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에베소서에서 11번이나 나오는 중요한 사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내가 먹기 전에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음식을 씹고, 소화시켜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구원, 능력을 나의 것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은 바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의 옛사람도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바로 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할 때 나도 새 생명인 성령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은 바로 나에게 영광을 주시기 위해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심으로 우리는 하늘의 영광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렇게 믿고 사는 사람이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이 신실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은혜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호의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평화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평화는 전쟁이나 다툼 후의 화해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과 화해하고 사람들과 화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과 평화하고, 사람들과 평화 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서 찬송함)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바울의 첫 마디는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바울은 노년에 습기 찬 지하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처량하고 슬픈 처지입니다. 바울은 40대 중반에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근 20년 동안 아시아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는데, 지금은 예수님 때문에 로마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습니다. 죄수들은 짐승처럼 쇠고랑에 묶인 채 콩밥을 먹습니다. 신참 죄수들은 고참들한테 얻어맞기 일수이고 변기통 곁에서 새우잠을 자야 합니다. 북송 장기수들은 나는 1.3평의 화장실에서 20년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형을 다 살고 나와도 전과자로서 붉은 꼬리표가 따라다녀 취직도 안 됩니다. 한 세상 살면서 제일 가보고 싶지 않은 곳이 감옥입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도 사람인지라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거나, 아니면 최소한 섭섭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낙심할 수 있습니다.

 

(신령한 복을 찬송함)

 

그런데 무엇을 찬송합니까?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복은 여러 가지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특히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선택하심, 성자 예수님의 구속하심, 성령 하나님의 인치심을 찬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학점 맞고, 월급이 올라가고 보너스를 타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질병이 낫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하는 일마다 잘되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람들은 복하면 물질적인 복만을 생각합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떵떵거리며 사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가 되고, 고시에 패스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고, 돈을 많이 벌어 남부럽지 않게 사는 삶을 보며 저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물질적인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정신적이고 영적인데서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을 하나도 받지 않았지만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적 혜택을 많이 받았지만 감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은혜를 받은 사람은 물질이 있든지 없든지 감사와 찬양이 가득합니다. 그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습니다. 그는 지하 감옥에 있었지만 영적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 구원의 은혜를 받았을 때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저는 처음 거듭났을 때 너무 감사해서 십자가만 들어간 찬양을 부르면 감격이 마음에 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찬양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이런 감사와 찬양을 잃어버린 것을 회개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받은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찬송은 신앙의 척도입니다. 기도가 살아 있고 말씀이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저절로 찬송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주신 복)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복으로 인하여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령한 복을 느꼈습니다. 신령한 복을 경험했습니다. 신령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형제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였습니다. 서자는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서자가 아닌 적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시장의 아들이나 대통령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먼저 부르면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령한 복은 무엇입니까? 신령한 복은 세상 복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복)

 

신령한 복의 첫째 특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특징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하늘이란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하늘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신령한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물론 오래 사는 것도 복입니다. 승진하는 것도 복입니다. 좋은 학점을 받고 월급을 받는 것도 복입니다. 세상에서 형통하게 살 수 있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나쁜 세상에서 형통하게 사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all A학점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컨닝을 해서 all A를 맞으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은 복입니다. 그러나 뇌물을 받든지 부동산 투기를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포주가 창녀촌을 운영하여 부자가 되는 것도 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통하여 받는 복이 신령한 복입니다. 하나님이 드러나는 복이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을 받게 하시고 영생을 주시며, 성령의 충만함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다음 4-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신령한 복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령한 복으로서 선택, 구속, 인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택하심)

 

4절을 보십시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바울이 말한 신령한 복의 첫번째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은 선택입니다. 선택은 에베소서와 성경 전체의 핵심적 진리입니다.

먼저 생각해 볼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 은혜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1516절에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과 은혜의 결과입니다. 내가 잘나서 똑똑해서 많은 사람 가운데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계 만민 가운데서 선택하셨습니다. 만민 중에 아브라함을 선택하듯이 나를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세계 만민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이요, 부르심이요, 사랑입니다.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은 내가 깨닫든 못하든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배에 나오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의 삶을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십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창세 전에 선택한 복)

 

선택은 임기응변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2천년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도 아닙니다. 선택은 이 지구가 생기기 전부터,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선택되었습니다. !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창세 전에 선택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그 많은 난자의 주기와 그 많은 정자 속에서 왜 하필이면 내가 태어났을까요? 그렇게 많이 피임을 하는데 왜 내가 태어났을까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진리가 평상시는 잘 영접되지 않습니다. 예수 믿을 때는 내 힘으로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을 깨달은 날 모두가 하나님의 선택이고 부름이고 예정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했을 때 이 하나님의 선택이 깨달아집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주권 편에서 과거를 보면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라이프소감을 쓰다 보면 그것이 깨달아 집니다. 내가 그때 왜 그렇게 아팠고, 왜 그런 죄를 지었고, 왜 그런 고난을 겪었는지 알게 됩니다. 과거를 돌아볼 때 오히려 과거의 모든 사건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과 섭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과거의 모든 사건이 알알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슨 고백을 합니까? 내가 하나님을 몰랐을 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셨구나. 내가 예배드리기 전에도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기 전에도 하나님은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를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을 지니고 있었구나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기가 막힌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가 있었구나 알게 됩니다. 그러면 눈물이 납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모태에서 나를 지으셨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니다 이천 년 전부터 계획하셨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다 천지창조 전부터 나를 계획하셨구나. 믿어집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믿으면 세상이 긍정적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부모도 없는 집 가장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11:4).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시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노예가 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택하심 편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41:8) 하나님의 선택 주권을 영접할 때 우리도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섬세하고 정확하게 인도하셨나 깨닫고 놀라게 됩니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의롭다히심을 하신 후에 반드시 영화롭게 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생깁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 후에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택한 후에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호적을 올리고 나서 키우는 것입니다.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호적에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이요 흠이 없는 것은 소극적인 목적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흠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흠이 생깁니다. 상처가 많이 납니다. 누구나 수치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땅에 묻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수치가 다 드러나면 쥐구멍이 열개라도 숨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전히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주홍 같은 죄가 있을지라도, 우리의 과거가 말할 수 없는 수치와 부끄러움이 있을지라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예수님의 보배피로 씻어 주십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고난을 주사 우리를 훈련하시고 단련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한 자로 변화되게 하십니다. 흠이 없는 자로 변화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사랑 안에서 거룩하게 하심)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동기가 무엇입니까? 4절에서는 사랑 안에서라고 했고 5절에서는 그의 기쁘신 뜻대로라고 했습니다. 영어 문맥에서 보면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전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그것뿐이십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합니다. 왜 사랑하는지 물어 보십시오. 그것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냥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못나고, 엉터리고, 형편없고, 무절제하고, 그렇게 변덕 많고, 그렇게 추한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 한 가지를 보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깊으신 뜻입니다. 여기서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하나님의 식구로 초청해 주셨습니다. 초대해 주실 뿐 아니라 호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양아들 삼아 주셨습니다.

 

(자기 아들로 예정하심)

 

5절을 보십시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로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기쁘신 뜻대로 자녀로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먼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예정이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예정론을 너무 확대하지도 말고 축소하지도 말아야합니다. 오해하지 말아야합니다. 먼저 우리를 아들로서 호적에 올리고자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 되도록 계획하시고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과 섭리 가운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선택하시고 예정하사 자녀 삼으셨습니다. 설계자가 집을 지을 때 설계도를 만들고 집을 짓듯이 우리를 예정하시고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예정은 운명과 다릅니다. 운명은 사단이 우리의 삶을 결정한 것입니다. 우리를 죽이고자 결정한 것입니다. 예정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생명을 주시고자 결정한 것입니다. 운명은 자유 의지를 무시하고 우리를 굴리는 것이지만 예정은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다 하시기 위해서 예정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은혜의 영광을 찬미함)

 

6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아들 삼으신 것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거져 주셨습니다. 이 지구, 내 생명, 내 가족 모두 거져 주셨습니다. 은혜도 거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거져 삼아주셨습니다. 우리 구원도 행위로 주셨다면 우리는 불안합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수고의 대가로 구원을 얻지 않았습니다. 장사해서 돈 버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해서 돈버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거져 주시는 것이지만 사랑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나는 거져지만 예수님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찬양해야합니다. 십자가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신 예수님께 감사해야합니다. 우리의 몸으로 찬양해야합니다. 세포 하나하나가 찬양해야합니다. 잠재의식에서 찬양해야합니다.

 

(믿음과 전도의 필요성)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믿으면, 우리가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고,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선택하느냐? 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는 말을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선택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를 선택하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야곱처럼 끈질기게 투쟁하는 자를, 집념의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필요성, 전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중국에도 러시아에도 독일에도 오스트리아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입니다.

 

(택하심을 믿는 자가 받는 은혜)

 

하나님의 선택을 믿는 것은 중요합니다. 만약 내가 나의 인생을 결정하고 미래를 선택하고 결과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진다면 얼마나 무섭고 두렵습니까? 나의 선택에 의해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공부를 잘 해야 자녀가 되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 자녀가된다면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불러 주시고 나를 선택하시고,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를 믿고 순종하며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불안하고 두려운 인생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믿고 안심하고 평안한 길을 갑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 주권을 믿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 인생을 맡겨 보십시오.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가 보십시오.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선택을 믿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영광을 찬미해야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소리 높여 찬양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에베소서 1장 강해 일부 신령한 복 I

말씀 : 에베소서 11-에베소서 16

요절 :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에베소서 1장 강해 일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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