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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마가복음 10장 강해 5부 섬기러 오신 예수님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6-01-29 00:00:00
조회수 : 2,165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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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장 강해 5부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 10장 32-마가복음 10장 45
요절 마가복음 10장 45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간을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혼자 살아갈 수 없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갑니다. 우리는 가족 공동체, 교회 공동체, 직장 공동체, 국가 공동체 등 여러 공동체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공동체는 그 어디든지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끊임없이 다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최고가 되고자 하는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우리가 이런 크고자 하는 본능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소원입니다. 다만 무엇이 큰 것이 무엇이지 모르고, 크고자 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것을 가르쳐주시고 친히 섬기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을 배워서 진정 큰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놀라고 두려워하는 제자들)

32-34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길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장한 각오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셨습니다.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은 예수님이 결연한 자세로 가시자 놀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놀라는 제자들에게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능욕당하고 침뱉음을 당하고 채찍질 당하고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벌써 공식적으로 세 번째 십자가에 죽을 것을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심을 말씀하실 때마다 심하게 반발하고 묻기조차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보라!”는 말로 제자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며 자신이 받을 고난에 대해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사형 선고를 내리고 예수님을 로마인에게 넘겨줍니다. 예수님은 로마인의 손에 의해서 모욕을 받고 침뱉음도 당하고 채찍질도 당하며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후에는 예수님은 부활하십니다. 십자가를 져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쉽고 편안한 환경에선 강한 인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련과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만 강한 영혼이 탄생하고 통찰력이 생기고, 일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며, 마침내 성공할 수 있다.”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십자가의 도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사람을 돕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을 가장 잘 돕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고난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마음으로 깨닫고 몸에 배이기까지 반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십자가를 싫어하고 십자가 없이 은혜만 누리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본성 때문에 십자가를 가르치기보다 그냥 잘 대해주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배우지 못하면 핍박과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십자가를 배워야 튼튼한 기초를 놓고 튼튼한 집을 지어서 어떤 핍박과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배운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고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십자가를 가르쳐야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가르쳤고 베드로도 십자가를 배운 후에 성도들에게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도록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십자가의 고난을 받도록 가르쳤고 바울도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반복하여 고난을 받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오은혜는 자연분만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자연분만 후에 몸의 상태가 휠씬 빠르게 회복되었습니다.

(영광 중에 좌우편에 앉게 하소서)

35절을 보십시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심각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야고보와 요한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은혜를 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채권자와 같이 당연히 받을 것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요구를 다 들어달라고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책망치 않으시고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영광을 얻을 때 주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왕이 되면 권좌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곧 지상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줄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는 새 왕국을 건설하는데 응당 따르는 고난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점점 가까워지자 새 왕국이 되면 베드로에게 총리 자리를 빼앗길 것 같은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로서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지만 베드로와 비교해 볼 때 그들은 이인자와 삼인자처럼 보였습니다. 베드로가 항상 그들보다 더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천국열쇠를 약속 받은 것도 베드로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에 대한 시기심으로 뼈가 썩는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당한 방법으로는 일인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형제가 연합하여 첫 번째 자리를 청탁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인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보변적인 욕망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에서 조차도 첫째가 되고자 다툽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첫째이고 진정으로 첫째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십자가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정으로 첫째가 되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고 예수님이 받는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에수님의 잔과 세례는 십자가의 잔과 세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먼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얻기를 원한다면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우리가 에수님과 함께 영광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반드시 예수님이 받은 영광을 주십니다. 우리가 에수님과 함께 죽으면 예수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첫째가 되는 첫 번째 길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첫째가 되고자 소망하였고 누구보다 더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많이 고난 받은 것에 대해서 자랑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첫째가 되고자 한다면 십자가의 잔을 마시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자리)

39,4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있게 예수님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첫째 자리만 보장해 주신다면 어떤 고난도 감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을 고난을 구체적으로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것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대답대로 야고보는 제자들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가장 오랫동안 십자가를 지고 복음역사를 섬기다가 후에는 밧모섬에 귀양을 가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좌우편에 앉는 자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첫째가 되고자 십자가를 지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자기 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후에 영광이 주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발과 다리와 같은 신체의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자리가 더 영광스런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이 수고하는 자리가 더 영광스런 자리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메시지를 쓰기 위해서 눈이 수고를 많이 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눈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막노동하는 사람에게는 손과 발이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우리는 모든 자리가 다 영광스러운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다만 십자가를 지는 자리가 더 영광스러운 자리라는 것을 알고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분노하는 열 제자)

41,42절을 보십시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히 여겼습니다. 베드로는 “의리 없는 놈들 그럴 수가 있는가“ 하며 화를 냈습니다. 도마는 이들의 정신이 올바른가 의심하며 화를 냈습니다. 평상시 이름이 나오지 않는 바돌로매나 다대오도 이 때는 화를 냈습니다. 그들도 요한과 야고보와 똑같이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심각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이런 권력 투쟁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로마인들의 집권자들은 군대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들에게는 힘이 곧 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권세를 얻으면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렸습니다. 그들은 권세를 부리며 재미를 느낍니다. 손가락 하나로 가라, 오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거나 살릴 수도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별이 되면 별의 별 권세가 주어집니다. 사람들은 이런 권세를 얻기 위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피나는 투쟁을 합니다. 제자들은 권세를 남용하는 이방 집권자들을 비판하고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도 어느새 그들의 영향을 받아 다시 교회 안에서 권세를 잡고자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큰 자가 되는 아주 중요한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섬기는 종이 되라)

43,44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Not so with you)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전면 부정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 섬김 받고 명령하는 자가 위대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는 타이틀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어야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종과 같이 낮아져서 겸손히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 ‘종’이 위대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지위나 소유보다 존재와 인격을 중시하십니다. 섬기는 것은 섬기는 내면성을 말합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섬기는 내면성을 소유한 자입니다. 리더는 위에서 군림하는 리더가 아니라 아래서 섬기는 종의 내면성을 지닌 리더(a servant-leader)이어야합니다. 이것을 서번트 리더십이라고합니다. 요셉이 위대한 것은 그가 노예에서는 보디발을 섬겼고 죄수일 때는 술맡은 자와 떡 굽는 자를 섬긴 것입니다. 총리가 되어서는 애굽 온 나라를 섬겼습니다. 그러면 섬기는 내면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할까요?

(겸손한 내면성)

첫째로 겸손한 내면입니다. 겸손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길 때 내가 너보다 낫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월감을 가지고 섬길 때 상대방이 불쾌하게 생각하고 섬김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남을 섬기는 것은 쉬울 것 같지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겸손한 내면성으로 섬겨야합니다. 겸손이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존경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훌륭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좋은 점을 보고 귀하게 여기고 자랑스럽게 여겨야합니다.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사람을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격려해주어야합니다. 사람을 사랑스럽게 여기며 겸손하게 섬길 때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그 사람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합니다. 특히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아져서 겸손히 섬길 때 더 큰 은혜가 됩니다.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그가 군목으로 있을 때 군인교회에서 열심히 섬기는 것을 본 사단장이 내가 무엇 섬길 것이 없나 물어보았습니다. 이때 김목사는 사단장에게 “매 주일마다 사단장복을 입고 30분 전에 오셔서 주보를 나누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단장은 기꺼이 이를 승낙하고 매주일 마다 30분전에 사단장복을 입고 나와서 열심히 주보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주보를 나누어 주려면 웃으면서 겸손하게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이렇게 사단장이 겸손하게 섬기자 그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다고 합니다.

(죄인을 품고 감당해주는 내면성)

둘째로, 섬기는 내면성이란 죄인을 품고 감당해 주고 병든 내면을 치료해 줌으로써 살려 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훌륭한 점도 있지만 죄로 인한 병든 내면도 있습니다. 죄로 인한 병든 내면을 볼 때 이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를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불쌍히 여기고 허물과 실수를 감당해 주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도록 도와야합니다. 그를 모든 면에서 rdn그의 편을 들어주고 믿어주고 소망을 갖고 대하고 내면이 변화되기까지 참아 주어야 합니다. 죄를 책망할 때는 분명히 책망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그의 모든 허물을 감당하여주셨습니다.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로 속이고 첩을 얻어서 서자를 낳은 아브라함의 편을 들어주시고 감당하여주셨습니다. 단 한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에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부활의 주님을 떠나서 고기 잡으러 간 것을 감당하여주셨습니다.

셋째 섬기는 자는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그 사람을 알고 짜장면 한 그릇 사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말라리아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어 예방약을 맞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알고 섬기려면 깊은 사랑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섬기고도 이렇게 밖에 섬길 수 없어 미안하다고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되고자하는 투쟁)

이처럼 섬기는 내면성을 가진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위대성의 척도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길 만한 깊고 넓은 내면성이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의 영적 투쟁이 필요하고 자기 희생이 필요합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얻고자 노력하는 이상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만한 내면성을 갖기에 힘써야 합니다. 섬기는 내면성을 가진 자는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 어딜가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섬길 것을 찾습니다. 무엇보다도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예수님께로 인도하고자 애를 씁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 안에서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단 12:3). 예수님은 ‘누구든지’라고 하시므로 누구든지 위대한 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타이틀이나 지위는 제한되어 있어 경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낮아져 섬기는 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위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위대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높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외적 투쟁에서, 낮아지고 희생하고 섬기는 내적 투쟁으로 삶의 스타일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내면의 덧입기 위해서 말씀에 기초하여 무릎끓고 기도해야합니다.

(섬기는 종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45절을 보십시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먼저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인생들로부터 찬송과 경배와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도리어 적극적으로 섬기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려면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섬김을 받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죄악된 속성이 있습니다. 이 죄악된 속성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섬기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 받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만을 바라면서 은밀한 중에 섬겨야합니다. 예수님은 섬김 받고자 하지 않으시고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기도와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생명을 주시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이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원 역사의 대원칙입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흥왕하게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진정으로 위대한 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길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십니다.

(섬기는 삶의 행복)

첫째로, 섬기는 생활의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섬김을 받는 생활이 위대하고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하고 행복한 삶은 섬김을 받는 생활이 아니라 섬기는 생활입니다. 남을 섬기는 삶은 남을 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한 삶입니다. 슈바이처가 운영하는 아프리카의 랑바레네 병원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미모의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안 프레밍거’였습니다. 헝가리 귀족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한 때 재색을 겸비한 최고의 미인으로 추앙받았습니다. 모든 악기의 연주에 능했으며, 비앤나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배우로도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슈바이처의 찬송가 연주를 듣다가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 살아온 내 인생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허상일 뿐이지 않는가. 슈바이처와 같이 남을 위해 사는 삶에 진정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녀는 그 자리에서 아프리카 행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슈바이처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흑인 병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다가 눈을 감았습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러하였습니다. “남을 위한 섬김의 삶이 이렇게 행복한 것을….”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일생동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수많은 사람들을 섬겼던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병이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고독과 절망과 좌절의 유일한 치료제는 사랑하는 것 뿐이다. 세상에는 빵 한 조각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섬기고자 할 때 어느 정도 물질적인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가 쓴 짧은 이야기는 물질적인 여유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진정으로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섬기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함을 말해 줍니다. 그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되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벌써 여러 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 남자와 함께 그 집을 찾아갔을 때 아이들은 오랜 영양 실조로 얼굴에 뼈만 남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슬픔이나 불행 같은 것 없었다. 단지 배고픔의 깊은 고통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집의 어머니에게 쌀을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쌀을 두 몫으로 나누더니 절반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내가 물었다. ‘어딜 갔다 왔습니까?’ 그녀는 간단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웃 집에요. 그 집도 배가 고프거든요!’ 나는 그녀가 쌀을 나눠 준 것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실제로 더 많이 나눌 줄 아니까.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녀가 이웃집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개 우리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는 자신의 고통만을 생각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마음을 돌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섬기는 생활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뿐만 아니라 자신도 행복하게 됩니다.

(공동체를 살리는 섬김)

둘째로, 섬기는 생활은 내가 속한 공동체를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험한 세상에 나 살기도 힘든데 남을 도와 줄 여유가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기적으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기적으로 사는 것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일이요, 공동체가 파괴되면 결국 자신도 불행하게 됩니다. 공동체 중에서도 가족 공동체는 모든 공동체의 기본으로서 가장 중요한 공동체입니다. 가족 공동체가 행복이 차고 넘쳐야 그 가운데서 자녀들이 건전하게 자랍니다. 이를 기초로 요회 공동체 및 교회 공동체를 힘있게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 공동체가 행복이 없고 메마르고 갈등이 많은 이유는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며 서로 이해 받고 섬김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살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자기를 주장하기보다 자기를 죽이고 서로 섬기기에 힘써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격려하고 섬기고자 애쓸 때 자연히 그 가정에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이러한 원리는 장막 공동체나 요회 공동체, 교회 공동체, 직장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도리를 본받아 서로 섬기는 생활을 할 때 공동체가 살고, 공동체가 살 때 나도 살게 됩니다. 결국 서로 섬기는 생활은 서로가 잘 되고 행복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철새 기러기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통해 서로 돕고 섬기는 생활의 중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기러기들이 브이(V)자를 그리며 날아가는 모습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기러기들이 브이자를 만드는 것은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는 그냥 날아갈 때보다 70%의 힘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맨 앞에 날아가는 기러기는 공기의 저항을 직접적으로 받기 때문에 가장 빨리 지칩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리더의 자리를 바꾸어가며 여행을 합니다. 그 덕분에 뒤에 따라오는 기러기들은 공기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습니다. 뒤에서 따라가는 기러기들은 앞서 가는 기러기들이 속도를 유지하도록 힘을 북돋우기 위해 계속해서 “끼악 끼악” 울음소리를 냅니다. 만약 한 마리가 병에 걸리거나 사냥꾼의 총에 부상을 입어 대열에서 낙오되면 반드시 두 마리의 다른 기러기들이 그 기러기와 함께 떨어져 그 기러기가 지상에 내려갈 때까지 도와주고 보호해 줍니다. 두 마리의 기러기는 낙오된 기러기가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함께 머뭅니다. 그 후에야 두 마리의 기러기는 하늘로 올라가 다른 기러기들의 대열에 합류하거나 자신들의 대열을 따라잡습니다. 기러기는 동료의 불행을 외면하는 법이 없습니다. 인생은 독창이 아니라 합창입니다. 인생은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 떠나는 여행입니다. 이처럼 서로 돕고 섬기는 생활은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사는 길입니다.

결론 섬김는 자가 큰 자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섬김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섬김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섬김은 겸손히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감당하고 믿어주고 소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변화되기까지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은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내가 섬기면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대한 자로 인정해주십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 상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섬기는 삶을 통해서 큰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마가복음 10장 강해 3부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 10장 32-마가복음 10장 45
요절 마가복음 10장 45절을 보십시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장 강해 오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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