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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욥기 5장 강해 꼭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는가?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8-01-11 00:00:00
조회수 : 3,804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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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5장 강해 꼭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는가?

말씀 욥기 51-욥기 527

요절 욥기 517절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징계를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징계가 죄로 인하여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훈련하기 위해서 징계를 주시기도 합니다. 혹은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아도 여기에는 징벌의 성격보다는 훈련의 성격이 강합니다.

욥은 지금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사랑하여 연약한 육신을 단련하고 있습니다. 욥에게 겸손의 훈련을 시키고 은혜의 세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 죄가 없는데도 하나님의 훈련을 받는 사람은 정말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욥이 죄에 대해서 징계를 받는다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죄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징계 받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소망을 심어야 합니다.

 

(욥은 죄로 재산을 잃은 것은 아니다)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1-5)

 

엘리바스는 욥에게 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라고 합니다. 그가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거룩한 이들에게 하소연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거룩한 이들은 서두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아들이나 천사를 의미합니다. 엘리바스는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분노 때문에 죽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질투 때문에 죽는 법이라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이 욥의 기도를 듣지 않는 이유는 욥이 분노하고 시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시기하고 분노하는 욥을 미련한 자요 어리석은 자고 합니다. 그는 죄에 대한 아무런 펙트도 없이 다만 욥이 고난당한다는 것을 근거로 욥이 시기하고 분노하는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1장에서도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죄를 지어서 지금 하나님이 욥의 기도를 들으시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들으시고 있습니다. 다만 욥의 믿음이 정금같이 단련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을 용광로에서 연단하며 기도의 응답하실 것을 참고 계신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과 같이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 저주하였다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을 미련한 나무(tree)로 비유하여 말합니다. 엘리바스는 나무가 튼튼히 뿌리를 박고 무성해 가는 것처럼 악인이 종종 현세에서 번성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뿌리가 뽑히고, 어리석은 자의 집이 순식간에 망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합니다. 욥이 죄악으로 현재 나무처럼 뿌리가 뽑혔다고 말합니다. 그런 자의 자식들은 도움을 받을 데가 없다고 합니다.

악인의 자녀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성문 또는 대로에서 부당한 처사(공동 번역, 몰매)를 당한다고 합니다. 악인의 자녀는 재판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구해 주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자들이 추수한 것은 굶주린 사람이 먹어 치운다고 합니다. 가시나무 밭()에서 자란 것까지 먹어 다 먹어 치운다고 합니다. 족장 시대의 근동인들은 추수한 뒤 곡식단을 가시나무로 가려 보관하거나 그 낱알을 왕겨로 덮어 보관하였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짐승이 물고 가거나 먹는 것을 방비하였습니다. 뜻밖의 침입자들이 종종 출몰하여 식량을 약탈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엘리바스는 악인이 그 곡식(재산)을 보전하기 위해 자구책을 강구하나 결국 그것도 별로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목마른 사람이 그의 재산을 삼켜 버린다고 합니다. 욥의 자식들이 대풍을 만나서 죽은 것도 욥의 이런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의 재산을 잃은 것도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욥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막혔다고 합니다.

 

(사람이 고생을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6,7)

 

엘리바스는 재난은 티끌이나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재난은 인간이 스스로 죄를 지어서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흙으로 만든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재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불꽃이 위로 날아오르는 것과 같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석가모니는 인생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라고 보았습니다. 생로병사가 다 괴로움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그 인생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꼭 인간의 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에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인내하며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엘리바스는 고난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죄 때문에 생긴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매우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적대적인 자연 환경에서 부단히 투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엘리바스는 모든 인생은 다 고난을 받는다고 역설합니다. 인생의 고난이 변개될 수 없는 자명한 이치라고 말합니다. 엘리바스는 일반론적 측면에서 맞는 말입니다. 앞서(417-21) 인간의 부패성을 주장한 그는 이제 인생의 고난이 보편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이것을 부정하지는 못했을 것입니.

그러나 그는 지극히 도식적이고 원론적인 차원에서만 욥의 고난을 파악하여 그것을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고난을 주셨지만 그들을 사랑하여 메시야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여주셨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애곡이 아니라 인내이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8-11)

 

엘리바스는 자신이 욥이라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겠다고 합니다. 8절 앞에 강한 반대 접속사인 그러나 를 첨가시켜 그러나 만일 내가 당신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NIV, But if it were I...) 하나님을 찾겠다고 합니다. 교만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엘리바스는 이제 욥에게 권면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권면 속에는 욥에 대한 은근한 질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이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땅에 비를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십니다.

대부분 건조한 사막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방에 있어서 우기에 내리는 비는 식수로 쓰입니다. 농부의 식물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으로 사용됩니다. 초장의 풀을 자라게 하여 육축을 기르게 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틴의 기후는 우기와 건기가 뚜렷이 구분되며, 건기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으며, 우기라고 해서 다량의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닙니다.

팔레스틴인들에게 있어서 비는 간절한 소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성경이 비를 하나님의 축복, 또는 은총으로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메마른 땅과 밭이 비를 받아 소성하듯. 인간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엘리바스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역전의 명수가 되십니다. 슬퍼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재투성이가 되다 (상심으로 얼굴 표정이) 어두운 색깔이 되다, (삼베 옷, 또는 더러운 옷을 입고) 극심히 애도하다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극심한 슬픔을 나타내는 자를 일으켜주십니다.

엘리바스는는 욥이 겸손하게 교만의 죄를 슬퍼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고 합니다. 욥이 지금 고난을 받고 있을지라도 겸손히 하나님을 찾으면 욥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욥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다만 욥은 고난을 찹고 인내해야합니다.

 

(욥은 책망이 필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12-16)

 

하나님은 그러나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꺽으시며 그들의 손은 성공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교활한 자는 정직한 자를 억압함으로써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악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지혜로운 자는 자기 계략에 빠지게 하십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악인은 자신의 지혜로 어떤 일을 공교히 도모하나 결국 그 동기의 사악함으로 인해 패망하게 됩니다.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9:16), (악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7:15,16), 지혜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신다(고전 3:19)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립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교활하다고 은근히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 교활홤으로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낮에도 어둠을 만나고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합니다. 엘리바스는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술하고 이제는 그 심판의 결과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빛의 대조(:밝음, :어두움)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악인이 당하게 될 당혹감과 좌절감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악인은 늘 불안한 가운데 있을 뿐 아니라 종국에는 주의 진노로 그 존재의 근거마저 상실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구출하여주신다고 합니다. 그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문제는 욥이 교활한 자가 아니며, 욥을 교활하다고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의 칼날 같은 입과 억센 손아귀로부터 구출하신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히브리어는 늘어지다, 헐겁게 되다, 허약하게 되다, 흔들리다를 뜻하는 동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여기서는 15절에 나타난 곤비한 자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사람을 악인의 칼로부터 악한 훼방과 핍박을 당하는 연약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비천한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희망을 가지지만, 불의한 사람은 스스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하심으로 악인의 횡포와 압제를 종식시킵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침탈당하는 약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압제자와 강포자를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증표로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바로 이같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의인은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악인이 더 이상 활개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부유하다고 교만한 자를 치시지만 가난하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하는 자는 미래가 없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교만하여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욥이 겸손하면 소망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엘비바스의 말은 마리아나 한나의 찬송시와 유사합니다. 하나님은 비천한 마리아나 한나를 높이셨습니다. 그들은 비천하였지만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그들을 높이셨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울이나 브닌나를 낮추셨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욥이 교만하기 때문에 낮아졌다고 말합니다. 이제 그가 겸손해지면 하나님이 그를 높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욥은 교만으로 낮아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신뢰하고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욥을 낮추신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는 욥에게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시는지 증거해야 합니다. 그 고난을 찹고 인내하도록 소망을 심어야합니다.

 

(징계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17)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의 징게를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징계가 없는 자는 사생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자가 징계하시는 것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징계를 받는 자는 복을 받은 자입니다.

엘비바스는 욥의 고난을 하나님의 연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여기서 욥의 고난을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연단(시험)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연단을 영구적인 것이 아닌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질병(18), 환난(19), 기근과 전쟁(20), 비방과 조롱(21), 멸망과 기근(22) 모두가 하나님의 연단으로서 일시적인 것이니 욥이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인내하여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런 권면은 옳은 것입니다.(12:5, 6).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 나가고 순수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더욱 하나님의 소망에 불타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죄의 결과로 징계하신다고 생각하는 견해는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는 자도 징계하십니다. 다윗왕이 사울왕에게 고난을 받은 것은 죄가 없이만 사랑하셔서 징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18-21)

 

하나님은 채찍으로 때려서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서 치료해주십니다. 상하게 하시다가 고칩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질병(피부병)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욥의 질병이 하나님의 징계의 일환이나 욥이 그것을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고쳐 주신다고 말합니다. 엘리바스는 앞절과 뒷절을 동의대구로 구성하여 표현합니다. 아프게 하시다가- 상하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고치시나니는 각각 동일한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치료자로 그 백성을 병자로 묘사하는 것은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죄인을 병든 자, 당신을 의원으로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징계를 받고 회개하면 여섯 일곱 가지 환난에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여섯 가지, 일곱 가지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으로 여기서는 모든(all), 어떠한(whatever) 환난에서도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숫자를 반복하여 그 뜻을 강조하는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학과 히브리 문학의 대표적 특징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엘리바사는 욥이 징계를 달게 받는다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을 것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기근의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수렵과 목축과 거의 의존하던 고대 족장 시대에서 기근은 가장 큰 두려움 중의 하나였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족장 시대의 기근의 사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가혹한 형벌의 하나로 간주합니다. 전쟁도 역시 고대 근동 지역에 있어서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 중의 하나였습니다. 대부분 유목민으로 이루어진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종종 무리를 지어 다른 부락을 약탈함으로 그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욥의 재산과 육축을 빼앗은 스바인(1:15)과 갈대아인(1:17)의 침입도 작은 전쟁의 하나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징계를 받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고대인들이 겪었던 가장 곤혹스러운 위협에서부터 욥을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욥은 혀의 채찍과 멸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혀의 채찍은 불의 혀(tongue of fire), 쏟아지는 저주(공동 번역), 채찍의 혀 등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하나님은 욥이 받는 중상, 비방에서 구원하십니다. 사람의 세치 혀는 채찍이 공중에서 휘도는 것처럼 사람의 입 안에서 날름거려 파괴적 위력을 동반합니다. 이처럼 인체의 일부분을 사물로 형상화하거나, 또는 사물의 일부분을 의인화하는 것을 히브리문학의 수사학적 기교입니다(예를 들면 15절의 입의 칼, 20절의 칼 권세(이를 문자적으로 옮기면 칼의 손이 됨).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의 징계를 받을 때 경히 여기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며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여주십니다. 그를 치료하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소망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로 징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욥은 죄로 징계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욥의 육신을 단련하고 계신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데도 사랑으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욥을 죄로 인하여 징계받는 것이라고 정죄함으로 도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신뢰하고 고난을 인내하도록 도와야합니다. 하나님이 너무 욥을 사랑하시고 신뢰하셔서 징계하시고 있다고 도와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징계를 받으면 복을 주신다)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22-27)

 

엘리바스는 욥이 징계를 잘 받으면 욥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과 돌과도 평화할 것이라고 합니다. 들짐승은 땅의 짐승(the beasts of the earth)으로 육축을 해치거나 사람을 다치게 하는 맹수(wildanimals)를 가리킵니다. 고대 팔레스틴 지역에 있어서 맹수를 매우 위험스런 존재였습니다. 특히 성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적한 민가에서는 맹수가 공포의 대상이 되었는데 여기서 보호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징계를 잘 받으면 밭 농사가 잘되어 풍족한 수확을 거둘 것입니다. 대부분 돌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방에 있어서 돌의 방해를 받지 않아야 밭 곡식이 잘 성장하여 풍년을 맞습니다. 실제로 팔레스틴지역에서는 돌 때문에 밭 곡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엘리바스는 당시 팔레스틴에 육축과 인명에 대한 맹수의 위협이 흔했던 시대에 욥이 안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22). 그는 징계를 받으면 인간의 타락으로 와해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새롭게 회복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도래로 완성될 새로운 창조 질서를 말합니다. 욥이 징계를 받으면 모든 자연이 욥을 도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욥이 집에서 평안하고 재산을 풍요롭게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29장에서 보듯 욥은 성읍에서 유력한 현자 중의 하나였으며, 또한 농부요, 목축업자였습니다.

욥의 후손들도 땅의 풀과 같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장법과 직유법이 쓰인 문학적 표현입니다. 시편 7216을 고려해 볼 때 이 풀은 성읍 밖에 도처에 널려 있는 야생화 또는 잡초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녀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라니(22:17)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욥이 징계를 잘 받으면 욥은 장수하다가 무덤에 갈 것이라고 합니다. 천수를 누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믿음으로 살면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를 범사에 복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다가 복 받은 사람이 재앙이 있는 사람에게 믿음으로 살지 않아서 재앙을 받는다고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장수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6:3-13 28:1-14). 실제 하나님은 장수를 자손의 번성(25)과 더불어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씀하셨습니다(왕상 3:14 91:6 3:29:1110:27 65:228:4 ).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 체계에 근거해 욥에게 말합니다. 그는 욥기 4853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의 사고 체계가 경험에서 실증된 진실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경험, 곧 역사적 산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경험을 일반화시켜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죄악으로 하나님과 관계성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인생은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욥이 교만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낮추었다고 말합니다. 욥이 교만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교만을 회개하면 번성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징계를 받을 때 교만을 회개해야합니다. 그러나 욥은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너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지식으로 판단하여 결론까지 내리지 말아야합니다.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울 때 그를 위해서 사랑으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교만하다면 왜 교만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야합니다. 현상만 보고 원인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신중해야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판단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검사를 합니까? 그렇게 하고 판단해도 오진이 나옵니다. 영적인 의사인 우리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한 자매는 소화가 안 되는 원인이 내분비의 문제인데 이것을 찾지 못하여 오래 고생하였습니다. 한 어린이는 눈꼽이 끼는 이유가 목이 안 좋아서인데 이것을 찾지 못하여 고생하였습니다. 명의는 원인을 정확히 찾아서 해결해주는 사람입니다.

욥은 아무 이유없이 애매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고난을 주십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야합니다. 히브리서 12장에게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징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자존감을 갖도록 도와야합니다. 그래야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훈련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지만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모든 고난을 일반화 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전개된 엘리바스의 변론의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6장부터 전개될 욥의 반론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고난을 일반화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의 특별한 죄악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단의 궤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1차적으로 사단의 참소의 허구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욥에게 시련을 내릴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둘째 보다 궁극적 의미에서 그것은 욥에게 신앙의 연단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은혜 신앙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욥은 자기 의(self-righteousness)와 선행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욥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욥의 고난은 죄악에 대한 형벌이라기보다는 의인의 신앙의 세우기 위한 일종의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이러한 욥의 고난의 특수성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일반적 고난의 범주에 넣어 해석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욥이 범죄로 인해 고난받고 있음을 심증적으로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5:3,4).

 

(자신의 경험을 남에게 적용하지 말라)

 

엘리바스는 또한 경험 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논증을 확신시키기 위해 자신이 목도한 몇가지 사례를 들었습니다(4:8-115:3). 그런데 이 같은 것들은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진리이나 현실의 개별적 부분에 있어서는 그대로 적용되기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결국 그는 부분적 경험에 근거하여 자신의 논리를 세우고 그것을 모든 부분에 적용시키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위로자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엘리바스는 위로자의 자격인 사랑이 결여 되었습니다. 그의 논증은 거의가 딱딱한 교리 체계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으며 실로 냉정하기조차 합니다. 그는 위로자(comforter)라기 보다는 훈계자 내지는 교사로는 욥 앞에 서 있습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고압적이고 냉정한 자세가 욥기 517-27에서 약간 완화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27절에서 보듯 그는 자신을 지혜자(wiser), 욥을 그 지혜에 복종해야 하는 학생 정도로 취급함으로써 욥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6:24-29). 엘리바스는 친구에 대한 참된 우정에서 자신의 변론을 시작했으나(4:1,2) 욥의 특수한 상황을 적절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상투적인 논리만을 나열하였습니다. 그는 간접적으로 욥을 정죄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긍휼을 가진 위로자로서 고난 받는 자를 도와주어야합니다. 아멘

욥기 5장 강해 꼭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는가?

말씀 욥기 51-욥기 527

요절 욥기 517절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욥기 5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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