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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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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66권강해서

욥기 21장 강해 누가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0-04-04 00:00:00
조회수 : 2,807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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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1장 강해 누가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말씀 욥기 211-욥기 2134

요절 욥기 2122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오늘 말씀은 소발의 두 번째 변론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소발은 욥이 악인이므로 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소발은 욥이 벌을 받는 것을 보고, 욥의 죄를 거짓으로 만들어내어 공격하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욥은 이런 소발에게 악인이 잘되는 현실의 여러 경우를 소개합니다.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현실적인 진리를 말합니다. 욥은 자신의 이해를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를 깨달으면서 겸손히 인간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우리는 나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자 하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근심하는 욥)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너희가 조롱할지니라.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 마음이 어찌 조급하지 아니하겠느냐? 너희가 나를 보면 놀라리라. 손으로 입을 가리리라. 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1-6)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욥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통할 때 말을 들어주는 것이 위로입니다. 상대방의 말에 공감해야합니다. 카운슬링의 핵심은 공감입니다. 거울 사람이 되어 그 마음을 비추어주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억울함, 답답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말을 들어본 후에 친구들이 자신을 조롱하라고 합니다. 욥은 진리의 확신을 가졌으니 겸손하고 또 담대하게 발언합니다.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고 한 말은 그의 겸손을 보여 줍니다. "내가 말한 후에 또 조롱할지니라"고 한 말은 그의 담대함을 보여줍니다.

욥의 이런 하소연은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의로운 자신에게 고난을 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마음이 조급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원망은 수심, 근심의 의미가 있습니다. 욥은 자기의 당한 고난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근심하였습니다.

그는 미궁에 빠져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욥은 만고에 모본이 될 만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처사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다 이해하지 못하는 처지에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자신의 처지를 고백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의로운 자기를 죄인 벌하시듯 무서운 환난으로 괴롭히시는가 근심합니다. 그 근심 때문에 그는 견디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는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여 답답해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답답한 중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지금 욥의 모습을 보면 놀라고 입을 가릴 정도입니다. 욥은 자녀와 종과 재산을 잃고 병이 날 때를 기억만 해도 어안이 벙벙합니다. "내가 그때를 추억하기만 하여도 답답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그가 과거에 당한 비참한 일들을 돌아볼 때에 가슴이 먹먹하고 소름이 끼칠 지경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과거의 사건은 욥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욥이 자기의 당한 고난의 실제로 보여주면서 그 친구들의 이론이 틀린 것을 지적합니다.

그는 확실히 고난을 받을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고난을 받습니다. 욥은 모든 고난은 반드시 죄의 결과라고 하는 그 친구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미운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사랑하는 자식 매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시고 오히려 포기한 자에게 죄를 지어도 내버려두십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고난을 받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욥는 친구들더러 "손으로 입을 가리우라"고 하였습니다. 친구들이 침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번성에 대한 고찰)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7-10)

 

욥이 현실적으로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알라고 합니다. 그들의 후손은 잘만 살고 있습니다. 욥이 친구들의 논리대로 하면 현실의 풀리지 않는 난제를 제시합니다. 이런 난제 속에서도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악인들은 그들의 자손의 잘되는 것을 보면서 행복하게 지냅니다. 욥의 친구들은 악인은 언제나 무자하다는 주장하였습니다. 욥은 그런 친구의 말을 반박합니다. 악인도 하나님의 경륜에 의하여 많은 자녀들을 거느립니다. 욥도 악인이 벌을 받아 무자하게 되는 일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욥은 사람에게 반드시 자손이 있어야만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다만 악인이 번성하는 현실적 진리를 말합니다.

악인이 이 세상에서 오래 살며 세력을 잡는 일이 있음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반스(Albert Barnes)는 악인이 번성하는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덕을 보여주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악함을 보여주기 위합니다. 악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충분히 주어 심판 때에 그들이 핑계하지 못하게 하려 함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풍성함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어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의 백성을 징계하는 도구로 그들을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 사회가 악인들의 재능에 의하여 진보하기 위합니다.

우리는 위의 여러 가지로 이 난제를 다 해결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응이 이 세상 중심이 아니고 내세 중심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게 되는 것이 주요한 축복은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번성하다 지옥에 가면 이 세상의 번성이 저주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다 천국에 가면 이 세상에서 고난이 축복입니다.

악인이 이 세상에서 불의한 행동으로 번영을 누림은 결국 그 인격에 손해를 끼칠 뿐입니다. 모든 행동은 그 자체에 있어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악인들의 집은 평안하고 하나님은 즉시 매를 대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모든 악인이 끝까지 평안히 잘 살다가 평안히 죽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도 최후에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악한 왕 느부갓네살이 평안히 잘 살다가 벌 받은 일이 있습니다.(4:28-33), 벧사살왕도 그렇습니다.(5:1-9, 30-31), 나발도 그렇게 되었습니다.(삼상 25:36-38), 헤롯도 그렇게 되었습니다(12:23).

욥이 이같은 경우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27:8-23), 다만 친구들의 잘못된 주장을 반박하는 것입니다. 악인이 세상에서 끝까지 형통한 경우도 있고 악인들의 짐승들은 잘만 자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잘되는 악인의 후손들에 대한 고찰)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11-15)

 

악인들 자녀들이 양 떼 같이 많습니다. 악인들은 그 자녀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쾌락을 누리며 즐기도록 말합니다. 악인은 쾌락주의에 빠집니다. 악인들의 자녀들은 춤추며 잘만 살아갑니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다가 고통도 없이 죽음을 당합니다.

악인들은 하나님께 우리를 떠나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주의 도리를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전능자를 섬기지 않고 기도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형통하면서도 그 형통함이 자기의 손에 달린 줄 오해합니다.(16절 상반).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악한 말을 합니다(14절 상반). 악인은 하나님을 섬길 필요도 없고 그에게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악인은 애굽의 바로와 같습니다(5:2). 이런 악인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해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또한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악인의 잘못은 자기의 번영 역시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짐승과 같은 무지에 있는 자입니다. 그들은 돼지가 도토리나무 아래서 그 떨어진 도토리를 많이 주어 먹고도 그 나무를 알아보지 못하고 가버림과 같습니다.

 

(악인이 망하지 않는 다양한 사례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 악인의 등불이 꺼짐과 재앙이 그들에게 닥침과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하게 하심이 몇 번인가.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 같이, 폭풍에 날려가는 겨 같이 되었도다.”(16-18)

 

익인들은 자기들의 성공이 자기들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욥은 그들의 생각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욥은 이런 악인들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욥은 자기가 이런 악인과 다름을 명백히 말합니다(16절 하반). "계획"은 인생관입니다. 욥은 악인들과 다른 인생관을 갖고 있습니다. 욥은 악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복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재앙을 현재 많이 내리지 않습니다. 시편에 보면 악인들이 바람 앞에 등불이나 검불처럼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된 적이 많지 않습니다. "몇 번이나 있었느냐"란 말이 중요합니다.

회개치 않은 악인이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벌을 받는 일에 대하여 욥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이 세상 국가의 법률 시행 방법은 같은 죄를 범한 자들에게는 대체로 같은 형()을 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간 통치 원리는 인간의 육신만 아니라 그의 영혼, 그리고 현세만 아니라 내세와도 관련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죄인을 다스리심에 있어서 공의로우시면서도 일정한 법에 예속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양성을 지녔고 또한 자유로우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치 않는 죄인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모두 다 이 세상에서 꼭 같은 모양으로 곤고케 되거나 멸망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 어떤 자는 현세에서 육신도 망하고(12:23), 어떤 자는 현세에서는 호화롭게 살다가 내세에 가서 비참해 집니다(16:23). "등불이 꺼짐"은 멸망을 비유하고, "바람 앞에 검불"이나 "폭풍에 불려가는 겨"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한 자의 비참한 육신 생활을 비유합니다(1:4, 35:5, 83:13 17:13, 29:5 13:24). 악인들은 불가항력의 힘 앞에서 어찌할 수 없이 패망합니다. 악인이 이렇게 이 세상에서 패망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악인이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욥의 변론입니다.

 

(악인을 지금 당장 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그의 자손들을 위하여 쌓아 두시며 그에게 갚으실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할 것이니라. 그의 달 수가 다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19-21)

 

친구들은 "하나님이 아버지의 죄를 그 자식들에게 갚으신다" 하고 말하지만, 욥은 그런 말을 말라고 합니다. 죄 지은 그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그가 제 죄를 깨닫습니다. 죄인은 제 스스로 망하는 꼴을 제 눈으로 보아야 하며, 전능하신 분께서 내리시는 진노의 잔을 받아 마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욥은 여기서 악인의 죄값은 이 세상에서 그 자신이 친히 받지 않은 경우에 그의 자손이 그것을 받는다는 주장(5:4, 20:10, 21:19)에 대하여 반대합니다. 만일 그 악인의 죄값이 악인 자신에게 미치지 않고 그의 자손에게 미치게 된다면 그 악인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19절 하반-20). 악인은 그의 사후에 자기 후손에 대하여 무관합니다.(21)

욥이 이렇게 말함은 아비의 죄값이 그 자손에게 미치게 된다는 성경적 진리(20:5 5:9)를 아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난제를 제시하는 것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오하신 처사에 대하여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욥은 자기에게 닥친 난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었고 또 참았습니다. 악인들이 죽은 후에 심판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합니다. 자식에게 심판을 내리면 그들은 자식의 심판에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그의 달수가 다하면." 이 말은 그 악인의 생애가 끝난다는 뜻입니다. 그가 죽은 다음에는 그와 그의 가족과의 혈연관계는 끊어집니다. 악인의 자녀를 심판하는 것이 악인에게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욥은 지금 현세에 눈을 고정시키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 살다가 지옥에 가는 것을 복으로 보지 않고 저주로 봅니다. 이런 견해를 갖는다면 욥은 자신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신비로운 하나님의 주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22-26)

 

욥은 악인의 번성을 보면서도 알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은 높은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충고할 수 없습니다.

여기 "높은 자들" 이란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나 하늘에 있는 피조물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지식은 무소부지하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하나님에게는 실수가 없으십니다.

욥이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면서도(18-21) 하나님의 완전하신 섭리를 믿고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사람이 모를 것도 많으나 그것은 사람의 무지 때문이고 하나님의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우리가 모르는 오묘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을 만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지식으로 다 측량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그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실 수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하고 또 신묘막측합니다. 로마서 1133-36에 말하기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먼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도록 충실하여 안전하여 평안하고 그의 그릇에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 합니다. 그러다 둘 다 죽어 한 가지 흙으로 가고 구더기가 덮습니다. 이 세상에서 볼 때는 그들의 차이는 없어 보입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욥은 여기서 인간에게 대한 하나님의 처사가 신묘막측하심을 진술합니다. 욥은 다만 자기의 무지를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심령 깊은 데서는 하나님을 사모하며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파스칼(Pascal)의 좋은 말을 인용할만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합리적이라고 불리울 만한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종류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는 자요, 다른 한 종류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를 진심으로 찾는 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꼭 같은 사람으로서 한 사람은 평생토록 평안히 살고 다른 한 사람은 평생 고난을 당하는가? 또 그 두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 육체들은 왜 아무 차별없이 꼭 같은 모양으로 썩는가? 이것이 욥의 의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를 느끼고 있습니다.

 

(잘 살다 가는 악인들의 사례들)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속셈도 아노라. 너희의 말이 귀인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이 살던 장막이 어디 있느냐 하는구나. 너희가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악인은 재난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고 진노의 날을 향하여 끌려가느니라. 누가 능히 그의 면전에서 그의 길을 알려 주며 누가 그의 소행을 보응하랴. 그를 무덤으로 메어 가고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그는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기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앞서 갔으며 모든 사람이 그의 뒤에 줄지었느니라.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려느냐? 너희 대답은 거짓일 뿐이니라”(27-34)

 

욥은 친구들의 생각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속셈은 욥을 해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욥이 죄를 지어서 망했고 더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친구들은 "고난을 받는 자가 악인이라" 하는 논리로 고난의 사람인 욥을 죄인으로 몰아 붙입니다. 고난 중에 빠진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치는 것은 잔인한 행동입니다.

성도는 그 고난의 이유를 알아볼 필요도 없이 그런 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9:1-7) 그 뿐 아니라 고난 중에 빠진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일 수도 있으니(12:7-11), 성도는 도리어 그런 사람을 귀히 여기며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친구들은 "세도 부리던 자의 집이 어디에 있으며, 악한 자가 살던 집이 어디에 있느냐?" 말합니다. 친구들은 악한 폭군이나 또는 기타 악인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벌을 받아 멸망하기 때문에 그 종적도 찾을 수 없이 된다고 합니다. 물론 악인이 이 세상에서도 그 죄값으로 멸절되는 일이 있으나 모든 악인이 다 그렇게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로 욥은 다음 말씀부터 그 친구들의 주장과 반대되는 경우(30-34)를 진술합니다. 친구들은 세상을 많이 돌아다닌 견문 넓은 사람들과 말을 해 본 일이 없느냐고 합니다. 그들은 그 여행자들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세상에서 악인들이 모두 다 멸망하는 것이 아니고 개중에는 그 사는 날 동안에 평안히 지나다가 평안히 죽는 자들도 있다는 사실은 길가는 여행자들도 안다고 합니다.

여행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지역에서 되는 일들을 잘 아는 만큼 이 사실을 환하게 압니다. 여행자들의 지식은 보편적입니다. 욥은 그 사실에 대한 자기의 확신을 표현합니다. 누구든지 욥 자신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편견 없이 친히 목격하고 말하는 행인들의 증거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리셔도, 악한 사람은 항상 살아 남는다고 합니다. 회개치 않는 악인이 이 세상에서 평안히 살고 또 평안히 죽기도합니다. 행인들은 그들이 사후에 그 심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욥이 그대로 받아들인 내세 신앙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선악간에 보응을 받지 못하면 그의 죽은 후에 내세에 가서라도 그 보응을 받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누구도 악인들 앞에서 그들의 죄악을 책망할 수 없습니다. 저지른 죄에 대해서 징벌할 수도 없습니다. 악인은 죽어도 달게 죽습니다. 그의 무덤에는 무덤지기가 있습니다. 골짜기의 흙덩어리가 그를 부드럽게 덮어줄 것이고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그의 앞과 뒤에서 그를 조문하며 따를 것입니다. 여기서는 세력 있는 악인의 생전에 되어진 일과 또 죽은 후에 그의 육신이 당할 것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그 겉 모양만 보아서는 매우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생전에는 그의 세력 때문에 누가 감히 그 앞에서 충고도 못하고 책망은 물론 못합니다. 그는 자행자지합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사람들이 그의 육체를 안장하고 그 무덤을 지키는 수위들을 세웁니다. 그렇게 호화롭게 매장된 장면은 마치 그가 무덤 속에서 흙덩이를 달게 여기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 장례식에는 그의 앞 뒤에 사람들이 무수히 호위하고 행진합니다. 이 부분 말씀(31-33)은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 끝까지 영광을 받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김일성, 김정일 같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받을 심판은 내세에 남아 있습니다(30). 그런 것을 보면서도 친구들은 악인은 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어떻게 친구들이 욥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친구들의 말은 거짓일 뿐입니다. 욥은 악인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는다는 변론이 성립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그것으로 자기가 설득될 수 없고 따라서 자기에게 문제 해결을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하나님)

 

욥은 불공평한 일을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불평을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것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참으로 욥의 말은 맞습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뜨린 김일성은 행복하게 살다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인 김일성은 많은 사람들의 조문을 받으면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가난에 빠뜨리고 인권을 유린하는 김정일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욥의 불평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기복주의 신앙을 가진 친구들의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믿으면 물질적으로 잘 산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십일조 안 해서 부자가 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기복주의 신앙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과 건강을 주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물질과 건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기복주의와 복음신앙의 차이점은 그 관심이 하나님께 있느냐 물질적이고 현제적인 복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현세에 있느냐 내세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해야합니다. 아멘

욥기 21장 강해 누가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말씀 욥기 211-욥기 2134

요절 욥기 2122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욥기 21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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