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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욥기 15장 강해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않는가?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0-02-13 00:00:00
조회수 : 2,907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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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5장 강해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않는가?

말씀 욥기 151-욥기 1535

요절 욥기 1515,16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엘리바스는 욥이 죄로 인하여 벌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빌닷은 공의의 하나님이 욥을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소발은 욥에게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욥기 15장은 엘리바스가 다시한번 욥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욥은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죄를 지적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을 믿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는 인간을 전적으로 신뢰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의 말이 무익한 말인가)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1-3)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지혜롭다는 사람이, 어찌하여 열을 올리며 궤변을 말하느냐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첫 번째 변론과 비교해 볼 때 한 차례 변론이 진행되는 동안 욥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변론 때에는 엘리바스가 욥의 특정한 범죄를 염두에 두고는 있었으나 위로와 동정 어린 어투로 권면하였습니다(4:7 5:17). 그러나 둘째 변론에서는 욥의 재난에 대해 단순한 인과응보적 시각만 강력히 피력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쓸모없는 이야기로 배를 채우는 논쟁이나 일삼고, 아무 유익도 없는 말로 다투기만 할 셈이냐고 묻습니다. 그는 욥이 욥 자신을 그의 친구들보다 지혜로운 자라고 말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질책합니다(12:3 13:2). 욥의 지식이 바람처럼 헛되이 날아가는, 가볍고 공허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헛된 지식으로 대답한다고 말합니다. 동풍처럼 도움이 되지 않고 무익한 말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동풍은 이란 시리아나 북아라비아 지방에서 팔레스틴 지역으로 불어오는 열풍으로서 특히 봄철에 많이 불며 농작물에 커다란 피해를 주는 바람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헛되고 오히려 해로운 생각을 그 품에 채워 간직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욥이 내세우는 논리가 헛되고 무익한 것이라고 경멸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복부를 생각과 감정의 가장 깊은 장소로 생각하였습니다.

 

(욥은 실족시키는 자인가)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4-6)

 

엘리바스는 정말 욥이야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내던져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뉘우치며 기도하는 일조차도 팽개쳐 버렸다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게 하고 반성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욥이 악하고 어리석은 말로 다른 사람의 신앙에 타격을 준다는 의미로 번역하였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포기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지금도 계속 경외하고 있습니다. 진실하고 죄를 짓지 않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죄가 그의 입을 부추겨서, 그 혀로 간사한 말만 골라서 하게 한다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친구들의 권면을 한사코 거부하고 도리어 자기를 변호하기에 급급한 것은 근본적으로 욥이 죄악 가운데서 바른 판단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친구들처럼 욥의 재난을 철저히 범죄와 연결시켜 말합니다.

욥을 정죄하는 것은 욥의 입이지, 엘리바스가 아니라고 합니다. 바로 욥의 입술이 욥에게 불리하게 증언한다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간사한 말을 한다고 합니다. 욥의 말이 바로 욥이 죄인이라는 것을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욥은 그 자신은 의롭고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신을 고난당하게 한다고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항변 자체로서 하나님 앞에 죄악되며, 욥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고통 가운데 진솔하게 자신의 심정을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욥이 한 말을 꼬투리로 잡아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여 죄를 짓는다고 말합니다.

엘리바스는 처음에는 욥이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지은 죄는 말하지 않고 불평하는 말 자체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말을 하다 본질에서 벗어나 말을 꼬투리잡아 말하는 논점일탈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말은 옳은가?)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7-10)

 

욥이 맨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산보다 먼저 생겨난 존재라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이 산들이 있기 전 존재했던 분은 하나님과 천사들뿐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나이가 어리다는 과장적인 표현으로써 욥의 주장의 무모성을 힐책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특히 욥이 그의 친구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한 것에 대한 반문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회의를 엿듣기라도 하였느냐고 합니다. 어찌하여 너만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느냐고 합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너의 나아가 초월적인 존재이냐고 힐책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노인들은 지혜를 많이 지닌 것으로 여겨져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욥에 대한 반어적 질문 역시 이러한 전통과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도 나이가 어린 부족한 인간임을 말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고 오묘하시고 지혜를 가지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친구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너 혼자만 알고 있기라도 하며,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그 무엇을 너 혼자만 깨닫기라도 하였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욥은 앞에서 친구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을 무지한 자로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는 자신이 친구들 못지않게 지혜롭다고 역설하였을 뿐입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이나 전통, 정통성, 인생 경륜 등에 대한 자부심에서 말합니다. 실제로 그들의 지식은 원칙론적이며 피상적인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들이 사귀는 사람 가운데는, 나이가 많은 이도 있고, 머리가 센 이도 있다고 합니다.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든 이도 있다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앞에서 언급되어진 것처럼 연로한 자가 더 지혜롭다는 당시의 보편적 인식에 근거를 두어, 욥의 친구들이 지혜로운 자들임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친구들도 욥처럼 지혜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들 중에는 욥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욥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성숙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이만으로 상대 편을 찍어눌러서는 안 됩니다.

 

(욥은 교만한 자인가)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사 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11-14)

 

하나님이 욥에게 위로를 베푸시는데도, 욥에게는 그 위로가 별것 아니란 말이냐고 묻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하여 욥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권고해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을 충고하고 교훈하려 하는 친구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라고 말함으로 그 친구들의 교훈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이러한 욥의 태도를 마치 하나님의 위로를 거부하는 것인 양 단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자신들을 통하여 부드럽게 말씀하시는데도, 욥에게는 그 말씀이 하찮게 들리느냐고 묻습니다. 무엇이 욥을 그렇게 건방지게 하였으며, 그처럼 눈을 부라리게 하였느냐고 묻습니다. 왜 너의 마음이 너를 끌게 하느냐고 합니다.(NIV, Why has your heart carried you away) 엘리바스는 욥의 교만되고 자만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그릇된 길로 이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전에 욥은 자신은 의로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굳이 죄를 찾아 징계하시고 계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 엘리바스는 욥이 헛된 지식을 갖고 있고, 동풍(헛되고 해로운 것)을 그 품에 품고 있다고 힐책한 바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이제는 욥을 교만하다고 합니다. 욥이 눈을 번쩍여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되고 반항하는 자세를 취하였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욥이 자신을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분노하는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어찌하여 욥은, 하나님께 격한 심정을 털어놓으며, 하나님께 함부로 입을 놀려 대느냐고 묻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는 커녕 끝내 자기 의()를 고집하는 것이 그의 심령에서부터 하나님을 반대하는 불의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항변하는 태도를 꼬투리 잡아 교만하다고 공격합니다.

인생이 무엇이기에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으며,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무엇이기에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인간은 완전부패한 존재라고 하는 그의 말은 맞습니다. 사람들은 죄의 본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그는 욥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한 말에 대하여 반박합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의 원죄의 사실을 나름대로 묘파한 말로서 교리적으로는 옳게 보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를 위시한 친구들이 욥에 대하여 고난 당하는 것을 근거로 범죄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욥이 죄로 인하여 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욥도 자신이 원죄로 태어났음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욥이 의롭게 살았는데도 고난을 받는다는 현재적 딜레마를 해결해 주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훗날 이들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욥의 중보 기도로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15,16)

 

엘리바스는 바로 핵심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천사들마저도 반드시 신뢰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분 눈에는 푸른 하늘도 깨끗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하물며 구역질 나도록 부패하여 죄를 물 마시듯 하는 사람이야 더 더럽게 보인다고 합니다. 거룩한 자들이란 일반적으로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하늘은 천사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부정함과 불의함을 천사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더 부각시킵니다.

엘리바스는 결론적인 내용으로서 인간의 불의와 부정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말한 것에 대한 반박으로 욥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거룩한 자라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은 악한 욥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처럼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 부패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완전 부패한 인간마져 신뢰하고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부패한 인간도 믿음으로 대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변화될 소망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를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부패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신뢰하고 그를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항상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고 신뢰하십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신뢰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더구나 욥은 죄악된 사람이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욥을 신뢰하고 자랑하셨습니다. 욥에게 고난을 주어도 그는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라고 신뢰하여주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기쁨이요 자랑이었습니다.

 

(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하는가)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그의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가 평안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이르리니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이 숨어서 기다리느니라.”(17-22)

 

엘리바스는 욥에게 가르쳐 줄 것이 있으니, 들어 보라고 합니다. 그가 배운 지혜를 욥에게 말해 주겠다고 합니다. 욥은 자신의 의를 고집하여 친구들의 말을 반박했습니다. 엘리바스는 이전에 주장했던 그의 논리처럼 또다시 악인은 고통과 환난을 당한다는 원칙론적 교훈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17-19절은 그의 본 논지를 교훈하기에 앞서 이끄는 서언(序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자신이 하는 말은 지혜로운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고, 지혜로운 사람들도 자기 조상에게서 배운 공개된 지혜라고 합니다. 엘리바스의 교훈이 그 자신의 경험에 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 지혜에 입각해서 말한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통주의에 입각한 교훈은 자칫 현실의 상황이나 보다 진보된 진리를 아랑곳하지 않는 폐쇄성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단순히 그 전통적 교리를 고수하고 전하려는 형식성에 치우칠 우려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들이 그 조상들에게서 교훈을 어떤 형식으로 받았는지 정확한 근거는 없으나 아마도 구전에 의해 전승되어진 것 같습니다.

땅은 온통 지혜자들의 차지이고, 낯선 사람은 얼씬도 못했다고 합니다. 데만 사람의 땅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다른 외인들은 그곳에 무력으로 침입하거나 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데만 땅의 지혜로운 자들에게 전승되어진 교훈 역시 다른 외부인의 영향에 의해 오염되거나 왜곡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순수하고 진실되다는 뜻을 암시합니다.

엘리바스는 악한 일만 저지른 자들은 평생 동안 분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잔인하게 살아온 자들도 죽는 날까지 같은 형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도입부 서언에 이어 본절에서부터 엘리바스의 주 논지가 언급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그 말에 이르기를 이라는 말을 첨가하였습니다. 악인은 필경 극렬한 고통을 당하리라고 합니다. 엘리바스의 이 말은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라는 욥의 말과 대조를 이룹니다.

악인에게는 들리는 소식이라고는 다 두려운 소식뿐이고, 좀 평안해졌는가 하면 갑자기 파괴하는 자가 들이닥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악한 자에게는 항상 악재의 소식이 뒤따라와 그를 괴롭힌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선가 칼이 목숨을 노리고 있으므로, 흑암에서 벗어나서 도망할 희망마저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악인의 형통은 잠깐이고 뜻하지 않는 재난이 갑자기 들이닥침으로써 결국 파멸한다고 합니다.

그는 욥을 악인이라고 합니다. 욥의 당한 현상황을 염두에 두고 약탈자가 악인인 욥을 공격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은 악인에게 고통을 준다고 말합니다. 악인은 환난과 역경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악인들은 한번 재앙이 임하여 불행한 비극 가운데 빠지면 너무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리는 바람에 그 속에서 다시 빠져 나오기를 바라지 못한다고 합니다.

 

(욥은 교만으로 망하는 것인가?)

 

그는 헤매며 음식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의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환난과 역경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라. 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 그는 목을 세우고 방패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드니. 그의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 그는 황폐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주하였음이니라”(23-28)

 

악인은 식물을 위하여 유리방황합니다.(He wanders abroad for bread) 악인이 먹을 식물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헤메입니다. 악인은 앞 절에서처럼 갑작스런 재앙을 만나 먹을 것이 없어서 헤매는 비참한 처지에 빠집니다.

날짐승이 악인의 주검을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으니, 더 이상 앞날이 없음을 악인은 깨닫는다고 합니다. 극도로 심각한 재난을 만나 삶의 의욕마저 상실하고 오직 파멸의 시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절망적 처지에 몰리게 됩니다. 재난과 고통이, 공격할 준비가 다 된 왕처럼, 그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칠 것이라고 합니다. 악인에게 임할 비극적 결말을 의인법을 사용하여 실감나게 표현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처한 불행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악인은 재난을 당하여 안절부절못하는 갑갑한 마음상태를 갖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을 악인이라고 하고 그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욥이 악인이라는 자기 확신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무식하고 용감한 사람이 무섭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죄악을 말합니다. 욥이 교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였다고 말합니다. 욥이 방패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든다고 말합니다. 욥이 당하는 환난은 모두 그가, 하나님께 대항하여 주먹을 휘두르고, 전능하신 분을 우습게 여긴 탓이라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악인들이 비참한 불행에 처하고 멸망당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하지만 욥은 극도의 재난 속에서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원망 섞인 탄식을 늘어놓은 적은 있지만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거나 모독한 적은 없습니다. 엘비바스는 욥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전능하신 분께 거만하게 달려들고, 방패를 앞세우고 그분께 덤빈 탓이라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심지어 하나님마저 대적하려 드는 참람한 행태를 말합니다.

엘리바스가 욥이 자기는 무죄하다는 것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비록, 얼굴에 기름이 번지르르 흐르고, 잘 먹어서 배가 나왔어도, 그가 사는 성읍이 곧 폐허가 되고, 사는 집도 폐가가 되어서, 끝내 돌무더기가 되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결국 황폐하게 망한 것을 보면 욥이 악인임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죄악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 또 온갖 탐욕과 쾌락을 충족시키는 악인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황폐한 곳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악인들의 화려하고 좋은 성읍과 집들은 이내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로 변해 버립니다. 엘리바스는 악인이 하나님의 저주와 징계를 받아 황폐한 성읍, 사람이 살지 못할 집에 거할 것이라고 합니다.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 무더기가 될 곳 등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과연 욥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나는가)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그의 소유가 땅에서 증식되지 못할 것이라. 어두운 곳을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의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으로 그가 불려가리라. 그가 스스로 속아 허무한 것을 믿지 아니할 것은 허무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즉 그의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포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29-33)

 

악인은 더 이상 부자가 될 수 없고, 재산은 오래 가지 못하며, 그림자도 곧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악인은 경제적으로도 그 부()와 재산을 계속 보존하지 못하고 이내 상실하게 될 것이며 다시 번창하지 못할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당한 재산상의 피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어둠이 엄습하면 피하지 못할 것이며, 마치 가지가 불에 탄 나무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흑암은 악인이 당하는 재앙 또는 불행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불꽃은 하나님의 진노 또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번성한 나뭇 가지가 형통함, 번성함을 상징적으로 암시합니다.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는 말은 악인의 번성, 번영 등을 말린다는 말입니다. 결국 악인은 한번 재앙에 빠질 경우 그 불행한 처지에서 다시는 빠져 나오지를 못하며 그의 번성하는 사업도, 재산도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온전히 사그러지고 말게 된다고 합니다. 꽃이 바람에 날려 사라진 나무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재산을 다 잃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욥이 결국 허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욥이 헛것을 의지할 만큼 어리석다면, 악이 그가 받을 보상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욥으로 하여금 헛된 것을 신뢰함으로 스스로 속임받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NIV, Let him not decieve himself by trusting what is worthless)

본문이 앞절들(29, 30) 또는 뒷절들(32, 33)의 나무 비유들과는 서로 연관됩니다. 찍힌 나무가 다시 때가 되면 소생하고 열매를 맺는 것과는 달리 악인은 다시 새롭게 될 소망을 가져봐야 헛될 뿐이라 말합니다. 악인이 자랑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공허하며 쓸모없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을 기만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때가 되지도 않아, 미리 시들어 버릴 것이며, 마른 나뭇가지처럼 되어, 다시는 움을 틔우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날, 즉 종려나무의 추수 때가 이르기 전 그 나무가 시들고 가지가 죽는다고 말합니다. 악인이 허망한 것을 믿어 기대하다가 도리어 때가 되기도 전에 실망케 되고 멸망케 됩니다. 익지도 않은 포도가 마구 떨어지는 포도나무처럼 되고, 꽃이 다 떨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올리브 나무처럼 될 것이라고 합니다. 때 아닌 한파로 말미암아 포도 열매가 익기도 전에 떨어져 버리움을 당하듯이, 악인에게도 창졸간의 재난이 들이닥쳐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합니다. 악인의 파멸이 거역할 수 없는 강압적 힘에 의해 초래된다고 말합니다. 엘리바스는 포도나무가 익기 전에 떨어짐같이 욥이 망하였다고 말합니다.

 

(욥이 뇌물을 받았는가)

 

경건하지 못한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하느니라.” (34,35)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리는 이렇게 메마르고, 뇌물로 지은 장막은 불에 탈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바스가 욥을 빗대어 경건하지 못한 무리라고 말합니다. 뇌물을 받는 장막은 불탄다고 말하여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다는 욥의 말을 정명으로 논박합니다. 아울러 욥이 뇌물을 받아서 욥에게 불 재앙이 임하였다는 말입니다. 엘리바스가 욥의 위선과 부패상을 간접적 어투로 꾸짖고 있습니다.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만을 낳으니, 그들의 뱃속에는 거짓만 들어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엘리바스는 출산과 관련된 잠언투의 경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최종 정리하고 있습니다. 불경건한 무리는 해악을 품고서 남을 해칠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 자신도 기만하여 멸망에 빠지게 되는 자들입니다. 엘리바스는 구체적으로 욥이 경건하지 못하고 뇌물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욥이 거짓이 있다고 말합니다. 엘리바스는 이제는 전혀 증거되지 않은 죄를 말합니다. 엘리바스는 거짓으로 무고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신뢰하신다)

 

엘리바스는 첫째, 욥의 변명을 죄악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욥의 죄로 재앙이 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제는 욥이 하는 기도를 듣고 욥이 교만하고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욥의 말꼬리를 잡아서 공격합니다. 사람이 싸우다 보면 처음 싸움의 원인된 것은 말하지 않고 말꼬리를 잡고 더 큰 화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싸움의 원인 된 것을 말해야지 그 후에 파생된 것을 가지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는 자동차 운전을 잘못한다고 말하다가 말버릇이 나쁘고 교만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엘리바스는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깊이 불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는 자가 아니라 이간질시키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는 거룩한 분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깊이 신뢰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이 죄악됨에도 인간을 신뢰하시고 믿어주시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지만 율법적이지 않고 인간을 위하여 속죄소를 만들어주시고 나아갈 길을 만들어주신 분이십니다. 죄악된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나가서는 욥을 대신하여 고통하며 중보기를 드려야합니다.

셋째, 엘리바스는 욥의 죄를 공격하다가 날조된 뇌물죄를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죄를 날조하여 덮어씌우는 공안검사와 같습니다. 변호인이라는 영화에 보면 이런 공안 검사로 인하여 순진한 대학생들이 옥살이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다른 사람의 없는 죄를 만들어서 공격하는 공안 검사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병을 치료하는 의사와 같은 긍휼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욥기 15장 강해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않는가?

말씀 욥기 151-욥기 1535

요절 욥기 1515

욥기 15장 강해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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