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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베드로전서 2장 강해 일부 왕같은 제사장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7-12-16 00:00:00
조회수 : 4,213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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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장 강해 일부 왕같은 제사장

배드로전서 21-베드로전서 210

요절 베드로전서 29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천안 ubf에서 만든 최초의 영화를 보셨죠? 그 영화 제목이 무엇인지 아시죠? , identity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정체성이죠. 그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런 것입니다. 이진휘라는 학생이 길가에 쓰러져 넘어져 있습니다. 운전하며 가던 최경외라는 사람이 그를 구해줍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진휘는 기억 상실증에 걸려 있습니다. 이진휘는 자신의 가방을 열어 보니 망치와 못과 총이 나옵니다. 자신의 학생증도 나옵니다. 학생증에는 상명대 요업디자인과 대학원생이라고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합니다. 상명대에 찾아가서 전도 나온 유비에프 사람 최소망을 만납니다. 과 사무실에 전화해보니 이진휘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진휘와 같이 자취를 하던 친구를 가르쳐줍니다. 이진휘는 친구가 살고 있는 동아빌라를 찾아갑니다. 친구의 전화번호를 알아서 전화를 걸었더니 친구는 유비에프 요원들이 이진휘를 찾고 있으니 도망가라고 말을 합니다. 유비에프 요원들은 이진휘가 나타났고 친구와 통화한 기록을 발견합니다. 유비에프 요원들은 이진휘를 찾아갔으나 이진휘는 창문으로 도망갑니다. 유비에프 국장은 이진휘의 친구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진휘와 친구는 단대에서 접선하고 모든 요원들이 그곳으로 출동합니다. 이진휘는 이를 눈치채고 유비에프 요원으로부터 친구를 보호하고자 합니다. 친구는 이진휘를 만나고 이진휘는 친구에게 유비에프 요원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결국 출동한 스나이퍼 박주민에 의해서 친구는 총에 맞아 죽습니다. 이진휘는 이를 알고 유비에프 요원들을 한 명, 한 명 넘어뜨립니다. 그들에게서 유비에프 정보국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얻습니다. 그리고 유비에프 정보국이 있는 유비에프 센타로 찾아옵니다. 유비에프 정보국을 방문하여 유비에프 정보국장을 쓰러뜨립니다. 거기서 정보분석 요원인 오은혜가 유비에프는 이진휘를 도와주려고 하고 이진휘는 과거 유비에프의 형제였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친구가 사단이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단의 꼬임에 빠져서 과거 가방에서 나온 망치와 못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자책감을 못이겨 자살했지만 실패하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을 알게 됩니다. 이진휘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억이 되돌아옵니다. 변화된 이진휘는 이제 유비에프 정보요원이 되어 나사렛대에 방황하는 양들을 찾으러 떠나며 그곳에 방황하는 이정영 양이 나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 한번도 영화를 해보지 않은 배우들과 디카를 가지고 이 정도의 영화를 만든 이진휘 목자가 자랑스러웠습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 이진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살했었지만 다시 예수님을 회상하며 예전의 자아를 회복하는 모습은 압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 보면 두 가지 정체성이 나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가 십자가를 생각하며 자신을 사명인으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스토리나 플롯이 아주 뛰어난 영화입니다. 참 멋진 영화입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우리 박수를 쳐줍시다.

오늘 말씀은 우리 크리스찬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오늘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네로의 핍박을 받고 흩어진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당시의 성도들은 네로의 기독교인의 박해로 집을 떠나고 고향을 떠나서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은 슬프고 고독하였습니다. 그들의 내면에 떠오르는 가장 큰 질문은 나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버림 받을 때 자신은 쓰레기와 같이 느껴집니다. 무가치하고 무의미함을 느낍니다. 우리가 한 공동체에서 소외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한 공동체에서 왕따를 당했을 때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아의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과연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나의 참된 정체성을 찾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버려야할 것)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성도들은 버려야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버린다는 것은 배설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배설을 잘한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요. 건강한 것입니다. 배설을 잘 못하는 사람을 변비에 걸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심하면 요즘은 관장을 시킵니다. 옛날에는 꼬챙이로 변을 끄집어 내었습니다. 배변을 못하면 사람은 배가 아프고 나중에는 죽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크리스찬으로 배변을 잘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변을 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죄입니다. 베드로는 회개치 않는 악독함, 속이는 기만, 이중적인 외식, 남이 잘되면 배 아파하는 시기심, 남의 약점을 말하는 비방을 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삶)

 

2,3절을 보십시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건강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는 젖을 먹어야 하고 나이가 들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젖이나 밥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와 살입니다. 밥은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신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아기들은 힘을 다해서 젖을 먹습니다. 어린아이는 젖을 필사적으로 사모합니다. 어린이들이 젖의 맛을 알고 젖이 생명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거듭난 사람도 말씀의 맛을 본 자들입니다. 저는 한 목자와 말씀을 공부하는데 그분이 과거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는 말씀공부를 하면 또 다시 다음 주에 말씀 공부할 것이 기다려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한창 성장할 때 밥을 먹고 돌아서면 또 배가 고픈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합니다. 십자가와 성령을 사모해야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살고 성장하고 건강합니다. 우리가 양식과 주일 말씀을 사모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 나가는 삶)

 

4a절을 보십시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버림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컴퓨터 겜이나 노래방이나 술집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위로 받기 위해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목자나 교회 자체로 나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목자나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저는 안마리아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안마리아 선교사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스텝입니다. 그분이 보낸 카드가 교회 게시판에 붙어있습니다. 그분은 서울 미대를 졸업하고 남편은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영사까지 지낸 호세안 선교사님입니다. 이분의 아버지가 고등법원 부장 판사였습니다. 아주 완고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예수님 믿는 마리아 선교사님을 엄청나게 핍박하셨습니다. 머리채를 잡고 매를 때렸습니다. 마리아 선교사님은 너무 슬퍼서 목자인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내다보지도 않고 쫓아내셨습니다. 하나님께 가야지 왜 내게 왔느냐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버림 받았다고 생각할 때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참았습니다. 그런데 목자님에게도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솟아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골목길을 나오는데 예수님이 그곳에 서계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예수님이 버림 받은 우리를 위로해주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들 심지어 목자님에게도 버림 받았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4b"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우리가 나아가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배로운 산돌을 삼으셨습니다. 산돌은 생명이 있는 돌입니다. 생명을 나누어주는 돌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돌이라고 한 것은 우리의 인생에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돌입니다. 베드로는 돌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도 생명을 주는 기초가 되는 돌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관의 기초요, 가치관의 기초요, 정치 사회 문화 과학의 기초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세 가지 변화)

 

5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가 예수님께 나갈 때 우리는 두 가지 변화가 생깁니다. 예수님께 나가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첫째, 산돌이 됨)

 

먼저 우리도 산돌이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동일하게 생명을 소유하고 생명을 나누어 주는 존재가 됩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집을 구성하는 벽돌이 됩니다. 신령한 집은 바로 성전이십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을 만드는 산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모임인 교회에 거하십니다.

 

(둘째, 제사장이 됨)

 

우리는 제사장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됩니다. 우리는 신령한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몸을 산제물로 드립니다. 나의 죄를 죽입니다. 짐승을 제사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제사장이 됩니다. 불신자들의 죄문제를 도와주는 제사장이 됩니다. 그들에게 죄사함을 주고 생명을 주는 제사장이 됩니다.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돕는 제사장이 됩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성도들을 통하여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사실 네로의 박해 때 흩어진 성도들이 세계선교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모퉁이돌 예수님)

 

6절을 보십시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이 말씀에 보면 성도들이 나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보배로운 모퉁이돌입니다.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이십니다. 이는 주춧돌이라고도 합니다. 옛날에는 주춧돌을 놓고 그곳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주춧돌은 집의 중심이므로 머릿돌(the capstone, THE VERY CORNER [stone]) 이라고도 합니다. 지금은 이런 주춧돌이 없어졌기 때문에 집을 지을 때 설계자 시공자 감리자들의 이름을 적는 곳을 주춧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보배로운 모퉁잇돌입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아주 귀한 보배로운 분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꼭 필요한 보배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나가면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여주십니다.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고 영생을 주십니다. 우리를 치료하시고 자유케 하십니다. 변화시키시고 안식을 주십니다. 우리를 부끄럽지 않고 영광스럽게 하여주십니다.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에 기초하여 집을 짓는 사람들은 그 인생의 집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영광을 주십니다. 지금은 나그네로 흩어져 있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심판하시는 예수님)

 

7,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부딪히는 돌이 됩니다. 걸려 넘어지는 바윗돌이 됩니다. 심판의 돌이 됩니다. 전쟁 때 돌을 굴려서 사람들 머리 위에 떨어지게 합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돌이 믿지 않는 사람들 위에 떨어져서 가루로 만들 것입니다. 그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죄를 지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지금은 핍박하는 로마의 권력자를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약 말씀에서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 속에서 그렇게 됩니다.

 

(성도의 네 가지 신분)

 

9a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흩어진 성도들은 버림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많은 고난과 희생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성도들은 사자 밥이 되고 불쏘시개가 되어 고난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외국인이요. 나그네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갈 때 네 가지 신분을 얻게 됨을 말씀하십니다.

 

(첫째 택하신 족속)

 

첫째는 택하신 족속입니다. 택하신 족속이란 선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선택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중에 하나님이 택하신 야곱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택함 받지 않은 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지 않았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가 약속의 자녀요 은혜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우리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아시고 미리 예정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먼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태초에 선택받은 선민으로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왕같은 제사장)

 

둘째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요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우리도 왕이요 제사장이 됩니다. 모세나 사무엘과 같이 왕과 제사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왕노릇합니다. 당시에 왕은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은 로마황제가 아니라 성도들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에 의해서 천국에 갈 수도 지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왕과 같이 존귀한 자들입니다. 흩어진 성도들은 제사장이 됩니다. 제사장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후손만이 되었습니다. 아론의 후손 가운데서도 죄를 지은 자는 제사장 직에서 짤렸습니다. 비누하스는 모압 여자들과 이스라엘 사람이 죄를 지을 때 분노하였기 때문에 그 후손 가운데 제사장 직을 계승하도록 하였습니다. 제사장은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제사장은 영화로운 직분입니다. 그들의 옷이 아름답고 영화롭습니다. 그들의 하는 일도 아름답고 영화롭습니다. 제사장은 죄문제를 도와 죄사함을 받도록 돕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도록 돕는 일이 아름답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도 아름답습니다. 예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은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제사장들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제사장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생명이 살아납니다. 제사장을 통하여 말씀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놀라운 제사장으로 삼아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자격없는 우리를 제사장 삼아주십니다. 이것을 만민사제주의라고 합니다. 우리가 모두 성직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제사장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나가서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중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성경책을 볼 수 있고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만민은 사제다)

 

그러나 가톨릭이 권력화 되면서 신부들만이 사제라고 하였습니다. 일반 성도들은 성경책을 읽지도 못하고 기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 개혁에 의해서 다시 만민이 사제라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가톨릭은 사제라고 주장하는 많은 성도들을 화형시켜 죽였습니다. 바비도라는 소설에 보면 영역된 성경을 읽었다고 화형을 시켜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희생을 통하여 개신교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사제가 되어 자유롭게 성경을 읽고 말씀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우리 유비에프는 이런 정신에 따라서 평신도를 선교사로 보내고 평신도를 목자로 세웠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이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유비에프를 이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비에의 평신도 사역은 성서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가 제사장입니다. 이제는 교회에서도 모든 성도들을 사역자로 만들고자 힘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면 우리는 모두가 제사장이요.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영화로운 제사장들입니다.

 

(셋째, 거룩한 나라)

 

셋째, 성도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거룩한 나라는 죄가 없이 하나님께로 구별된 나라입니다. 세상의 나라는 죄악된 나라입니다. 온갖 음란과 거짓과 도둑과 폭력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거룩한 나라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나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더러운 죄악을 씻음 받았습니다. 말씀을 따라사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사랑과 공의가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죄를 짓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제사를 드리며 나갑니다. 회개하는 속죄제를, 드리고 순종하는 번제를 드리고, 긍휼의 화목제를 드리고, 감사의 소제를 드리고, 사람들에게 피해를 보상하는 속건제를 드립니다. 제사장은 양들의 죄를 담당해야 합니다. 그들의 죄를 위해서 자신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에게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게 씻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신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공의를 주십니다. 성령 안에서 사는 우리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넷째,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우리는 과거 죄의 소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사셔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보호해 주십니다. 불가운데 지나도 물 가운데 지나도 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먹을 것, 입을 것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여주십니다. 어떤 물건의 가치는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의 작품이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박수근의 시장의 사람들이 박수근의 작품이므로 25억을 호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치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자)

 

9b를 보십시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네 가지 직분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죽음의 어둠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볼 때 흠모할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널리 증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아름다운 덕을 모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합니다. 나의 삶을 통하여 나를 변화시키신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

 

10절을 보시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는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합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아야 합니다.

 

(결론 왕같은 제사장)

 

결론적으로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과연 왕과 같은 제사장들입니까? 왕은 당시에 생사여탈권 있습니다. 왕은 존귀합니다. 왕은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기는 내면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왕과 같은 권세가 있습니까? 우리가 왕과 같이 존귀한 존재입니까? 우리가 왕과 같은 내면성이 있습니까? 솔직히 세상에서 우리를 볼 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왕이라는 말입니까? 저는 이 문제로 20071231일날 심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제가 전임목자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인턴 목자와 함께 다니고 백요셉 이예스 목자님과 일대일 하고 그리고 김상미 강종진 형제님과 새롭게 일대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섬기는 나의 내면성 없음을 생각하며 심히 절망이 되었습니다. 내가 과연 목자를 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일월 일일 목자들과 태조산을 등반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의 내면에는 알 수 없는 힘이 났습니다. 태조산 정상을 올라갔다가 교회까지 걸어와서 탁구를 열게임을 쳤습니다. 윳을 놀고 메일을 15통을 보냈습니다. 학생회 소감 모임을 갖고 말씀 공부를 인도하였습니다. 저녁에는 다시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에게는 성령님이 임하고 있었습니다. 태조산 등반을 통하여 하나님은 나에게 하나의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왕처럼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자랑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주위에 사람들이 하나같이 존귀하고 자랑스럽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요? 이들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전혀 왕과 같지 않았습니다. 고려 태조 대왕이 올라갔던 태조산에 가서 내가 왕도가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 바뀐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들을 바라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안에서 보니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처럼 아름답고 영화롭게 보였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니 모든 사람들이 왕처럼 자랑스러운 존재로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볼 때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 들입니다. 아멘!

베드로전서 2장 강해 일부 왕같은 제사장

배드로전서 21-베드로전서 210

요절 베드로전서 29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베드로전서 2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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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 2장 강해 일부 왕같은 제사장 오요한 2007-12-16
2 [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 1장 강해 이부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오요한 2007-12-14
1 [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 1장 강해 일부 산소망 오요한 2006-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