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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연구자료

08 삼상 6장 벧세메스 암소처럼

작성자 : 강이삭
작성일 : 2008-11-16 00:00:00
조회수 : 1,267
사무엘상 6장 벧세메스 암소처럼
요절 14절

한우고기를 만드는 최고등급의 한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는 한우암소를 잡은 고기입니다. 우리가 먹고 있는 대부분의 소고기는 수소고기입니다. 횡성한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횡성한우는 소고기 중에서도 특등급의 소고기를 만드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횡성한우는 특등급 소고기는 암소새끼를 성장단계에 따라 다른 배합사료를 줍니다. 영양을 공급하여 근육의 성장을 돕고, 소가 24~36개월 사이에 550kg이상 나갈 때 잡습니다. 이는 최고의 소고기로 우리나라에서 안에서중 유명합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유명한 이 한우들보다도 세계에서 유명하며, 가장 훌륭한 암소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3절을 형제님들께서 읽어보시겠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아스돗 지방에 있는 다곤 신전에 놓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의 우상 다곤의 머리와 두 손을 끊으셨습니다. 또한 아스돗에 있는 사람들은 독한 종기와 재앙이 내려서 망하게 하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런 일이 있자 하나님의 언약궤를 아스돗에서 가드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가드에서도 독한 종기가 사람들로 퍼져나갔습니다. 또 이를 에그론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이 재앙은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에그론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환난이 왔고 고통받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있은지 일곱 달째가 되었습니다. 오랜기간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자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만보아도 두려워하였고 근처에도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함부로 대했다가 무서운 재앙을 받았습니다. 그제서야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만보아도 “오 다곤 신이시어”만 외쳤던 이들은 “오 하나님 맙소사”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로 블레셋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소집했습니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하나님께 속건제들 드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속건제란 피해를 끼친것을 배상하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는 블렛셋 사람의 방백수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이를 보낸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린 재앙을 가볍게 하시리라 생각하였습니다.
6절을 자매님들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애굽인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역사를 알았습니다. 바로가 회개를 않하여 열가지 재앙을 받았고 장자까지 잃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바로와 같이 완악하면 결국 이 재앙이 계속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보내기로 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재앙을 통해 하나님 한 분을 깨닫게 하셨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7-9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이 재앙을 주신 것이 우연히 아닐까라는 의심이 있었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재앙 있잖아!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 아냐!”라며 수군수군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표적을 구합니다. 그리고 먼저 멍에를 메어보지 못한 소를 준비했습니다. 멍에란 쟁기나 수레를 끌기위한 도구입니다. 이 멍에를 오랜시간 끌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합니다. 또한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멍에를 지속적으로 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또한 근육을 단련을 해야 합니다. 흔한말로 완전 튼튼 완전 몸짱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금독종과 금쥐가 실린 수레를 끌어야 하는 소는 경험이 전혀 없는 소였습니다. 우리가 운동을 할 때 평소에 안쓰던 근육을 사용해 보셨습니까? 처음 안쓰던 곳을 사용하면 너무 아픕니다. 한 번 그 근육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은 고통이 따릅니다. 이와같이 처음 멍에를 매는 소는 매우 육적인 고통이 커서 한 발짝도 걷기에도 힘이 듭니다. 그럼에도 블레셋 사람들은 이 암소들이 멍에를 매고 한 발 한 발 벧세메스로 향할 수 있는가를 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블레셋 사람들은 젖나는 소를 준비했습니다. 젖나는 소는 출산한지 얼마 안된 암소입니다. 새끼를 지극정성으로 돌볼 때이고 모성애로 가장 풍성할 때입니다. 이런 암소 새끼를 블레셋 집에 떼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벧세메스를 향하여 앞으로 가도록 합니다. 이 소들의 발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이 암소들의 마음에 큰 고통있습니다. 암소들은 바로당장 돌아가 새끼를 향하여 “우순아!! 우돌아!!를 왜치며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그러나 이 암소들은 뒤돌아보지 않아야합니다. 새끼를 뒤로 두고 한 발 한 발 간다는 것은 매우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블레셋 사람들은 이 암소들이 새끼를 뒤로하고 한 발 한 발 벧세메스로 향하는가를 봅니다.
세 번째로 블레셋 사람들은 두 마리소를 준비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멍에를 메어보지 못한 소를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를 준비함으로 히든카드를 준비했습니다. 위 조건중 하나만 어겨도 수레가 벧세메스로 가기 힘들텐데도 여기에 두 마리라는 조건을 더했습니다. 두 마리 소는 훈련도 받지 않은 소이고, 블레셋을 떠나보지 않은 소입니다. 이 소들이 벧세메스가 어디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의지대로 “벧세메스는 서쪽에 있을꺼야 나는 서쪽으로 갈래” “아냐 나는 저기 보이는 나무에 필받았어! 저기가 맞을꺼야” 하며 지멋대로 간다면 두 소가 서로 방향도 안맞을 뿐더라 수레는 갈피를 잃고 옆으로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블레셋 사람들은 이 암소들이 발 맞추어 벧세메스로 향하는지를 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위의 세 조건이 모두 맞아 떨어져 이 암소들이 벧세메스로 간다면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임을 인정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벧세메스는 소가 택할 수 있는 수많은 길중에 하나이고 여러 악조건을 볼 때 도저히 이 암소들이 벧세메스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암소들은 어떠했습니까?
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벧세메스 암소는 집에 두고 온 우순이와 우돌이로 인하여 “엉엉!” 슬피 울었습니다. 하지만 암소들은 벧세메스 길로 갔습니다. 눈물이 구슬같이 맺혔음에도 암소들은 뒷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두 소가 발을 맞추어 “하나 둘 하나 둘” 하며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벧세메스 암소는 좌로도 우로도 조금도 치우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인도자가 없이 소들은 이스라엘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갔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쫓아 블레셋 방백들도 따라갔습니다. 너도 나도 하나님 이야기가 절로 나왔습니다. 암소들을 통해 하나님의 높으심과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벧세메스 암소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수레 하나에 훈련받지 않은 두 마리의 소는 간격만 안맞아도 수레가 한 쪽으로 치우쳐져 기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암소 두 마리는 발맞추어 곧게 벧세메스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이 소들의 발을 맞추시고, 앞을 보게 하시어 곧게 나아가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암소는 정을 끊고 순종하였습니다. 아이를 낳은 부모는 어디에 있든지 사랑스런 아이가 마음에 걸립니다. 아기를 낳아보신 사모님들과 아이를 떼어놓고 수양회에 오신 분들은 잘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하물며, 갓 송아지를 출산한 이 암소들은 어떻겠습니까? 그 마음에는 자신의 새끼가 보고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새끼를 위해 한 마리라도 뒤를 돌아본다면, 수레는 기울어져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또한 머뭇거림이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암소들은 새끼를 떼어놓는 아픔에 눈물이 났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셋째 자신을 온전히 희생했습니다.
13,14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벧세메스에 암소들이 도착했습니다. 암소가 끌고온 수레에 있던 언약궤를 본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스라엘로 돌아온 언약궤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하지만 벧세메스 암소의 사명은 여기까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죄를 사함 받음에 있어서는 생명이 필요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가져온 금쥐와 금독종만으로는 안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수레를 부수어 장작삼았고, 암소들을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불은 활활 타올랐습니다. 소들은 털부터 시작하여 살 한점 남기지 않고 다 태웠졌습니다. 벧세메스 암소는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희생을 통해 하나님은 블레셋에 재앙을 내리신 것을 거둬 들이셨습니다. 암소들의 희생은 재앙으로 죽어야할 블레셋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이런 벧세메스 암소를 보면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벧세메스 암소가 순종한 것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벧세메스 암소가 처음 멍에를 맨 것과 같이 십자가의 멍에를 지셨습니다. 사람의 소욕과 아픔과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육신에 오는 정욕들을 말씀으로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와 죄로부터의 치유를 주시기 위해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수님과 벧세메스 암소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암소들은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암소의 피도 사람을 죄를 사했습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사람들의 죄를 사하지 못하겠습니까? 블레셋은 벧세메스 암소를 통해 재앙을 피한 것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셔서 죄로인해 죽을 우리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 되어 주시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19-21절을 보십시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언약궤는 택정하신 제사장들만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번도 언약궤 안을 보지 못했던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궁금증이 더 해가습니다. 정말 처음 보는 것에 대한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이게 모야! 궁금해 죽겠어”라고 마음에서 외쳤습니다. 결국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경외심 없는 행동은 칠십명을 죽게 하였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의 대상이 아닌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결국 이로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를 볼 때 “개보다 못하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 벧세메스 사람들은 벧세메스 암소보다도 못했습니다. 자신의 호기심조차도 못이기고 하나님을 경외치 않았습니다. 심판을 체험 그들은 회개하여야 했지만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두려움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기랏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많은 인생의 길중에 우리는 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앞으로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세상사는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 따라 선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또한 인본주의의 선택에 따른 자신의 중심적 생각을 따라 길을 갑니다. 그러나 이 길들은 어떠한 길입니까? 결코 구원도 얻을 수 없는 길이며, 사망에 이르게 될 수 밖에 없는 길입니다. 생명을 주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가다가도 물질 때문에 뒤를 보아 다른 방향으로 가고, 사람의 정 때문에 뒤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길이 어디인지 알면서도 자신들 정욕들 때문에 순종을 할 수 없습니다. 정욕들을 끊고 정을 끊는다는 것은 아픔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얘야 너는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사람보다도 나를 더 사랑할 수 있느냐?” 물어보십니다. 벧세메스 암소는 새끼도 사랑하고, 자신의 생명도 사랑할 줄 알았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을 했고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좌로나 우로 치우쳐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벧세메스 암소가 벧세메스의 길이 어딘지 몰랐듯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벧세메스 암소들이 하나님의 이끄시는 길로 순종하여 갔듯이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데로 순종하여 나아가는 종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3 때까지 병원에 매년 지속적으로 입원하신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치료를 받으면 얼마뒤 또 병원에 입원하시길 반복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일을 하시며 너무 바쁘셔서 식사도 거르시며 장사를 하셨습니다. 또한 신경성으로 화병까지 있으셔서 속이 다 상하고 온 몸이 항상 아프셨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자녀를 바라봄으로 병원비와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장사를 나가셨습니다. 저는 어렸지만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잘알았습니다. 그러하였기에 저는 그런 어머니를 배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성실한 아들로 어머니의 자랑이 되는 것이 저의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원하는 대학교에 오지 않았던 저는 1학년 때, 대학교를 그만두려고 생각했었습니다. 내 마음에는 가정의 기쁨이 물질이라고 생각하였고 저의 우선순위는 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 저를 UBF로 부르셨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성령님을 주심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함이 넘쳤습니다. 이렇듯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저는 어머니의 수고하심과 아팠었던 과거를 볼 때 도저히 하나님께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이 때였습니다. 동생이 대학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 부담이라도 덜어드리려고 군대를 가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학생회 역사를 볼 때에 학교에 남아 학생회로 있는 것이 하나님편에서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서질 않았습니다. 그 때 저의 선택은 군대를 가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지원을 했으나 가는 날짜를 일주일을 남겨 놓고 취소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때에 믿음없음에 결국 그해 겨울방학되는 날 교회를 떠났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나갔던 탕자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 교회를 조금 다니다가 결국 안다녔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며, 술도 안먹다 모니 학과생활을 수업이후로 많이 못하였던 저는 선배들과 친해지기 위해 많은 선배들이 하는 게임도 같이 하고 모임도 참석을 많이 하며 인간 관계성을 넓혀 갔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에 메워지지 않는 영적 갈급함으로 5개월만에 come back 하였습니다. 저는 사람의 정에도 약하고 어머니에게 약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간다면서 좌로 기우뚱! 우로 기우뚱! 하였습니다. 도저히 하나님편에는 쓰임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종입니다. 이런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은 부르셨습니다. 스텝으로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물론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원대로 제대하자마자 취업도 하고 돈도 벌어 어머니 용돈도 드리고 빨리 자리잡아 결혼도 하고 손주도 안겨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원하심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캠퍼스의 목자로 이 종이 살아가시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을 모르는 학생들과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복음을 알리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이 종을 통해 가정과 캠퍼스의 복음역사를 하나님은 쓰실것입니다. 벧세메스 암소 같이 어머니를 사랑하나 예수님을 더 사랑함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겠습니다. 전에 스텝의 길이라는 것이 처음 지어야 하는 것도 많고 멍에와 같이 여겨졌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자격도 없는데 할 수 없는 사람이 하려하니 자신감도 잃어버렸었습니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벧세메스 암소가 하나님께 순종을 하였을 때 하나님은 이 소들을 벧세메스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이 종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가장좋은 베스트의 길로 이끄십니다. 제가 믿음으로 스텝에 길에 있어 주님을 전심을 다해 섬기는 종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벧세메스 암소가 순종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좋은 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순종했을 때,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내가 순종할 때, 나를 천안 ubf에 목자로 세우실 것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길
말씀 : 누가복음 9장 18~26절
요절말씀: 9장 23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세계 최대의 증권사와 보험을 소유한 미국 투자은행 메릴린치가 파산하면서 미국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럼 제가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이 메릴린치의 상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황소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메릴린치 은행 앞에는 그들의 심볼인 청동 황소가 세워져 있습니다. 소는 물질과 힘을 상징하는 우상입니다. 요즘은 하나님 보다 물질을 더 높이고 사랑하는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합니다. 현시대에 물질은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요, 능력이며,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물질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지못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참다운 그리스도 예수님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어떤 길을 가셨습니까? 또한 그리스도예수님을 모신 우리들은 어떤 길을 가야합니까?

PART 1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18절에서19절을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당시 이스라엘 상황이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 최강대국 로마식민지 치하에서 나라 잃은 설움과 슬픔을 모두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로부터 과도한 세금 수탈, 정치적인 탄압 등 정치적, 경제적으로 핍박과 억압을 받았습니다. 또한 로마식민지 백성으로 부당하고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영적으로는 400년 동안 선지자와 말씀이 없는 암울하고 어두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보이지 않던 절망적인 시대였습니다. 이와 같은 혼란과 어두운 시대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셨고 그들에게 수많은 일 들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들을 하나 둘씩 이야기 했습니다. 제자 중 하나는 “세례요한 이라고들 합니다.” 말했고, 또 어떤 제자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옛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고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통해 세례요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로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식민통치하에 자신들이 처한 가난한 현실문제와 정치적인 독립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고 예수님을 통해서 경제적, 정치적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모든 세상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우리의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목적은 우리가 지금 간절하게 바라는대로 현실문제만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으로 오셨습니까? 다같이 20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물음에 수제자 베드로가 먼저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니이십니다” 마태복음 16장16절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은자, 구세주, 만유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으셨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입니다. 때문에 세상 만물을 통치 할 권세를 가지신 만유의 왕이십니다. 특히, 생사화복의 주권자이시며, 우리의 모든 인생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망권세에서 메여 죽을 운명의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이십니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전무도 한국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힘과 능력을 우리가 감히 어떻게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믿으면 세상에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과 비교하여 현재 우리들이 처한 상황은 어떻습니까? 현재 우리는 그 당시 이스라엘과 같이 어렵과 힘든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미국으로 시작된 금융 쓰나미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주택담보대출의 부실화운영, 월가 투자회사들의 탐욕으로 투자회사 리만 브라더스 무너졌고, 최대보험회사 AIG가 구제금융에 들어가는 등 그 위기의 불길은 겉잡을 수 없습니다. 미국경제의 절대적인 영향권 아래 있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미국발 금융 위기가 우리 경제를 덮쳐 한 달 만에 주가가 반 토막 나고 실물경제에 전이되어 소비 및 고용시장이 위축되었습니다.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인정받던 아이슬란드, 경제체력이 약한 파키스탄은 국가부도 위기고, 아르헨티나, 우크라이나는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습니다. 이와 같이 연쇄적이고 복합적으로 세계경제가 휘청거리면서 많은 서민들은 고통으로 절규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들은 현실문제, 인생문제들로 하루하루의 삶이 버겁고 힘이 듭니다. 특히 세계경제 악화로 세상 시름이 거친 파도처럼 한꺼번에 우리에게 밀려들고 있습니다. 직장인들은 경기침체로 감원바람이 불어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입니다. 월급은 고정되어 있는데 주택담보대출금과 물가상승은 큰 짐이 되어 가장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대학생들은 높은 등록금으로 부담이 가중되고, 고용시장 악화로 취업문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습니다. 아이를 책임지는 엄마들은 사교육비와 양육비로 등골이 휩니다. 이처럼 암울한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번민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과도한 스트레스는 우울증에 시달리게 하고 심지어 자살을 부르기도 합니다. 아직도 진행 중인 경제위기 파장에 어둠의 긴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문제 뿐 아니라 다변화된 사회 속에서 질병문제, 사람문제, 열등감을 내적으로 많이 병들어 있습니다.
이런 혼란과 어둠의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구하고 의지해야 대상은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아니면 사람입니까? 전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도 참 만족과 자유를 주지는 못합니다. 특히 현대사회 우리들은 물질을 그리스도 삼고 물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물질은 세상에서 필요악이지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참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근본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또한 정말 어렵고 힘든 상황 일수록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때 연하고 교만한 자신을 발견 하게 됩니다. 만물의 창조주 예수님,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관하시는 통치지 예수님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먼 예수님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높이고 믿으면 물질문제, 정치적인 문제는 후에 자연스럽게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참 소망이 있고 미래에 대한 비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PART 2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죽음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1절에서 22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리고 인자이십니다. 누가복음 5장 24절은 말씀 하십니다 ”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리라” 말씀에 기초할 때, 인자의 뜻은 죄를 사하실 권세를 가지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을 까요?
바로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 너무도 연약하고 나약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더럽고 추한 죄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소돔과 고모라 같이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입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말씀이 귀한 줄 모르고 오직 육체적인 소욕과 만족을 위해서만 살고 있습니다.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문화가 주를 이루고 포스터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불쌍한 영혼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문화와 사상을 선도해야 할 매스미디어에서는 음란과 폭력을 미화하여 돈벌이에 악용하여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거짓 포장된 문화에 속고, 자극적이고 상대적인 사상에 도취되어 죄가 죄인 줄을 모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속 깊이 들어 오는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 하면서 점점 예수님을 멀리 합니다. 특히 죄는 인간 본연에 내재되어 있는 이기심, 시기심, 미움, 분노 등 감정적인 부분을 이용해 들어오는데 오히려 이런 감정을 즐깁니다. 또한 육신을 가진 인간이 가장 쉽게 넘어지는 문제가 정욕문제, 물질문제, 사람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죄를 통해서 잠시 동안 쾌락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몇 배의 고통과 아픔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물질과 사람이 참 만족이 될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참 만족이요 기쁨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저도 믿기 전에 대학교 때 술 취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었고, 친구들, 자매들과 어울려 세상문화에 취해 죄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참 재미있었고 즐거웠지만 나중에는 더 큰 고통으로 돌아 왔습니다. 무의미, 허무, 인간적인 사랑,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어둠과 죄의 세력은 점점 저를 옭아 메어 안서호에 뛰어 들고 싶은 충동이 들곤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삶의 의미와 참 기쁨을 찾지 못했다면 아마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다 고통스럽게 죽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아니라 죄는 육체 뿐 아니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사망에 메여 죽게 만듭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평생을 사단의 종노릇 하다 소돔과 고모라 같이 불과 유황에 타는 못에 빠져 죽는 심판을 받게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앞에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눈물로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예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인인 우리는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구원의 길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인자 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하시고, 사망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사함에는 분명한 희생이 따릅니다. 그 희생은 바로 예수님이 직접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건제물이 되시는 겁니다. 그 십자가 피와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흠, 무결하신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오직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질고를 지시고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창에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제사장들과 서기관 장로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따르던 제자들에게까지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심으로 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와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죄 사함을 얻고 마음에 행복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자유와 평안을 얻고 나아가 모든 사망과 죽음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PART 3 우리도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며, 그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모두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첫째,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주권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이란 연약하고 한계적인 자기 자신의 뜻을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모든 주권과 판단이 자기 자신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의지, 판단, 생각, 감정 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인간적인 속성을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할 때 자기를 부인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스스로의 뜻과 의지를 거부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방향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갈망하던 정치적인 독립과 경제적 안정을 이루실 왕으로 오심으로 사람들이 기뻐하는 삶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통해서 새나라의 높고 좋은 자리를 얻고자 원했을 때 사랑하는 제자들의 뜻을 부인하셨습니다. 또한 전능자로 하나님의 아들로 모든 영광과 존귀함을 버리시고, 육신적으로 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심으로 예수님 자신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거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가족들이 눈물로 그 길을 막고자 했을 때 가족에 대한 인정과 사랑을 거부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도 육신의 몸을 덧입고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 고난과 죽음 앞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시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피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누가 복음 22장 42절에는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고 그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본 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성이 악해서 늘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행동하고자 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은 두 길을 교대로 갈 수 있으나, 두 길을 다 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동시에 좆고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본성을 따르든지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든지 분명하게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 결정에 따라 그 결과는 천지차이입니다. 기본성에 따라, 자기생각에 따르는 길을 간다면 결국은 죽어 심판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완전하게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된다면 잠시 동안 영.육간에 고통이 있을지라도 결국 하늘나라의 큰 상급과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자기능력과 힘에 의지해서 자기를 부인하고자 하는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율법주의적인 신앙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피곤하고 지칩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부인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때 기쁨으로 그 뜻에 순종할 수 있고 참 기쁨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의 상징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증거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허물과 죄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자기부인보다 한 차원 높은 행위를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그대로 좆아 가기 때문에, 연약한 인간에게는 정말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때문에 사단의 간교한 유혹과 시험에 쉽게 넘어지곤 합니다. 십자가 길의 대표적인 방해꾼이 바로 인본주의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사람의 인정이나 동정 그리고 칭찬 등 인간적인 감정을 기초로 한 인본주의적인 요소는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을 막고 방해합니다. 그럼 인본주의적인 믿음이냐 신본주의적인 믿음이냐를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믿음생활 가운데 인본주의적인 것들은 겉으론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진정한 사랑처럼 포장되어 인간의 마음을 흔들고 점점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말씀이나 믿음보다는 인간적인 능력이나 행위를 칭찬하여 교만하게 하고, 예수님보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게 합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길, 믿음의 길을 방해하는 인본주의적인 것을 강력히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수제자 베드로에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니 아니하리이다” 라며 간곡히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행하실 앞으로의 큰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정과 사랑의 마음만 앞세워 예수님계서 가시는 십자가 길을 막고자 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제자의 진심 어린 사랑과 믿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을 바라보면 예수님의 깊은 뜻을 생각하기 보다는 한 인간의 감정적인 처사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인간적은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 순종의 길을 방해하여 인류 구원역사를 뜻을 저버리게 하고자 하는 사단의 술수였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치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하시며 강력하게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인본주의적인 신앙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 항상 교만하고 연약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깊은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예수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 사랑에 동참해서 주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기도와 말씀입니다. 매일매일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죄를 발견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절대적인 행하며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져야 할 십자가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사명의 십자가, 자기부인 십자가, 기도와 말씀의 십자가입니다. 특히 우리 UBF는 캠퍼스 복음과 세계선교의 사명과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UBF의 가족으로서 각자는 감당해야 할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목자와 목동들은 직장과 학교수업을 감당하면서 대학 캠퍼스 복음을 위해서 일대일 말씀공부, 양을 치는 것, 전도하는 십자를 져야 합니다. 선교사님들은 문화와 언어가 다른 이방땅에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섬기는 십자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소감문을 작성하고, 말씀공부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공통적으로 새벽기도를 통해서 하루를 시작하고 양식말씀을 보는 십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져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가정생활과 직장생활 가운데 바쁘다는 핑계와 피곤하다는 이유로 십자가 지는 것을 거부하고 육신적인 삶을 살고자 할 때는 열매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후 부활을 체험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세상을 살면서 십자가 지는 것의 의미가 고난과 훈련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때로는 피곤하고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시는 방향을 믿음으로 순종하였을 때분명하게 열매와 큰 상급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율법과 행위가 아니라 은혜와 기쁨으로 감당했을 때 그 뒤에는 반드시 부활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4~25절을 모두 잃어보시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위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바로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입니다.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라는 뜻은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 라는 의미입니다.
원래는 오자병법에서 필사즉생(必死則生) 행생즉사(幸生則死) 라는 글귀인데 이순신 장군께서 전투에 임하기 전 그 의미를 변형하여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말씀과 같이 모든 조선 수군이 한 마음이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왜구들과 싸웠을 때 큰 승리를 얻었습니다. 당시 조선 수군은 13척의 배로 배수진을 치고 목숨 바쳐 싸웠고 330척의 왜군함을 물리침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정벌 야욕을 꺽게 하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치열한 전투가 바로 명량대첩입니다. 이와 같은 희생과 용기가 왜적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믿음과 신념은 하나님의 역사에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면 세상에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어떤 시련과 고난가운데서도 이겨 낼 힘이 있고 나아가야 할 길이 보입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세상의 파도가 거세게 몰아쳐 두려울 지라도 만물의 주관자 예수님을 믿고 목숨 바칠 각오로 순종할 때 세상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자유와 기쁨이 넘치고 나아가 하늘나라의 큰 상급이 있습니다. 특히 복음과 진리를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 바쳐 헌신하는 자들은 잠깐 동안 시련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예수님을 소외시키고 예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 자신의 삶을 고집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 보다 세상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믿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세상의 기쁨을 위해서,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결국 심판 받아 죽게 됩니다. 또한 세상에서 온 힘과 노력으로 부귀영화를 얻은 사람들, 심지어 천하를 얻은 사람일 지라도 그 기쁨은 유한하며 모든 것이 헛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 또한 결국 빈손으로 죽게 되고, 진정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26절에서 29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 후 부활과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 영광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부활 승천 후, 우리가 복음을 증거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핍박과 고난이 있더라도 그 십자가 길을 묵묵·을 보시고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실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끄러움이 될 것이며, 영광과 존귀대신 죽음 그리고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 길을 따라서 가야 합니다. 십자가 길만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이요,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온전하게 십자가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발견하고 그 사랑을 깊이 신뢰하고 믿을 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그리고 십자가 길 후에 오는 부활과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님 재림 때 살아서 하늘나라를 보고 들려 올려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아가 우리 모두가 주의 일꾼으로 세상의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충성되게 하나님의 사역을 섬기고 그 십자가 길을 묵묵히 갈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이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체험케 도와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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