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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연구자료

십자가의 길

작성자 : mistral122
작성일 : 2008-11-17 00:00:00
조회수 : 1,007
십자가의 길

말씀 : 누가복음 9장 18~25절

요절말씀: 9장 23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세계 최대의 증권사와 보험을 소유한 미국 투자은행 메릴린치가 파산하면서 미국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럼 제가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이 메릴린치의 상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황소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메릴린치 은행 앞에는 그들의 심볼인 청동 황소가 세워져 있습니다. 소는 물질과 힘을 상징하는 우상입니다.

요즘은 하나님 보다 물질을 더 높이고 사랑하는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합니다. 현시대에 물질은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요, 능력이며,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물질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지못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참다운 그리스도 예수님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어떤 길을 가셨습니까? 또한 그리스도예수님을 모신 우리들은 어떤 길을 가야합니까?


PART 1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18절에서19절을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당시 이스라엘 상황이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 최강대국 로마식민지 치하에서 나라 잃은 설움과 슬픔을 모두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로부터 과도한 세금 수탈, 정치적인 탄압 등 모진 핍박과 억압을 받았습니다. 또한 로마식민지 백성으로 부당하고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영적으로는 400년 동안 선지자와 말씀이 없는 암울하고 어두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보이지 않던 절망적인 시대였습니다. 이와 같이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예수님께서 혜성같이 등장하셨고 그들 앞에서 수많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들을 하나 둘씩 이야기 했습니다. 제자 중 하나는 “세례요한 이라고들 합니다.” 말했고, 또 어떤 제자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옛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고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통해서 세례요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여러 성인들 가운데 하나로 보았습니다.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꼭 예수님을 믿어야 될 필요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제자들의 견해를 물어 보았습니다.

다같이 20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물음에 수제자 베드로가 먼저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니이십니다” 마태복음 16장16절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은자, 구세주, 만유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으셨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입니다. 특히,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모든 인생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망권세에서 메여 죽을 운명의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이십니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아들 이재용 전무도 한국을 좌지우지 할 정도의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힘과 능력은 얼마나 막강하겠습니까! 우리는 삼성전자의 Background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예수님의 Background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믿으면 세상에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합력해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과 비교하여 현재 우리들이 처한 상황은 어떻습니까?

현재 우리는 그 당시 이스라엘과 같이 어렵과 힘든 현실입니다. 미국으로 시작된 금융 쓰나미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주택담보대출의 부실화운영, 월가 투자회사들의 탐욕으로 많은 회사들이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투자회사 리만브라더스, 메릴린치가 무너졌고, 최대 보험회사 AIG가 구제금융에 들어가는 등 그 위기의 불길은 겉잡을 수 없습니다. 미국경제의 절대적인 영향권 아래 있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미국발 금융 위기가 우리 경제를 덮쳐 한 달 만에 주가가 반 토막 나고 실물경제에 전이되어 소비 및 고용시장이 위축되었습니다.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인정받던 아이슬란드, 경제체력이 약한 파키스탄은 국가부도 위기입니다. 이와 같이 연쇄적이고 복합적으로 세계경제가 휘청거리면서 많은 서민들은 고통으로 절규하고 있습니다.


세계경제 악화로 세상 시름이 거친 파도처럼 우리에게 밀려들고, 망할 것 같은 공포감과 두려움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직장인들은 경기침체로 감원바람이 불어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입니다. 고정된 월급에 비해 높이 치솟은 주택담보대출금과 이자, 물가에 가장의 어깨를 무겁습니다. 대학생들은 높은 등록금부담, 고용시장 불안으로 취업문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습니다. 아이를 책임지는 우리 엄마들은 어떻습니까? 사교육비와 양육비로 등골이 휩니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위기 파장은 긴 터널의 어둠처럼 끝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또한 다변화되고 암울한 현실에서 정신적으로도 크게 고통하고 있습니다.

질병문제, 사람문제, 열등감 등 내적으로 많이 병들어 있습니다. 또한 두려움과 불안, 과도한 스트레스는 우울증을 유발하고, 심지어 자살을 선택하곤 합니다.


이런 혼란과 어둠이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구하고 의지해야 대상은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사람이나 권력입니까? 아니면 곧 죽어도 자신의 능력입니까? 모두 아닙니다.


이런 것들아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 만족과 자유를 주지는 못합니다. 특히 현대사회는 물질을 그리스도 삼고, 물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우리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오직 참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근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높이고, 믿고 구하면 경제적, 정치적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참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고, 물질을 그리스도 삼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온전히 그리스도 예수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 때 비로소 내 전 인생을 주관하시는 예수님, 창조주 예수님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두려움, 불안, 허무, 현실문제 등 모두 예수님께 맡기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며 뿐만 아니라 참 자유와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입니다.


저도 요번 경제위기를 통해서 물질을 그리스도 삼은 죄를 깊이 회개하고 진정한 그리스도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저는 경제. 경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관심은 욕심을 불고 주식과 펀드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수익이 조금 나는 것을 보면서 점점 교만해 졌고, 물질을 불리고 늘리는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0월 들어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이 미국 경제위기로 한 달 만에 투자한 펀드와 주식이 반 토막이 났습니다. 무슨 게임머니도 아니고 저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자식을 잃은 아비와 같이 깊이 절망하고 슬퍼하였습니다. 몇 일 동안 믿음을 잃고 마음에 혼란과 번민으로 가득했습니다. 결국 삐뚜러진 나의 중심과 교만 그리고 욕심은 결국 화를 부르고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저는 이런 절망의 상황에서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이 때야 비로서 예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징계를 통해서 저 물질중심적인 죄를 깊이 깨닫고 온전히 예수님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망할 것 같은 두려움, 절망에서 구원하시고 참 자유를 주신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물질을 주시는 분도 예수님이고, 물질을 취하시는 분도 예수임을 깨닫고 물질에 자유가 생겼습니다. 저는 제가 가진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만물의 주권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제는 두려움과 절망보다는 미래에 대한 소망과 비젼이 넘칩니다. 아멘.




PART 2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죽음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1절에서 22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을 까요?

바로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 너무도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매일 더럽고 추한 육체적인 소욕과 죄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소돔과 고모라 같이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입니다. 말씀이 귀한 줄 모르고 육체적인 만족과 기쁨만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고 있습니다.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문화가 주를 이루고 포스터모더니즘의 영향은 신앙을 상대화하고 있습니다. 사상과 문화를 선도해야 할 매스미디어는 음란과 폭력을 미화하여, 돈벌이에 악용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할 종교지도자들조차 정욕문제, 물질문제에 넘어지는 패역하고 강포한 세상입니다.


이런 타락과 혼돈의 세상에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거짓 포장된 문화에 속고, 자극적이고 상대적인 문화에 도취되어 죄가 죄인 줄을 모릅니다.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죄를 정당화하고 점점 마음에서 예수님을 밀어냅니다. 이러한 모든 죄의 뿌리는 마음의 하나님을 두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만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죄는 잠시 동안 육체적인 쾌락과 기쁨을 맛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죽을 만큼의 고통과 아픔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처럼 죄는 육체 뿐 아니라 마음을 점점 병들게 하고 결국 사망에 메여 죽게 만듭니다. 우리가 만일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불과 유황에 타는 못에 빠져 죽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죄인인 우리는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구원의 길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죄사함에는 분명한 희생이 따릅니다.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아무 죄 없는 분이 대신 죽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직접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십자가 피와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질고를 지시고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무흠, 무결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창에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제사장들과 서기관 장로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따르던 제자들에게까지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심으로 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와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죄 사함을 얻고 마음에 행복과 기쁨이 넘칩니다. 자유와 평안을 얻고 나아가 모든 사망과 죽음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23절을 모두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첫째,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주권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이란 연약하고 한계적인 자신의 뜻을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모든 주권과 판단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의지, 판단, 생각, 감정 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인간적인 속성을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자기를 부인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부인함으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방향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갈망하던 정치적인 독립과 경제적 안정을 이루실 왕으로 오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삶을 거부하셨습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모든 영광과 존귀함을 버리시고, 육신적으로 천한 목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심으로 예수님 자신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거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가족들이 눈물로 그 길을 막고자 했을 때, 가족을 기쁘게 하는 삶을 거부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도 육신의 몸을 덧입고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 고난과 죽음 앞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시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피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피눈물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고 그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죽으셨습니다.


사람의 인정이나 동정 그리고 칭찬 등 인간적인 감정을 기초로 한 인본주의적인 요소는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을 막고 방해합니다. 그럼 인본주의적인 믿음이냐 신본주의적인 믿음이냐를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 사람을 기쁘게 하느냐? 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믿음생활 가운데 인본주의적인 것들은 겉으론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진정한 사랑처럼 포장되어 인간의 마음을 흔들고 점점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말씀이나 믿음보다는 인간적인 능력이나 행위를 칭찬하여 교만하게 하고, 예수님보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게 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인본주의 신앙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인간편에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삶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산다면 결국 사단의 종노릇하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받고 구원에 길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완전하게 부인하고 예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산다면 잠시 동안 영. 육간에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부서지고, 깨어지고, 주위의 비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자기를 부인했을 때 하나님 나라가 마음에 임합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부인을 감당하면 ,기쁨으로 그 뜻에 순종할 수 있고 참 기쁨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부인보다 한 차원 높은 행위를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그대로 좆아 가기 때문에, 연약한 인간에게는 정말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세상적인 것을 포기하는 길입니다. 세상에 어떤 것보다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부자는 주님을 위해서 물질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날 때도 있습니다. 나의 생명까지도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절대적인 기도와 말씀입니다. 매일매일 기도는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을 수 있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또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 길이 어떤 길인지 깊이 깨닫게 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럼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져야 할 십자가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사명의 십자가, 기도와 말씀의 십자가, 자기부인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 UBF는 캠퍼스 복음과 세계선교의 사명과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UBF는 각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목자들은 직장과 학교수업을 감당하면서 대학 캠퍼스 복음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양을 치는 것, 일대일 말씀공부, 전도, 직분과 교회사역 등이 대표적인 십자가입니다. 선교사님들은 문화와 언어가 다른 이방땅에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섬기는 십자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소감문을 작성하고, 말씀공부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공통적으로 기도와 말씀의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새벽기도를 통해서 하루를 시작하고 양들과 역사를 위해서 중보기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또한 매일 양식말씀을 보는 십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져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가정생활과 직장생활 가운데 바쁘다는 핑계와 피곤하다는 이유로 십자가 지는 것을 거부하고 육신적인 삶을 살고자 할 때는 열매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후 부활을 체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시는 방향을 믿음으로 순종하였을 때 분명하게 열매와 큰 상급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율법과 행위가 아니라 은혜와 기쁨으로 감당했을 때 그 뒤에는 반드시 부활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4~25절을 모두 잃어보시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위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바로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입니다.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라는 뜻은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 라는 의미입니다.

원래는 오자병법에서 글귀인데 이순신 장군께서 전투에 임하기 전 그 의미를 변형하여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말씀과 같이 모든 조선 수군이 한 마음이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왜구들과 싸웠을 때 큰 승리를 얻었습니다. 당시 조선 수군은 13척의 배로 배수진을 치고 목숨 바쳐 싸웠고 330척의 왜군함을 물리쳤습ㄴ다. 이 전투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정벌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 치열한 전투가 바로 명량대첩입니다. 이와 같은 희생과 용기가 왜적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믿음과 신념은 하나님의 역사에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면 세상에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어떤 시련과 고난가운데서도 이겨 낼 힘이 있고 나아가야 할 길이 보입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세상의 파도가 거세게 몰아쳐 두려울 지라도 만물의 주관자 예수님을 믿고 목숨 바칠 각오로 순종할 때 세상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자유와 기쁨이 넘치고 나아가 하늘나라의 큰 상급이 있습니다. 특히 복음과 진리를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 바쳐 헌신하는 자들은 잠깐 동안 시련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예수님을 소외시키고 예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 자신의 삶을 고집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 보다 세상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믿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세상의 기쁨을 위해서,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결국 심판 받아 죽게 됩니다. 또한 세상에서 온 힘과 노력으로 부귀영화를 얻은 사람들, 심지어 천하를 얻은 사람일 지라도 그 기쁨은 유한하며 모든 것이 헛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 또한 결국 빈손으로 죽게 되고, 진정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 길을 따라서 가야 합니다. 십자가 길만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이요,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온전하게 십자가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발견하고 그 사랑을 깊이 신뢰하고 믿을 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그리고 십자가 길 후에 오는 부활과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경진이, 범진이, 창준이, 형래, 홍준이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아마 자동차 키를 좋아하는 경진이는 모두 알 것입니다. 아니면 주위의 친구들의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 이름은 요번에 태어난 저희 아이의 이름들이었습니다. 저희 집안은 유교적 통념과 전통이 강하고 예를 매우 중시합니다. 묘를 뜬다거나 아이의 이름을 짓는다거나 모든 대소사를 철저하게 유교법에 맞게 진행을 합니다. 때문에 종손의 아들이 태어났으니 주위 어른들은 매우 기뻐했고 서로들 상의하여 음양오행, 한자획수와 음 그리고 뜻 등 4가지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실 저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름을 짓고 싶었기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저는 부딪히기 싫어 주위에 이 이름을 지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주신분도 하나님이요, 아이를 책임지실 분도 하나님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이를 놓고 기도할 때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었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결단 하고 예수님께서 준비한 자라는 뜻의 "예준" 이로고 지었습니다. 이 때 주위 압박과 비난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높으신 종친어른, 특히 아버지와 싸운다는 것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웠고, 지기 싫은 십자가였습니다. 또한 집안의 체면과 나의 생각들은 그 십자가를 더욱 무겁게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 뜻에 순종해서 이름을 지었을 때 오히려 마음에 평안이 임하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지만 결단을 하고 십자가를 감당하면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제가 미국선교사로 떠나기 전에 온전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체험하고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인본주의의 싹을 자를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물질과 명예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얻을 수 있기를 또한 기도드립니다.

나아가 우리 모두가 주의 일꾼으로 세상의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충성되게 하나님의 사역을 섬기고 그 십자가 길을 묵묵히 갈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이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체험케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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