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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욥기 9장 강해 우리 사이에 판결자가 없구나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0-02-08 00:00:00
조회수 : 2,764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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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장 강해 우리 사이에 판결자가 없구나

말씀 욥기 91-욥기 935

요절 욥기 933절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빌닷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욥이 죄없이 고난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깨뜨리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욥이 그런 빌닷의 판단에 답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공의의 하나님이 아무 죄없는 자신에게 징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큰 벽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중재해줄 중보자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감)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1-3)

 

욥은 빌닷의 말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고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다는 것도 동의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의()의 수준에 결코 다다를 수 없습니다.

욥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본질상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견주어 볼 때 의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완전 부패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아무리 말을 잘해도 하나님이 천 마디 할 때 하나님께는 한 마디도 말할 수 없는 죄악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변론할 수 없습니다. 변론하려할지라도는 경쟁하려 할지라도, 다툴지라도 등으로 해석됩니다. 이 용어는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쟁변(다툼, 경쟁)의 대상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분은 사람과 더불어 쟁변하시지도 않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존재론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유한하고 죄성을 가진 존재이나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분으로가 완전한 의에 거하십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단절감과 괴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과 인간의 핀딘 기준은 서로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절대적으로 의로운 것처럼 인간에게도 온전한 성결과 의를 요구하십니다.

만약 이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그에 합당한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구약 시대의 희생제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의 이러한 기준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까지 이르라(4:13)’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1:16)’,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준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에 다다르지 못하며, 결코 다다를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력으로는 하나님의 절대적 의와 성결에 부합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 기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비밀에 접해 보지 못한 욥으로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차이를 더 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연을 섭리하시는 하나님)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4-10)

 

욥은 사람에게서 눈을 돌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십니다.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어떤 악인도 하나님 앞에서 형통하지 못합니다.

지금껏 욥은 의롭게 살았지만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모진 시련을 겪어왔고, 또 현재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앙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뼈아픈 고난 중에 격한 감정을 토로하며, 때로 하나님께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 놓았으나, 하나님이 지혜로우시고 강하신 것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욥은 비범한 신앙 인격자입니다. 하나님은 산과 땅을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지진을 일으키시고 산이 갈라지게 하고 돌이 굴러떨어지게 하십니다. 폭풍우에 의해 산이 깎여 내리게 하십니다. 급류에 의해 산이 깎이고 주변의 암반이 무너져 내립니다.

욥은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성을 드러내고 그러한 하나님에 비교해 볼 때 자신은 미천하기 그지없음을 인식합니다. 특히 그는 현재 극심한 고난 중에 처해 나약해져 있습니다.

산이나 땅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대 근동 지역, 특히 시리아와 팔레스틴에 인접한 나라에 있어서 지진은 그렇게 드문 현싱이 아니었습니다(104:32). 성경에도 지진에 관한 언급이 여러 번 나타납니다.(16:32 왕상 19:11 1:1 14:4, 5) 지진에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고대 사람들은 지구()가 커다란 기둥들(pillars)에 의해 떠받쳐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38:6 삼상2:8 104:5). 또한 그들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산이라고 보았습니다(26:11). 땅에서 우뚝 솟아난 거대한 산이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지진으로 하늘의 기둥인 산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해와 별을 주관하십니다.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거두십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일식은 천지를 순식간에 어둡게 합니다. 갑자기 찾아오는 먹구름, 모래를 동반한 폭풍 등은 하늘을 짙게 가려 해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대부분 모래 사막과 건조한 기후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역에서 흔히 발견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건물이 무너지며, 산과 계곡의 암석과 나무들이 쏟아짐으로 인해 먼지가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사람의 시야가 가려 햇빛을 보지 못합니다. 화산 폭발로 인한 화산 재와 연기는 햇빛을 가려 시야를 어둡게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바다물결을 움직이십니다. 하늘을 펴시고 바다 물결을 밟으십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에 대량의 물이 축적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 물을 지탱하기 위해서 하늘은 단단한 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궁창은 단단하고 고정되어 있는 땅의 천장 혹은 지붕(827)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하늘을 펼쳐 펴시는 창조자의 능력을 가진 분이십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42:5 45:12 51:13 10:12).

욥은 홀로라는 말을 써서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 하나님으로 인식했습니다. 격랑에 의해 마치 산더미처럼 높이 솟아오른 파도를 하나님께서 밝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자연계를 지배하고 계십니다.

아모스도 하나님을 땅의 높은 데(, )를 밝는 자로 묘사하였습니다.(4:13), 미가(1:3)도 매우 유사한 표현을 하였습니다.(3329 18:33 58:14 3:19 ).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큰 일을, 기이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사람과 달리 창조주가 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깊고 오묘한 뜻을 갖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욥)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11)

 

욥은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앞으로 지나시나 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움직이시나 깨닫지 못합니다.

욥기 4:15, 16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경험과 유사한 일면을 지닙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체득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것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욥의 고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욥은 가중되어가는 고난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앙적 회의에 대한 질문을 쏟아놓으면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대답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면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욥의 문제의 핵심은 친구들과의 갈등도, 육체적 질병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오해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이었습니다. 욥기 425에서 보듯 결국 욥은 하나님과 만나게 됨으로써 자신의 신앙적 회의를 청산하게 됩니다.

 

(심판 앞에서 할 말을 잃은 욥)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12-14)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재산과 자녀와 건강을 빼앗아도 그 주권에 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하시나이까 물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욥기 121에 나타난 욥의 신앙 고백,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라고 고백과 같습니다.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은 직후에 여호와의 주권(sovereignty)을 고백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현시점에서 그같은 신앙을 재삼 고백하고 있습니다(45:9 18:6).

욥은 자신에게 재난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을 회의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왜(why) 자신이 그러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하는 데에 그의 고뇌가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또는 넓게는 전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왜 그렇게 하느냐 물을 수 없습니다. 만물의 완성자이신 하나님은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실 뿐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사용, 통제하실 권리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역사(works)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철저히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토기장이 비유에 나타나는 토기장이(하나님)와 토기(인간)의 관계와 비슷합니다.(45:9). 하나님께서는 한번 회개치 않는 악인에게 작정하신 일은 결코 변개시키지 않으십니다. 라합과 같은 괴물을 돕는 자도 하나님 앞에 굴복하였는데 욥이 감히 하나님께 대답할 수 없습니다. 라합은 원어상 교만, 강팍함, 완악함등을 뜻합니다(3:514:4).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것을 바다의 괴물(7:12 51:9)로 여겼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정복되어 쫓겨난 것으로 나타납니다(26:12 89:1051:9). 본문에서는 라합은 사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12: 3-12). 라합을 돕는 자는 사단에 동조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무리 일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뿐 아니라 사단을 추종하는 모든 악의 세력도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기서 대답하다 , 변론하다에 해당하는 용어는 공히 법적 용어입니다(3절 참조). 욥은 여기서 하나님을 재판관, 자신을 재판을 받는 자로 보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을 시험하고 심판하는 권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며 욥 자신은 그것에 대해 하등 항변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껏 하나님께 탄원과 질문을 쏟아 부었으나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한 욥이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욥)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15-18)

 

욥은 비록 자신이 의로워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심판하실 그에게 심판을 감하여 주시도록 간구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셨을지라도 그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는지 그 의미를 알고자 하나 알 수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까닭없이 상처가 깊어진 것입니다. 욥은 처을 고난을 받을 때부터 이 까닭없는 고통으로 괴로웠습니다. 고난이 매순간 계속되었습니다. 욥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의인이 고난 받는다는 점에서 까닭없는 고통이지만 신뢰하는 자에게 연단으로 고난을 주신다는 점에서는 까닭있는 고통입니다. 거기에는 높은 차원의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 따질 수 없는 욥)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19-21)

 

힘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셔도 하나님을 소환하여 하나님께 잘못을 따질 수 없습니다. 2, 14절과 마찬가지로 본문에도 법정적 분위기가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전권을 소유하고 계시는 심판자이시며, 인간은 그의 재판을 받아야 하는 피고 내지는 원고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재판을 번복할 권능도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을 법정에 불러낼 권한, 곧 소환권 조차도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말합니다.

욥은 지극한 고난을 체험하는 기간 동안에, 자신은 단지 미천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재난 앞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철저히 느꼈습니다. 욥은 의로워도 그가 하는 말은 죄악된 말입니다. 결국은 불평의 말, 원망의 말입니다. 그는 온전하여도 자신이 자신의 의로움을 온전히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욥은 절대적,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자신도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은 죄인임을 고백했었습니다(2). 그는 사실적. 구체적 측면에서는 특정한 범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욥의 자기 확신도 고통의 나날이 지속되면서부터는 흐려져간 것 같습니다. 욥은 재난을 받기 이전까지는 늘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 또한 경건한 의인으로 자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고난의 강도가 심해지고 그것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질책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욥은 고통의 나날(1:21 2:10) 속에서 때로는 구원을 갈망하고, 또 때로는 불평과 원망을 토로하는, 이른바 신앙적 씨름(32:24)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사는 것 자체가 싫을 뿐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따질 수 없었습니다. 욥은 의롭고 온전할지라도 정죄함을 받았습니다. 온전한 자가 정죄받지만 그는 하나님께 따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못하는 욥)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22-24)

 

욥은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은 하나님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나 의로운 자나 다 멸망시킵니다. 무죄한 자가 갑자기 죽을지라도 하나님은 비웃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욥이 그의 가축과 자녀를 갑자기 잃어버려도 하나님은 무관심하십니다. 나름대로 경건에 대해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욥 자신이 재난을 받자 이러한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무죄한 자의 절망도 하나님은 비웃으십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의 고난이 그의 범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도리어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 곧 의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취급하시는(22) 하나님의 주권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무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변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욥의 이해는 다분히 현상적, 단편적인 경향이 짙습니다. 제반 현실사에서 악인의 흥왕과 의인의 고난이 자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인과 악인을 동일한 수준에서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불의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의인의 고난은 연단이요 악인의 고난은 회개의 촉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악인의 흥왕을 묵과하시고, 허용하실 뿐입니다. 사단의 활동을 하나님께서 일시적, 제한적으로 허용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1:12 2:6). 의인의 고난도 일시적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욥 역시,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에만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숨겨진 공의를 온전하게 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22절에서 욥은 이 세상의 공의와 질서가 왜곡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그는 의인의 고난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곧 냉소적이며 무자비한 분으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와같이 욥은 더욱더 신랄하게 하나님께 재판관의 얼굴이 가리워졌다고 불평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세상을 지배하게 하시고 재판관도 눈을 가려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보는 것은 짧은 시간 속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인의 고난에 대한 연단으로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은혜 속에서 주는 고난을 몰랐습니다.

 

(고통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욥)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25-31)

 

욥에게 인생은 허무한 인생입니다. 경주자와 같이, 빠른 배와 같이, 독수리같이 잠간 가는 인생입니다. 경주자는 중요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조정에서 고용한 발이 빠른 자를 가리킵니다(대하 30:6 3:13 8:10, 14). 고대 팔레스틴, 특히 애굽 지역에서는 이러한 전령자들을 많이 사용하여 군사적, 행정적 사무를 원활히 처리하였습니다. 빠른 배의 원문의 문자적 의미는 갈대의 배입니다. 고대인들은 큰 갈대를 이용하여 배를 만들었습니다. 이 배들은 넓이는 좁고 길이가 긴 유선형이었기 때문에 매우 빠른 속도로 항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독수리는 창공을 배회하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전속력으로 하강하여 그것을 채어갑니다. 이러한 독수리의 하강 모습을 통하여 아무런 소망없이 허무하게 흘러가는 자신의 삶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욥은 육지(경주자). 바다(빠른 배), 공중(독수리)등에서 빠르다고 생각되는 것을 일일이 열거함으로써 보잘 것 없고 짧은 자신의 삶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은 단순히 세월의 빠름을 나타내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고통이 멈출 날을 기대하면서 병고 가운데 보내는 참혹한 시일들이 빨리 흘러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34).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 종잡을 수 없이 휘청거렸던 심령을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욥은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정죄하는 태도를 보였던 친구들의 불평을 잊고자하였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였던 것도 친구들의 비난과 조롱 탓이 컸습니다.

그는 불평을 잊고 기쁘게 하려고 하여도 모든 고통으로 두려워서 기쁜 얼굴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항상 기뻐해야한다고 알지만 죄책감으로 불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통으로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즐겁게 살고자하는 욥의 굳은 결의도 극도의 고통 앞에서는 여지없이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욥도 자신에게 고통을 주신 하나님이 자신을 정죄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욥이 하나님이 내리시기로 작정하신 고통을 피하려고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욥은 고통의 엄연한 현존 앞에서 깊이 절망해 합니다. 하나님이 유죄로 판결하신 마당에 자신의 결백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수고하리이까는 본래 기진맥진하다라는 뜻입니다. 욥은 고된 노역으로 말미암은 쇠약함에 강조합니다.

욥은 깨끗하게 살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개천에 빠뜨리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깨끗하게 살았지만 결과적으로 개천에 빠져 더러운 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을 정화(淨化)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266에서 시인은 성소 제단에서 손을 씻음으로써 자신의 무죄성을 입증하려 했습니다. 신명기 211-9에는 피살된 시체를 발견할 경우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음으로써 그 살해 사건과 무관함을 나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아 222에서 하나님은 잿물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유대 백성의 죄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욥은 한편으로 자신의 무죄성을 주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결국 흠많은 존재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한계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더러워진 자신의 옷을 싫어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종종 의복은 어떤 사람의 도덕적, 영적 특질과 결부되어 언급됩니다(8:22 521 61:10). 죄악에 대한 징계로 말미암아 황폐화된 예루살렘도 더러워진 치마를 입은 여인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욥은 이런 죄악으로 불평하는 자신의 삶이 다만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중보자를 구하는 욥)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32-35)

 

욥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재판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변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므로 변론할 수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무죄성을 보이기 위한 최선의 방도를 강구하였습니다. 이제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중보해줄 분을 찾았습니다. 판결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키아흐는 야카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문맥에서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혜 문학에서는 바로잡다, 경책하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5:17 9:8) 법정적인 문맥이나 제삼자의 역할을 언급하는 문맥에서는 판단하다 혹은 변론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31:37 2:4). 여기서는 양자(兩者) 사이에 가로 놓인 벽이나 문제 등을 해소하는 중재자들을 의미합니다. 변호사를 의미합니다. 욥은 지식, 능력, 거룩성 등에 있어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놓인 엄청난 간격을 통절히 인식하고서 그 간격을 연결시켜줄 대상을 마지막 희망으로 찾고 있습니다.

이는 어렴풋하게나마 중보 사상을 보여주는 말입니다.(딤전 2:5). 욥기서 중 신약 성경에 그대로 인용된 부분은 단 한 곳뿐이지만(5:13 고전 3:19) 그 내용상 신약 성경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절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값을 치르므로 우리를 변호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십니다. 중보자가 오셔서 하나님의 막대기를 떠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위엄을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욥은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말하겠다고 합니다.

욥은 현재 자신의 판단력과 삶의 의지마저 흐리게 만드는 지독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 있는 한 객관적 입장에서 스스로를 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막대기는 양떼를 인도하고 보호하기 위해 목자들이 들고다녔던 지팡이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주는 안위감에 대해 노래하고 있으나(23:4), 이 지팡이가 징벌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21:910:5 3:1). 욥은 중보자가 아니므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마움)

 

욥은 자신이 믿음으로 의롭게 살았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따지고 싶어도 따질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하나님과 자신의 사이에서 중보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의로운 요셉이 노예가 되고 죄수가 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지만 25년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윗이나 모세가 민족을 구원하려고 하다가 고생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런 이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나도 한 목자가 조현병이 걸린 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고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고 성숙을 주시기 위해서 이 일을 하셨습니다. 아멘

욥기 9장 강해 판결자가 없구나

말씀 욥기 91-욥기 935

요절 욥기 933절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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