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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 강해 일이부 너희는 우리의 기쁨이다

작성자 : 천안UBF
작성일 : 2021-07-09 05:49:51
조회수 : 491
데살로니가전서 2장 강해 일부 유모같이 섬긴 바울
말씀/데살로니가 전서 2장 1-데살로니가 2장 12
요절/데살로니가 전서 2장 7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무엇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사도 바울과 예수님을 본받아 모델 교회가 된 것을 인해서 감사드렸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마게도냐 지방에서 좋은 교회로 소문난 교회가 된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오기 전에 빌립보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곳에서 점치는 여자의 귀신을 쫓아내고 그 주인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감옥에도 갇혔다 나온 전과자가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도 유대인들이 조폭들을 데리고 와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밤에 도망을 갔습니다. 이런 것을 근거로 대적자들은 사도바울을 사기꾼으로 매도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속여서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면 왜 감옥에 갇히고 밤에 도망을 갔겠느냐고 비방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바울이 양들을 버리고 도망갔으므로 양들을 사랑하지 않는 삯군 목자라고 비방을 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의심을 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의 열두사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처럼 풀타임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직장 생활을 하며 평신도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겼습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키도 작고 말도 어눌했습니다. 이런 것을 근거로 말하기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비방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비방에 대하여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합니다. 이는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의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영접하고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목자들과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목자들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신뢰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목자들과 사랑의 관계를 잘 맺고 복받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 바울)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사도 바울은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 아는 바와 같이라고 말을 하여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대적자들의 말과 같이 물론 빌립보에서 발가벗김을 당하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곳에서 하나님의 힘을 입어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러자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의 문이 열리고 죄수들을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이 다 풀렸습니다. 이를 보고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생각하고 자살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도망가지 않고 그의 자살을 만류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두고 하나님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였다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쓰시는 사도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석방되어 나온 후에는 다시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을 힘입어 데살로니가에 와서 하나님을 힘입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단지 삼주간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축복하셔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탄생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동기가 간사에서 나거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아첨이나 속임수의 행동으로 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동기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복음을 부탁받은 바울)

4,5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바울이 복음을 전한 동기는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옳게 여겨서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옳게 여기셨다는 말은 검증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훈련하여 복음을 맡겼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자신이 원해서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탁하셔서 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음 전파하는 것을 맡기자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부분 일에 성공하지 못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일에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둘째 자신에게 맡겨진 일만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이고 창의적으로 자신의 일을 했습니다. 억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거나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목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한 탐심으로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일을 하고 보상을 요구하기 때문에 추해지는 것입니다. 일을 하고 대가를 받지만 그 대가가 일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도바울은 오직 기쁨과 깨끗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상급만을 바라고 일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아시는 바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아는 바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인 너희도 알거니와 라고 말하여 그들의 과거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회상하도록 가르칩니다. 우리 목자들은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양들은 목자가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복음이 마음 속에 임하게 됩니다. 

(자비량 목자 바울)

6절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 바울은 사도입니다. 다른 사도들과 같이 복음을 전하고 월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로 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자기 일을 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모범적인 평신도 목자였습니다. 복음이 방해를 받지 않게 하려고 평신도 목자로서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복음으로 양들을 섬기고 물질로도 양들을 섬겼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까지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였습니다. 

(유모와 같이 섬긴 바울)

7-9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바울은 유모가 어린 아이를 섬기듯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섬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모는 젖먹는 어린 아이에게 무슨 영광을 얻지 못합니다. 어린 아이가 유모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못하고 자신을 돌보아주었다고 돈을 주지도 못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지 않고 복음을 섬겼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돈을 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존경을 받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서에 보면 차라리 굶어죽어도 그런 목적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목자와 바른 관계성을 맺어서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종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종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축복가 저주가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복을 받으려면 주의 종 사도바울을 존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높여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데살로니가에서는 사도바울을 얕잡아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일을 하는 평신도 목자라고 사도바울을 무시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양들을 위해서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양들은 오히려 이를 근거로 사도바울을 무시했습니다. 저는 자녀들이 학교에서 아버지 직업을 말하라고 하면 학원 강사 겸 목사라고 말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목사가 선생도 하는냐고 이상하다고 말을 하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면 감사하고 귀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보고 의심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했고 자신이 그들의 존경을 받기에 합당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바울이 수고하고 애쓴 것을 기억하라고 말을 합니다. 이를 기억하고 목회자인 사도 바울을 존경하고 사도바울을 목자로 대접하라고 합니다. 왜냐면 이렇게 하는 것이 결국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복을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목자에 대한 자세는 말씀을 듣는데도 중요합니다. 목자를 존중히 여기고 신뢰해야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게 됩니다. 말씀이 심령에 임하고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양들에게나 자녀들에게 목자에 대해서 존경심을 갖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목자에 대한 비방이나 욕을 하여 목자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으면 복음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어린 양들 앞에서 목자를 비방하는 말을 하는 것은 복음을 믿지 말라고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목자가 존경을 받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양들의 신앙을 바로 서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저는 곽선희 목사님이 왜 목사가 되었는가 간증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곽선희 목사님의 어머니는 무슨 좋은 것을 하면 목사님에게 갖다 주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어머니가 목사님에게 하는 것에 십분의 일만 나에게 하면 내가 열녀비를 세워주겠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곽선히 목사님의 내면에는 목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거룩하게 산 바울)

10-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방받을 일이나 의심받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물질 문제가 여자 문제에서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목자가 이런 일에 깨끗하지 못하면 양들이 불신에 빠지고 실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라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듯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도왔습니다. 실의에 빠졌을 때는 격려하고 슬픈 자는 위로하고 잘못된 길로 가는 자는 경계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우리는 결혼해도 합당한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목자는 양들이 신앙을 바르게 갖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2장 강해 일부 유모같이 섬긴 바울
말씀/데살로니가전서 2장 1-데살로니가 2장 12
요절/데살로니가전서 2장 7
데살로니가전서 2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강해 이부 너희는 우리의 기쁨이다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데살로니가전서 2장 20  
요절 데살로니가전서 2장 20절 

사도바울은 계속하여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있습니다. 바울은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듯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성도들)

 13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처음 신앙을 칭찬하며 그 신앙을 회복하도록 권면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봄품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업도 천막 만드는 천한 직업입니다. 외모도 꽃미남이 아니었습니다. 말도 어눌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전에 사도바울을 하나님의 종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때 말씀이 그들 속에 역사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거듭나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질병의 치료를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이 사도바울을 하나님의 종으로 대하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을 때 말씀은 생명력있게 역사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인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쉬지 않고 감사드렸습니다. 목자에게 최고의 감사조건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을 통해서 양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데 쓰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을 통해서 말씀을 받는 자세가 중요함을 배웁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합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고넬료는 로마백부장입니다. 사도베드로는 유대인의 어부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베드로를 인간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했습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자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향나사렛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대했습니다.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요. 야고보와 유다의 형으로 대했습니다. 어렸을 때 함께 소꿉놀이하던 친구로 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고 나옵니다. 이렇게 목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듣고 그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루의 방향을 잡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본받은 데살로니가 교회)

 14-16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이 살아있고 사랑의 수고를 하고 소망으로 인내했습니다. 현재 그들은 유대인들의 공격으로 내적 외적으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 믿고 핍박 받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본받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예수님을 믿은 후 대핍박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붙잡혔습니다. 또한 사도들을 본 받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쫓아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할 때 대적이 되이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본받게 된 것에 크게 감사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부활의 영광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핍박하는 자들을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노하심이 저희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심판하신 것과 같이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사랑은 보고 싶은 것) 

17-2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연애 편지로 써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구절입니다. 제가 아내 모니카의 이름을 넣어서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잠시 오스트리아에서 모니카 동역자에게 쓴 편지라고 생각해보십시오. “모니카 내가 잠시 당신을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당신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소. 그러므로 나 오요한은 한 번 두 번 당신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나를 막아서 가지 못했오. 나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인지 아시오?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당신이 아니오? 당신은 나의 영광이요. 기쁨이요." 우리는 여기서 사도바울의 양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은 보고 싶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힘썼다고 합니다. 사랑은 보고 싶은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더욱 보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얼굴을 보면서도 또 보고 싶은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양들을 사랑한다면 자주 만나야 합니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마음 속에는 그 사람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목자를 사랑한다면 목자가 보고 싶어야 합니다. 먼저 목자에게 달려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소망을 갖고 보고 싶은 것)

둘째 사랑은 상대방을 인해서 소망을 갖고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것을 모두 소망을 갖고 바라봅니다. 현재는 형편없을지라도 장래는 그가 귀하게 될 것을 믿어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기쁨이 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화가 나고 분노하고 억울하고 속이 뒤집히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인해서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들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목자가 있기 때문에 행복한 양 그것은 양이 목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 때문에, 아내가 남편 때문에 행복해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은 그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만족을 얻는 그런 인간적인 사랑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기쁨과 슬픔이 뒤바뀌는 그런 사랑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하실 때 그때 성도들이 자랑이요.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현재 그들이 비록 잠시 대적자들로 인해서 불신이 들어가 있어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바라보며 소망하며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너무나 괴롭힐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방을 인해서 소망을 갖고 기뻐하며 자랑하며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성)

사도바울이 자신의 사랑을 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목자의 사랑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목자와의 사랑의 관계성을 견고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견고해지고, 그래야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그래야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의 고백을 항상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러브레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말씀만 하시면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증거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목자들의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못할지라도 하나님과 목자의 사랑을 알고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과거 시련의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도하는 것을 조금 쉬었을 때 모든 하는 일을 엉망진창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저와 얼마나 가까이 이고 싶어하는가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나님보다 양들이나 역사에 더 마음이 빼앗길 때도 나를 치심으로 낮추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양들을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요즘 어깨에 움직일 수 없는 통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제가 잠시 헛눈파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말과 행동에 항상 함께 하셔서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랑을 인해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 사랑으로 주님이 주신 양떼들을 더욱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목자나 양이나 예수님 앞에서 서로 자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데살로니가전서 2장 강해 이부 너희는 우리의 기쁨이다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데살로니가전서 2장 20  
요절 데살로니가전서 2장 20절 
데살로니가 2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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