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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마가복음 11장 강해 일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6-04-04 00:00:00
조회수 : 1,927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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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장 강해 일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마가복음 11장 1-마가복음 11장 11
요절 마가복음 11장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사랑은 사흘분의 설탕이에요"라는 제목의 산문집이 있습니다. 시인 오인숙 씨가 지은 책인데 그분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날 장애인선교회에서 "행복 나누기 찬양제"라고 하는 찬양제를 열고 오인숙씨에게 와서 좋은 시를 하나 발표해 주시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오인숙 시인은 그날 따라 가고 싶은 기분이 나질 않아 못 가겠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거절을 해 놓고 퇴근하는 길에 마음에 좀 께름직해서 찬양제가 열리는 서초구민회관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복음성가 가수인 조성철씨가 휠체어에 앉은 채로 기타를 치면서 복음성가를 부르는 찬양을 듣게 됩니다. 그 얼굴은 환하고 그 음성은 맑고, 그 가사 하나가 큰 감동을 주는데 이렇게 놀라운 행복한 시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행복을 나누어주는 축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 그는 한없이 울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나야말로 가장 무거운 중증 장애인이다. 저분들은 몸의 장애인이지만, 나는 마음의 장애인이다. 나는 정신적인 병자다 이렇게 스스로 깨닫고 펑펑 울었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난 눈은 아름다워지나 봅니다. 옆에 앉은 낯선 사람의 얼굴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고, 작은 일 사소한 일, 사물까지도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졌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찬송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잘되고, 성공하고, 축제를 하고, 축하하고, 축하파티…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이 깊이 내려가고, 내려가고, 겸손하고, 아주 순수해질 때, 어린 아이 같아질 때 거기서 진정한 찬양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활짝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해 보았습니까? 아니면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해 보았습니까? 눈물로 감사하는 그 세계에 진정한 행복과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감사보다 불평하기 쉽습니다. 찬송보다 원망하기 쉽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불평할 만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불평할 때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내가 왕이 되어 있을 때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가운데 왕이 되어서 세상 일을 친히 그 뜻대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왕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찬양하는 예루살렘 백성과 어린 아이들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왕되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루살렘 가까이)

1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4킬로 정도 됩니다. 예수님은 이번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게 됩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마음은 비장하고 엄숙했을 것입니다.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셨습니까?

(주가 쓰시겠다)

2,3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 둘을 건너편 마을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타보지 않은 다른 사람의 나귀를 주인의 허락도 없이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순수하고 거룩한 나귀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쓰임 받는 나귀를 원하십니다. 나귀의 임자가 "왜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는 거요?" 하면 "주가 쓰시겠답니다." 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즉시 보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귀를 끌고 오게 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주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자신을 인자로 드러내셨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로 성육신하신 겸손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 주님으로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맞은편 마을에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허락할 것도 아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미래와 내면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남의 집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절도범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귀의 진정한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예수님은 나귀의 진정한 소유주가 되십니다. 나귀의 임자는 관리자입니다. 잠시 나귀를 빌려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셋방살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 집을 내놓으라고 하면 집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주인이신 하나님이 내어놓으라고 하면 언제든지 내어 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 돈 한 푼 가져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산이나 권력이나 생명의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과 시간과 물질의 주인이십니다. 자녀도 나의 자녀가 아니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양들도 나의 양이 아닌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이것을 알 때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탐욕으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작다고 위축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것을 충성스럽게 관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소유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나귀 새끼는 꼭 나의 나귀 새끼여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더 키워서 보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귀 새끼로 주님께 쓰임받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사도바울이나 모세나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의 자녀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드려야합니다.

(순종을 통하여 주님을 체험함)

4-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방향에 반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꼭 도둑질을 해야 하나요? 만약에 주인이 허락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서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많은 체험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을 때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날 그물이 찢어지게 잡았습니다. 열두제자는 전도 여행갈 때 말씀에 순종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갔습니다. 그들은 그때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친히 먹이시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체험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 신뢰하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건너편 마을에 가보니 정말 나귀 새끼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 주인은 군말 없이 나귀를 즉시 보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순종을 통해서 예수님을 나귀의 주인이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으로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자신을 주님으로 드러내십니다.

(겸손한 왕 예수님)

7절을 보십시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왔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걸쳐 안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는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고 나팔 소리가 나고 지진이 나고 구름이 빽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검은 벤츠를 타시고 많은 경호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입성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발이 질질 끌리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인격을 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지만 군림하는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귀처럼 섬기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왕이십니다.(스가랴9장9) 솔로몬도 노새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갔습니다.(왕상1)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나중에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찬송하는 사람들)

8-10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을 벗어서 땅에 폈습니다.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겉옷과 나뭇가지를 편 것은 최고의 존경의 표시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질렀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구원자를 찬송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찬송하였습니다. 본문에는 찬송하리로다 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찬송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지금 입성하고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만세를 불렀습니다. 호산나는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며 찬송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람이 진정한 왕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 자신도 왕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순수한 어린아이의 찬양)

사람들의 만세소리는 같지만 만세를 부른 의도는 다 다릅니다.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많은 어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어 독립국가가 될 것을 꿈꾸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좌에 앉을 때 한 자리 할 것을 생각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만세, 만세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광주에서는 고시원에서도 모금하여 선거자금으로 쓰라고 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랐습니다. 어린이들은 출세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영광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1장 16절에 보면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이들의 부족한 찬송을 온전케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찬송에서 어린 아이의 찬송을 칭찬하시고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찬송은 어린아이의 찬송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같은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처럼 될 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찬미가 어디 있습니까? 기쁨과 행복과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건강한 때입니까, 병든 때입니까? 성공한 때입니까, 실패한 때입니까? 감사와 찬송은 깊은 깨달음에서 오는 겁니다. 깨달음이 그 언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성경에는 사도바울이 찬송을 불렀다는 얘기가 별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불렀겠지만은 기록상으로는 빌립보와 로마 감옥에서 찬송을 부른 것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 되어서 아주 정신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리게 될 때 으스스하고 춥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깨닫고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졌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감옥에서 매맞고 부르는 찬양 이것이 아주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순수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찾고 하나님을 찾았을 때 찬양)

폴 투르니에라고 하는 스위스의 심리학자이고, 의사인 그분이 쓴 창조적 고통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많은 정신과 환자들을 상담을 하고 한평생을 지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을 말합니다. "현대 환자들의 가장 큰 병은 바로 자기 상실감입니다." 어느 사이에 자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돈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명예를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건강을 잃은 것도 아니라 자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자기 상실감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가정과 국가를 위해서 일하며 살다 보니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특히 한국의 50-60년대 태어나신 분들은 급속하게 경제성장에 매진하다가 더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잃어버린 자기를 찾게 합니다. 고난을 모르고 살다 죽는 사람은 멍청하게 가는 겁니다. 가난과 고통을 통해서 나라고 하는 존재를 찾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나의 당한 고통, 이것이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 바로 자기를 찾는 길이요, 하나님을 찾는 길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단순하게 합니다. Simplify, 단순하게 할 때 거기서 순수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혹시 마음이 복잡하신 분이 있으십니까? 소원도 많고, 체면도 생각해보고, 집안도 생각하고, 결혼도 생각하고 나름대로 복잡합니까? 이런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의 훈련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언젠가 정말로 깊은 고난에 들어가게 됩니다. 찬미의 주제는 언제나 주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어릴 때는 내 소원을 이루어 주세요, 내 병을 고쳐주세요,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이런 것이 찬송가 가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장하면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오늘도 내 마음에 함께 계시는 성령의 역사를 찬양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7절에 보시면 초대교회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나옵니다. 경제적으로 나아진 것도 없어요. 정치적으로 달라진 것도 없어요. 자기 생활에 변화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달라진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원망과 불평과 좌절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그런 것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진정한 왕 하나님)

사람들의 찬양을 받으신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되십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영원토록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립니다. 우리는 세상 왕의 권세에 대해서는 실감합니다. 당시에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은 로마황제 가이사처럼 보입니다. 가이사는 군대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움직였습니다. 유대지방은 로마 총독 빌라도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명령에 따라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이들의 명령에 따라서 세금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들이 왕이 아닙니다.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쓰셔서 통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쓰시기 위해서 왕으로 세웠고 쓸모가 없으면 이들을 폐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가이사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호적명령을 내렸습니다. 호적명령을 통해서 군사를 징집하고 세금을 거두어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도록 하시기 위해서 호적명령을 내리도록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풀어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해할 권세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단은 욥의 자녀를 죽이고 재산을 파멸시켰습니다. 욥을 병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허락 없이 사단이 욥의 생명을 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사건 사고도 많이 일어납니다. 질병으로 전쟁으로 테러로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계무역센타에서 부지런하여 일찍 출근한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품백화점에 물건 사러갔다가 죽은 사람이 있고, 버스타고 성수대교를 건너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고 머리카락 하나도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사단에게 왕노릇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 왕노릇하고 눈에 보이는 물질이, 쾌락이 왕노릇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서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고 사망권세를 깨뜨렸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힐 때 그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에는 어떤 왕도 없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라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 되셨습니다. 온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이 왕이 되어서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은 실수 없이 이 세상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하나하나를 섭리하십니다. 예수님은 처음과 중간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깨달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항상 찬양하는 마음)

우리는 예수님이 불가능한 가운데 승리를 주시는 것만 하나님의 주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는 축복을 주신 것만 하나님의 주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져가시고 고난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취하신 하나님도 찬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을 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건강을 잃었을 때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먼저 의를 행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을 때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7일 동안 금식기도한 아이가 죽었을 때도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왕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서운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정확하고 완전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특히 믿는 자들의 고난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진한 사랑은 베어 있습니다. 사생자는 징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베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왕되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왕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우리 삶에 왕으로 모시면 우리 삶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가정에서 인정하면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교회에 인정하면 교회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베다니에 나가심)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셔서 성전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정치적인 왕이라면 헤롯궁으로 갔을 것입니다. 많은 추종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왕으로 선포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왕이기 때문에 성전에 가셨습니다. 당시에 성전은 완공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 성전으로 성전의 기능을 회복하고자 오셨습니다. 성전의 기능이 회복되어야 진정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셨을 때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이룬 정치경제의 강성함만 보고 있습니다. 그 전에 다윗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서 행복한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둘러보시고 나서 열두제자와 함께 예루살렘 근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1장 강해 일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마가복음 11장 1-마가복음 11장 11
요절 마가복음 11장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마가복음 11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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