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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욥기 10장 강해 하나님은 집단 폭행자인가??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0-02-09 00:00:00
조회수 : 2,458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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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0장 강해 하나님은 집단 폭행자이신가?

말씀 욥기 101-욥기 1022

요절 욥기 1017절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

 

빌닷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볼 때 욥이 고난을 받으므로 욥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욥이 이런 빌닷의 말을 듣고 공의로운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중재자를 찾습니다. 그러나 중재자가 없는 욥은 하나님에 대해서 집단 폭행자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보지 말고 사랑의 하나님에 기초하여 현실을 보아야합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하여 현실을 보아야합니다. 그래야 현실을 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한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1,2)

 

욥은 살기에 곤비하다고 솔직하게 불평하고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암울한 심경을 반복적으로 표현합니다. 욥은 산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우니, 이제 원통함을 참지 않고 하나님께 다 털어놓고, 내 영혼의 괴로움을 다 말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정죄하지 마시고 무슨 까닭으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알게 해달라고 합니다.

욥은 자신이 갖고 있는 괴로운 심경을 하나님께 토로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무슨 일로 나 같은 자와 다투시는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욥은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지 알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는 고난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사람에게서 시선을 하나님께 돌려 솔직하게 자신의 고통을 토로해야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자신에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괴로움을 털어놓는 욥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학대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3-6)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이 몸은 학대하고 멸시하시면서도, 악인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니 그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라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은 욥을 의미합니다. 손으로 지으신 것은 당신 손바닥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the work of your hands)이라는 표현이 쓰입니다(14:15 34:19 138:8). 욥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수고로이 만드신 작품이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과 자신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욥을 특별히 만드신 존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존귀하신 하나님이 특별한 자신을 왜 학대하시느냐는 묻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학대하지 않았습니다. 욥을 존중히 여기고 높게 보셨습니다. 욥을 사랑하고 자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통받는 것을 학대받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욥은 주님의 눈이 살과 피를 가진 악인의 눈이 되느냐고 묻습니다. 주의 눈이 죄악된 육신의 눈이냐고 묻습니다. 육신에 해당하는 말은 문맥에 따라 살(2:5 6:12 7:5), (4:15), 인생(12:10)등으로 번역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인 사람을 지칭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닌 창조주로서 절대자이신 것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한다(8:15)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독특한 성품 가운데 하나는 육체의 방법을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주관하시며(31:3),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삼상 16:7)

그런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고통을 주느냐고 묻습니다. 주님의 날도 사람이 누리는 날처럼 짧기라도 하단 말이냐고 묻습니다. 주님의 햇수가 사람이 누리는 햇수와 같이 덧없기라도 하단 말이냐고 묻습니다.

욥은 세 번째로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욥은 원문상 동의어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시적 기교를 사용합니다. 주의 날은 주의 해로 대치하여 사용합니다. 욥은 자신이 인식하고 있던 하나님의 근본적인 성품을 표현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자존성(自存性)(3)과 전지성(全知性)(4)을 타나냅니다. 시간적으로 초월해 계셔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냅니다.(5) 하나님의 연대는 무궁하셔서(102:24) 시간적으로 한계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유한성과 유약성을 초월해 계신 분이십니다.

욥은 주께서도 매사를 악인이 보듯이 자신을 보시느냐고 묻습니다. 주께서도 매사를 연약한 사람이 보듯이 자신을 보시느냐고 묻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주께서는 기어이 내 허물을 찾아내시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왜 내 죄를 들추어내려고 하시느냐고 묻습니다. 내 죄를 꼬치꼬치 밝혀내시려고 하시느냐 묻습니다.(새번역).

하나님은 인간을 이미 알고 계시며(3), 본래부터 근본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5). 욥은 하나님은 세상 지배자들과 달리 어떤 죄를 들추어 내려고 극심한 고문을 하거나, 유도신문을 하지 않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죄를 찾느냐고 묻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욥의 죄를 찾아내는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죄를 찾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욥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고통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순수하게 의지하는 지를 보고 계십니다. 율법의 세계가 아닌 은혜의 세계를 가르쳐주고자 합니다. 선을 행한 일이 없이 복을 받는 것도 은혜이지만, 악을 행한 것이 없이 고난을 받는 것도 은혜입니다.

 

(욥은 주님의 치료를 기대한다)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7-9)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고백합니다. 그는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가 있는지를 솔직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이 자신의 선을 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심문 방식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한 후에 욥은 하나님 앞에서 흠없이 살았다는 것을 자신있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보다도 최선의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기에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욥은 주님이 주신 환난에서 사람이 자신을 벗어나게 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욥은 이 질병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악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자신이 주의 손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욥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누구라도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도록 하지 못한다는 것에 근거하여, 자신이 악하지 않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제에 해당하는 말은 문자적으로 주의 모든 곳이란 뜻입니다. 70인역에는 `돌이킨 후에(after you have turned)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말합니다. 공동 번역은 이제 마음을 바꾸시어로 나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시고 마음을 바꾸어 멸하시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멸하시는 분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을 창조하시고 고통스럽게 하느냐고 질문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기억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흙으로 지으셨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죽이려 하느냐고 묻습니다. 진흙과 같이 본성상 깨어지기 쉬운 인생을 하나님이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욥 자신이 거의 진흙 그릇이 깨어질 것과 같은 다급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64:8)고 고백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시사하며 피조물의 존재가치는 오직 주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45:9). 티끌은 아담을 만든 재료로 사용된 흙이며(2:7), 타락한 후에 사람이 돌아갈 흙(3:19)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욥은 연약한 자신을 고쳐달라고 기도합니다.

 

(현실을 기초로 주님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10-15)

 

주님께서 욥의 아버지에게 힘을 주셔서, 자신을 낳게 하시고, 어머니가 자신을 품에 안고 젖을 물리게 하셨습니다. 젖과 같이 쏟은 것은 정액을, 엉긴 젖은 태()의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지혜자들은 태아가 자라는 것을 가장 위대한 신비로 보았는데(11:1), 욥 또한 신비로운 수태의 과정을 묘사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말합니다. 주께서 살과 가죽으로 자신을 입히시며, 뼈와 근육을 엮어서, 그의 몸을 만드셨습니다. 9절에서는 단순히 흙을 뭉쳤다라고 표현했는데, 11절에서는 더욱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가죽, , , 힘줄로 입히고 뭉쳤다고 합니다. 3, 8, 9절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욥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재차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시고, 자신을 돌보셔서, 자신의 숨결까지 지켜 주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젖을 주시고 키우신 것을 기억합니다. 사랑으로 양육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은혜로운 생명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생명을 언급하여 욥이 죽음의 위협을 직면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지막 부분(21, 22)에서 이러한 죽음의 사상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며 후반부로 가면서(14, 19장 등) 사후의 부활에 관한 사상을 나타냅니다.

욥은 자신의 전생애를 인도해 오신 주의 계속적인 배려를 말합니다. 욥은 자신의 인격이 하나님의 계속적인 권고를 통해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욥이 가진 자기 판단과 결정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욥이 현재의 상태에 있게 된 것은 바로 그 기원에 있어서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 상태 역시 그 자초지종을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임을 상기 시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견인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자신에게 고통을 주셨는지 질문합니다. 지금까지 사랑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기초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욥에게 하나님은 죄악을 사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죄를 마음에 품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조그마한 죄라도 지켜 보시는 분이십니다.(watch) 특히 본문에서처럼 사람을 목적격으로 취했을 경우에는 `아무개를 기억하다, 아무개를 죄인으로 표하다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죄악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고, 죄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뿐만 아니라, 죄의 동기에 대해서도 지적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매우 세부적이고 사소한 죄까지도 묵과되지 않고 정죄한다고 단언합니다.

욥은 이러한 언급을 통해 자신의 무죄함을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롭지만 죄를 또한 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욥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욥은 14절에서 사용된 범죄하다(sin)보다 강한 용어인 악하다(wicked)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만약(if)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욥의 고난이 증가하는 것을 표현하기에(17) 앞서 욥의 감정이 고조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3절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생각에로의 전환을 암시합니다.

욥은 자신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여. 자신의 공포와 고통을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7:1). 악의 결과가 화가 있으리라는 것이므로 의로움의 결과는 상급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질병의 결과를 주시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욥이 현재 처해 있는 암담한 상황이 자신의 논리로서는 이해할 길 없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이 환난을 본다는 말은 흠뻑 젖다, 배어 들다, drowned)로 읽을 수 있습니다(NIV). 결국 욥은 환난 속에 완전히 파묻혀 있어서 이로 인해 머리를 들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과 굴욕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굴욕을 주시는 분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기초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영광을 기초로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나 욥은 아직 예수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고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집단폭행자가 아니다)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주께서 자주 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16,17)

 

욥에게 하나님은 젊은 사자처럼 인간을 사냥하시는 분이십니다. 사자는 하나님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사자처럼 무섭게 욥을 사냥하신다는 말입니다. 주의 놀라움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지시할 때 사용됩니다(28:29 29:14). 욥은 자신에게 닥친 환난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크고 두려우신 능력을 나타냅니다. 주께서는 군대에서 집단으로 폭행하시는 분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증거하는 자는 고통이 의인화된 것입니다(16:8). 욥은 고통을 증거하는 자로 표현하여 욥이 마치 법정에서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질병과 그 외의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마치 죄를 추궁하는 고문처럼 여겨졌습니다.

군대가 친다는 것은 앞 문장의 내용을 반복하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욥이 받고 있는 고난의 상태가 악화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군대에 해당하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군대, 교전(交戰)등을 뜻하며, 상징적으로 역경, 곤경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정규 부대가 번갈아 치며, 증강 부대가 온 것을 의미합니다. 정규부대는 지금까지 욥이 받아왔던 고난을 말하고, 증강부대는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과 앞으로 닥치게 될 예측할수 없는 역경을 말합니다. 욥은 나쁜 하나님을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중보자 없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들의 오해입니다. 우리도 이런 때가 있습니다. 현실에 알 수 없는 고통이 있을 때 하나님이 사랑이 없으시고 괴롭히시는 분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전쟁이나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을 때 우리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질병으로 고통할 때 이런 생각이 납니다.

 

(욥은 잠시나마 평안을 구한다.)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18-22)

 

주께서 저를 이렇게 할 것이라면 왜 나를 모태에서 살아 나오게 하셨느냐고 묻습니다. 욥은 전형적인 애가 문체를 사용하여 질문하고 있습니다. 욥의 이러한 불평 섞인 질문은 욥이 처음으로 한탄을 털어놓던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3:11). 끝없는 고난의 연속에 직면한 욥은 살 소망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자기의 태어난 것 때문이라고 비관합니다. 여기서도 욥은 자신의 출생은 물론이고 현재 당하고 있는 참담한 상황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기운이 끊어진다는 말은 죽다라는 뜻입니다. 욥은 자신의 출생, 혹은 수태가 곧 죽음으로 직결되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욥은 태어나지 않았기를 기대하지만, 자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욥은 차라리 모태에서 죽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나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생기지도 않은 사람처럼, 모태에서 곧바로 무덤으로 내려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19절 역시 1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비관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20-22절에 묘사된 사후(死後)의 세계가 3:17-19에서와는 달리 매우 암울한 곳으로 나타난 것은, 욥의 마음 속에 생명에 대한 애착심이 역설적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욥이 살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좀 혼자 있게 내버려 달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남은 이 기간만이라도, 자신이 잠시라도 쉴 수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어둡고 캄캄한 저승 땅으로 내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리로 가기 전에 잠시 쉬게 해달라고 합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혐오감을 계속 설파하면서도, 20절에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는 기대감으로 진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암울한 음부의 밤을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고통 주시는 일을 멈추시고 음부에 떨어지기 전에 잠시나마 기력을 회복하여 숨 쉬게 해달라고 합니다.(39:13). 심각하게 급박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렇듯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으며, 뒤이어 나오는 소발의 답변에서도 드러나듯이(11:4), 욥은 여전히 자신의 결백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죽음의 땅은 흑암처럼 캄캄하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서 아무런 질서도 없고, 빛이 있다 해도 흑암과 같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려두사 잠시나마 질병에서 놓여 이 땅에서 평안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욥은 지금 살고 있는 날이 적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고, 가게 될 미래의 거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욥은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인식이 있던 것이 확실합니다. 22절에서는 어두움, 죽음의 그늘이라는 개념을 반복하면서, 사후세계를 클로즈 업(close-up)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음의 어두움을 묘사하기 위해 5개의 히브리어를 7회에 걸쳐 사용합니다. 즉 어두움(호쉐크), 그늘진(찰마웨트 2), 어두워서(에파타), 흑암( 오펠 2), 구별이 없고(로 스다림)등입니다(3:21, 22 비교).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어둡다고 매우 강렬하게 표현하여 아무런 빛도 없고 다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두움 뿐라고 말합니다. 가장 밝다고 하는 어떠한 빛이라도 이 땅 위에 있는 죽음 같은 어두움보다도 더 깜깜합니다.

극도의 고난 속에서 죽음을 구하면서도 사후의 세계에 더 큰 두려움을 표현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을 염두에 두고 치료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첫째, 욥은 이해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욥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고통을 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통을 통하여 욥을 연단하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믿음이 정금같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고통 가운데 두시고 기다리십니다.

둘째, 욥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기초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를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가 감당할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초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야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합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멘!

욥기 10장 강해 하나님은 집단 폭행자이신가?

말씀 욥기 101-욥기 1022

요절 욥기 1017절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

욥기 10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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