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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디모데후서 1장 강해1 일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2 00:00:00
조회수 : 4,169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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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1장 강해 일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말씀:디모데후서 1장 1-디모데후서 1장 7
요절 디모데후서 1장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노년에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쓴 서신입니다. 사도바울의 유서와 같은 책으로 디모데후서를 읽다보면 그 인간적인 마음이 느껴집니다. 바울이 고난을 사랑하는 복음정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UBF의 기본정신도 디모데후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4절을 볼 때 현재 디모데는 마음이 연약해져 있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마음에는 두려움이 임하고 있었습니다.(7) 왜 그렇게 연약해져 있을까요? 디모데의 목자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로마의 핍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위장병이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어린 나이에 에베소 교회의 책임목자가 되었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어린 디모데를 업신여겼습니다.(디모데전서4장12) 또 이단 사상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로 디모데는 연약해져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디모데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펜을 들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아들 디모데에게 주는 유언적인 서신입니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유언이 나오고 신명기의 마지막에는 모세의 유언이 나옵니다. 목자요 아버지인 바울이 죽으면서 아들 디모데게 주고자 한 유산이 무엇인가 나옵니다.
디모데가 어떻게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오늘 일장에서 디모데에게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으면 됩니다.

(바울은 생명의 약속대로 사도 되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은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하며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를 보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바울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생명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의 마음 속에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 마음 속에 정의와 사랑과 신용을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친히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는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생명을 얻도록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일이 사도입니다. 사도는 내가 받은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입니다. 디모데도 바울을 통하여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2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서는 사도바울이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쓴 서신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제자로 취하였습니다. 루스드라는 사도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 돌에 맞아서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버린 곳입니다. 바울은 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디모데는 그때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난을 당한 곳에서 2차 전도여행 때 디모데를 제자로 얻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욱 디모데를 사랑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아들처럼 사랑합니다. 바울은 그를 아버지의 심정으로 도왔습니다. 바울과 디도데는 평생을 같이 하였습니다. 로마에 가면 바울이 묻힌 곳에 디모데의 무덤도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하듯이 이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먼저, 디모데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오 우리는 그의 아들입니다. 부자관계는 피로 맺어진 관계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히 살아계셔서 역사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학점과 결혼과 자녀와 노후와 자녀와 전쟁과 지진과 비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생명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디모데에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바울의 사랑을 알기 원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디모데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알게 합니다. 나를 향한 사랑을 알 때 우리의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는 말씀하십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하지만 부모의 사랑도 알아야하고 목자의 사랑도 알아야합니다. 자녀의 사랑도 알고 양들의 사랑도 알아야합니다. 바울은 밤낮 디모데를 생각하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밤낮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도할 때마다 이름을 부르며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보다 더 좋은 사랑은 없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기도할 때마다 생각하며 그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사랑은 그 사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으로 화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을 생각하거나 만날 때마다 감사한 것입니다. 자녀를 만날 때마다 감사하고 아내나 남편을 만날 때마다 감사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담이 이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아담이 어떻게 이렇게 여자를 만들었습니까? 이렇게 코와 눈과 입술을 예쁘게 만들었습니까? 왜 살결은 왜 그렇게 부드럽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네가 사랑하지 않겠느냐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가끔 맹추 같을 때가 있습니까? 그래야 부족한 너를 사랑하지 않겠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 부족한 사람들도 우리에게는 사실 감사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 보기를 심히 원했습니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디모데가 감옥으로 옷과 성경책을 가지고 면회 오기를 바랍니다. 디모데를 만나서 기쁨이 가득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기뻐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옥 밖에 있는 디모데를 만나서 기쁨을 가득 얻기를 원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그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확신을 심어서 디모데의 두려움을 몰아내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 주위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확신해야합니다. 설령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사랑의 하나님이 그를 선으로 바꿔주십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았으나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길을 막은 조영원씨도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조상부터 내려오는 믿음이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는 목자 생활을 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나이도 어리고, 리더십도 부족하고, 마음도 여리고 연약하였습니다. 목자인 바울과 비교할 때 개척정신도 도전 정신도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있는 위대한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디모데의 마음 속에는 거짓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석에도 가짜가 있듯이 믿음에도 거짓된 믿음이 있고 진실된 믿음이 있습니다. 거짓 믿음은 일시적인 믿음입니다. 사람 앞에서 사는 믿음입니다. 교회 안에 있을 때는 믿음이 있는데 집에 가면 불신자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행동은 불신자와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불이야 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믿으면 집을 나갑니다. 나가지 않으면 정신병자입니다. 축복의 때는 예수님을 잘 믿지만 역경의 때는 예수님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이 변함없습니다. 사단과 같이 권모술수를 행하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거짓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거짓 없는 진실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행이 일치되었고, 명절 때 집에 가도 변함없이 기도했고, 거짓말을 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청결한 양심을 가진 자였습니다. 양심을 따라서 사는 자였습니다. 이는 얼마나 귀한 믿음입니까? 그런데 이런 믿음은 역사성이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가문에서 계승된 믿음입니다. 전통 있는 믿음입니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고 어머니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은 어머니가 유대인일 때 유대인으로 취급합니다. 신앙은 모계 사회입니다. 모세는 어려서 어머니 품에 자랍니다. 그는 바로의 궁전에서 사십년을 살았어도 히브리인으로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그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먼저 외할머니 로이스에게 있었고, 이것이 그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계승되었고, 디모데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조상들에게서 영향력을 받습니다. 특히 어머니들의 영향력은 중요합니다. 디모데에게 훌륭한 믿음의 어머니, 외할머니가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한 사람은 경건이 몸에 베어있습니다.
우리가 배웠듯이 모니카, 이숙녀, 한나, 마리아와 같은 믿음의 여종들을 통해서 훌륭한 주의 종들이 성장했습니다. 모니카는 남편을 위해서 16년을 기도하였고 아들을 위해서 30년을 기도합니다. 어거스틴은 어머니로부터 젖과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자랐다고 말합니다.
우리 UBF에도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에 의해서 지금까지 성장했습니다. 개척 조상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조상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또 한국교회에는 훌륭한 목사님, 평신도들이 많이 계십니다. 성령의 역사를 이루는 교회도 있고, 사랑이 충만한 교회, 사회에 봉사하는 교회, 찬양이 충만한 교회 말씀을 잘 가르치는 교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이 있습니다. 절대 순종하는 아브라함, 절대적으로 기도하는 다니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눈물의 종 예레미야와 같은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의 좋은 믿음의 영향력이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물려주신 조상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잘 계승해야합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도 먼저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침과 저녁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인해서 감사할 때 우리 내면의 슬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은사를 불일 듯 하게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사도 바울은 아버지로서 아들 디모데에게 안수하였습니다. 그때 디모데는 이미 조상들에게서 받은 은사를 발견하였습니다. 거짓 없는 믿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디모데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 듯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거짓 없는 믿음이 불처럼 활활 타게 부채질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안수받을 때 죽도록 충성하고자 다짐합니다. 그때 받은 초심과 감격과 결단을 불일듯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데 필요한 자질이나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부르실 때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지혜의 말씀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가르치는 지식의 말씀 은사를, 태산을 옮기는 것같은 불가능을 극복하는 믿음의 은사, 병고치는 은사,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은사, 말씀에 기초하여 미래의 방향을 잡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의 은사, 악령을 분별하는 은사, 방언하는 은사,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 사랑의 은사들을 주었습니다. 이런 은사 외에도 찬양의 은사, 섬기는 은사, 기도의 은사, 전도의 은사,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은사, 리더쉽의 은사, 음악, 체육, 미술의 은사들도 있습니다.
특히 송근광 목자님은 고장난 기계를 고치는 은사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삭과 같은 온유함의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빌립 같은 남다른 지성의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안드레 같은 진심과 단순함의 은사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같이 진실하고 담대하게 큰 소리치는 은사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야곱 같은 집념과 성실성의 은사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삭과 같이 순종하는 단순한 믿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과 같이 개척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여튼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펴보면 하나님이 주신 남다른 은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은사는 내가 그 일을 함으로 기쁘고 힘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사를 발견하고 그 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누구든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를 발견하지 못할 때는 비교 의식, 열등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은사를 불일듯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인도네시아나, 강원도, 미국에서 산불이 엄청난 위력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이처럼 불은 엄청난 힘으로 주위에 퍼져 나갑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은사를 먼저 자신에게서 불타게 하고, 이런 은사를 다른 사람에게 퍼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의 불이 붙으면 은사를 불일듯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은사를 적극적으로 계발하면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의 연약함을 책망하기보다 은사를 불일 듯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UBF에는 말씀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순복음 교회는 기도의 은사가, 마라나타는 찬양의 은사가, ccc에는 조직력의 은사가, 한사랑은 사랑의 은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모임에서 은사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은사를 불일듯하게 해야 합니다. 소감쓰기, 양식메모, 메시지 훈련은 말씀의 은사를 불일듯하게 하는 ubf만의 은사입니다. 나에게는 성경 연구의 은사가 있습니다. 성경 66권 강해서를 쓰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디모데에게만 준 은사도 있지만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은사가 있습니다.

(사단은 두려워하는 은사를 줍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하나님이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은사는 세 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단이 준 은사도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은사는 사단이 주는 은사입니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사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제일 먼저 생기게 된 것이 두려움이었습니다(창3:10).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두려하는 영이 임하면 사단의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잠언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사람의 올무에, 물질을 두려워하면 물질의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빠지면 아무리 능력 많은 사람도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됩니다.
민수기 13:33절을 보면 가나안을 정탐한 10두령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모두 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주는 두려움의 은사도 불붙듯이 퍼져나갑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전염시켜 다른 백성들도 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아닌 사단의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이들을 다른 영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골리앗을 보고는 싸워 보지도 않고 두려워했습니다. 전쟁을 할 때 가장 큰 적은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미디안 군사와 싸울 용사를 고를 때에 먼저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집으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훈련된 군사들이라 할지라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 불신과 회의를 심으면 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큰 일을 하려면 반드시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오늘날을 일컬어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기치 못할 장래 문제로 불안해합니다. 사람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건강과 직장에 대한 두려움, 결혼에 대한 두려움, 출산에 대한 두려움 등 두려워하지 않을 것도 만들어서 두려워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될 일도 두려워하다가 그르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두려워하고 염려하게 된다면 이는 불신자와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까? 은사를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에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 앞에 두려워하는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5:36)." 하나님은 두려워 떠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언29:25)." 우리가 세상을 의지할 때 아무 것도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여름수양회를 앞두고도 사단이 심는 두려움을 극복해야합니다. 우리는 불신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어 드리고 하나님 안에서 다른 사람을 믿어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배피로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에 임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면 우리의 내면에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영이 생깁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공통의 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은사를 주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능력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면 우리는 권능을 받습니다.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능력을 받습니다.
이사야는 이 하나님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사야 40장 28-31절입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창조주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미련한 자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달려가도, 걸어가도 피곤치 않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신 사람은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피곤치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강하고 담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은사를 주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사랑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심으로 사랑을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는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처음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1서 4:9-10)
하나님을 영접할 때 우리는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자, 우리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좋아하는 것과 다릅니다. 좋아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따라서 섬기는 것입니다. 개를 좋아해서 키운 사람은 병이 나면 버립니다. 어떤 사람이 삼겹살을 썰고 있는데 개가 삼겹살을 주워 먹다가 혀가 잘라졌습니다. 그 사람은 개의 혀를 수술하는데 100만원이 들었습니다. 개값은 10만원밖에 안 합니다. 그는 개를 사랑했기 때문에 개를 버리지 않고 개를 수술하여 살렸습니다. 상대방이 도움이 필요할 때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구별됩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입니다. 돈과 시간과 자존심을 희생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제의 은사를 주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근신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근신하는 마음은 self control로서 절제하는 영을 말합니다. 적당히 TV를 보게 하시며, 겜을 하다가 일어날 줄을 알게 하시며, 잠에서 일어날 때, 먹는 것을 그만 둘 때를 알게 하십니다. 절제는 경건한 것에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기도도 절제할 필요가 있고 말씀을 보는 것도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절제는 자동차의 break와 같이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어 줍니다. 브레이크를 잡아야할 때 엑셀을 밟으면 대형사고가 일어닙니다. niv 성경에는 근신하는 마음이 self-discipline이라고 나옵니다. 절제는 훈련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운동하고 밥먹고 기도하고 말씀보는 것을 훈련해야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훈련해야 하고 사랑하는 것도 훈련해야 가능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사랑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지만 훈련이 안 되면 어색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을 것)

결론적으로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목자의 사랑을 신뢰해야합니다.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성령을 받아야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능력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주신 은사를 불일듯하게 해야합니다. 더 나아가 나에게만 주신 은사를 불일듯하게 해야 합니다. 이번 여름수야회 통해서 우리의 은사를 불일듯하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디모데후서 1장 강해 일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말씀:디모데후서 1장 1-디모데후서 1장 7
요절 디모데후서 1장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디모데후서 1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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